【건치연혁】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취하여 성을 쌓고,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성을 나가 달아나다가 해를 당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설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韓山州) 군주(軍主)를 임명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조 초기에 또 양주(楊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에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海州)와 더불어 좌우 2보(輔)를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가,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여 양광도(楊廣島)에 예속시켰다. 문종(文宗) 때에 승격시켜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삼아, 유수 1명ㆍ부유수 1명ㆍ판관(判官) 1명을 두고 이웃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의하여,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도성(都城)을 건립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고, 일자(日者 천문관)ㆍ문상(文象)이 따라서 주장하니, 임금이 친히 와서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을 명하여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윤(尹)을 두었으며, 공양왕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경도(京都)의 구장(口帳 호구장부)ㆍ시전(市廛)ㆍ가사(家舍)ㆍ전토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투구(鬪毆 쟁투와 구타 상해)ㆍ주순(晝巡)ㆍ검시(檢屍)ㆍ거량고실(車輛故失)ㆍ우마낙계(牛馬烙契) 등의 일을 맡게 하여, 판부사(判府事)ㆍ윤ㆍ소윤(小尹)ㆍ판관ㆍ참사(參事) 등의 관직을 두었다. 예종조(睿宗朝)에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이라 하고 소윤을 서윤(庶尹)이라고 하였다. 영종 조(英宗朝)에 참군을 고쳐 주부(主簿)로 하였는데 그 밑에 5부(部)가 있었다.
【관원】 판윤 1인, 정2품. 좌윤ㆍ우윤 각 1인, 모두 종2품. 서윤 1인, 종4품. 판관 1인, 종 5품. 주1부 2인, 종6품.
【이속】 서리(書吏) 52인. 서사(書寫) 1명. 서원(書員) 11인. 사령(使令) 30인.
【속사오부】 중부(中部) 정사가 예전에는 본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는데, 후에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5부를 설치하여 관내 방리(坊里) 거주인들의 불법(不法) 및 교량ㆍ도로ㆍ반화(頒火)ㆍ금화(禁火)ㆍ이문경수(里門警守)ㆍ집터 측량[家址打量]ㆍ인시 검험(人屍檢驗)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 영(令) 종5품 1인ㆍ도사(都事) 종9품 1인과 이속으로 서원 4인ㆍ사령 8인ㆍ대청직(大廳直) 1인ㆍ군사 2인을 두었다. 관장(管掌)하는 일 및 관원은 다른 부도 같으며 관할하는 구역은 8방(坊)인데, 부방조(部坊條)에 자세하다.
동부(東部) 본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관할하는 구역은 11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남부(南部) 예전에는 본부의 명례방(明禮坊)에 있었는데, 후에 그 본부 훈도방(薰陶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11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서부(西部) 예전에는 중부 징청방에 있었는데 후에 여경방(餘慶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8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북부(北部) 예전에는 중부 징청방에 있었는데 후에 본부의 관광방(觀光坊)으로 옮겼으며, 또 그 본부의 안국방(安國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10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관부】중부 징청방은 이조(吏曹) 아래 남쪽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세웠다.
【강역】동쪽으로 양주목(楊州牧) 경계까지 10리, 남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10리, 북쪽으로 양주목 경계까지 10리이다.
【군명】 남경ㆍ한양ㆍ남평양(南平壤)ㆍ북한산ㆍ양주ㆍ광릉(廣陵).
【부방】무릇 경외(京外)에는 5호(戶)로 1통(統)을 삼아서 통마다 통주(統主)가 있으며, 외방에는 5통마다 이정(里正)이 있고,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이 있는데, 같은 한 구역이라도 지역이 넓고 호구가 많으면 적당히 증가한다. 서울에는 방리(坊里)마다 관령(管領)이 있다.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 이조 내계(吏曹內契)ㆍ한성부 내계ㆍ한성부 후동계(後洞契)ㆍ호조 내계ㆍ호조 후문계(後門契)ㆍ고례조계(古禮曹契)ㆍ판정동계(板井洞契)ㆍ전함사계(典艦司契)ㆍ변종견계(卞宗堅契)ㆍ두석동계(豆錫洞契)ㆍ비변사계(備邊司契) ○ 이상은 훈국 우영(訓局右營)에 속한다. 수진방(壽進坊) 수진궁 내계(壽進宮內契)ㆍ수진궁 행랑계(行廊契)ㆍ간동계(磵洞契)ㆍ송현계(松峴契)ㆍ제용감 하계(濟用監下契)ㆍ사복시 전계(司僕寺前契)ㆍ사복시 천변계(川邊契)ㆍ개정동계(蓋井洞契)ㆍ상사동계(相思洞契)ㆍ청성군계(淸城君契)ㆍ종현병문계(鍾縣屛門契)ㆍ상어물전계(上魚物廛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 상미전계(上米廛契). ○ 훈국 후영(後營)에 속한다.
견평방(堅平坊) 의금부 내계ㆍ의금부 후동계(後洞契)ㆍ전의감 동계(典醫監洞契). ○ 이상은 훈국 후영에 속한다. ○ 중어물전 일패계(中魚物廛一牌契)ㆍ중어물전 이패계. ○ 이상은 어영청중영(御營廳中營)에 속한다.
장통방(長通坊) 수표교 동변계(水標橋東邊契)ㆍ비파동계(琵琶洞契)ㆍ함평 주인계(咸平主人契)ㆍ광주(廣州) 주인계ㆍ석정동계(石井洞契)ㆍ조세홍계(曹世弘契)ㆍ박계손계(朴戒孫契)ㆍ방종계(方宗契)ㆍ입전계(笠廛契)ㆍ창전계(昌廛契)ㆍ창전 행랑계ㆍ중로계(中路契)ㆍ의성정계(義城正契)ㆍ분전(粉廛) 중로계ㆍ하순원계(河順元契)ㆍ내종계(乃宗契)ㆍ이전계(履廛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禁衛營前營)에 속한다. ○ 백립전계(百笠廛契)ㆍ정만석계(丁萬石契)ㆍ지전계(紙廛契)ㆍ장만호계(張萬戶契)ㆍ장구담계(張九淡契)ㆍ청주 주인계(淸州主人契)ㆍ서천수계(徐千守契)ㆍ염전계(鹽廛契)ㆍ신형손계(辛亨孫契)ㆍ박기수계(朴己守契)ㆍ관자동계(貫子洞契)ㆍ유사익계(兪士益契)ㆍ원주 주인계(原州主人契)ㆍ흑립전계(黑笠廛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서린방(瑞麟坊) 포도청계(捕盜廳契)ㆍ일영대계(日影臺契)ㆍ고색정계(古索井契)ㆍ계아전계(鷄兒廛契)ㆍ사기전계(砂器廛契)ㆍ박정계(朴井契)ㆍ전옥내계(典獄內契)ㆍ전옥후동계(典獄後同契)ㆍ종루서변계(鐘樓西邊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관인방(寬仁坊) 대사동 일패계(大寺洞一牌契)ㆍ대사동 이패계ㆍ대사동 삼패계ㆍ대사동 사패계ㆍ충훈부(忠勳府) 내계.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경행방(慶幸坊) 시전계(市廛契)ㆍ한원서변계(漢源西邊契)ㆍ한원동변계ㆍ궁내계(宮內契)ㆍ오순덕계(吳順德契)ㆍ사거리계(四巨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정선방(貞善坊) 비로전계(非老廛契)ㆍ임기손계(林己孫契)ㆍ김만년계(金萬年契)ㆍ수문동계(水門洞契)ㆍ고병조계(古兵曹契)ㆍ돈녕부 상계(敦寧府上契)ㆍ돈녕부 하계ㆍ파자전계(把子廛契)ㆍ하미전계(下米廛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대묘동계(大廟洞契)ㆍ의전일계(衣廛一契)ㆍ의전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하는데,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는 소의 먹이 쌀겨[糟糠] 18석을 거두게 하였다. 숙종조(肅宗朝)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1두로 하고, 돈으로 대신내면 4냥 2전 7푼이 되는데, 매 석의 값이 5전이다.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 성균관계(成均館契)ㆍ숭교 일계(崇敎一契).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열성조(列聖朝)에서 현관(賢關)을 우대하기 때문에, 순라졸과 금부 이속이 감히 반촌(泮村 성균관이 있는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연화방(蓮花坊) 연화동계ㆍ북 이계(北二契). ○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종묘동계(宗廟洞契)ㆍ연 일계(連一契)ㆍ연 삼계ㆍ금중계(金衆契)ㆍ중로계(中路契).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천변계(川邊契)ㆍ분륙계(分六契)ㆍ연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건덕방(建德坊) 어의동계(於義洞契)ㆍ건덕방계.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창선방(彰善坊) 창선방계ㆍ동학동계(東學洞契).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창선 이리계(彰善二里契)ㆍ동학내계(東學內契)ㆍ소천변계(小川邊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방내(坊內)에 오사인동(五舍人洞)이 있으니, 곧 유자빈(柳自濱)이 살던 곳이다. 자빈의 아우 자한(自漢)ㆍ자분(自汾)과 그 손아래 매부 김겸광(金謙光)ㆍ신중거(辛仲琚)가 모두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었기 때문에 인하여 동명(洞名)이 된 것이다.
숭신방(崇信坊) 숭신방계. ○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이하는 성 밖에 속한다.
인창방(仁昌坊) 인창방계. ○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성외(城外) 제기리계(祭基里契)ㆍ전농리계(典農里契)ㆍ벌리계(伐里契)ㆍ중량동계(中梁洞契)ㆍ능동계(陵洞契)ㆍ가오리계(加五里契)ㆍ장위리계(長位里契)ㆍ안암동계(安岩洞契)ㆍ우이계(牛耳契)ㆍ미아리계(彌阿里契)ㆍ청량리계(淸涼里契)ㆍ수유촌계(水踰村契). ○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왕십리역계(往十里驛契). ○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신설계(新設契)ㆍ답십리계(踏十里契)ㆍ마장리계(馬場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왕십리 사계(私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예전 사축서(司畜署)에서 기르던 고양(羔羊)의 먹이 쌀겨[糟糠] 값 6냥을 거둔다.
남부(南部)
낙선방(樂善坊) 금위영창계(禁衛營倉契). ○ 금위영 전영(前營)에 속한다. ○ 와유두리계(瓦有豆里契). ○ 어영청 우영(右營)에 속한다. 진소리계(眞梳里契)ㆍ왜관동계(倭館洞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성명방(誠明坊) 석교 상계(石橋上契)ㆍ석교 하계.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연성위계(蓮城尉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훈도방(薰陶坊) 주자동계(鑄字洞契)ㆍ정승계(政丞契)ㆍ박정계(朴井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죽전동계(竹廛洞契)ㆍ혜민서계(惠民署契)ㆍ하돌지방계(下乭之坊契)ㆍ묵정동계(墨井洞契)ㆍ이현계(泥峴契)ㆍ저전동계(苧廛洞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태평방(太平坊) 한수견계(韓守堅契)ㆍ보십내계(甫十內契)ㆍ보십외계ㆍ구리현계(仇里峴契)ㆍ선산계(善山契)ㆍ하홍문계(下紅門契)ㆍ수하동 허허병문계(水下洞虛虛屛門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광통방(廣通坊) 동행랑계(東行廊契). ○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군기시 월변계(軍器寺越邊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모전계(毛廛契)ㆍ손복동계(孫福洞契)ㆍ대다방 북변계(大多坊北邊契)ㆍ소다방 남변계(小多坊南邊契)ㆍ소다방 북변계ㆍ옹대리문계(瓮垈里門契)ㆍ성천계(成川契)ㆍ서행랑 상계(西行廊上契)ㆍ서행랑 하계ㆍ소천변계(小川邊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방 안에 보은단동(報恩緞洞)이 있으니 곧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 살던 곳이다. 순언은 호협(豪俠)하고 의를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명(明) 나라 서울에 가서 일세의 미인을 보고자 하여 수백 냥의 은을 가지고 기생촌[花房]으로 가서 제일가는 명기(名妓)를 찾았는데, 한 여자가 있어 생김생김이 절세가인인데 소복(素服)을 입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괴이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원래 사천(四川) 사람이며 아버지가 서울 와서 벼슬하여 관직이 주사(主事)에 이르렀는데 객중(客中)에 연이어 부모님을 여의고, 또 한 형 마저 잃어서 세 상사를 지금 권장(權葬 임시 매장)하여 두었는데, 고향으로 모셔다 장사를 치를 길이 없어서 부득이 화류계에 나와 몸을 팔아서라도 장사를 치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순언이 묻기를, “일찍이 다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오늘 처음 나왔기 때문에 아직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순언이 가엾게 여겨서 곧 가지고 갔던 은 천 냥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이면 영구를 모시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몸을 깨끗이 가지고 돌아가 장사를 지낸 다음 사족(士族) 가문으로 잘 시집가거라. 내가 만일 네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것을 준다면 의사(義士)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결의(結義)하여 누이동생을 삼고 돌아오니, 그 여인이 은혜에 감명하여 뼛속 깊이 새기며 순언의 성명을 물어서 알고 인하여 은을 팔아서 반구(返柩)하여 장사지냈다.
그 후 시집가서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부인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갚고자 하여 해마다 자신이 누에치고 손수 비단을 짰는데, 비단 첫 머리에는 보은단(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하고 우리나라 사신이 갈 때마다 반드시 순언이 오는가를 탐문하였다. 순언이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를 따라 명 나라 서울에 가게 되었을 때, 석 상서가 그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이었는데 곧 그가 맡아하는 일이었으므로 쉽게 일을 다하였다. 하루는 석 상서가 순언을 초청하여 집으로 가서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대접하였는데, 한 성장(盛粧)한 부인이 뜰 아래에 나와서 배례하고 이어 당 위로 올라와서 잔을 드리는 것이었다. 순언이 깜짝 놀라서 달아나 피하려 하니, 시랑이 말리며 잔을 받게 하고 이어 자세하게 사실의 전말을 말하여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강을 건너려 하는데 사람이 와서 시랑 부인의 친필 서신과 예단(禮單)ㆍ보은단 수십 필 및 기타 진귀한 물품을 수없이 받들어 드리며, 순언이 안 받을까 염려하여 강가에 두고서 가니 순언이 부득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일을 성공한 공으로 광국훈공(光國勳功)에 책정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知中樞) 벼슬을 주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로 인하여 순언이 살던 마을을 이름해서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때에는 석성이 병부상서[本兵]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전후 주청(奏請)하는 병기와 군량 등을 힘써 주장하여 극진히 돌보아주어서 우리나라의 재조(再造)의 공적을 이루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인의 내조(內助)의 공에 힘입은 바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잘못 전하여 미장동(美墻洞)이라 한다.
명례방(明禮坊) 장악원 내계(掌樂院內契). ○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명례동계ㆍ부계(部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남산동(南山洞)에는 훈국(訓局) 마병(馬兵)이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호현방(好賢坊) 호현동계ㆍ장흥동계(長興洞契)ㆍ송현계(松峴契)ㆍ의산위계(宜山尉契)ㆍ본궁내계(本宮內契)ㆍ소공동계(小公洞契)ㆍ부월변계(部越邊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서소문 월변계.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이간병문계(二間屛門契). ○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명철방(明哲坊) 수구문내계(水口門內契)ㆍ어영창계(御營倉契).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남소문동계(南小門洞契)ㆍ쌍이문계(雙里門契)ㆍ청녕위계(靑寧尉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둔지방(屯之坊) 서빙고 일계ㆍ서빙고 이계ㆍ지어둔계(之於屯契)ㆍ미서계(尾署契)ㆍ이태원계(梨泰院契)ㆍ동파계(東坡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전생서 내계(典牲署內契)ㆍ전생서 외계.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이하는 모두 성 밖이다.
두모방(豆毛坊) 중촌리계(中村里契)ㆍ신당리계(新堂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전관(箭串) 일계ㆍ전관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신촌리계(新村里契)ㆍ수철리계(水鐵里契)ㆍ두모포계(豆毛浦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한강방(漢江坊) 몽뢰정계(夢賚亭契)ㆍ한강계ㆍ주성리계(鑄成里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 방내 백성들에게서 전생서(典牲署)의 쌀겨 25석을 거두었는데, 무인년에 감하여 14석 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7냥 7푼이다.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 신문내계(新門內契). ○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장생동계(長生洞契)ㆍ두석동계(豆錫洞契)ㆍ선공감 내계(繕工監內契)ㆍ해풍군계(海豐君契)ㆍ동령동계(東嶺洞契)ㆍ서학동계(西學洞契)ㆍ서학 내계ㆍ모전계(毛廛契)ㆍ도자동계(刀子洞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ㆍ당피동계(唐皮洞契)ㆍ필전계(筆廛契)ㆍ공조후동계(工曹後洞契)ㆍ사역원계(司譯院契)ㆍ율학청계(律學廳契)ㆍ도렴동계(都染洞契)ㆍ사헌부 내계(司憲府內契)ㆍ병조 내계(兵曹內契)ㆍ형조 내계(刑曹內契). ○ 이상은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수성궁월변계(壽城宮越邊契)ㆍ사온동계(司醞洞契)ㆍ중추부 내계(中樞府內契)ㆍ예조 내계(禮曹內契)ㆍ종각계(鐘閣契)ㆍ십자각계(十字閣契).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인달방(仁達坊) 분선공감 내계(分繕工監內契)ㆍ사직동계(社稷洞契)ㆍ내수사계(內需司契)ㆍ내행랑계(內行廊契)ㆍ내섬시 내계(內贍寺內契)ㆍ봉상시계(奉常寺契). ○ 이상은 훈국(訓局) 전영(前營)에 속한다. ○ 수성궁 내계(壽城宮內契). ○ 훈국 중영에 속한다. ○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태평의 군왕이 그 방에서 나리라.” 하더니, 선조가 사직동 잠저(潛邸)에서부터 들어가 대통(大統 왕실의 종통)을 계승(繼承)하였다.
양생방(養生坊) 창동계(倉洞契)ㆍ송현계(松峴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태평관계(太平館契).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황화방(皇華坊) 서소문 내계(西小門內契)ㆍ취현동계(聚賢洞契)ㆍ소정동계(小貞洞契).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처음에는 황화방 북쪽 언덕에 있었다. ○ 태종 9년에 양주(楊州)로 옮겨 모셨는데, 지금도 이곳을 정릉동이라고 한다.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ㆍ경영고계(京營庫契). ○ 이상은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조판부사계(曹判府事契)ㆍ수근전계(水芹田契)ㆍ노첨정계(盧僉正契)ㆍ권정승계(權政丞契)ㆍ청성군계(靑城君契 ).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아현계(阿峴契). ○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인장리계(茵匠里契).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차자리계(車子里契). ○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이하는 모두 성 밖이다.
반석방(盤石坊) 사거리계(四巨里契)ㆍ도저동계(桃楮洞契)ㆍ석교리계(石橋里契)ㆍ조전계(租廛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연지계(蓮池契)ㆍ약전계(藥田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고순청계(古巡廳契)ㆍ서소문 외계.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미전 상계(米廛上契)ㆍ미전 하계ㆍ성삭주계(成朔州契)ㆍ유판부사계(兪判府事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이정암(李廷馣)ㆍ정향(廷馨)ㆍ정유(廷?)의 3형제가 모두 한림(翰林)을 지냈으므로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한림동이라 한다.
용산방(龍山坊) 마포계(麻浦契). ○ 훈국 우영에 속한다. ○ 공덕리계(孔德里契)ㆍ토정리계(土亭里契).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옹리 상계(瓮里上契)ㆍ옹리 하계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신촌리계(新村里契)ㆍ사촌리계(沙村里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청파 일계(靑坡一契)ㆍ청파 이계ㆍ청파 삼계ㆍ청파 사계ㆍ청파 오계.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만리창계(萬里倉契)ㆍ동문외계(東門外契)ㆍ어영청창계(御營廳倉契)ㆍ진휼청계(賑恤廳契)ㆍ신창계(新倉契)ㆍ형제정계(兄弟井契)ㆍ탄항계(灘項契)ㆍ곽계(槨契)ㆍ도화동계(桃花洞契).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윤민신(尹民新)의 집이 청파 작작동(灼灼洞)에 있었는데, 다섯 아들을 공부시켜서 5년 만에 모두 대과 급제(大科及第)하였으므로, 지금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로 부른다. ○ 곽계는 귀후서(歸厚署)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지금도 신당(神堂)이 있으며, 지금 훈국의 별영(別營)이 역시 곽계 안에 있다. ○ 정종(正宗)이 읍청루(挹淸樓)에 나아가 마을 이름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산 사람이 사는데, 어찌 관곽(棺槨)으로 이름을 하겠느냐.” 하면서, 도화동 외계로 고쳤다.
서강방(西江坊) 흑석리계(黑石里契)ㆍ율도계(栗島契).ㆍ신정리계(新井里契)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ㆍ구수철리계ㆍ창전리계(倉前里契)ㆍ하중리계(下中里契)ㆍ수일리계(水溢里契)ㆍ당인리계(唐人里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 방내의 백성들에게서 전생서 쌀겨 56석을 거두었는데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3두로 하고 돈으로 수봉(收捧)한다.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 ○ 훈국 좌영에 속한다.
의통방(義通坊) 옥정리계(玉井里契)ㆍ후동계(後洞契).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영추문계(迎秋門契). ○ 훈국 중영에 속한다.
준수방(俊秀坊) 준수방계. ○ 훈국 중영에 속한다.
관광방(觀光坊) 관광방계. ○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중학 내계(中學內契)ㆍ의정부 내계(議政府內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진장방(鎭長坊) 진장방계. ○ 훈국 우영에 속한다.
광화방(廣化坊) 광화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양덕방(陽德坊) 양덕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가회방(嘉會坊) 가회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안국방(安國坊) 안국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성외(城外) 합정리계(合井里契)ㆍ망원정 일계(望遠亭一契)ㆍ망원정 이계ㆍ여의도계(汝矣島契)ㆍ세교리계(細橋里契). ○ 이상은 훈국(訓局) 우영(右營)에 속한다. ○ 아현계(阿峴契)ㆍ연희궁계(延禧宮契)ㆍ성산리계(城山里契)ㆍ가좌동계(加佐洞契)ㆍ견산리계(甄山里契)ㆍ신사동계(新寺洞契)ㆍ갈고개계(葛古介契)ㆍ역계(驛契)ㆍ사계(私契)ㆍ불광리계(佛光里契)ㆍ수암리계(水巖里契)ㆍ수생리계(水生里契)ㆍ지서계(紙署契)ㆍ경리청계(經理廳契)ㆍ선혜청계(宣惠廳契)ㆍ양철리계(梁哲里契)ㆍ구리계(舊里契)ㆍ말흘산계(末訖山契)ㆍ홍제원계(弘濟院契). ○ 이상은 훈국 후영에 속한다. ○ 가좌동에 훈국 장막이 있으니 군사들의 무예 시험하던 곳이다. ○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이 수생리에 살았는데, 서재를 넓히고 학문을 강의하였다. 드디어 마을이름을 고쳐서, 물이촌(勿移村)이라 하고, 기문을 지어서 생각하는 바를 표시하였다. ○ 삼남약환계(三南藥丸契)ㆍ해서총약계(海西銃藥契)ㆍ폭백계(曝白契)ㆍ훈조계(燻造契)는 총융청(摠戎廳) 군영 밑으로 옮겨 설치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이 의지하여 사는 바탕을 삼게 하였다. ○ 방내의 백성들에게 거두는 예전 사축서(司畜署)의 쌀겨 값이 3냥 3전 3푼이다.
【성씨】 본부 한(韓) 시조는 고려조 고종(高宗) 때의 검교 태자첨사(檢校 太子詹事) 원서(元諝)이다. ○ 또 한 파는 고려조 고종 때의 판사복사(判司僕事) 균(均)이다. ○ 조(趙) 시조는 첨의중서(僉議中書) 지수(之壽)이다. ○ 또 한 파는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원경(元卿)이다. 민ㆍ신(申), 애(艾) 촌성(村姓)이다. 함(咸)ㆍ박(朴)ㆍ홍(洪)ㆍ부(夫)ㆍ최(崔)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 무릇 다른 주에서 와서 사는 자는 성 아래에 그 본적만을 주로 적어둔다. 이(李)ㆍ김(金)ㆍ윤(尹)ㆍ권(權)ㆍ오(吳)ㆍ강(姜)ㆍ허(許)ㆍ장(張)ㆍ임(任)ㆍ서(徐)ㆍ유(兪)ㆍ원(元)ㆍ황(黃)ㆍ조(曹)ㆍ임(林)ㆍ우(禹)ㆍ노(盧)ㆍ정(丁)ㆍ배(裵)ㆍ맹(孟)ㆍ변(卞)ㆍ백(白)ㆍ전(全)ㆍ엄(嚴)ㆍ전(田)ㆍ문(文)ㆍ진(陳)ㆍ길(吉)ㆍ주(周)ㆍ염(廉)ㆍ유(劉)ㆍ양(楊)ㆍ차(車)ㆍ명(明)ㆍ석(石)ㆍ기(起)ㆍ천(千)ㆍ영(靈) 속성(續姓)이다.
【호구】세종(世宗) 10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6천 9백 21호에, 인구가 10만 3천 3백 28명이고, 관령(管領)이 46명이며, 성 밑 10리 둘레의 호수는 1천 6백 1호에, 인구가 6천 44명이고, 관령이 15명이었다. 선조(宣祖) 39년에는 5부의 원래 호수가 1만 2천 9백 65호였다, 인조 26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66호에 인구는 9만 5천 5백 69명이었다. 효종(孝宗) 8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5천 7백 60호에 인구가 8만 5백 72명이었다. 현종(顯宗) 10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3천 8백 99호에 인구가 19만 4천 30명이었다. 숙종(肅宗) 4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2천 7백 40호에 인구가 16만 7천 4백 6명이었다. ○ 43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8천 3백 56호에, 인구가 18만 5천 8백 72명이었다. 경종(景宗) 4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5천 8백 44호에 인구가 14만 7천 7백 72명이었다. 영종(英宗) 2년에는 5부의 호수가 3만 2천 7백 47호에, 인구가 18만 8천 5백 97명이었다. ○ 29년에는 5부의 호수가 3만 4천 9백 53호에 인구가 17만 4천 2백 3명이었다. ○ 44년에는 경성ㆍ외방의 도합 호수가 1백 67만 9천 8백 65호에 인구가 7백만 6천 2백 48명이었다. 정종(正宗) 원년에 5부의 호수가 3만 8천 5백 93호에 인구가 19만 7천 9백 57명이었다. ○ 10년에 5부의 호부가 4만 2천 7백 86호에 인구가 19만 9천 1백 27명이었다. ○ 태종조(太宗朝)에 연호법(煙戶法 호별 등급)을 정하였는데, 서울 안 현재 관직의 1ㆍ2품이 상호(上戶)가 되고, 3ㆍ4품이 중호가 되고 5ㆍ6품이 하호가 되며, 그 아래의 참외(參外 6품 이하)가 하하호가 되고, 서민 및 전직 각 품의 사람들은 각각 그 품계에 따라 차별하였다. 외방은 남녀 15명 이상의 집이 상호가 되고, 10명 이상이 중호가 되고, 5명 이상이 하호가 되며, 1ㆍ2명의 식구로 호(戶)를 이루지 못한 자는 3호를 합하여 1호를 삼았다. ○ 경성 외방에 모두 5호로 1통(統)을 삼고, 통마다 통수(統首)가 있어서 통내의 일을 맡아보며, 방(坊)마다 관령(管領)이 있다. ○ 호적은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 마다 정한 해에 고쳐 정리하여 한성부에 보관한다. ○ 남자 장정은 16세 이상이면 호패(號牌)를 차는데, 동ㆍ서반의 관원 및 내간(內官 궁중관원)의 2품 이상은 아패(牙牌)를 차고, 3품관 이하 및 삼의사(三醫司)와 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은 각패(角牌)를 차고, 생원ㆍ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 유품잡직(流品雜職)과 사서인(士庶人)ㆍ서리(書吏)ㆍ향리(鄕吏)는 소목방패(小木方牌)를 차고, 공사천인가리(公私賤人假吏)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차고, 군사들은 그대로 요패(腰牌)를 찬다.
【풍속】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돈독하다 《함허자(涵虛子)》. 천성이 유순(柔順)하다 《후한서(後漢書)》.
【관제】 내명부 빈(內命婦嬪) 정1품. 교명(敎命)이 있는 자는 품계가 없다.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상궁(尙宮) 이하는 궁인(宮人)의 관직에 속한다. 상의(尙儀) 모두 정5품. 상복(尙服)ㆍ상식(尙食) 종5품. 상침(尙寢)ㆍ상공(尙功) 정 6품. 상정(尙正)ㆍ상기(尙記) 종6품. 전빈(典賓)ㆍ전의(典儀)ㆍ전선(典膳) 정7품. 전설(典設)ㆍ전제(典製)ㆍ전언(典言) 종7품. 전찬(典贊)ㆍ전식(典飾)ㆍ전약(典藥) 정8품. 전등(典燈)ㆍ전채(典彩)ㆍ전정(典正) 종8품. 주궁(奏宮)ㆍ주상(奏商)ㆍ주각(奏角) 정9품. 주변치(奏變徵)ㆍ주우(奏羽)ㆍ주치(奏徵)ㆍ주변궁(奏變宮) 종9품. ○ 세자궁의 양제(良娣) 종2품. 양원(良媛) 종3품. 승휘(承徽) 종4품. 소훈(昭訓) 종5품. 수규(守閨) 이하는 궁인(宮人)의 관직에 속한다. 수칙(守則) 모두 종6품. 장찬(掌饌)ㆍ장정(掌正) 종7품. 장서(掌書)ㆍ장봉(掌縫) 종8품. 장장(掌藏)ㆍ장식(掌食)ㆍ장의(掌醫) 종9품. ○ 외명부(外命婦)ㆍ공주(公主) 왕녀 중 적실(嫡室) 소생. 옹주(翁主) 왕녀 중 서생(庶生). 부부인(府夫人) 왕비의 어머니, 정1품. 봉보부인(奉保夫人) 대전(大殿)의 유모, 종1품. 군주(郡主) 세자의 딸, 적실 소생. 정2품. 현주(縣主) 세자의 딸, 서생. 정3품. ○ 종친 처(宗親妻)ㆍ부부인(府夫人) 정1품, 대군의 아내. 군부인(郡夫人) 정1품, 왕자 군의 아내. 군부인(郡夫人) 종1품의 아내. 현부인(縣夫人) 정ㆍ종2품의 아내. 신부인(愼夫人) 당상관 정3품의 아내. 신인(愼人) 정ㆍ종3품의 아내. 혜인(惠人) 정ㆍ종4품의 아내. 온인(溫人) 정ㆍ종5품의 아내. 순인(順人) 정6품의 아내. ○ 문무 관원 명부(命婦)의 예에 따라 작(爵)을 봉한다. ○ 문무관 처(文武官妻)ㆍ정경부인(貞敬夫人) 정ㆍ종1품. 정부인(貞夫人) 정ㆍ종2품. 숙부인(淑夫人) 당상관 정3품. 숙인(淑人) 정ㆍ종3품. 영인(令人) 정ㆍ종4품. 공인(恭人) 정ㆍ종5품. 의인(宜人) 정ㆍ종6품. 안인(安人) 정ㆍ종7품. 단인(端人) 정ㆍ종8품. 유인(嬬人) 정ㆍ종9품.
【동서반관계】무릇 직함(職啣)은, 먼저 품계요 다음이 관청이요 다음이 직위이다. 품계가 높고 직위가 낮으면 행(行)이라 하고, 품계가 낮고 직위가 높으면 수(守)라고 하는데, 행ㆍ수라는 글자는 관청 이름 위에 놓는다.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議政).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국구(國舅)ㆍ종친(宗親)ㆍ의빈(儀賓). ○ 종친은 현록대부(顯祿大夫)ㆍ흥록대부(興祿大夫)요, 의빈은 유록대부(綏祿大夫)ㆍ성록대부(成祿大夫)이다. 보국숭록대부 종1품 숭록대부ㆍ숭정(崇政)대부 종친은 의덕(宜德)ㆍ가덕(嘉德)이요, 의빈은 정덕(靖德)ㆍ명덕(明德)이다. 정2품 정헌(正憲)대부ㆍ자헌(資憲)대부 종친은 숭헌(崇憲)ㆍ승헌(承憲)이요. 의빈은 봉헌(奉憲)ㆍ통헌(通憲)이다. 종2품 가의(嘉義)대부ㆍ가선(嘉善)대부 종친은 중의(中義)ㆍ소의(昭義)요, 의빈은 자의(資義)ㆍ순의(順義)이다. 당상 정3품 통정(通政) 대부 동반(東班). 절충장군(折衝將軍) 서반(西班). 종친은 명선(明善)이요, 의빈은 봉순(奉順)이다.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동반(東班). 어모장군(禦侮將軍) 서반. 종친은 창선(彰善)이요, 의빈은 정순(正順)이다. 종3품 중직(中直)대부ㆍ중훈(中訓) 대부 동반. 건공장군(建功將軍)ㆍ보공장군(保功將軍) 서반. 종친은 보신(保信)ㆍ자신(資信)이요, 의빈은 명신(明信)ㆍ돈신(敦信)이다. 정4품 봉정(奉正)대부ㆍ봉렬(奉列)대부 동반. 진위(振威)장군ㆍ소위(昭威)장군 서반. 종친은 선휘(宣徽)ㆍ광휘(廣徽)이다. 종4품 조산(朝散)대부ㆍ조봉(朝奉)대부 동반. 정략(定略)장군ㆍ선략(宣略)장군 서반. 종친은 봉성(奉成)ㆍ광성(光成)이다. 정5품 통덕랑(通德郞)ㆍ통선랑(通善郞) 동반. 과의교위(果毅校尉)ㆍ충의교위(忠毅校尉) 서반. 종친은 통직랑(通直郞)ㆍ병직랑(秉直郞)이다. 종5품 봉직랑(奉直郞)ㆍ봉훈랑(奉訓郞) 동반. 현신교위(顯信校尉)ㆍ창선교위(彰善校尉) 서반. 종친은 근절랑(謹節郞)ㆍ신절랑(愼節郞)이다. 정6품 승의랑(承議郞)ㆍ승훈랑(承訓郞) 동반. 돈용교위(敦勇校尉)ㆍ진용교위(進勇校尉) 서반. 종친은 집순랑(執順郞)ㆍ종순랑(從順郞)이다. 종6품 선교랑(宣敎郞)ㆍ선무랑(宣務郞) 동반. 여절교위(勵節校尉)ㆍ병절교위(秉節校尉) 서반. 정7품 무공랑(務功郞) 동반. 적순부위(迪順副尉) 서반. 종7품 계공랑(啓功郞) 동반. 분순부위(奮順副尉) 서반. 정8품 통사랑(通仕郞) 동반. 승의부위(承義副尉) 서반. 종8품 승사랑(承仕郞) 동반. 수의부위(修義副尉) 서반. 정9품 종사랑(從仕郞) 동반. 효력부위(効力副尉) 서반. 종9품 장사랑(將仕郞) 동반. 전력부위(展力副尉) 서반. ○ 종2품 이상은 동ㆍ서반의 품계가 같다. ○ 지금 임금 2년에 종친ㆍ의빈은 모두 동반의 품계를 따르게 하였다.
【잡직계】 정6품 공직랑(供職郞)ㆍ여직랑(勵職郞). 종7품 근임랑(謹任郞)ㆍ효임랑(効任郞). 정7품 봉무랑(奉務郞). 종7품 승무랑(承務郞). 정8품 면공랑(勉功郞). 종8품 부공랑(赴功郞). 정9품 복근랑(服勤郞). 종9품 전근랑(展勤郞).
【사관계】 정5품 통의랑 도무(通議郞都務). 종5품 봉의랑 장부(奉議郞掌簿). 정6품 선직랑 교부(宣職郞校簿). 종6품 봉직랑 감부(奉職郞勘簿). 정7품 희공랑 전사(熙功郞典事). 종7품 주공랑 장사(注功郞掌事). 정8품 공무랑 관사(供務郞管事). 종8품 직무랑 급사(直務郞給事). 정9품 계랑 참사(啓郞參事). 종9품 시사랑 섭사(試仕郞攝事). ○ 붙임. 녹과(祿科) 매달 요미[散料]를 전달에 나누어 준다. 제1과(科) 정1품. ○ 쌀 2석 8두, 콩 1석 5두. ○ 대군(大君)은 봄 석 달에 한 섬씩을 더 준다. 제2과 종1품. ○ 쌀 2석 2두, 콩 1석 5두. 제3과 정2품.○ 쌀 2석 2두, 콩 1석 5두. 제4과 종2품 . 쌀 1석 11두, 콩 1석 5두. 제5과 당상관 정3품. ○ 쌀ㆍ콩 1석 5두. ○ 이상은 25일에 나누어 준다. 제5과 당하관 정3품. ○ 쌀 1석 5두, 콩 1석 2두. 제6과 종3품. 쌀 1석 5두, 콩 1석 2두. 제7과 정ㆍ종4품. ○ 쌀 1석 2두, 콩 13두. 제8과 정ㆍ종5품. ○ 쌀 1석 1두, 콩 10두. ○ 이상은 26일에 나누어 준다. 제9과 정ㆍ종6품. 쌀 1석 1두, 콩10두. 제10과 정ㆍ종7품. ○ 쌀 13두, 콩 6두. ○ 이상은 27일에 나누어 준다. 제11과 정ㆍ종8품. ○ 쌀12두, 콩 5두. ○ 28일에 나누어 준다. 제12과 정9품. ○ 쌀 10두, 콩 5두. 제13과 종9품. ○ 쌀 10두, 콩 5두. ○ 이상은 29일에 녹을 나누어준다.
【과제】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보는데, 전해 가을에 초시(初試)를 보고 이듬해 첫봄에 복시(覆試)를 본다. 전시(殿試)ㆍ문과(文科)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가 보며 무과도 같다.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시험은 통덕랑(通德郞) 이하가 보게 하고, 6품 이상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 영물서용(永勿敍用 종신토록 벼슬하지 못함)의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도, 탐관오리[臟吏]의 아들이나, 재가하고 행실 부정한 여자의 아들 및 손자, 서얼(庶孼)의 자손은 문과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보지 못하며, 본도에 거주하지 않는 자나 조정 관원으로서 현재 직위에 있는 자는 향시(鄕試)를 보지 못하는데, 지방에 파견되었거나 휴가를 얻은 자는 여기에 구애되지 않으며 무과도 같다. 시험 장소는 한두 곳을 설치하여, 시험 보는 이가 시관(試官)과 서로 피하여야 할 경우는 다른 곳에서 보며, 아버지가 복시에 응시한 경우에는 아들이 피하는데 무과도 같다. ○ 음양과(陰陽科) 천문학 시험은 그 학교의 생도 외에는 보지 못한다. ○ 문과는 10년에 한 번씩 중시(重試 급제자의 재시험)가 있는데 당하관이 보며, 인원수 및 시험 방법은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서 정한다. 무과도 같다.
식년(式年) 3년에 한 번씩 시험보는 것이 대비지과(大比之科 대과)가 되는데, 지금은 자ㆍ오ㆍ묘ㆍ유년에 시행하니, 이것을 식년이라 한다.
문과 초시(初試) 인원수는 성균관 시험이 50명인데 두 곳으로 나누어 소속시키며, 한성부 시험이 40명이요, 경기(京圻) 시험의 20명은 한성부 시험에 나누어 보게 한다. 충청도ㆍ전라도 각 25명, 경상도 30명, 강원도ㆍ평안도 각 15명, 황해도 10명, 함경도 13명이다. 제술(製述) 시험은 초장(初場)에 사서의(四書疑) 1편, 논문 1편이요, 중장에는 부(賦) 1편, 표(表)ㆍ전(箋) 중 1편이며, 종장에는 대책문(對策文) 1편이다. 지은 것은 모두 바꾸어서 썼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명경(明經) 시험은 삼경 사서(三經四書) 중에서 조(粗)ㆍ약(略 강독하는 시험 성적의 등급인데, 조의 위, 순(純)의 다음이다.) 이상을 뽑는다.
복시(覆試) 인원수는 33명인데 칠서(七書)로 배강(背講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서 읽는 것)하고 그 성적의 통(通)ㆍ약(略)을 계산하여 14분 반이면 뽑는다. ○ 두 시험 장소에서 16명씩 뽑는다.
생획(栍劃) 명경과의 시험 성적 14분 이하의 사람에게 보게 하여 1명씩 뽑는데, 모두 33명을 제술 시험으로 뽑는다.
전시(殿試) 인원수는 직부(直赴)ㆍ병부(並赴)를 합하여 정한 수효가 없으며, 제술 시험으로 뽑는다.
생원초시(生員初試) 인원수는 한성부 2백 명인데, 경기 60명이 나누어 한성부 시험을 보며, 충청도ㆍ전라도 각 90명, 경상도 1백 명, 강원도ㆍ평안도 각 45명, 황해도ㆍ평안도 각 35명이다. 제술 시험은 사경의(四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이다.
복시(覆試) 인원수는 1백 명인데, 제술 과목은 초시와 같다.
진사 초시(進士初試) 인원수는 생원 시험과 같은데, 부 1편ㆍ시 1편을 제술한다.
복시 인원수는 생원 시험 복시의 인원수와 같으며, 제술은 초시와 같다.
증광(增廣)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혹은 여러 경사가 겹치면 특별히 증광 시험을 설치하되, 경사가 겹친 것이 제일 많은 경우에는 대증광(大增廣)이라고 이름한다.
문과 초시(文科初試) 인원수는 식년 시험과 같으며, 제술 3장(場)도 같은데 강경(講經) 시험은 없다.
복시 인원수는 33명이며 강경은 삼경(三經) 중에서 원하는 한 경으로 하며 조(粗) 이상을 뽑는다. 제술은 초시 시험의 중(中)ㆍ종장(終場)과 같다.
전시 식년 시험과 같다.
생원시ㆍ진사시 초시ㆍ복시의 인원수 및 제술은 식년 시험과 같다.
별시(別試) 중시(重試)의 준례에 의하여 거행하는데, 병년(丙年) 및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한다. 정시(庭試)도 같다.
문과초시 인원수는 병년 별과면 3백 명이요, 기타는 혹 천 명에도 이르는데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서 시행한다. 제술 시험 초장(初場)은 논(論) 1편, 표ㆍ전 중의 1편, 부 1편인데 번갈아 가며 두 제목을 낸다. 종장은 대책(對策) 1편이요, 강경은 삼경(三經) 중 원하는 한 경으로 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뽑는다.
회시 겸 전시(會試兼殿試) 인원수는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 정하며 제술은 증광전시(增廣殿試)와 같다.
광시(廣試) 국가 경사로 인하여 시행한다.
문과 초시(文科初試) 인원수는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 정한다. 제술(製述)은 부 1편, 표ㆍ전 중 1편이다.
회시 겸 전기(會試兼殿試) 인원수 및 제술은 별시ㆍ전시와 같다.
알성시(謁聖試)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거행하고, 이어 선비를 시험하는 것인데, 초시가 없고 그 날로 발표한다.
문과 인원수 및 제술은 별시ㆍ전시(殿試)와 같다.
중시(重試) 문ㆍ무과가 함께 10년에 한 번씩 보이는데, 당하관이 나가 보며 병년(丙年)마다 시행한다.
문과 인원수 및 제술(製述)은 별시ㆍ전시와 같다.
절일제(節日製) 성균관 서재에 거처하는 유생(儒生)들이 원점(圓點 출석 여부를 표시하는 점)을 찍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두 번 식사한 것을 1점으로 잡아서, 유생들간의 제술[泮製]에는 50점, 성균관 시험에는 3백 점에 이르는 사람을 나가 시험보게 한다. ○ 정월 7일 곧 인일(人日)과, 3월 3일, 7월 7일, 9월 9일의 제술을 황감제(黃柑製)라고 하는데, 인원수는 원래 정해 있지 않으며, 수석한 사람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거나 바로 회시에 나가게 하되, 2분(分) 또는 1분의 점수를 주며, 서책ㆍ필묵(筆墨) 등도 상으로 나누어 준다.
도기(到記) 관학(館學 성균관에 설치한 학당)의 유생이나 생원ㆍ진사들이 나가 보며 제술은 절일제의 시험과 같고 강경(講經)은 3경 중 통(通)에 낙점된 이하 중에서 시험하여 뽑는다. 제술에 수석한 사람 및 강경에 수석한 사람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며 봄ㆍ가을로 시행한다.
통독(通讀) 매해 대사성(大司成)이 경향의 유생들을 시험보여 뽑는데, 제술ㆍ강서(講書)를 각 11차로 하며 통한 것을 계산하여, 식년 문과 복시(覆試)를 보게 하는데 인원수는 10명이다. 제술은 부 1편과 표ㆍ전ㆍ논 중의 1편을 보며, 강경은 7서 중에서 자원하는 것으로, 1서를 배송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뽑는다. ○ 무릇 모든 강경은 모두 배송(背誦)한다.
승보(陞補) 매해 대사성이 사학(四學) 및 지방 유생들을 공부시키고, 시험보는 것을 합하여 12차례 한다. 세초(歲抄 6월ㆍ12월)에 계산하여 식년 생원ㆍ진사 복시를 보게 하는데, 인원수는 12명이며, 제술은 부 1편, 시 1편이다.
사학합제(四學合製) 제술은 승보와 같으며 인원수는 16명인데 그 중 사서(四書)에서 4명, 《소학(小學)》에서 4명이다.
무과 식년ㆍ증광ㆍ초시 시험 장소는 훈련원(訓練院)의 한 곳과 모화관(慕華館)의 두 곳이다. 시험보여 뽑는 인원수는 70명인데, 경상도 30명, 충청도ㆍ전라도 각 25명, 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 각 10명이다. 목전(木箭)ㆍ철전(鐵箭)ㆍ기추(騎蒭)ㆍ관혁(貫革)ㆍ기창(騎槍)ㆍ격구(擊毬)ㆍ유엽전(柳葉箭)ㆍ조총(鳥銃)ㆍ편추(鞭芻)ㆍ강서(講書)의 기예(技藝)를 죽 써 놓고 점찍어서 그 중 몇 기예를 시험보여 뽑는다.
복시 인원수는 28명이며 시험보는 기예는 초시와 같다.
전시(殿試) 인원수는 직부(直赴)ㆍ병부(幷赴) 합하여 정한 수가 없으며, 기예는 초시와 같다.
제과(諸科) 시험보여 뽑는 여러 규정이 대략 같다.
잡과 식년 증광ㆍ역과(譯科) 초시 한학(漢學 중국어 통역) 23명, 몽학(蒙學)ㆍ청학(淸學)ㆍ왜학(倭學) 각 4명이다.
복시 한학 13명, 몽학ㆍ왜학 각 2명이다.
의과 초시 18명이다.
복시 9명이다.
음양과(陰陽科) 초시 천문학 10명, 지리학 4명, 명과학(命課學 운명 길흉 화복을 판단 하는 학문) 8명이다.
복시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명과학 4명이다.
율과(律科) 초시 18명이다.
복시 9명이다.
【의장】 조참(朝參)ㆍ상참(常參)ㆍ조계(朝啓) 모두 흑의(黑衣)를 입는다 종1품 이상 및 기로소(耆老所)의 당상관은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종2품 이상은 초헌(軺軒)을 타며, 당상관은 호상(胡床 걸상) 안롱(鞍籠)을 가진 자가 앞에서 인도하고, 정3품 당하관은 안롱만을 가지게 한다.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은 갓에 옥정자(玉頂子)로 장식하고, 감찰(監察)은 수정 정자를 장식하며, 한산직(閑散職)의 당상관은 공석 회합이면 사모(紗帽)를 쓴다. 사헌부의 서리(書吏)나 통례원(通禮院)의 서원(書員)이 감찰 및 조하(朝賀 조정 하례) 할 때에는 공복(公服)을 입는다. ○ 무릇 어가(御駕)를 시종하고 조하하는 여러 신하들의 복색은 상복(上服)을 따르며, 임금이 나가 행차할 때에는 모두 공복을 입는다. ○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ㆍ장신(將臣)이 융복(戎服)과 군복을 입을 때에는 갓에 옥로(玉鷺)를 장식한다.
관(冠) 1품관의 조복(朝服)은 오량목잠(五梁木箴)인데 제복도 같으며, 공복(公服)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평상복에는 사모를 쓴다. 관자(貫子)ㆍ갓끈은 금ㆍ옥을 쓰고, 갓의 장식은 은으로 하는데 대군(大君)도 같으며, 이엄(耳掩)은 주단 초피(貂皮)를 사용한다. 2품관의 조복은 4량(粱)이요, 대사헌(大司憲)은 해태[獬豸] 모양을 붙이고, 집의(執義) 이하는 모두 목잠을 사용한다. 이하도 위와 같음. 당상 3품관은 3량이며, 종친은 6품관에 이르기까지는 생초 초피 이엄(耳掩)을 사용한다. 당하관 정3품 이하로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생초 서피(鼠皮) 이엄을 사용하며, 4품에서 6품까지는 2량이요, 7품에서 9품까지는 1량인데, 모두 목잠이다. 제복도 같고 공복엔 복두, 평상복엔 사모이다. 녹사(錄事)는 뿔 있는 평정건(平頂巾)이요, 여러 학당의 생도들은 검은 베 건(巾)을 쓰며, 서리(書吏)는 뿔 없는 평정건, 별감(別監)은 자색 건, 세자궁(世子宮) 하인은 푸른 건을 쓰며, 평상복엔 주황 초립(朱黃草笠)을 쓴다. 궁궐 안의 각 차비(差備 하인)는 푸른 모자, 길 인도하는 자는 자색 건, 나장(羅將)과 조예(皂隷)는 검은 건을 쓴다. ○ 당상관 3품 이상은 오사모(烏紗帽 검은 사모)에 문사각(紋紗角 무늬 있는 사각)이며, 융복(戎服)엔 자립(紫笠)이었는데, 칠사립(漆紗笠)으로 고쳤다. 당하관 3품 이하는 오사모이며, 융복에는 흑립(黑笠)에 수정 갓끈이다. 녹사는 오사모, 수복(守僕)은 검은 건이다.
복(服) 1품관은 붉은 생초의 의상(衣裳)과 폐슬(蔽膝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가슴에 늘이는 헝겊)이며, 백사(白紗) 중단(中單 웃옷 속에 있는 소매 넓은 두루마기)에 구름과 학을 수놓은 금고리에 술 있는 띠(雲鶴金環綬)를 사용한다. 제복(祭服)은 푸른 생초 옷에 붉은 생초 하의와 폐슬이고, 중단은 금고리에 술 있는 띠[金環綬] 위와 같음 이며 방심 곡령(方心曲領)이고, 공복은 홍포(紅袍)요, 평상복은 사라 능단(紗羅綾緞)으로 한다. 흉배(胸背)는 대군은 기린(麒麟)이고, 왕자군(王子君)은 자연 광택 있는 문채의 공작(孔雀)이며, 무관은 호표(虎豹) 모양이다. 2품관의 조복ㆍ제복(祭服)ㆍ공복ㆍ상복(常服)은 위와 같은데 흉배는 운안(雲雁)을 수놓았고 대사헌은 해태이며, 무관은 위와 같다. 3품관의 폐슬 이상은 위와 같고, 중단은 수리가 앉아 있는 것을 수놓은 은고리에 술 있는 띠[盤雕銀環綬]이며, 제복은 의상 폐슬이 1품과 같고, 중단은 위와 같으며 백초(白綃)의 방심 곡령은 위의 1품관과 같다. 공복은 정3품은 홍포(紅袍)요, 종3품은 청포(靑袍)이며, 상복(常服)은 당상관은 위와 같다. 흉배는 백한(白鷳)을 수놓았는데 무관은 웅비(熊羆)이다. 4품관의 조복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까치를 수놓은 은고리에 술 있는 띠[鍊鵲銀環綬]이다. 제복도 같고, 조복은 백초 방심령(白綃方心領)이요, 공복은 청포이다. 5ㆍ6품은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까치 수놓은 구리고리에 술 있는 띠[練鵲銅環綬]요, 제복(祭服)은 같고 조복은 백초 방심 곡령이며 공복은 청포이다. 7품에서 9품까지는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접동새를 수놓은 구리고리에 술 있는 띠[鸂鶆銅環綬]이고 백초 방심 곡령이며 공복은 녹포(綠袍)이다. 녹사는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이고 여러 학당의 생도도 단령이고 유학(儒學)은 청금(靑衿)이고 서리는 단령이며, 별감은 푸른 단령인데 평상복은 직령(直領)이다. 궁궐 안의 각 차비는 직령이며 인로(引路)는 푸른 단령, 나장은 푸른 반비의(半臂衣)이다. 형조와 사헌부의 전옥(典獄)은 검은 단령이며 사간원의 사(士)는 누런 단령이며, 조예(皂隷)는 푸른 단령이다. 공주와 옹주(翁主)의 시종은 초록색을 사용한다. ○ 당상관 이상은 담홍포(淡紅袍)인데 대소 조정 의식에는 현록색(玄綠色) 사단(紗緞)이며 흉배는 운학(雲鶴)을 수놓았는데 무관도 위와 같고, 융복엔 남색 첩리(帖裏)를 입는다. 당하관 3품 이하는 홍포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으며, 대소 조정 의식에는 현록색 저견(紵絹)이고 흉배는 백한이다. 무관도 위와 같은데 융복에는 청현색(靑玄色) 첨리를 입는다. 녹사의 홍단령은 지금 폐지되고 청현색 단령이며, 별감은 홍직령인데, 대소 조정 의식에는 녹색 직령을 입는다. 수복(守僕)은 홍직령이다. ○ 문ㆍ무사ㆍ서인이 모두 푸른 색을 숭상하게 하는데, 대소 인원은 문ㆍ무 직위를 물론하고 표의(表衣)가 앞은 땅 위에서 3촌 떨어지게 하며 뒤는 땅 위에서 2촌 떨어지게 한다. 소매는 길이가 손을 지나고 다시 돌아서 팔목에 이르며 소매통은 넓이가 1척이고 소맷 부리는 7촌이다. 서민(庶民)은 표의가 앞에는 땅 위에서 4촌 떨어지게 하며 뒤에는 땅 위에서 3촌 떨어지게 하고, 소매 길이는 손을 지나며 소매통 넓이는 8촌, 소맷부리는 5촌이다.
대(帶) 1품관의 조복에는 서대(犀帶)요, 제복ㆍ공복ㆍ상복(常服)에도 같으며, 사복엔 붉은실 띠(紅條兒)이다. 정2품관의 조복에는 정삽금(正鈒金)이며 종2품은 소금(素金)인데 제복ㆍ상복도 같다. 공복엔 여지금(荔枝金)이며 사복엔 붉은실 띠이다. 3품관의 조복에는 정삽은(正鈒銀). 종3품은 소은(素銀)이며, 제복과 평상복도 같고, 정3품의 공복에는 여지금, 종3품은 흑각(黑角)이고, 사복에는 붉은실 띠이다. 4품관의 조복에는 소은이며, 평상복도 같고, 공복엔 흑각이다. 5품에서 9품까지의 조복에는 흑각이며, 제복ㆍ공복ㆍ평상복도 같다. 녹사와 여러 학당의 생도들과 서리(書吏)는 실 띠이며 별감과 궁궐 안 각 차비도 실 띠이고, 인로(引路)는 자색 난삼[紫襴]이요, 나장ㆍ조예(皂隷)도 실 띠이다. ○ 왕자가 데리고 다니는 자는 자색 난삼에 놋쇠 패[豆錫牌]를 차고, 의정부(議政府)와 승정원(承政院)의 경연(經筵)에서는 납패(鑞牌)이며, 내각의 인로는 금패(金牌)이다.
홀(笏) 1품에서 4품까지는 조복에 아홀(牙笏)이며, 제복과 공복에도 같고, 5품에서 9품까지는 조복에 목홀(木笏)이며 제복과 공복에도 같다.
패옥(佩玉) 1품에서 3품까지는 조복에 반청옥(燔靑玉)이며 제복에도 같고, 4품에서 9품까지는 조복에 반백옥(燔白玉)이며 제복에도 같다.
말(襪) 1품에서 9품까지 조복에 백포(白布)인데 제복에도 같다.
화혜(靴鞋) 1품에서 3품까지는 조복에 흑피혜(黑皮鞋)이며 제복에도 같고 공복엔 흑피화(黑皮靴)이다. 당상관은 평상복에는 금화(金靴)를 신는다. 4품에서 9품까지의 조복과 제복에는 위와 같으며 공복(公服)에는 흑피화를 신는다.
안구(鞍具) 1품에서 9품까지는 대랑피변안(大浪皮邊鞍)에 녹색 언치[䩞]와 단첨보로(段韂甫老)이며 골추륵 삼조수아(骨鞦勒三條垂兒)를 장식한다. 3품관 당상관은 대랑피변안에 녹색 언치이며 종친(宗親)의 3품 이하는 유청색(柳靑色)을 사용하여 골추륵 삼조수아를 장식하고, 기타의 3ㆍ4품은 백록각변안(白鹿角邊鞍)에 이조수아이며, 5ㆍ6품은 백록각 변안에 일조수아이고, 7ㆍ8ㆍ9품은 백록각변안이다. 사족의 의복은 첨리(帖裏) 및 치마[裳]가 13폭을 지나는 일이 없으며, 서인(庶人)의 의복은 9승(升) 포목에 첨리와 치마가 12폭이다. 사족의 초립(草笠)은 50죽(竹)이며, 또 마미립(馬尾笠)에 죽립(竹笠)을 붙인다. 서인은 초립이 30죽이며, 또 죽직립(竹織笠)과 승결립(繩結笠)이 있다.
【공헌】전부고(田賦考) 공제조(貢制條) 끝에 보인다. ○ 경기ㆍ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도에는 대동법(大同法)을 행하는데, 무릇 서울 관청에 모든 공물(貢物)이 공안(貢案)에 기재되어 있고, 5도(道)에 나누어 배정된 것은, 5도 각 영읍(營邑)의 준비가 백성의 노력에서 나는 것으로 모두 쌀로 만들며,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 지방의 공물 값인 쌀은 호조에서 주관하여 내어주고, 북도(北道)의 공물 값인 마포(麻布)는 각 해당 관청에서 내어준다. ○ 해서(海西 황해도)에서는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하니 대동법의 규정을 의방(依倣)한 것이다. ○ 종친과 동반(東班)의 6품, 서반의 4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자는 포목이 각각 백저포(白苧布) 3필이며, 동반의 7품 이하와 서반의 6품 이상은 각각 흑마포(黑麻布) 1필씩이다. 서울 안의 무녀(巫女)는 상등은 백저포ㆍ흑저포 각 3필, 중등은 각 2필, 하등은 각 1필이며, 서울 안에 사는 부유한 사람은 각기 백저포ㆍ흑마포 1필씩이다. ○ 석자(席子)ㆍ인삼ㆍ초피(貂皮)ㆍ수달피(水獺皮) 등의 공물이 있다. ○ 무릇 세납이나 공물로 받아들이는 물건은 이듬해 6월까지 상납(上納)하며 제향(祭享)에 진상하는 것 및 제철에 나는 산물(産物)은 모두 그때에 미쳐야 한다. ○ 여러 도의 공물을 지금은 쌀이나 포목으로 상납(上納)하며, 평안도의 공물은 지금 상납이 없는데, 그 값을 호조(戶曹)에서 쌀과 돈과 포목으로 공인(貢人 공물 바치는 계(契)의 계원)에 내어 주어서 방내 백성 중에서 정하여 주인을 삼고, 그 값을 넉넉히 정하여 주어서 예비하였다가 바치게 하며, 원 물건으로 상납하는 것은 제때에 미쳐야 한다. ○ 북도에서 바치는 인삼은 도합 수량이 1백 10근인데 5승(升) 생포(生布)로 대납(代納)한다. ○ 진상하는 포목은 15승에서 10승까지의 물품으로 하는데, 그 중 백저포ㆍ흑마포ㆍ저마교직포(苧麻交織布)는 12승에서 9승까지이며, 면포(綿布)ㆍ백면포(白綿布)는 15승에서 13승까지이다. ○ 별마(別馬)는 상ㆍ중ㆍ하등으로 나누며, 종마(種馬)는 웅마(雄馬)와 자마(雌馬)의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왜(倭)와 야인(野人)의 진상하는 것은 대마(大馬)의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중마의 상ㆍ중ㆍ하로 나누며, 하마의 상ㆍ중ㆍ하로 나눈다. ○ 제주(濟州)의 자제들은 웅마의 상ㆍ중ㆍ하와 자마의 상ㆍ중ㆍ하를 진상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선상(選上) 여기(女妓) 1백 50명, 연화대(蓮花臺 나라 잔치 때 추는 춤의 한 가지) 10명, 의녀(醫女) 70명을 3년마다 여러 고을 여종 중에서 연소한 자로 뽑아 올리며, 진연(進宴 국가 경사 때에 궁중에서 열던 잔치)이 있을 때에도 52명을 뽑아 올린다. 의녀는 공부를 마친 후에는 본읍으로 돌려 보내는데 서울 안 각 관청의 여종들 중에서도 뽑는다.
【금제】분경(奔競)하는 자를 금하니, 도목 정사(都目政事 매 해 6월과 12월에, 관리들의 성적을 고과하여 승직과 강등을 결정하는 일) 시행하는 날을 정한 후에,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당상관의 집과 도목 정사 후 서경(署經 관리의 임명이 있은 다음 대간(臺諫)이 다시 인정 서명하는 일)이 있기 전에 양사(兩司 사헌부ㆍ사간원) 관원의 집에는 동성(同姓) 6촌이나 이성 4촌 및 혼가(婚家)가 아닌데 출입하는 자를 금단(禁斷)하며, 이조ㆍ병조의 여러 장수나 당상 관리(堂上官吏)ㆍ병방 승지(兵房承旨)ㆍ사헌부ㆍ사간원의 판결사(判決事)의 집에는 동성 8촌이나 이성 처가 친척 6촌과 이웃 마을의 사람이 아닌데 출입하는 자는 장(杖) 80을 쳐서 3천 리 밖으로 유배 보낸다. 잡문서를 가지고 다니는 자는 장 1백을 치며, 판매를 금지하는 물건인 활세포(濶細布)ㆍ채문석(彩紋席)ㆍ후지(厚紙)ㆍ초피(貂皮)ㆍ토초피(土貂皮)ㆍ해달피(海懶皮) 등을 몰래 파는 자는 장 1백을 치고 도형(徒刑) 3년에 처하며, 귀중한 철물(鐵物)ㆍ우마(牛馬)ㆍ금은ㆍ주옥ㆍ보석ㆍ염초(焰硝)ㆍ군기(軍器)를 파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 과장(科場)에서 과거 보는 이가 남의 손을 빌려 짓거나 대신 지어주는 자는 모두 장 1백을 치고 도형 3년에 처한다. 일설에는 과거보는 이가 과장에서 책을 가지거나 남의 손을 빌려 짓거나 대신 지어주는 자는 2회의 과거를 못 보게 한다고도 한다. 유생과 부녀자로서 절간에 올라가는 자나 여중이 되는 것도 같다. 조정 관원으로서 내어보낸 궁녀나 수사(水賜 무수리)에게 장가드는 자와 문서를 뜯어서 다시 종이를 만드는 자나 도성 안에서 야제(野祭)를 거행하는 자와 사족(士族)의 부녀자로서 산 속의 물가에서 잔치를 벌여 놀거나 친히 야제(野祭)ㆍ산천ㆍ성황사(城隍祠)ㆍ묘제(廟祭)를 거행하는 자와 과장의 이전(吏典)ㆍ복예(僕隷)로서 사실을 누설하고 연락[交通]하는 자나 이런 일을 보고서도 짐짓 단속[檢飭]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장 50대를 친다. 대소 인원(人員)으로서 홍ㆍ회ㆍ백색의 표의(表衣)와 흰 갓이나 붉은 언치를 사용하는 자거나 술그릇 외에 금은 청화 백자기(金銀靑畫白磁器)를 쓰는 자는 금하며 서인(庶人)의 남녀는 홍자의(紅紫衣)ㆍ자대(紫帶)ㆍ금은 청화 주기(金銀靑畫酒器)ㆍ비단실로 섞어 짠 옷감[交綺]ㆍ옥 마노[瑪瑙]ㆍ호박(琥珀)ㆍ명박(明珀)ㆍ청금의(靑金衣) 및 황동(黃銅)의 말안장 장식(粧飾)ㆍ삽등자(鈒鐙子)ㆍ사피(斜皮)도 함께 금한다. 그러나 수건ㆍ수파(手帕)ㆍ비뉴(轡紐) 같은 종류의 자잘한 물건들은 사라 능단(紗羅綾緞)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금하지 않으며, 혜사피(鞋絲皮)의 종류나 자잘한 장식물 같은 것은 금하지 않는다. 심염회색(深染灰色)의 옷이나 양구(兩具) 백색의 옷이거나 사족의 부녀자ㆍ아동과 서울 기생의 잡종 장식인 금은 주옥이나 정병(正兵)ㆍ서인의 백색 옷은 금하지 않는다. ○ 종친 집의 아내와 딸이나 당상관 집의 어머니ㆍ아내ㆍ딸ㆍ며느리와 음관(蔭官) 집 신부 외에, 방처럼 된 교자를 타는 자거나 사찰(寺刹) 외에 진채(眞彩)를 사용하는 자나 화석(花席)을 사용하는 자와, 주렴 칠기(朱染漆器)를 사용하는 자나 사화봉(絲花鳳) 금은노포화(金銀露布花)를 사용하는 자거나 염초를 사용하는 자와 관사(官舍) 및 당하관 이하 집에서 혼인하는 사람으로서 사라(紗羅)ㆍ능단(綾緞)ㆍ계담(罽毯)을 사용하는 자와 사족의 부녀ㆍ아동이나 서울 기생은 금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사채(私債)를 받는 자는 모두 장 60을 친다. ○ 선비로서 윤리를 문란하게[敗喪]하거나 탐장죄(貪贓罪)를 범한 자나, 사족집 부녀로서 실행(失行)한 자와 다시 세 번 시집간 자는 함께 녹안(錄案)을 만들어서 이조ㆍ병조 및 사헌부와 사간원으로 공문을 보내도록 한다. ○ 경성 안에 무격(巫覡)이 거주하는 자와 여염집에 승니(僧尼)가 유숙하는 자는 논죄(論罪)한다. ○ 이미 혼서(婚書)를 받고서 두 번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여 성혼(成婚)한 자는, 그 주혼자(主婚者)를 논죄하여 따로 살게 한다. ○ 경성 10리 안에 동쪽은 대보동(大菩洞)ㆍ수유현(水踰峴)ㆍ우이천(牛耳川)ㆍ상하벌리(上下伐里)ㆍ장위송계교(長位松溪橋)에서 중량포(中梁浦)에 이르기까지 하천으로 한계를 삼으며, 남쪽은 중량포 전관교(箭串橋)ㆍ신촌(新村)ㆍ두모포(豆毛浦)에서 용산(龍山)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으며, 북쪽은 대보동ㆍ보현봉(普賢峯)ㆍ저서현(猪噬峴)ㆍ아미현(峨嵋峴)ㆍ연서구관기(延曙舊館基)ㆍ대조리(大棗里)에서 석관현(石串峴) 서남쪽 물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산 등으로 한계를 삼으며, 서쪽은 석관현ㆍ시위동(時威洞)ㆍ사천도관(沙川渡串)ㆍ성산(城山)ㆍ망원정(望遠亭)에서 마포(麻浦)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아서 그 안에 입장(入葬)하는 자는 원릉(園陵)의 수목을 도벌(盜伐)한 형률과 같이 논죄하며, 강제로 시일을 정하여 파 옮기고 능침(陵寢)의 화소(火巢 불의 연소를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불을 놓아 경계를 삼게 한 곳)나 외안 금표(外案禁標) 안에 투장(偸葬)한 자는 사형을 감하여 정배한다. ○ 빈 대궐의 소나무를 몰래 찍은 자는 연한 없이 변방 먼 곳에 정배한다. ○ 경성 10리 안에 소나무를 찍는 죄를 범한 자는 형률에 의하여 죄를 정하며 사산금표(四山禁標) 안에서 나무 뿌리나 잔디 뿌리를 채취한 자나 토석(土石)을 채취한 자는 모두 산 소나무를 벤 준례에 의하여 논죄하며, 함부로 밭갈이한 자는 궁(宮)이나 민가의 언덕을 강제로 차지한 자와 같이 논죄한다. 신무문(神武門) 밖과 면악(面岳) 아래의 흙 파는 곳을 조사[擲奸]하여 엄금한다. ○ 마소의 밀도살 죄를 범하는 자나 경성 안에서 서민이 말을 타는 자는 금하되, 삼의사(三醫司)나 역관(譯官)ㆍ일관(日官)ㆍ사자관(寫字官)ㆍ산원(算員)ㆍ화원(畫員) 등 잡과 출신의 사람 및 아전(衙前)은 금하지 않으며, 녹사와 금군도 금하지 않는다. 성 안에서 구치(驅馳 거마를 빨리 몰고 다니는 일)하는 자는 병조(兵曹)로 잡아다가 곤장을 친다. 잡귀신에 제사지내는 자와 경성 내외의 대소 음사(淫祀)나, 성 밖 10리에서 모여 술마시는 자거나 3인 이상이 안주와 술을 준비하여 가지고 모여 마시는 자는, 맡아 차린 자만을 치죄(治罪)하되, 금군(禁軍)인 경우에는 금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술주정하는 사람이나 승니(僧尼)로서 함부로 도성 안에 들어오는 자나 처녀[童女]로서 여중이 되는 자는 치죄(治罪)하여 환속(還俗)하게 하되, 모두 금단(禁斷)한다. ○ 위로 궁궐 안에서부터 아래로 여염집에 이르기까지 장복(章服 관대를 갖춘 의복)이나 융복(戎服 군복) 외에는 토산(土産 국산)이 아니면 입지 못하는데, 금군이나 호위군관(扈衛軍官)이나 의녀(醫女)와 침선비(針線婢)는 지나친 의복을 금하지 않으며. 사족집 부녀들의 의복은 모두 그 남편의 작품(爵品)에 따라서 하게 한다. 겉에 대단금(大緞錦)을 사용하거나, 수봉차(繡鳳釵)ㆍ금옥차(金玉釵)ㆍ주전가환(珠鈿假鬟)을 사용하는 자는 신부에 한하여서만 금하지 않으며, 사단(紗緞)ㆍ능주(綾紬)는 물론하고 무엇이나 무늬 있는 것은 일체 엄금하는데, 범한 자는 시민(市民)도 모두 같은 형률로 시행한다. 역관이나 장사치는 의주[灣府]에서부터 먼저 목베어 매단 후에 장계하여 알리며, 물건은 목책(木柵) 밖에서 불태운다. ○ 당하관의 말안장에 은실로 새겨 장식한 자나 당하관으로서 교자를 탄 자는 남기률(濫騎律)로 처벌하며, 중관(中官 내시부의 관원들)으로서 교자를 탄 자는 그 관품의 당상ㆍ당하를 막론하고 당하승교(堂下乘轎)의 준례에 의하여 처벌한다. 국상(國喪) 때 풍악치고 기생 데리고 노는 자나 국기정일(國忌正日) 및 치재일(致齋日)에 풍악을 울리는 자를 모두 엄금하고 죄를 다스린다. ○ 시중 가격을 농간질하여 올리는 자와 두승(斗升)을 정한 규격대로 만들지 않는 자나 나무공이로 찧은 나쁜 쌀을 외상(外上)이라고 하며, 억지로 전(廛)보는 사람들에게 파는 자는 평시서(平市署)에서 주관하되, 시정이나 마을의 범금인(犯禁人)을 본서에서 물건을 거두어 놓아주지 말고 형조에 보고하여 죄를 주게 하며, 도고 계방(都庫契房 도매 가게)인 자는 형장을 쳐서 정배한다. 전안(廛案 시전 명부)에 매어 있지 않고 난전(亂廛 노점)을 보는 자는 경조(京兆)에서 주관한다. ○ 여러 군문(軍門)에 속한 군병들의 제조 물품은 난전에 관한 처벌로 시행하지 않는다. ○ 호위청(扈衛廳)에 소속된 난전은 법사(法司 형조와 한성부)에서 바로 처벌을 시행한다. ○ 점포를 잠그고 철시(撤市)하는 자는 그 주모자는 형장을 쳐서 정배하고 모두 금단(禁斷)한다. ○ 삼법사(三法司)인 형조ㆍ사헌부ㆍ한성부에서는 관원이 집에서 금단하지 못하며, 또 어두운 밤에 금단하지 못하며 경성 금표(禁標) 밖에 대하여 금단하지 못하며 난전과 같은 금지 조례 외에는 다른 금지 조례를 지어 내지 못한다. 시각을 생각해서 정하여 넘는 일이 없게 하며 먼저 금지 조례로 거듭 엄중히 당부하여 알려 준 후에 금단하는데 매달 6차례씩 한다. 사시 명절에는 모두 금령중 장 1백을 치는 것은 늦추어준다. 법사의 목패(木牌) 외에 추가로 지패(紙牌)를 내는 일은 일체 엄금하며 감찰이 출패하는 일도 일체 금단한다. ○ 여염집을 빼앗아 드는 자는 도형(徒刑)으로 3년 정배한다. ○ 자기가 제 몸을 판 자도 아내를 판 형률과 같이하며 산 자도 같은 죄로 본다. ○ 화랑 유녀(花郞遊女) 및 무녀(巫女)로서 경성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적발하여 논죄(論罪)한다. ○ 여자 복색으로 변장하고 남의 집에 출입하는 자는 장(杖) 1백을 쳐서 섬에 정배한다. ○ 집을 헐어버리고 시골로 가는 자를 일체 엄단한다. ○ 각 관청의 관원 및 하인들이 면신(免新)ㆍ벌례(罰禮)ㆍ허참(許參) 등의 일로 재물을 거두는 자는 관리가 재물을 받았으되, 법률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받은 재물을 계산하여 논죄하며, 여러 군문의 장교 및 군교(軍校)가 면신례(免新禮)라 하며 거두어들이는 자는 중한 죄목에 의하여 곤장을 친다. ○ 능원(陵園) 묘소의 나무를 찍었는데도 적발하지 못하면 범인이나 능관(陵官)을 경중을 구분하여 논죄한다.
금화(禁火) 병조ㆍ의금부ㆍ형조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와 5부(部)의 당직 숙직하는 관원들이 순행하면서 금화한다. 궁궐 안에 화재가 나면 큰 종을 치든가 대신 호각[螺]을 부는데 궁궐에 있는 자는 뛰어가서 구원하되, 장병[將卒]은 당직 장소를 떠나지 않으며, 번에 나간 장병들은 각기 본위(本衛)에, 여러 관청의 관원들은 각각 그 조방(朝房)에 모이며 여러 관청의 인원과 공장(工匠)들과 5부 방리의 사람들과 번에 나간 별감과 각 차비인(差備人)들은 모두 궐문 밖으로 가서 대령한다. ○ 여러 관청을 모두 5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구화패(救火牌)를 주는데, 그 부 안에서 불이 나면, 병조ㆍ형조ㆍ한성부ㆍ의금부ㆍ금화사의 관원들이 부속(部屬)의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구원한다. ○ 의금부에서는 망화인 나장(望火人羅將)을 정하며, 사복시(司僕寺)ㆍ군기시(軍器寺)의 종은 항상 종루에 올라가서 망을 보다가 이궁(離宮)이나 관청에서 불이 나면 종을 치며 사가(私家)가 연소(延燒)되어도 종을 친다. ○ 바람이 어지럽게 불면 금화사에서 방리(坊里) 각 호에 목탁을 흔들면서 순찰 경계한다. ○ 금화하는 공사 각처에는 모두 저수하는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방목토가(防木土架)와 구화기계(救火器械)를 준비하여 둔다. ○ 궁성과 궁장(宮墻)에서 사면으로 백 자 안에는 인가를 짓지 못하게 하며 창고는 30자로 한정한다. ○ 모든 조문의 금령은 경조ㆍ한성부 이외의 제읍(諸邑)에도 방을 붙여서 널리 알린다.
【요역좌경】종사 묘궁(宗社廟宮) 등 중요한 여러 곳 및 궁방(宮房)이나 전곡(錢穀) 있는 곳과 관청[衙門]이나 큰 거리 복처(伏處 순라군이 지키는 곳)에 좌경군(坐更軍 밤에 파수 서는 군사)이 두 명씩 있는데, 하나는 인가에서 나와 지키며 차례로 돌아가며 수직한다. 대군ㆍ왕자ㆍ공주ㆍ옹주ㆍ대신ㆍ국구(國舅) 및 맹인(盲人)ㆍ독녀로서 장정 없는 자 외에는, 종실 신하의 정1품이라 하더라도 경재(卿宰 재상)의 보국(輔國)ㆍ판서 이하는 모두 부역으로 나온다. 중부에 15처, 동부에 7처, 서부에 26처, 남부에 36처, 북부에 17처이다. 조강가(糟糠價) 중부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거두는 전생서(典牲署) 가축[牲口]의 먹는 조강이 18석인데, 숙종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1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4냥(兩) 2전(錢) 7푼[分]이니 매석의 값이 5전이다. 동부에서 거두는 예전 사축서(司畜署) 양과 염소가 먹는 조강은 돈으로 6냥이다. 남부에서 거두는 전생서의 조강은 25석인데 무인년에 감하여 14석 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7냥 7푼이다. 서부에서 거두는 전생서의 조강은 56석인데 무인년에 감하여 18석 1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9냥 3전 2푼이다. 북부에서 거두는 예전 사축서의 조강은 돈으로 대납하면 3냥 3전 3푼이다.
【영선】궁궐은 전연사(典涓司)에서, 공해(公廨 관청 청사)는 각각 그 관청 관원들이 나누어 맡아 간수(看守)하는데, 비가 새거나 헐린 곳이 있으면 공조(工曹)에 보고하여 수리하며, 매해 봄과 가을에 공조에서 순찰하여 그 상황을 위에 아뢴다.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은 공조의 당하관 각 2명이 나누어 맡아 검찰(檢察)하며 건물ㆍ잡물 등에 대한 문서를 교체할 때에 인계 인수한다. ○ 대궐 안 건물로 관청이 된 곳은 그 관청의 관리가 군사들의 입직(入直)하는 곳과 체번(遞番)하는 날을 간수하며, 전연사(典涓司)의 관원과 그 부장(部將)이 간심(看審)하며, 만일 파손 훼상하였다든가 유실한 물건이 있으면 공문을 형조로 보내어 심문 조사해서 징수하게 한다. ○ 도성 각 문과 각처 군영(軍營) 경수소(警守所)는 소재지 부(部)의 관리가 인근 거주민들의 간수(看守)를 정한 문서를 교체할 때에 인계 인수하는데, 파손ㆍ훼상 또는 유실한 물건이 있으면 숙직(宿直)한 군사들에게 나누어 받아내며, 간수인은 군사들이 체번하는 날에 번갈아 서로 간심하여 주고받게 한다.
자문감(紫門監)의 9영선(營繕)이 궐내ㆍ궐외 각처의 수리하는 일을 나누어 맡아 한다 시어소(時御所)와 각 전(殿)과 각 당(堂) 안의 각 관청 청사의 수보(修補)와 차비문(差備門) 안의 각종 기구의 제조와 내빙고(內氷庫)의 공상(供上)을 맡아 한다. ○ 9영선은 지금 5소장(所掌)으로 되었다. 1소장은 종묘ㆍ육상궁(毓祥宮)ㆍ연우궁(延祐宮)ㆍ장생전(長生殿)ㆍ독소(纛所)ㆍ종친부(宗親府)ㆍ중학ㆍ돈녕부 조방(敦寧府朝房)ㆍ의빈부(儀賓府)ㆍ홍문관 조방(弘文館朝房)ㆍ정업원(淨業院)ㆍ선잠단(先蠶壇)ㆍ첨성대(瞻星臺)ㆍ목멱당(木覓堂)ㆍ마조단(馬祖壇)ㆍ하순청(下巡廳)이며, 2소장은 사직ㆍ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ㆍ광명전 시어소ㆍ요령막(搖鈴幕)ㆍ경복궁ㆍ기로소(耆老所)ㆍ의정부 조방ㆍ돈녕부(敦寧府)ㆍ이조ㆍ동학ㆍ유하정(流霞亭)ㆍ종각ㆍ선농단(先農壇)ㆍ양정재(養正齋)ㆍ하함춘원(下含春苑)ㆍ좌순청(左巡廳)이며, 3소장은 영희전(永禧殿)ㆍ저경궁(儲慶宮)ㆍ선원록청(璿源錄廳)ㆍ대빈궁(大嬪宮)ㆍ남별궁ㆍ봉상시(奉常寺)ㆍ신당(神堂)ㆍ북단(北壇)ㆍ여단(厲壇)ㆍ내자시(內資寺)ㆍ권초각(捲草閣)ㆍ상함춘원(上含春苑)ㆍ중추부(中樞府)ㆍ예조ㆍ서학ㆍ내섬시(內贍寺)ㆍ우모가가(牛毛假家)ㆍ상하당직(上下當直)이며, 4소장은 경모궁(景慕宮)ㆍ경우궁(景祐宮)ㆍ동관왕묘ㆍ경희궁ㆍ12별당ㆍ어의본궁(於義本宮)ㆍ의금부ㆍ의정부 반열조방(議政府班列朝房)ㆍ사간원 조방ㆍ모화관(慕華館)ㆍ남학ㆍ상림원(上林苑)ㆍ승문원(承文院)ㆍ우사단(雩祀壇)ㆍ한강단(漢江壇)이며, 5소장은 성균관ㆍ창의궁(彰義宮)ㆍ융례전(隆禮殿)ㆍ문희묘(文禧廟)ㆍ남관왕묘ㆍ전계대원군궁(全溪大院君宮)ㆍ선무사(宣武祠)ㆍ연서비각(延曙碑閣)ㆍ차동비각(車洞碑閣)ㆍ남단(南壇)ㆍ사한단(司寒壇)ㆍ의정부 중추부 조방ㆍ사헌부ㆍ내각 조방(內閣朝房)ㆍ방마원(放馬苑)ㆍ전생서(典牲署)이다. ○ 무릇 영선하는 곳은 맡은 관원이 본사(本司)의 관원과 함께 나가 검거(檢擧)한다. ○ 궁장(宮墻)은 도성의 준례에 따라 3군문에 나뉘어 속하여 허물어진 곳을 돌로 쌓는다.
【형세】 삼각산이 진산(鎭山)이 되었는데 낙산(駱山)이 왼쪽에 높이 솟고, 모악(母岳)이 오른쪽에 자리잡았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 읍하고 한강[漢水]이 그 앞에 흐른다. ○ 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고, 동쪽은 동해[桑暾]에 접하였다. 천지(天池)가 남호(南戶)에 미쳤고 말갈(靺鞨)이 북문이 되었다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있다. ○ 북쪽으로 화산(華山 삼각산)을 의지하여 자리잡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는데 토지가 평탄하고 넓으며 백성이 많고 부유하여 번화하다 《고려사(高麗史)》에 있다.
【산천】한성부의 낭관이 사산(四山)을 나누어 맡아 긴관 금기처(緊關禁忌處)를 검거(檢擧)하며, 성 안의 전수 및 성 밖의 현무(玄武 북방) 주산(主山)에 표(標)를 세운다. 동지긴관(東指緊關)의 외청룡(外靑龍)인 석가호(釋迦岵) 안 사을한(沙乙閑) 남쪽 가에서부터 적유현(狄踰峴)을 지나 광평대군(廣平大君) 집 북호(北岵) 선잠제단(先蠶祭壇)에 이르기까지 선제원(善濟院) 서쪽 건너편 가에서 안암동(安岩洞)ㆍ저방동(猪房洞)ㆍ동대문에 이르기까지에는 모두 산 등 안팎에, 서지긴관(西指緊關)의 외백호(外白虎)인 모화관(慕華館) 뒤에서 사현(沙峴) 사축서호(司畜署岵)를 지나 청파(靑坡) 뒤에 이르기까지에는 산 등 내면(內面)에, 주작(朱雀 남방) 안산(案山)인 남산의 외면과 남대문 성 밖에서부터 전생서(典牲署) 뒤를 지나 벌아현(伐兒峴)에 이르고, 동쪽으로 두모포(豆毛浦) 후산(後山)ㆍ왕십리(往十里) 후산으로 나가고 돌아서 수구(水口)에 이르기까지는 산 등 내외면에 모두 표를 세운다.
삼각산(三角山) 도성 북쪽 30리 양주(楊州) 땅에 있는데 일명은 화산(華山)이요,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연이어진 봉우리와 첩첩한 묏부리가 잇따라 뻗어와서 서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러 서남쪽에서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북산(北山)이 되니, 사실 경성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니 곧 이 북산이다. 백운(白雲)ㆍ만경(萬景)을 국망(國望)이라고도 하고, 인수(仁壽)의 세 봉우리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바로할 때에, 세조 및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다른 유신(儒臣)들을 시켜서 이 산의 보현봉(普賢峯)에 올라가 해의 출입하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고 그 아래가 한량없이 깊으니 안평대군 이하는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지만, 세조는 걸어가기를 나는 듯이 하며,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오니, 보는 이들이 절찬 탄복하면서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만경봉이 동쪽으로 굽어 돌아서 석가(釋迦)ㆍ보현ㆍ문수(文殊)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되었는데, 보현봉의 갈라진 산기슭이 곧 도성의 주맥(主脈)이기 때문에 총융청(摠戎廳)에서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주관하여 보축(補築)하였다. 문수봉의 동쪽 가지가 형제의 두봉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구준봉(狗蹲峯)ㆍ백악산(白岳山)이 되며, 문수봉의 서쪽 가지가 칠성봉(七星峯)이 되고, 거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떨어져서 나한(羅漢)ㆍ증봉(甑峯)ㆍ혈망(穴望)ㆍ의상(義相)의 여러 봉이 되어 중흥 수구(重興水口)에 이르며,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서 승가사(僧伽寺)의 비봉(碑峯)과 불암 향림사(佛巖香林寺)의 후봉인 백운봉(白雲峯)이 되며, 서쪽으로 돌아서는 영취(靈鷲)ㆍ원효(元曉)의 두 봉이 되어 중흥 수구에 와서 멈춘다. ○ 우리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일찍이 이 산에 올라 시를 짓기를, “손 내밀어 덩굴 붙들며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한 암자 높게도 백운 중에 누워 있네, 눈앞의 보이는 곳 다 우리 땅이라면, 오월(吳越) 강남(江南)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리.” 하니, 그 넓은 마음 큰 도량을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이 있다. ○ 고려 정종(靖宗) 원년에 적석정(積石頂)에 운석(隕石)이 있었다. 예종(睿宗) 원년에 이 산의 부아봉(負兒峯)이 무너졌으며 2년에도 무너졌다. 희종(熙宗) 6년에 산의 중봉(中峯)이 무너졌으며, 공민왕(恭愍王) 23년에도 중봉이 무너졌다. 신우(辛禑) 원년 6월에 크게 비가 와서 국망봉이 무너졌으며, 우리 조정 선조 30년에 산중에서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 기우제(祈雨祭)에는 초차(初次)에 당상 3품관이, 6차에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에는 근시관이 드린다.
백악(白嶽) 경복궁성 북쪽에 있는데 도성(都城)이 그 위로 지난다.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한다.
응봉(鷹峯) 백악 동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로 지난다. 봉 아래 후원주맥(後苑主脈) 보토처(補土處)에는 매해 봄가을로 병조ㆍ공조ㆍ한성부의 당랑관(堂郞官)이 어영대장과 더불어 간심(看審)한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하니 명(明) 나라 사신이 고쳐 이름지은 것이다. ○ 영천(靈泉)이 산허리 바위 아래에서 나는데 돌 짬에서 솟아나며 맛이 달고 맵지 않고 또 매우 차지도 않다. ○ 현종(顯宗) 임자년에 성매죽(成梅竹 삼문)의 신주를 인왕산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얻었는데, 분칠한 쪽에는 성삼문 신주(成三問神主) 다섯 자만을 썼으며 움푹한 곳에는 무술생 외손 박호(戊戌生外孫朴壕) 일곱 자가 쓰여져 있었다. 봄에 홍주(洪州)에 있는 공의 구기(舊基)로 보내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타락산(酡酪山) 도성(都城) 안 동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로 지난다. 응봉(鷹峯) 동쪽에서 뻗어 돌아 이 산이 되었는데 동쪽으로 안암(安巖)ㆍ고암(鼓巖)에 이른다.
목멱산(木覓山) 곧 도성의 남산이며 열경산(列慶山)이라고도 하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인왕산에서부터 낮게 평평해지며 남쪽으로 뻗어 오다가 동쪽으로 휘어지며 솟아올라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동쪽에서 대소(大小)ㆍ설마(雪馬)의 두 고개가 되고, 왕십리현(往十里峴)ㆍ동현(東峴)에 이른다. ○ 본조 개국 초기에 동요(童謠)가 있어 이르기를, “저 남산(南山)에 가서 돌을 떼내는데 정(釘) 남은 것 없다.” 하더니, 얼마 안가서 남은(南誾)ㆍ정도전(鄭道傳)이 사변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다. 남(南)은 남은을 말함이요, 정(釘)은 정(鄭)과 음이 같으니 도전(道傳)을 말한 것이며, 여(餘) 자의 해석이 남은의 음과 서로 같으니 남(南)ㆍ정(鄭)이 모두 없어진다는 말인 것이다. ○ 기우제(祈雨祭)의 초차(初次)는 당하 3품관이, 6차는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는 근시관이 드린다.
선암(禪巖)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한양 도성(漢陽都城)을 쌓을 때에 바위가 중이 장삼 입은 모양 같은 것이 인왕산 모퉁이에 서있어 선암(禪巖)이라 불렀다.” 한다. 무학(無學)은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하고 정도전은 성 밖으로 내 보내려 하였는데, 태조가 그 이유를 물었다. 도전이 아뢰기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면 불교(佛敎)가 성하고 성 밖으로 내보내면 유교가 흥합니다.” 하니, 명하여 도전의 말을 좇게 하였는데, 무학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후로는 중들이 선비의 책보를 지고 따르게 되었다.” 하였다.
비봉(碑峯) 《택리지(擇里志)》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가 도읍터를 정할 때에 무학이 백운대(白雲臺)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萬景臺)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러 보니, 한 비석에 크게 ‘무학왕심도차(無學枉尋到此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른다)’라는 여섯 글자가 있으니, 이것은 곧 도선(道詵)이 세운 것이다.” 하였다.
모악(母嶽) 도성 서쪽에 있는데, 안현(鞍峴)이라 하기도 하고 기봉(岐峯)이라 하기도 한다. ○ 인왕산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 추모현(追慕峴)이 되고,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남쪽으로 나가 약현(藥峴)ㆍ만리현(萬里峴)이 되고, 용산(龍山)에 이르러, 한 기슭이 서남쪽에서 계당치(鷄堂峙)가 되고, 와우산(臥牛山)에 이르러 잠두봉(蠶豆峯)이 된다. ○ 지봉(芝峯 이수광)이 말하기를, “민간에서들 이르기를, ‘부아암(負兒巖)이 집을 나가는[出世]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이 산을 모악(母岳)이라 이름하였으며, 남쪽을 벌아령(伐兒嶺)이라 하니 대개 막으려 하다가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아라 한 것이다.’ 하였는데, 서쪽을 병시현(餠市峴)이라고 하니 이것은 나가려는 아이를 떡을 주어 달래어 멈추려 한 것이다. 옛날 이름지은 것이 모두 깊은 뜻이 있다.” 하였다. ○ 인조 갑자년 2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도성을 차지하였는데, 도원수 장만(張晩)과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방어사 정충신(鄭忠信) 등이 안현(鞍峴)에 진을 치고 힘써 싸워 적을 물리쳤다.
추모현(追慕峴)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는데 본래 이름은 사현(沙峴)이다. 영종(英宗) 45년에 명릉(明陵)에 역사가 있으니 왕이 친히 이 고개에 와서 바라보고, 명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녹반현(綠礬峴) 추모현 북쪽에 있다. 석벽(石壁)에서 자연동(自然銅)이 나는데, 뼈 부러진 이들이 많이 캐어다 사용한다. ○ 당 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일만 사람이 이기지 못할 곳이다.” 하였다.
동망봉(東望峯)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영종 47년에 어필로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 불우(佛宇) 정업원조(淨業院條)에 자세하다.
계당치(鷄堂峙) 서부(西部)의 기봉(岐峯) 서쪽 기슭에 있다.
와우산(臥牛山) 도성 밖 서쪽 13리에 있는데, 산 남쪽에 광흥창(廣興倉)이 있다.
용산(龍山) 도성 밖 서남쪽 10리에 있는데, 군자감(軍資監)과 훈국(訓局)의 별영(別營)이 있다. ○ 위의 두 산은 모두 한강 가에 있다.
잠두봉(蠶頭峯) 도성 밖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민간에서 가을두(加乙頭)라고 부르며, 또 용두봉(龍頭峯)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 강희맹(姜希孟)이 서술한 기문이 있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있는 것을 대설마(大雪馬)라 하고, 동쪽에 있는 것을 소설마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부어현(夫於峴)이라고 부른다.
가산(假山) 도성 수구 안, 훈련원(訓練院)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물[水] 남쪽에 있고 하나는 물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들어서 지기(地氣)를 기르는 것이다. 영종 경진년에 버들을 양쪽 언덕에 심어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는데, 지금은 식목소(植木所)라고 하며 어영청(御營廳)이 관할한다. 경모궁(景慕宮) 안산(案山) 및 관현(館峴)과 흥인산(興仁山) 내외의 3곳에 각각 장졸을 배정하여 수호 금양(守護禁養)하는데, 경모궁 패장(牌將)으로 오래 벼슬한 사람이 전임(轉任)한다.
개천(開川) 제소남(齊召南 청(淸) 나라 사람)의 《수도제강(水道提綱 천하의 수도를 총론하였음)》에 이르기를, “왕경(王京) 한양은 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는데, 동(東) 12도 6분에 극(極) 37도 5분이며, 서쪽으로 강화도(江華道)에 이르는데, 동 9도에 극 37도 4분이다.” 하였다. ○ 백악(白岳)ㆍ인왕ㆍ목멱(木覓)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도성(都城) 안을 가로 질러서 3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 수원(水源)이 인왕산 백운동(白雲洞)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자수궁교(慈壽宮橋)를 지나서 옥류동(玉流洞) 누각동수(樓閣洞水) 수원이 인왕산 동쪽에서 나와 모여 남쪽으로 흘러 창의궁(彰義宮) 서쪽에 있는 금청교(禁淸橋)와 사직동(社稷洞)에 있는 종침교(琮琛橋)를 지난다. 오른쪽으로 큰 물이 지나 작은 물과 합하는 것을 ‘과(過)’라 하며, 후에도 이와 같다. 수원이 사직 남쪽 경희궁(慶熙宮) 북쪽에서 나오는 승전색교(承傳色橋)를 지나 적선방(積善坊)에 있는 송기교(松杞橋)에 이르며, 오른쪽으로 수원이 대은암(大隱巖)에서 나와서 경복궁 서쪽으로 들어가 경령지(慶令池)의 물을 합하고, 금청교(禁淸橋) 동남쪽을 지나고, 남금교(南禁僑)를 경유하는 북어수교(北御水橋)를 지나서 꺾여 삼청동(三淸洞) 물 수원이 사동(寺洞)ㆍ수침동(水砧洞) 두 곳에서 나와서 백련봉(白蓮峯) 남쪽에 이르러 합류하며, 장원서(掌苑署) 앞 장생전(長生殿) 다리와 관광방(觀光坊)에 있는 십자각(十字閣) 앞 다리를 지나서 경복궁성 안 동쪽 가의 물과 합하여 중학 앞에 있는 중학교(中學橋)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 혜정교(惠政橋)를 지나는데, 민간에서 말하기를, “관으로 재물 많이 탐한 자를 이 다리 위에서 삶는다.” 한다. 운종가 남교(雲從街南橋)는 민간에서 모전교(毛廛橋)라고 하는데 서린방(瑞麟坊)에 있다. 대광통교(大廣通橋)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곡교(曲橋)의 물을 지난다. 하나는 목멱산(木覓山) 아래 북창동(北倉洞)에서 나와서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는 수각교(水閣橋)ㆍ황화방(皇華坊)에 있는 전도감교(錢都監橋)ㆍ미장동 동교(美墻洞東橋)를 지나서 동쪽으로 흐른다. 하나는 정릉동(貞陵洞)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군기시(軍器寺) 다리가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수각교 물과 합하여 소광통교(小廣通橋)가 되어 온다. 하나는 회현동(會賢洞)에서 나와서 동현동(銅峴洞)을 지나 소광통교의 물과 합하여, 태평방(太平坊)에 있는 곡교(曲橋)가 된다. 하나는 명례동(明禮洞)에서 나와서 곡교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장통교(長通橋)가 되니, 송기교(松杞橋)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7백 68척, 넓이가 10여 보(步)이며, 훈련도감(訓鍊都監) 관내가 된다. 왼쪽으로 수원이 대소안국동(大小安國洞)에서 나오는 통운교(通雲橋)를 지나고, 수표교(水標橋)ㆍ하량교(河良橋)를 지나며,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木覓山) 북쪽에서 나와서 주자동(鑄字洞) 다리를 경유하여 오는 초전동(草廛洞)을 지나고, 또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중부동 다리를 경유하여 오는 중부동(中部洞)을 지나서 영풍교(永豐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왼쪽으로 이교(二橋) 물을 지난다. 하나는 응봉(鷹峯) 동쪽에서 나와서 북영(北營) 요금문(曜金門) 곁의 수구(水口)를 경유하여 창덕궁 금청교(禁淸橋)로 들어갔다가, 단봉문(丹鳳門) 곁의 수구로 나와서 창경궁 후원으로 들어가며, 금청교의 선인문(宣仁門) 밖 수구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연화방(蓮花坊)에 있는 황참의교(黃參議橋)를 경유하여 와서 단봉문 수구의 물과 합한다.
하나는 회동(灰洞)ㆍ제생동(濟生洞)에서 나와서 향교동(鄕校洞)을 경유하여 돈화문(敦化門) 밖 병문(屛門)에 있는 기자교(杞子橋)가 되고, 대묘동(大廟洞)에 이르러 단봉문(丹鳳門) 수구물과 합하여 함께 이교(二橋)로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청녕교(靑寧橋) 물의 근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南別營)을 경유하여 명철방(明哲坊)에 있는 무침(無沈)ㆍ청녕(靑寧)의 두 다리를 지나와서 태평교(太平橋)가 되는데, 민간에서들 마전교(馬廛橋)라고 하며 영종조에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장통교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1천 1백 81보, 넓이가 20여 보이며, 금위영 관내이다. 다시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쌍리문동(雙里門洞)을 경유하는 청교(靑橋)를 지나서 명철방(明哲坊)에 있는 어청교(於靑橋)를 지나며, 또 동쪽으로 흐르는 초교(初橋) 물은 수원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나오는데, 동반수(東泮水)는 성균관 앞 다리와 식당교(食堂橋)와 비각교(碑閣橋)를 경유하고, 서반수(西泮水)는 집춘문(集春門) 앞 다리를 경유하여 대성전(大成殿) 남문 밖에서 합하며, 남쪽으로 흘러서 관기교(觀旗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충락교(忠樂橋)가 되며, 광례교(廣禮橋)에 이르러 흥덕동(興德洞) 물과 합하고, 또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 응란교(凝鸞橋) 물을 지나서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 장경교(長慶橋)가 되고,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 앞을 지나고 신교(新橋)를 지나와서 오칸 수문(五間水門)으로 들어간다. 성 밖에 나가서는 수원이 남소문동(南小門洞) 남쪽 가에서 나오는 이칸 수문(二間水門) 물을 지나서 영도교(永渡橋)를 거치는데, 태평교(太平橋)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1천 1백 73보, 넓이가 30여 보이고, 장경교(長慶橋)에서 큰 개천 골목에 이르기까지는 길이가 1천 4백 7보, 넓이가 10여 보이며, 모두 어영청(御營廳) 관내에 속한다. 차현(車峴) 동쪽에서 수원이 양주(楊州) 불곡산(佛谷山) 및 벽석현(碧石峴)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녹양역(綠楊驛)ㆍ송계교(松溪橋)로 흘러서 남쪽으로 와서 모이는 중량포(中梁浦)와 모이며, 남쪽으로 흘러 전관교(箭串橋)를 지나고, 서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 영종 경진년에 오래도록 쳐내지 않았으므로 개천 길이 막혀서 모래가 덮이고 다리가 묻혀, 장마 때가 되기만 하면 그만 넘쳐흐르게 되니 백성을 모집하여 개천을 쳐내게 하였다. 그리고 완공된 다음에는 준천사(濬川司)를 수표교 북쪽 냇가에 설치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고 얽어매어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계사년에는 고쳐서 돌로 쌓았다.
한강(漢江)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목멱산 남쪽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고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祀)로 적혀 있으며,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오대산 우통(五臺山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廣州)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 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豆毛浦 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며, 시흥현(始興縣)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陽川縣)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交河郡)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부(通津府)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여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찰하였는데, 후에 별장(別將)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字內]는 광주의 압구정(押鷗亭)과 두모포, 독도(纛島 뚝섬)의 몽뢰정(夢賚亭), 한강의 서빙고(西氷庫)이다. ○ 속한 선박은 훈국(訓局)의 배 10척이 있는데 관방조(關防條)에도 보인다. ○ 명(明) 나라 예겸(倪謙)ㆍ기순(祈順)의 기문(記文)이 있다. ○ 선조 21년에 강물이 5ㆍ6일간 핏빛 같았다. ○ 기우제에 초차(初次)는 당하 3품관이, 6차는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는데 호두(虎頭)를 물 속에 넣으며, 기설제(祈雪祭) 재차는 근시관이 드린다.
노량(露梁 노들)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 처음에는 도승을 배치하여 출입하는 사람을 기찰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과천(果川)의 신촌리(新村里)ㆍ사촌리(沙村里)ㆍ곽계(槨契)ㆍ형제정계(兄弟井契)ㆍ마포강(麻浦江)이다. ○ 속한 선박은 금위영(禁衛營)의 배 10척인데 관방조에도 보인다. ○ 강 북쪽 모래사장에 용호영(龍虎營) 및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3영의 습진(習陣)하는 곳이 있다. ○ 선조 36년에 큰 돌이 물 속에서 언덕 가의 다른 돌 위에 일어섰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고양군(高陽郡) 부원현(富原縣) 땅이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의 조운(漕運)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서강(西江)의 한 갈래가 바로 시흥현(始興縣)에서부터 방학동(放鶴洞)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서 양화도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니, 이것이 용산포(龍山浦)이다. ○ 예전에는 10리 장호(長湖)가 되었는데 서쪽으로 염창(鹽倉)이 막히고 모래 언덕이 새지 않으며, 연이 그 가운데에 나서 이름을 용산(蓉山)이라고 하였다. ○ 기우제(祈雨祭)에 재차는 종2품관이, 7차는 정2품관이 드린다.
삼전도(三田渡) 광주 지경에 있는데 도성에서 30리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으며 속한 관청은 어영청(御營廳)이요, 녹안(錄案)에는 관선(官船)이 3척이다. ○ 삼전도와 신포(新浦) 사이에 상전(桑田)이 있다.
마포(麻浦) 도성 서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용산강 하류이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마포에서 여기까지를 통틀어 서호(西湖)라고 한다. 황해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토정리(土亭里)ㆍ옹리 상하계(甕里上下契)ㆍ현석리(玄石里)ㆍ율도(栗島)ㆍ다인리(多人里)ㆍ하중리(下中里)ㆍ합정리(合井里)ㆍ수파리(水波里)ㆍ망원정 일이계(望遠亭一二契)ㆍ시흥 신정리(始興新井里)이다. ○ 호조(戶曹)의 점검청(點檢廳)이 있다. ○ 선조 24년에 물이 얕아져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고, 인조 14년에 또 물이 얕아져서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다. 속한 선박은 어영청(御營廳)의 배 10척인데 관방조에도 보인다.
독도(纛島) 혹은 독백(禿白)이라고 하는데 두모포의 상류이다. ○ 강변에 예전에는 호조(戶曹)의 수세소(收稅所)가 있었다. 효종 병신년에 설치하였는데 무릇 각종 목물(木物)이 물 상류에서 내려오는 것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10분의 1의 세를 받았다.
저자도(楮子島) 도성 동쪽 25리,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다.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여기에 별장을 두었는데, 우리 조정의 세종(世宗)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의 아들 안빈(安貧) 이후로 대대로 전하여 소유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이 있다. ○ 기우제에 초차는 종2품관이, 7차는 정2품관이 드린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동호(東湖)라고 한다. 명종(明宗) 을축년에 두모포 어부가 한 마리 흰 고기를 얻으니 그 크기가 배[船] 같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고기가 바다에서 멀리 와서 강에 이르러 죽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의 형(衡)자가 행(行) 자와 어(魚) 자로 되었으므로 고기가 죽은 것은 곧 원형이 죽을 징조였다.” 하였다.
입석포(立石浦) 두모포 상류에 있다.
신포(新浦) 광주 지경에 있으며, 도성에서 거리가 27리이다. 한강 물이 넘쳐서 기류(岐流)가 되었는데, 그 정파(正派)가 기류로 옮겨져서 신포(新浦)라고 한다. 가물면 그대로 건너고, 물이 넘치면 두 강이 되며, 저자도(楮子島) 아래에 이르러서는 합하여 하나가 된다.
중종조(中宗朝)에 그 물 형세가 바로 선릉(宣陵)에 부딪히므로, 군사들을 출동시켜 돌을 운반하여 언덕이 무너져 들어간 곳을 막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도요연(桃夭淵) 전관교(箭串橋)에 있다.
만초천(蔓草川) 수원이 경성 서쪽 모악(母岳)에서 나와서 성을 돌며 남쪽으로 흐르는데,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혁교(革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 경영교(京營橋), 소의문(昭義門) 밖에 있는 신교(新橋)ㆍ비교(圮橋),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염초청(焰硝廳), 청파(靑坡) 남쪽에 있는 주교(舟橋)를 지나 만초천(蔓草川)이 되고, 서남으로 흘러 용산강(龍山江)에 들어간다.
창천(倉川) 도성 서쪽 10리 되는 광흥창(廣興倉) 근처에 있다. 동남쪽으로 흘러서 서강으로 들어간다.
사천(沙川) 수원이 문수봉(文殊峯)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탕춘대(蕩春臺)ㆍ홍제원(弘濟院)을 지나며, 모악을 돌면서 서남쪽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간다.
중량포(中梁浦) 일명 속계(涑溪)라고도 하는데, 도성 동쪽 13리 지점에 있으며, 양주(楊州) 독두천(獨豆川)의 하류이다.
율주(栗洲) 일명 율도(栗島)라고도 하고, 일명 가산(駕山)이라고도 한다. 길이가 7리인데, 경성의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마포(麻浦) 남쪽이다. ○ 상림(桑林)이 있는데 곧 공상(公桑)이며, 약전(藥田)은 지금 내의원(內醫院)에 속하였다.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고도 한다. 모래 섬 중에 늙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고려의 김주(金澍)가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정지】 종묘서(宗廟署)의 우물 하나는 서(署) 안에 있고, 하나는 서 밖에 있다.
성제정(星祭井) 소격서(昭格署) 곁에 있는데, 물이 돌 사이에서 나오며 맛이 매우 맑고 차다. 옛날 초제(醮祭 별에 제사 드리는 것) 드릴 때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제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의성위정(宜城尉井) 타락산(駝駱山) 아래 어의동(於義洞)에 있다. 성종조(成宗朝)에 그 우물을 봉(封)하고 길어다가 임금께 진상하였으므로 어정(御井)이라고 하였으며, 후에 의성위에게 하사하였기 때문에 사정(賜井)이라는 두 글자를 우물 돌 위에 새겼다.
미정(尾井)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매우 좋다.
통정(桶井) 훈련원(訓鍊院) 서남쪽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가장 좋아서 성 안에 제일이다. 맛이 매우 달고 차며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차다. 가뭄과 장마에 늘고 줄지 않으며 조정에서 봉하여 어정으로 삼았다.
초정(椒井)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목욕하면 병이 나았다. 효종조(孝宗朝)ㆍ현종조(顯宗朝)에 모두 여기에 행차하였다.
잠룡지(潛龍池) 이문(里門) 안에 인조의 잠저(潛邸)가 있었는데, 당(堂) 안에 영종(英宗)의 어필 사액(賜額)을 걸어 잠룡지(潛龍池)라고 하였다.
동지(東池)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다. 하나는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으며, 연지(蓮池)라고 한다. 민간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집터라고 말한다.
서지(西池)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는데 큰 가뭄에 비를 빌면 영험이 있으며 연꽃을 심었다. ○ 못 가에 옛날에는 반송(盤松)이 있어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임금이 일찍이 남경(南京 서울)에 행차하였다가 여기서 비를 피하였다. 본조(本朝) 초기에도 그 소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반송지(盤松池)라고 하였다. 태종(太宗) 8년에 모화관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려다가 오래도록 이루지 못하니, 사헌부에서 제조관(提調官) 박자청(朴子靑)을 탄핵하였다. ○ 못 서쪽 언덕 위에 경기도 중군영이 있다. 천연정(天然亭)을 지었으며 또 원관정(遠觀亭)이 있다.
와암천(臥巖泉) 모화관(慕華館) 곁에 있는데 맛이 매우 상쾌하고 차다.
휴암천(鵂巖泉) 목멱산(木覓山) 아래 삼아동(三丫洞) 위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달고 차다. 양어소(養魚所) 훈국(訓局)의 양어소는 보제원(普濟院)에 있는데, 착어군(捉魚軍)이 보살펴 기른다. 금위영(禁衛營)의 양어소는 왕십리에 있는데, 군병(軍兵)을 정하여 붕어를 사다가 기른다. 어영청(御營廳)의 양어소는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붕어를 사다가 기른다.
종목소(種木所) 가산(假山) 주(註)에 보인다.
【명승】중흥동(重興洞) 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는데 위에 중흥사(重興寺)가 있고 천석(泉石)이 유수(幽邃)ㆍ청절(淸絶)하여 도성 사람들이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된다. 또 산영루(山映樓)가 있다.
조계동(漕溪洞) 북한산성(北漢山城) 동문 밖에 있는데 7층 폭포가 있다. ○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헐렸다.
탕춘대(蕩春臺)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三角)ㆍ백운(白雲) 두 산 사이에 있어, 수석(水石)의 좋은 경치가 있으며 장의사(藏義寺) 옛 터가 있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이궁(離宮)을 설치하고 놀며 잔치하였다. 또 돌 구유를 만들고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하였다. 그 후에 이궁은 헐리고 조지소(造紙所)를 개천 동쪽에 설치하였다.
북저동(北渚洞)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동(洞)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며, 어영청의 성북둔(城北屯)이 있다. ○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묵사(墨寺)가 있었기 때문에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주민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한다.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
안암동(安岩洞) 혜화문 밖에 있는데, 훈국(訓局)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연미정동(燕尾亭洞) 흥인문 밖에 있는데, 훈국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 영풍정(映楓亭)이 있다.
세마평(洗馬坪) 노량(露梁) 북쪽에 있는데 훈국 보군(步軍)이 중순(中旬)마다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되었다.
산단(山壇) 바깥 남산에 있는데 곧 남단 곁이요, 녹사장(綠莎場) 동쪽이다. 민간에서 단오절마다 나이 젊고 건장한 이들이 편을 나누어, 이곳에서 씨름을 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삼청동(三淸洞) 인왕산 기슭에 있다. (주ㆍ오기(誤記)임) 냇물이 석벽으로 흐르고, 석벽 위에는 삼청동문(三淸洞門) 네 글자를 새겼는데, 감사 이상겸(李尙謙)의 글씨이다. ○ 동문 곁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의 옛 집이 있으며 동(洞) 가운데 또 팔판동(八判洞)이 있으니, 옛날 8판서(判書)가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산청(山淸)ㆍ수청(水淸)ㆍ인청(人淸)하기 때문에 삼청(三淸)이라 하였다.” 한다.
필운대(弼雲臺)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소시에 대 아래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贅寓]하였으므로 인하여 필운이라 불렀는데, 석벽에 새긴 필운대(弼雲臺)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이다. 대 곁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의 봄철 꽃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되었다.
육각현(六角峴) 필운대 곁에 있는데 대와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 인가가 있는데 담장 둘레가 매우 길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리장성(萬里長城) 집이라고 한다.
옥류동(玉流洞)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수석의 좋은 경치가 있다. 계겹란(鸂鵊瀾)ㆍ청휘각(淸暉閣)이 있는데, 모두 사암(思巖) 김창협(金昌協)이 이름지은 것이다. 물이 석벽 사이에서 나오며 석벽 위에는 옥류동(玉流洞)이란 세 글자를 새겼다.
전대(殿臺) 삼청동에 있는데, 훈국(訓局)에서 큰 기치(旗幟)를 새로 만들 때 제사드리는 곳이다.
세심대(洗心臺) 인왕산 아래 육상궁(毓祥宮) 뒤에 있는데, 석벽에 세심대(洗心臺)란 세 글자를 새겼다. 꽃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구경하기에 적당하다. 영종 을묘년에 장헌세자가 탄생하였는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웃으며 동대(東臺)에 올라가니, 오얏꽃 희고 복사꽃 붉게 일만 나무 피었네. 이런 풍광 이런 즐거움에, 해마다 태평 술잔에 크게 취한다네.” 하였다. ○ 정종(正宗)이 일찍이 임어(臨御 임금이 행차함)하였는데, 그 후에 순조(純祖)ㆍ익종(翼宗) 열성조(列聖朝)도 많이 거둥하였다. 사정(射亭)이 있다.
청풍계(淸楓溪)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동부(洞府)가 그윽하고 깊으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조용하여[窈窕] 놀며 구경할 만하다.
도화동(桃花洞) 북악(北岳) 아래에 있는데 복사꽃이 많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회맹단(會盟壇) 신무문(神武門) 북쪽에 있다.
화개동(花開洞)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지역이 치우쳐서 술마시며 시 읊기에 적합하다. 이 동리에 옛날 토기도감(土器都監)이 있었기 때문에 변하여 화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포곡(浦谷) 성균관(成均館) 북쪽 산기슭 아래에 있다.
쌍회정(雙檜亭) 창동 앞에 있는데, 석간수(石澗水)를 내려다보고, 단풍나무와 측백나무가 많아서, 가을에 놀며 구경하기에 적합하다.
칠송정(七松亭) 남산 기슭에 있는데, 정자는 없지만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기에 적합하다.
【관방】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 서쪽 수구(水口)에 있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평창(平倉)을 방비ㆍ수호함이 있어야 하겠다.” 하면서 처음으로 한북문(漢北門) [한(漢)은 한(捍)으로도 씀]을 설치하고, 좌우익(左右翼)의 성을 쌓았다. 주위가 1천 1백 10보이며 높이는 10척인데, 좌상 이유(李濡)가 감독하여 쌓았다. 그 안에 총융청(摠戎廳)의 군창(軍倉)과 혜청(惠廳)의 별창(別倉)이 있다. ○ 수문부장(守門部將)은 춘방(春坊) 서리(書吏) 강효원(姜孝元)의 자손이 전교에 의하여 정해 두고 임명된다.
북한산성(北漢山城) 경성 북쪽 30리 삼각산의 온조왕(溫祚王) 옛 터에 있다. 숙종 37년에 성을 쌓았는데, 행궁(行宮)을 짓고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여 유사시에 보장(保障)하는 장소로 삼았다. 성은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7천 6백 20보, 여첩(女堞)이 2천 7백 97, 성곽이 1백 21에, 장대 3, 못 26, 우물 99개 소이다. 대문 4, 암문(暗門 누가 없는 성문) 10이며, 안에는 군창(軍倉)과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3영의 창고가 있다. ○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곳이 있으며, 관성장(管城將)을 배치하고, 숯 1천 1백 석은 동문 안에 묻고, 1천 20석은 용암사(龍巖寺) 앞에 묻어 두었다. 영종 경진년에 대성문(大城門) 길이 도성 주맥(主脈)에 방해된다고 하여 폐쇄하고, 또 3곳의 대남문(大南門)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중흥동 중성(重興洞中城) 중흥사(重興寺) 북쪽 옛 성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척이며, 내성ㆍ외성ㆍ석문(石門)ㆍ석비(石扉)가 있는데,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백제 중엽에 여기에 도읍하였는데, 석문이 곧 그때 궁문이었다.”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중에 산이 있는데, 우뚝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노적 같으므로 민간에서 노적봉(露積峯)이라고 한다. ○ 산성의 수구(水口)가 낮고 넓으므로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척이다.
성북둔(城北屯) 혜화문 밖에 있다. 영종 을유년에 창건하였으며 둔감(屯監)이 있고, 또 환곡미(還穀米) 4백 섬과 돈 2천 냥 가량, 둔의 소 33쌍이 있다.
한강진(漢江鎭) 영종 계유년에 설치하여 훈국(訓局)의 진(鎭)으로 삼았다. 정종 14년에 장용영(壯勇營)으로 이속(移屬)하였다가 순조(純祖) 2년에 다시 훈국에 소속시켰다. 별장이 있는데 본영(本營)의 지구관(知彀官)과 기패관(旗牌官)을 돌아가며 30삭(朔)씩 교대 임명한다. ○ 진선(鎭船)이 15척인데, 그 중에 본진의 것이 8척이요, 동작진(銅雀津)의 것이 1척 이요, 서빙고(西氷庫)의 것이 6척인데, 산천조(山川條)에 보인다.
노량진(露梁津) 숙종 계미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숙종조에는 금위영(禁衛營) 소속이었으며, 정종 14년에 장용영(壯勇營) 주교소(舟橋所)에 이속하고, 주교소에서 별아별장(別牙別將)을 겸하였는데, 파영(罷營)한 후에는 금영(禁營)으로 환속(還屬)하였다. 별장이 있고 초관(哨官) 2명, 기패관(旗牌官) 1명, 명원(名員) 8명이 있다. 아병(牙兵) 1백 24명은 매삭(每朔)마다 10명씩 돌아가며 당직하고, 취고수(吹鼓手) 30명ㆍ기수(旗手) 8명ㆍ취고수(吹鼓手) 10명인데, 환곡미 2천 석과 돈 5천 냥이 있다. ○ 진선(鎭船)이 15척인데, 그 중 본진의 것이 9척이요, 동작진의 것이 6척이다. 또 급수선(汲水船) 2척, 향축배행선(香祝陪行船) 1척이 있는데, 산천조에 보인다.
양화진(楊花鎭) 영종 갑술년에 설치하였는데 어영청(御營廳)에 속하였다. 별장이 있고 아병(牙兵)이 1백 명이며, 환곡미가 2천 석, 전세전(田稅錢)이 8백 20냥, 돈이 3천 냥, 둔우(屯牛)가 33짝인데, 산천조에 있다.
【도로】 도성 안 대로(大路)는 넓이 46척인데,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며,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이며, 양쪽의 도랑은 넓이 2척인데, 만일 침범하여 차지하고 파낸다든가, 혹 더러운 물건을 버려두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 본부의 관리 및 관령(管領)이 천(川)ㆍ지(池)ㆍ성(城)ㆍ장(場)을 그 근처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장부를 만들어 두어 간수(看守)하게 한다. ○ 8도의 도로는 명(明) 나라 준례에 의하여,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측량하는데, 자 여섯 치가 한 보(步)가 되고, 3백 60보가 한 리(里)가 되며, 30리가 한 참[息]이 된다. 무릇 제향(祭香)이나 수향(受香)이 있을 때는, 한성부의 관원이 미리 길을 청소한다. ○ 서로(西路)에 기발(騎撥)을 두니 의주(義州)까지 45참(站)이요, 남북로(南北路)에 보발(步撥)을 두니 동래(東萊)까지 35참, 경성(鏡城)까지 59참이다. ○ 서울에서 개성부(開城府)ㆍ죽산(竹山)ㆍ직산(稷山)ㆍ포천(抱川)까지 대로인데, 한 참에 5호(戶) 씩을 배정하며, 서울에서 양근(楊根)까지, 죽산에서 상주(尙州)까지, 진천(鎭川)에서 성주(星州)까지, 직산에서 전주(全州)까지, 개성부에서 중화(中和)까지, 포천에서 회양(淮陽)까지가 중로인데, 3호씩을 배정하고, 기타 소로에는 2호씩을 배정하는데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한성부에서 조사ㆍ검찰한다.
서북으로 의주(義州)에 가는 것이 제1로가 된다 홍제원(弘濟院)과 양철평(梁鐵坪)을 경유한다.
동북으로 경흥부 서수라진(慶興府西水羅鎭)에 가는 것이 제2로가 된다 흥인문(興仁門)과 수유치(水諭峙)를 경유한다.
동으로 평해군(平海郡)에 가는 것이 제3로가 된다 흥인문과 중량포(中梁浦)를 경유한다.
동남으로 동래부ㆍ부산진(釜山鎭)에 가는 것이 제4로가 된다 숭례문과 한강진(漢江津)을 경유한다.
남으로 고성현(固城縣)과 통제사영(統制使營)에 가는 것이 제5ㆍ6로가 된다 두 길로 나뉘는데 한강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5로가 되고, 노량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6로가 된다. 남으로 제주(濟州)에 가는 것이 제7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남으로 보령현(保寧峴)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에 가는 것이 제8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쪽으로 강화부(江華府)에 가는 것이 제9로가 된다 양화진(楊花津)을 경유한다.
행행진로(幸行津路) 선릉(宣陵)ㆍ정릉(靖陵)ㆍ장릉(章陵)ㆍ건릉(健陵)ㆍ현륭원(顯隆園)은 모두 노량진을 경유하며, 헌릉(獻陵)ㆍ영릉(英陵)ㆍ영릉(寧陵)ㆍ인릉(仁陵)은 모두 광진(廣津 광나루)을 경유한다.
【교량】구거 교량(溝渠橋梁)은 공조와 한성부에서 조사ㆍ검찰하고 수리ㆍ정리하였는데, 지금은 준천사(濬川司)에 속하였다. 송기교(松杞橋)에서 장통교(長通橋)에 이르기까지는 훈련도감에서, 장통교에서 태평교(太平橋)에 이르기까지는 금위영에서, 태평교에서 영도교(永渡橋)에 이르기까지는 어영청에서, 사산(四山)의 참군(參軍)과 함께 나누어 맡아서 순시(巡視)하며, 모래가 뭉치고 돌이 무너진 곳은 해당 관청에 보고하여 수축하게 한다.
혜정교(惠政橋)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편에 앙부일영대(仰釜日影臺)가 있다. 《원사(元史)》에 기록된 곽수경(郭守敬)의 법에 의하여 만들었는데, 안에 시각을 새겼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여다보고 시간을 알게 하려한 것이다. 둘이 있는데, 세종 14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설치하였다. 하나는 여기 두고 하나는 종묘 앞 거리에 두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대광통교(大廣通橋) 종루(鐘樓) 남쪽에 있는데 돌난간이 있다.
소광통교 대광통교 남쪽에 있다.
통운교(通雲橋) 민간에서들 철물전(鐵物廛) 다리라고 하는데, 종루 동쪽 대사동(大寺洞) 어귀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연근동(蓮根洞)에 있다. 또 통운교 동쪽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이교(二橋)라고 한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초교(初橋)라고 한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장통교(長通橋) 중부 장통방에 있는데 곧 광제교 동쪽이다. ○ 민간에서는 장창교(長倉橋)라고 한다.
수표교(水標橋) 중부 장통방(長通坊),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고, 또 척촌(尺寸)의 수효를 새겨서 빗물의 얕고 깊음을 알게 하였는데, 높이가 10척이다.
하량교(河良橋) 옛날에는 신교(新橋)라고 하였는데 영표교 동쪽 장통방에 있다. 민간에서들 하량교(河梁橋)라고 하니, 옛날 하남위(河南尉)의 집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영풍교(永豐橋) 하량교 동쪽에 있다. 민간에서들 효경교(孝經橋)라고 한다.
태평교(太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민간에서들 마전교(馬廛橋)라고 한다.
송첨교(松簷橋) 사헌부(司憲府) 서쪽에 있는데, 곧 서부의 적선방(積善坊)이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에 있는데, 곧 개천(開川)의 하류이다.
제반교(濟盤橋) 전관(箭串)에 있는데, 다리가 3백여 보 이상에 걸쳐있다. 두 다리는 모두 중종(中宗)이 어필로 글씨를 써서 정한 것이다.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 밖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주교(舟橋 배다리)라고 한다.
경고교(京庫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홍제원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 임금이 능에 거둥할 때에는 도성 안팎의 교량을 호조(戶曹)에서 수리 개선하는데, 동쪽은 안암천(安巖川)을 한계로 하고 서쪽은 홍제원을 한계로 하고 남쪽은 노량강 가를 한계로 한다.
【전야】 동적전(東籍田) 동교 10리 전농리(典農里)에 있는데, 곧 선농단(先農壇) 곁이다. 왕이 친히 밭 가는 땅이 있고 친경대(親耕臺)가 있다. 또 분필각(芬苾閣)이 있고, 또 창고가 있다. ○ 수전(水田 논)과 한전(旱田 밭)을 총합하여 37결(結) 59부(負) 6속(束)인데, 친경전(親耕田)은 8일 갈이이다. ○ 열성조(列聖朝)에서 친히 밭 가는 예절을 많이 거행하였으며, 영묘(英廟)에도 행차하여 추수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 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곡식을 심어서, 별제(別祭)의 자성(粢盛) 및 천신(薦新)하는 6종의 곡물로 바친다.
친경대(親耕臺) 선농단(先農壇) 곁에 있다.
성경대(省耕臺) 숭례문 밖 청파(靑坡) 남쪽에 있는데, 관가대(觀稼臺)라고도 한다. ○ 영종조에 해마다 친히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권장하였으며, 가을 성숙기에도 행차하여 보았다. 43년에는, 임금이 왕세손(王世孫 뒷날의 정조)과 함께 거둥하였는데, 정종 정사년에 단을 쌓아 그 일을 기념하고 성경대(省耕臺)라고 이름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의 기문이 있다.
고암전(鼓巖田) 태종이 하루는 미행(微行)으로, 박은(朴訔)의 집에 갔다. 그때 은의 지위는 높고 이름났지만 가세는 매우 가난하였다. 마침 조밥을 먹다가 재채기가 나서 곧 맞이하여 절하지 못하고, 문 밖에 조금 오래 서 있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였다. 은이 황공하여 사실대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재상인데 조밥을 먹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들어가 보게 하였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임금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특별히 청문(靑門 동대문) 밖 고암전의 땅을 약간 하사하였다.
홍덕전(弘德田) 나인(內人 궁중의 여관) 홍덕(弘德)이 병자란(丙子亂)에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 봉천(奉川))에 들어갔는데, 김치를 잘 담가서 때때로 효종(孝宗)이 인질로 있는 집에 드렸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홍덕도 이어서 돌아왔는데, 다시 김치를 담가서 나인을 통하여 드렸다. 임금이 맛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출처를 물으니 나인이 사실대로 아뢰었다. 임금이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 곧 홍덕을 불러 들여서 후하게 상을 주려고 하니, 홍덕이 굳이 사양하면서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에 명하여 낙산(駱山) 아래 밭 몇 경(頃)을 하사하여 그 수고를 갚아 주었다. 지금도 그 밭을 홍덕전(弘德田)이라고 한다.
왕십리평(往十里坪) 흥인문 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와 배추 등 채소류를 심어 생활한다.
동잠실(東蠶室) 구잠실(舊蠶室)은 성 동쪽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있고, 신잠실(新蠶室)은 한강 원단동(圓壇洞)에 있는데, 모두 환관(宦官)들이 주관한다.
서잠실(西蠶室) 성에서 10리 서쪽 연희궁(延禧宮)에 있는데, 상의원(尙衣院)에 속하였다. 서잠실에서는 2년씩 간격으로 뽕나무를 심었는데, 훈국(訓局)에서 적간(摘奸)한다.
내농포(內農圃) 돈화문(敦化門) 밖 동쪽 가에 있다. 포전(圃田)이 있는데 내관(內官)이 주관하고, 채소를 세납으로 받아서 임금의 찬거리에 충당한다.
약전(藥田) 율주(栗洲)에 있는데, 지금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
고초전(苦草田) 서쪽 연희궁 앞 들에 있다.
남전(藍田) □□□에 있다.
상전(桑田) 삼전도(三田渡)에 있다.
상림(桑林) 율주(栗洲)에 있는데 공상(公桑)이다.
【목장】 전관(箭串 살곶이) 곧 국도의 동교(東郊)인데, 그 지역이 평탄하고 넓으며 수초(水草)가 매우 풍요하다. 둘러서 우리를 만들고 국마(國馬)를 기르는데 넓이가 34리나 된다. 처음에는 목책을 만들었다가 해마다 개수(改修)하니, 백성은 이속들의 농간질에 피폐하고, 말도 도둑맞아 도망갔다.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서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상진(尙震)이 정부에 건의ㆍ요청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철삭(鐵索)으로 열고 닫게 하니, 그 후로 폐단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나의주(羅衣洲) 또 잉화도(仍火島)라고도 하며 도성 서쪽 15리에 있는데, 곧 서강 남쪽이다. 율주와 서로 잇닿았는데, 장마로 인하여 끊어져 둘이 되었다. ○ 옛날에는 축목장(畜牧場)이 있어, 사축서(司蓄署)ㆍ전생서(典牲署)의 관원을 나누어 보내 기르는 것을 감독하게 했는데 후에 폐지되었다. 지금은 옛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마리만을 놓아 기른다. 위토전(位土田) 경중(京中)에 92일 갈이가 있어, 1년의 세금이 2백 22냥이다.
【봉수】평시에는 한 홰[炬]요, 적이 보이면 두 홰, 지경에 가까이 오면 세 홰, 지경을 침범하면 네 홰, 접전하면 다섯 홰이다. 수직하는 금군(禁軍)이 5명이며, 병조(兵曹)의 봉수장(烽燧將)에게 보고한다. 충순위(忠順衛)를 혁파(革罷)한 후에는, 금군 중에서 녹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번 차례로 돌아가며 수직한다. ○ 봉대(烽臺)에는 표(標)를 설치하고 경계를 정하는데, 위봉(僞烽)ㆍ방화(放火) 등의 일을 막론하고, 백 보(步) 안에 있는 것은 병조에서 맡아 처리하고, 백보 외의 것은 금위영에서 맡는다. ○ 봉대 근처에는 음사(淫祀) 기도를 금한다.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 동쪽의 제1봉(烽)은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것은 함경ㆍ강원ㆍ경기도에서 오는 봉화(烽火)요, 제2는 광주(廣州) 천천령(穿川嶺 천림산(天臨山)이라고도 함)에 응하는데 이것은 경상ㆍ충청ㆍ경기도에서 오는 봉화요, 제3은 무악(毋岳) 동봉(東烽)에 응하는데 이것은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육로로 오는 봉화요, 제4는 무악 서봉에 응하는데 이것은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해로로 오는 봉화요, 제5는 양천현(陽川縣) 개화산(開花山)에 응하는데 이것은 전라ㆍ충청ㆍ경기도의 해로로 오는 봉화이다. 제1봉화는 직봉(直烽)이 1백 20곳, 간봉(間烽)이 60곳이며, 제2봉화는 직봉이 40곳, 간봉이 1백 23곳이며, 제3봉화는 직봉이 78곳, 간봉이 22곳이며, 제4봉화는 직봉이 71곳, 간봉이 35곳이며, 제5봉화는 직봉이 60곳, 간봉이 35곳이다. ○ 매일 초저녁에는 반드시 다섯 자루를 든다. 그런데 동쪽 제1봉화는 혹 때로 들지 않으니, 북도의 봉화가 구름이 끼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매일 초저녁에 봉수군(烽燧軍) 1명이 단봉문(丹鳳門) 밖에 나가서 본산의 봉화 다섯 자루를 드는데, 혹 한 자루를 들지 못하게 되면 부장(部長)이 남소(南所)에 보고하며, 남소의 부장은 그 길로 병조에 보고하고, 이튿날 아침에 들어가서 아뢴다. ○ 봉수ㆍ연대(煙臺)의 봉군(烽軍) 등은 정한 다른 부역이 없고, 오로지 후망(候望)만을 한다. ○ 혹 구름이 어둡고 바람이 어지러워서 연화(煙火)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로 달려가 보고한다. ○ 목멱ㆍ무악 두 산 봉수군의 호(戶)는 30씩인데, 매호에 보솔(保率) 3명을 둔다. 각 1백 20명이 나누어 24번을 만들고, 매번 5명이 6일마다 교체한다.
무악봉수(毋岳烽燧) 동쪽 봉화는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염포(鹽浦)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3봉화에 보고하며, 서쪽 봉화는 서쪽으로 고양군 고봉(高烽)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4봉화에 보고한다.
붙임 척후(斥候) 백악척후(白岳斥候)ㆍ목멱산 척후ㆍ무악 척후.
【행순】 궐내(闕內)는 위장(衛將)이나 부장(部長)이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시간을 나누어 다니면서 순찰한 후에, 무사한지의 여부를 바로 아뢴다. 도성(都城) 내외의 행순(行巡)을 병조에서 당직한다 충의(忠義)ㆍ충찬(忠贊)ㆍ충순(忠順)ㆍ족친(族親)ㆍ내금위(內禁衛)ㆍ외오위(外五衛)의 각 1부를 2소(所)로 나누어 행순을 배정하며, 또 점고(點考) 받는 순장(巡將)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첨지(僉知)에 이르기까지는 망(望)에 올려 정하는데, 부족하면 당직 당상관을 망에 올려 정한다. 및 감군(監軍) 선전관과 병조, 도총부(都摠府)의 당하관 중에서 망에 올려 정한다. 각 운영관(運領官) 상호군(上護軍)ㆍ대호군(大護軍)ㆍ호군(護軍)으로 정하되, 부족하면 그 다음의 별시위(別侍衛)로 정한다. 출입번(出入番)의 장수는 대궐에 나가 숙배(肅拜)하고, 대내(大內)에서 납패수패(納牌受牌)한다. 각 부대의 영관이 받는 패(牌)는 순장(巡將)이 모두 받아서 나누어준다. 병조(兵曹)에서 사무를 맡기는데, 궁성(宮城) 4문 밖의 숙직은 각 상호군(上護軍)ㆍ대호군ㆍ호군 중 1명과, 정병(正兵) 5명이며, 도성 안팎 여러 경수소(警守所)에는 보병(步兵) 2명이 부근 동리 사람 5명을 거느리고 하는데, 소(所)에 따라서는 활ㆍ검ㆍ지팡이 등을 가지고 경첨(更籤)을 받아 가지고서 숙직한다 신표[籤]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아무 경수소 신표라고 썼다. 광화문(光化門) 호군은 초저녁에 요령[鐸]을 병조에서 받는데 군호도 함께 받는다. 민간에서는 언적(言的)이라고 한다. 인정(人定) 후에는 정병(正兵) 2명이 요령을 흔들면서 궁성을 순찰하는데, 4면 경수소(警守所) 및 각 문을 차례로 전하고 받으면서, 돌기를 말지 않으며, 파루(罷漏) 때가 되어서야 그친다. 운영관(運領官)은 매 시간마다 궁성을 돌고, 4면 경수소 및 각 문에 가서 경첨(更籤)을 거두며, 밝으면 병조에 바친다. 여러 경수소에는 순장이나 순관(巡官)이 불시에 가서 신표를 거두어 병조에 바친다. 2경(更) 후, 5경 전에는 대소 인원이 나다니지 못하는데, 불을 낸 자가 있으면 순관이 쫓아가서 도둑을 살핀다. ○ 병조ㆍ형조ㆍ의금부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守城禁火司) 5부의 숙직하는 관원은 표신(標信) 몸체가 둥근데 1면에는 통행(通行)이라 쓰고 1면에는 전자로 통행이란 화인을 찍었다. 밤에 다닐 때 및 군중(軍中)에서 사용한다. 을 정원(政院)에서 받는다. 이튿날 아침에 환납(還納)한다. 군호(軍號)를 병조에서 받고 각각 그 관청의 아전(衙前)ㆍ사령을 통솔하는데 행순은 없다. 형조 이하의 여러 관청은 5부 외에는 지금 폐지되었다. ○ 군호는 병조에 입직(入直)한 당상관이 친히 써서 봉함하는데, 매일 신시(申時)가 되면 낭관(郎官)이 직접 가서 정원에 드리게 한다.
○ 두 포청(捕廳)에서는 각기 패장(牌將) 8명, 군사 64명을 정하여, 도성 안팎을 밤새워 행순 하며,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군문에서는 날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한다. 도감은 첫날인데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일이고, 금영(禁營)은 중간 날인데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일이며, 어청(御廳)은 마지막 날인데 인(寅)ㆍ술(戌)ㆍ축(丑)ㆍ미(未)일이다. 각기 패장(牌將) 9명을 정한다. 군사는 도감이 83명, 금영이 84명, 어청이 67명이다. 도성 안팎을 야순(夜巡)하며, 또 각 군문에서는 그 외영(外營)에서 입직한 장교 1명으로 입직한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 밖을 시간을 정하여 야순한다 도감은 초경ㆍ3경, 금위영은 2경, 어영청은 5경이다. 또 3군영에서는 각기 장교 1명을 정하여, 입직한 군사 5명을 거느리고 궁장(宮墻) 밖을 밤새워 순행한다. 모두 땅거미질 때[日晡時]부터, 날이 밝기까지 하되, 별순라패(別巡邏牌)를 만들어 준다. ○ 금령을 범하고 밤에 다니는 사람은 잡아서 인근 경수소(警守所)에 보내며, 이튿날 각기 그 군영에서 곤장(棍杖)을 쳐서 처벌한다 초경(初更)에 다닌 사람은 곤장 10도를 때리고, 2경은 20도, 3경은 30도, 4경은 25도, 5경은 10도이다. 무릇 행순(行巡)하는 사람은 모두 군호(軍號)를 받는데, 대궐 안의 사람이나 담장 밖의 사람이 다른 군인과 신지(信地)를 만나면, 그때 그때 문득 서로 응하면서 돌아서 멈추지 않고 파루(罷漏) 때 가서야 그친다. ○ 외삼영(外三營) 북영(北營)ㆍ신영(新營)ㆍ동영(東營)이다. 입직 중에는 원 순라(巡邏) 외의 장관(將官)을 매일 밤 파루 후에 내보내어, 날이 밝기까지 각 해당 영관 내의 궁성(宮城)을 살펴본다.
붙임 파수(把守) 궁성 문은 병조에서 정병(正兵)ㆍ갑사(甲士)를 정하여 나누어 여러 소(所)에 소속시켜 파수하게 하며, 또 대졸(隊卒) 10명을 정하여 광화문(光化門)을 지키며, 종묘문(宗廟門)ㆍ도성문은 출직(出直)한 보병으로 파수하고, 흥화(興化)ㆍ숭례(崇禮)ㆍ돈의(敦義)ㆍ혜화문(惠化門)은 호군(護軍)으로 정하며, 그 밖의 문은 5명씩을 정한다. 사직(司直) 이하로 칭호되는 사람이 통솔하게 한다. 각 대문에 30명이며 그 좌우 협문(夾門)도 같다. 중문은 20명인데 그 좌우 협문도 같으며, 소문(小門)은 20명이고 종묘문은 4명이다.
○ 궁성문은 초혼(初昏)에 닫고, 명평(明平)에 열며, 도성문은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연다. 궁성문은 주서(注書)가 총부(摠部)의 낭관(郎官)과 선전관으로 더불어 자물쇠를 맡아서 열고 닫고 하는데, 열쇠를 정원(政院)에서 받으며, 도성문은 호군(護軍) 5명이 열고 닫고 하는데 교대할 때에 병조에서 받고 바치고 한다. 제때[及期]에 아뢸 일이 생기면, 호군 5명이 문틈에서 받아 가지고 급히 대궐문으로 가서 아뢴다. 정한 시간 외에 도성문을 열게 되면 대내(大內)에서 개문좌부(開門左符)를 내린다. 몸체가 둥근데 한 쪽에는 전자로 신부(信符)라 쓰고, 한쪽에는 전자로 신부라 쓴 것을 찍었으며, 가운데가 나누어졌다. 호군 5명이 좌부(左符)를 받으며 교대할 때에는 병조에서 받고 바치고 한다. 궁성문은 표신(標信)을 사용하여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표신은 몸체가 모가 났는데, 한 쪽에는 개문(開門)이라 쓰고 한 쪽에는 어압(御押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이 있다. 폐문(閉門) 표신도 같은데, 한 쪽에 폐문이라 썼다. 긴급한 때는 도성문에도 통용한다. ○ 개국 초기부터 파루(罷漏)가 되면 궁성문 및 외성(外城)문을 모두 열었는데, 예종조(睿宗朝)부터는 평명에야 궁문을 열게 하였다.
【복처】 1패(牌)의 복처(伏處 순라군이 잠복 근무하던 요긴한 곳). 회현동(會賢洞) 동구에 있는데, 구역 안은 숭례문에서 타락동(駝駱洞)까지이다. 상(上) 2패의 복처. 남산동(南山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타락동 동쪽에서 영희전(永禧殿) 서쪽까지이다. 하(下) 2패의 복처. 필동교(筆洞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주자동(鑄字洞)에서 생민동(生民洞)까지이다. 3패의 복처. 청량교(淸梁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이다. 4패의 복처. 어의동(於義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파자교(把子橋) 동쪽에서 동대문 북쪽까지이다. 5패의 복처. 재동(齋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파자교 서쪽에서 전의감동(典醫監洞) 동쪽에 이르기까지이다. 6패의 복처. 수표교(水標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종루(鐘樓)에서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이르기까지이다. 7패의 복처. 동대문 밖에 있는데, 구역 안은 동대문 밖에서 관왕묘(關王廟)까지이다. 좌변 포도청(左邊捕盜廳)에 속한다.
【궁실】 북한행궁(北漢行宮) 산성 안 상원봉(上元峯) 아래 있다. 숙종(肅宗) 37년에 내정전(內正殿) 28칸, 외정전 28칸과 그 외의 행각(行閣)ㆍ월랑(月廊) 등 73칸을 지으니, 합하여 1백 29칸이다.
종루(鐘樓)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다. 태조 4년에 큰 종을 주조하고, 권근(權近)이 명(銘)을 지었는데, 각(閣)을 큰 거리[通衢]에 짓고 종을 달아서 새벽과 어두울 때 치게 하였다. 세조조에 고쳐 층루(層樓)로 지으니, 동서의 넓이가 5칸, 남북이 4칸인데, 십자가(十字街)를 만들고 종을 누 위에 달고, 인마(人馬)는 누 아래로 통행하게 하였다. 세조 13년에 명하여 다시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아서 새벽과 밤을 알리게 하였는데, 1경(更) 3점(點)에 비로소 징과 북을 치니, 북으로 경(更)을 알리고 징으로 점을 알리는 것이며, 큰 종을 28번 치니, 이것을 인정(人定)이라 하며, 5경 3점에는 징과 북을 치우고, 큰 종 33번을 치니,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한다. 선조 임진년 병란 때에 광화문의 종과 함께 모두 녹아버렸으며, 환도한 후인 갑오년 가을에 숭례문의 종을 옮겨다가 달고 새벽과 밤을 알려주니, 도성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 경리(經理)가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로 옮겨 달았다. ○ 《추관지(秋官志)》를 보면 간고(諫鼓)를 남현(南峴)에 달고, 방목(謗木)을 서교(西橋)에 설치하였다.” 하였으며, 지금도 종현(鍾峴), 방목교(謗木橋)라고 부르니, 국조(國朝)에서 옛날 삼대(三代 옛날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를 모방하던 성대한 의사를 알 수 있는 일이다. ○ 또 살펴보면, 중종조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흥천사(興天寺)의 종을 흥인문(興仁門)에, 원각사(圓覺寺)의 종을 숭례문(崇禮門)에 옮겨 놓고, 새벽과 밤을 알려주려 하였는데 미처 달지 못하고 안로가 실패하여, 그만 풀숲 속에 버려둔 지 오래였다. 선조 갑오년에 명하여 숭례문의 종을 종루로 옮겨 달게 하였다.
종각(鐘閣) 세조 2년에 큰 종을 주조하고, 신숙주(申叔舟)가 명을 지었으며, 사정전(思政殿) 앞 행랑에 두었는데, 지금은 광화문 밖 서쪽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종각을 지었다.
태평관(太平館) 숭례문 안 양생방(養生坊)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관 뒤에 누(樓)가 있는데 명 나라 사신 예겸(倪謙)ㆍ기순(祈順)이 모두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지금은 칙사(勅使)를 영접할 때에 나례(儺禮 가면극(假面劇))를 준비하여 거행하는 곳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칙사를 접대하는 규정은 없다. ○ 상고해 보면 문정왕후(文定王后)ㆍ인목왕후(仁穆王后)의 가례(嘉禮)를 모두 이 관에서 거행하였다.
남별궁(南別宮)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명설루(明雪樓)가 있다. ○ 상고해 보건대, 조사(詔使)가 오면 반드시 태평관에 거처하였는데, 선조 임진년 병란에 태평관이 불탔으며, 계사년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경성을 수복하고 여기에 거처하여 그대로 조사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으며, 그 후로 남별궁이라 하였다. ○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조대림(趙大臨)의 집이라 하는데 상고하여 경험할 데가 없으니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의안군(義安君)의 새 궁이라고도 한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래는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 12년에 관(館)으로 고쳐서, 무과(武科) 시험장으로 삼고 무이소관(武二所館)이라 하였다. 앞 길 위에 옛날에는 홍전문(紅箭門)이 있고, 중종 30년에 사신[王人]을 맞이하고 전송하던 곳인데, 사체에 온당하지 못하다 하여 김안로의 건의로 고쳐서 두 기둥의 한 칸 집을 짓고, 푸른 기와로 덮은 다음 영조(迎詔)라는 현판을 걸었다. 33년에 중국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맞이하는 것은 조(詔)ㆍ칙(勅)ㆍ뇌(賚) 등이 있는데, ‘조’라고만 이름하는 것은 치우친 것 같다.” 하면서, 고쳐 현판을 써서 영은(迎恩)이라고 걸었다. 후에 명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고쳐 현판 글씨를 썼다. 영종 갑신년 가을에 명릉(明陵)에 전알(展謁)하고 늦게 돌아오는데, 정종이 세손(世孫)으로서 영은문 밖에 나와 맞이하니, 임금이 친히 장막에 들어가서 사언시(四言詩) 4구를 써서 기쁜 뜻을 표시하였으며, 세손이 화답하여 지어 올렸다. ○ 관 동쪽 건너 산기슭에 연향대(燕享臺)가 있으며, 대의 동북쪽에 양호(楊鎬) 경리(經理)의 공덕비(功德碑)가 있다. ○ 못이 있으며 못 가에서 석척동자(蜥蜴童子)로 기우제 9차를 드리는데, 무관 종2품관이 연 3일간 거행하고 그친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설치하였으며, 일본 등 제국(諸國)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데, 임진년 병란에 불타고 그만 폐지되었다. 지금은 그곳을 왜관동(倭館洞)이라 한다. 선조 24년에 왜사(倭使)가 관에 와서 머물며 벽 위에 시를 써서 이르기를, “매미 시끄럽게 우느라 당랑이 잡을 줄 모르고, 고기 노닒은 해오라기 졺을 기뻐함일세. 이곳이 어느 곳이냐, 다른 해에 다시 잔치 벌여 보세나.” 하였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야인(野人 여진)으로 와서 조회하는 자들을 접대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독서당(讀書堂) 옛날에 용산에 폐지한 절간이 강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성종조에 고쳐 짓고 당(堂)을 만들어서 홍문관(弘文館)의 연소한 학자들의 글 읽는 곳을 만들었다. 연산군 때에 혁파하고 당은 궁인(宮人)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중종 10년에 다시 독서당을 옛날 정업원(淨業院)에 설치하였는데, 여염집 사이여서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여 다시 좋은 자리를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 월송암(月松庵) 서쪽 산기슭을 선택하여 창건하였으며, 호당(湖堂)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다시 임진년의 병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는데, 광해군 무신년에 고쳐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소로 삼았다. 옛날에 절간[僧舍]이 남문 밖 귀후서(歸厚署) 뒷산 기슭에 있었는데, 세상에서들 말하기를, “16나한(羅漢)이 영험(靈驗)이 있다.”고 해서, 불공[香火]이 끊기지 않았다. 중 상운(尙雲)이 그 집에 살면서 아내를 얻어 아들을 낳으니,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중을 처벌해서 속인이 되게 하고, 불상을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드디어 그 집을 홍문관에 주어서 번갈아 가서 글을 읽게 하고, 이름을 독서당이라고 하였다. ○ 조위(曹僞)의 〈용산독서당기(龍山讀書堂記)〉와 이식(李植)의 〈독서당기〉가 있고, 또 호당고사(湖堂故事)를 지었으며, 윤현(尹鉉)의 〈문회당기(文會堂記)〉가 있다.
【누정】 황화정(黃華亭) 두모포 북쪽 산기슭에 있는데, 연산군이 짓고서 나와 노는 곳으로 삼았다. 중종조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유하정(流霞亭) 두모포에 있다. 원래는 제안대군의 정자이며 수진궁(壽進宮)에 속한 공청이었는데, 정종(正宗) 5년에 명하여 규장각(奎章閣) 신하들에게 하사하여, 여러 각신(閣臣)들의 승경지를 가려 놀며 구경하는 장소로 삼았다. ○ 혹은 말하기를, 본래 제안대군의 집으로 효종의 잠저(潛邸) 때 정자가 되었다고 한다.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풍경이 매우 좋으며, 중국 사신들의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되었다. 성종이 일찍이 행차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한강 도승(漢江渡丞)이 검찰하고 간수(看守)한다.
칠덕정(七德亭) 곧 한강 하류의 백사정(白沙亭)이다. 세조가 여러 번 행차하여 무예(武藝)를 사열하고, 인하여 이름지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읍청루(挹淸樓) 용산 별영 앞에 있는데, 긴 강류에 임하여 풍경이 매우 좋다.
영복정(榮福亭) 강 서북 언덕에 있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여 손수 영복(榮福)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하사하여 정자 현판으로 삼고, 인하여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이라는 여섯 글자로 그 뜻을 풀이하였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정자는 본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이었는데, 세종이 행차하여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성종 갑진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지금 이름으로 현판을 걸었다. 성종이 매년 농사를 살피거나 세납선(稅納船)을 집합시켜 수전(水戰)을 연습할 때 언제나 이 정자에 행차하였으며,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대군이 졸한 후에는 다시 행차하지 않았다. ○ 변계량의 〈희우정기(喜雨亭記)〉가 있으며, 신장(申檣)이 현판을 썼다.
낙천정(樂天亭) 전관(箭串)에 있다. 태종이 선위(禪位)한 후에 이궁(離宮)을 동교대산(東郊臺山)에 창건하여, 정자를 그 위에 짓고 박은(朴訔)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이 있다.
화양정(華陽亭) 낙천정 북쪽 언덕에 있다. 본래 태복시(太僕寺)의 목장이었는데, 세종 14년에 그곳에 이 정자를 지었다. ○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이 있다.
세검정(洗劍亭)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앞에 있는데,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 열조(列朝)의 실록(實錄)이 이루어진 후에, 반드시 여기서 세초(洗草 원고 정리)하였다. ○ 정자가 돌 위에 있는데, 폭포수가 그 앞을 지난다. 매년 장마 때 도성 사람들이 나가서 넘쳐흐르는 물을 구경한다.
산영루(山映樓) 북한산 성 안에 있다.
반송정(盤松亭)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는데, 소나무가 구불구불 우뚝 서있음으로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서지조(西池條)에 자세하다.
천연정(天然亭) 서지 가에 있다. 본래 이해중(李海重)의 서재였는데, 지금은 경기 중영(京圻中營)이 되었다. ○ 여름철 연꽃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데, 서지조에 자세하다.
풍월정(風月亭)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있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지었는데, 성종이 친히 집 서쪽 동산에 행차하여, 풍월(風月)이라는 두 글자를 하사하여 정자 현판으로 삼게 하고, 시 6수를 짓고 문신들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몽답정(夢踏亭) 훈국북영(訓局北營) 안에 있는데 천석(泉石)의 승경(勝景)이 있다. 숙종이 일찍이 꿈에 이 정자에 행차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또 사정(射亭)이 있는데 괘궁정(掛弓亭)이라 하며, 연꽃 구경하는 정자를 군자정(君子亭)이라 한다.
쌍회정(雙檜亭) 명승조에 자세하다.
칠송정(七松亭) 명승조에 자세하다.
천우각(泉雨閣)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 안에 있는데, 시내에 걸쳐 집을 지어서 여름철 피서에 좋다. 석벽에 아계(丫溪) 두 글자를 새겼다.
협간정(夾澗亭) 타락산(駝駱山) 아래에 있다. 앞으로 시내와 폭포에 임하여 있어 동촌(東村) 사람들의 놀고 구경하는 장소가 되었다.
백림정(柏林亭) 타락산 아래에 있는데 박은의 옛 집이다. 이 정자 이름으로 하여 동리를 백동(柏洞)이라고 한다.
【제택】《조가지(造家志)》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사람들의 청원에 의하여 공지(空地)로서 만 2년간 비워두고 짓지 않은 땅을 나누어주어 공대(空垈) 및 포전(圃田 채마밭)을 물론하고 백성들에게 집짓는 것을 허가하되, 본 주인이 이것을 막고 방해하는 경우에는 제서유위(制書有違)의 법률로 논죄한다. 무릇 가대(家垈)가 산을 의지한 곳은 관상감(觀象監)으로 하여금 산기슭과 산등성이가 도성ㆍ궁궐에 임압 금기(臨壓禁忌)되는 곳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서 나누어주지 말게 하며, 함부로 받아서 집을 짓는 자는 죄주고 철거한다. ○ 집터의 면적은 대군ㆍ공주는 30부(負), 왕자ㆍ군ㆍ옹주(翁主)는 25부, 1ㆍ2품관은 15부, 3ㆍ4품관은 10부, 5ㆍ6품관은 8부, 7품관 이하 및 음관(蔭官)의 자손은 4부, 서인은 2부인데, 3등 전척(田尺)을 사용하여 측량한다. 집의 규모는 대군은 60칸, 왕자ㆍ군ㆍ공주는 50칸, 옹주 및 종친(宗親), 문ㆍ무관의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서인은 10칸으로 하되, 숙석(熟石 다듬은 돌)ㆍ화공(花供)ㆍ초공(草供)은 사용하지 못한다.
중부(中部)
구수영(具壽永)의 집 견평방(堅平坊) 이문(里門) 안에 있다. 태화정(太華亭)ㆍ부용당(芙蓉堂)이 있고, 당 앞에 잠룡지(潛龍池)가 있으니 인묘가 예전에 공부하던 곳이다. ○ 문학(文學) 이정(李挺)이 기문을 지었다.
조광조(趙光祖)의 집 경행방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예전 한양현(漢陽縣) 향교가 이 동리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동명(洞名)을 한 것이다.
동부(東部)
이석형(李石亨)의 집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지금 자손들이 그 근방에 사는데, 동촌 이씨라고 한다.
이정귀(李廷龜)의 집 연화방에 있다. 사당 앞에 단엽 홍매(單葉紅梅)가 있는데, 곧 중국인이 공에게 선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홍매화가 단엽인 것은 이 한 그루뿐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집 건덕방(建德坊) 타락산(駝駱山) 아래에 있는데, 용흥궁(龍興宮)과 동ㆍ서쪽으로 마주 서 있다. 석양루(夕陽樓)가 있는데 기와 벽돌에 모두 그림을 새겼으며, 규모의 넓고 화려하기가 여러 제택(第宅) 중에 제일이다. ○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신광한(申光漢)의 집 타락산 아래 있는데, 세상에서 신대명승지지(申臺名勝之地)라고 한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다.
송시열(宋時烈)의 집 성균관(成均館) 서쪽 산기슭에 있는데, 우암(尤菴)이 예전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동명(洞名)을 송동(宋洞)이라고 한다. 동리의 골이 깊으며 석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는데, 우암의 글씨이다. 동리 가운데 꽃나무가 많아서 봄놀이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남부(南部)
조말생(趙末生)의 집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중 무학(無學)이 터를 잡은 곳으로 낙양(洛陽)의 명원(名園)이라고들 한다. 남산의 바른 줄기가 바로 낙동(駱洞)에 닿았기 때문에 복귀형(伏龜形)이라 일컫는다. 서쪽이 조말생의 집이고, 동쪽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집이 되어 좌우의 거북 눈을 이루었다. 그 꼬리가 공북헌(拱北軒)이 되니, 곧 지금 박제헌(朴齊憲)의 집이다.
권람(權擥)의 집 목멱산(木覓山) 산기슭의 비서감(祕書監) 동쪽에 있으니, 곧 무학이 정한 암석(巖石)으로 된 터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였으며, 그 서쪽 언덕에 석천(石泉)이 있는데 이름하여 어정(御井)이라 한다. 그 위에 소조당(素凋堂) 옛 터가 있는데,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하였다. 지금은 녹천정(鹿川亭)이 되었는데, 박영원(朴永元)이 차지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의 집 낙선방(樂善坊) 생민동(生民洞)에 있다. 반송(盤松)이 있어 육신송(六臣松)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말라 죽었다.
상진(尙震)의 집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다. 예전 전례에 대가(大駕)가 이곳을 지날 때에는 액례(掖隷)들이 동명(洞名)을 불러 고하면 임금이 반드시 수레 위에서 허리를 굽혔으며, 그 동리를 이름하여 상정승동(尙政丞洞)이라 하였다.
정광필(鄭光弼)의 집 회현방(會賢坊)에 있다. 은행나무[鴨脚樹]가 있는데, 신인(神人)이 서대(犀帶 정1품ㆍ종1품관이 띠던 띠) 열두 개를 이 나무에 걸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동리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들 회현동(會賢洞)이라고 부른다. 정씨들은 또 남문 밖에도 산다.
이안눌(李安訥)의 집 낙선방 묵사동(墨寺洞)에 있는데, 비파정(琵琶亭) 위에 시단(詩壇)이 있다. ○ 위에 훈국(訓局) 군병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정숙옹주(貞淑翁主)의 집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장악원(掌樂院)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뜰이 좁고 이웃집이 곁에 붙어 있어 말소리가 서로 들리며, 처마가 낮고 짧아 막히고 가리운 데가 없었다. 옹주가 조용히 임금에게 아뢰기를, “땅을 사서 넓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선묘가 하교하여 이르기를, “소리가 낮으면 들리지 않고, 처마를 가리면 보이지 않을 것이니, 뜰을 어찌 반드시 넓게 하겠는가.” 하며, 발 두 부(部)를 하사하면서, “이것으로 가려라.” 하였다. 그 후로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발을 내려 보냈다. ○ 지금은 윤치의(尹致義)의 집이 되었다.
한준겸(韓俊謙)의 집 □□방에 있다. 같은 종문의 여러 한씨 집이 많이 동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이 자주 난정 수계회(蘭亭修禊會)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동명을 난정동(蘭亭洞)이라 하였다.
박승종(朴承宗)의 집 낙선방에 있다. 별원(別園)은 후조당(後凋堂) 동편 산기슭에 있다. ○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있었는데, 서궁은 성 서쪽 백악산(白岳山) 아래 있다. 그러므로 당(堂)을 짓고 백악을 바라보며 읍백(挹白)이라 현판하였으니, 대개 서궁에 공읍(拱挹)한다는 의미이다.
조형(趙珩)의 집 명철방(明哲坊)에 있는데, 일감정(一鑑亭)이 있다. 후손들이 근방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들 청녕교 조씨(淸寧橋趙氏)라고 부른다 한다.
윤선도(尹善道)의 집 명례방 종현(鐘峴)에 있다. 지금도 주춧돌에 먹으로 쓴 여산부동(如山不動)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바람과 비에 씻기지 않았다. 혹은 허목(許穆)의 글씨라고도 하며 집터는 연소형(燕巢形)이라고 한다.
김석주(金錫冑)의 집 회현방(會賢坊) 회현동 남산 기슭에 있는데, 청성군(淸城君) 김석주가 지은 것이다. 청성이 어렸을 때 얼굴의 생김새가 범 같았는데, 범은 의당 산에 있어야 한다고 여겨, 드디어 거처하는 누대를 재산(在山)이라고 이름하였다. 담장 밖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곧 손수 심은 소나무이다. 19번 꺾어진 폭포가 있고 그 아래 우물이 있는데, 맛이 매우 향기롭고 차다. 우물이 푸른 석벽 위에 있는데, 창벽(蒼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문명(趙文命)의 집 낙선방(樂善坊) 묵사동(墨寺洞)에 있다. 귀록정(歸鹿亭)이 있는데, 일찍이 푸른 실로 사슴을 정자 아래에 매어 두었다.
심강(沈鋼)의 집 회현방 분호조(分戶曹) 앞에 있는데, 지금도 심본금(沈本衿)이라고 한다. 선묘조 계사년에 환도(還都)한 후에 궁궐과 종묘가 새로 병화[兵燹]를 겪었으므로 부득이 종묘 신주를 이 집에 봉안하였다.
홍현주(洪顯周)의 집 □□방 이전동(履廛洞)에 있는데, 외당(外堂)에 금옥당(金玉堂)이라고 전자로 현판을 써서 걸었다. ○ 순조의 어필로 원정(園亭)이라 썼으며, 시림정(市林亭)은 익종(翼宗)의 어필이다.
서부(西部)
이숙번(李叔蕃)의 집 □□방에 있다. 숙번이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크게 전장과 집을 만들었는데, 인마(人馬)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싫어하여 문(門)을 막고 사람들이 통행을 금하였다.
신개(申槪)의 집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중 무학이 터를 잡은 곳이다. 양체당(養棣堂)이 있다.
이황(李滉)의 집 □□방 학교(鶴橋)에 있다. 선생이 이 동리에 살았으므로, 승지(勝地)라고 한다. 뜰에 노송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다. 병란 후에 도성 안의 교목(喬木)이 모두 없어졌지만 이 나무만이 그대로 푸르러서 하늘에 닿았다. 신해년 봄에 홀연히 부러지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고 의아(疑訝)하게 여겼더니, 그 해 여름에 인홍(仁弘)이 박여량(朴汝樑)의 무리를 사주하여, 상소하여 퇴계(退溪)를 훼방하기를 못할 일이 없이 하니 나무 부러진 변고가 여기서 과연 징험이 되었다.
최규서(崔奎瑞)의 집 황화방 소정동(小貞洞)에 있다. 영종 4년에 역적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는데, 공이 봉조하(奉朝賀)로 물러나 용인(龍仁)에 거주하다가 기미를 알고 달려와 고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공훈의 명칭을 치사(致仕)한 원로에게 더하는 것은 경례(敬禮)하는 뜻이 아니다.” 하면서, 손수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각(閣)을 지어서 그 집에 간직하게 하니 이름을 어서각(御書閣)이라 한다.
신수근(愼守勤)의 집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는데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북부(北部)
허종(許琮)의 집 인달방(仁達坊) 사직단(社稷壇) 앞 길가에 있다. ○ 종(琮)이 일찍이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성종(成宗)이 사직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종의 집에 들러서 그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당시에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감격하고 분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종이 그때 아우 침(琛)과 함께 살았으므로 그 집 앞의 다리를 종침교(琮琛橋)라고 부른다.
성수침(成守琛)의 집 백악산(白岳山) 아래 유란동(幽蘭洞)에 있다. 소나무 숲 속에 서당 몇 칸을 지어서, 청송당(聽松堂)이라고 편액하였다. ○ □□가 그때의 일이 크게 그릇되었음을 보고 고향에 돌아가려 할 때, 수침과 작별하려고 청송당에 이르렀더니, 수침이 없었다. 이에 벽에 한 수 절구(絶句)를 적었는데, 그 첫 구에 이르기를, “은근하게 잘 있구나 두 그루 소나무, 저무는 해 풍상에도 그 모습 바꾸지 않았네.” 하였다. 대개 소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수침에게 비유한 것이다. ○ 동산 중턱에 금오(金吾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들이 기예를 익히는 곳이 있다.
이기설(李基卨)의 집 삼청동(三淸洞)의 평지가 다한 끝 바로 북악(北岳)이 내려와서 밑에서 뭉친 백련봉(白蓮峯) 아래에 있다. ○ 석벽(石壁)에 영월암(影月巖)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 인왕산(仁王山)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조희신(趙希臣)의 집 순화방에 있다. 아우 희철(希哲)과 더불어 모두 그 효행이 정표(旌表 사람의 선행을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 표창함)된 까닭에 지금 쌍효자(雙孝子) 거리라고 일컫는다.
성삼문(成三問)의 집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바로 장원서(掌苑署) 뜰 앞이다. 예전에 손수 심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뒤에 사람들이 베어서 거문고를 만드는 재목으로 삼았다.
유관(柳灌)의 집 진장방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다. ○ 하의(荷衣 별호) 홍적(洪迪)의 〈유정승의 옛집 잣나무를 보고 느낌이 있어〉 라는 시에 이르기를, “옛 잣나무 푸르고 푸르러 그림 처마 덮었으니, 겹겹한 그 그늘에 석양 햇빛 얼마나 더했던가. 서리 내린 뿌리에 궂은 비 다시 뿌리니, 지나는 나그네 무정하지만 눈물 저절로 적시네.” 라고 하였다.
이염의(李念義)의 집 인왕산 기슭 백운동(白雲洞)에 있다.
소세양(蘇世讓)의 집 인왕산 아래 인왕동에 있다. 청심당(淸心堂)ㆍ풍천각(風泉閣)ㆍ수운헌(水雲軒)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헐어졌다.
김상용(金尙容)의 집 순화방 창의동(彰義洞) 청풍계(淸風溪)에 있다. 태고정(太古亭)ㆍ늠연당(凜然堂)이 있고 선원(仙源 김상용의 별호)의 화상을 봉안했다. 후손들이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 창의동 김씨라고 일컫는다. 시내 위의 돌에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百世淸風)’이라는 8자를 새겼다. ○ 순조(純祖)와 익종(翼宗)이 일찍이 봄날에 들린 일이 있다.
김수항(金壽恒)의 집 백악산 아래에 있는데, 육상궁(毓祥宮)과 담이 붙었다. 무속헌(無俗軒)이 있다.
민유중(閔維重)의 집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바로 인현왕후(仁顯王后 숙종의 비 민씨)가 왕후 자리에서 물러나서 살던 사제(私第)가 있던 곳이다. 감고당(感古堂)이 있다. ○ 또 아래에 보인다.
김주신(金柱臣)의 집 순화방 대은암동(大隱巖洞) 연우궁(延祐宮) 곁에 있다. ○ 양정재(養正齋)가 있는데 인원왕후(仁元王后 숙종의 계비(繼妃) 김씨)가 난 곳이다.
연령군(延齡君)의 집 북부 안국방에 있는데, 바로 영안군(永安君) 홍주원(洪柱元)의 옛집이다. 인목왕후(仁穆王后 선조의 계비 김씨)가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지어 주었는데, 궁실과 정원이 매우 넓고 뛰어나서 성 안에서 제일가는 집이다. 지금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철종의 생부)의 사당이 되었다.
이완(李浣)의 집 관인방(寬仁坊) 대사동(大寺洞)에 있다. 이완이 죽은 지 20년 뒤에 민종도(閔宗道)가 빼앗아 살았다. 뜰에 상공이 손수 심은 배나무가 있는데, 민가가 들어가 사니 열매를 맺지 않더니, 갑술년 뒤에 이정승의 서손(庶孫)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되찾아 들어가니 뜰의 배가 다시 열매를 맺었다.
박명원(朴明源)의 집 □□방 제생동(濟生洞)에 있다. 정종(正宗)이 일찍이 여기 거둥하여 편액을 하사하여 만보정(晩葆亭)이라고 했다.
동문(東門) 밖 유관(柳寬)의 집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다. 집 몇 칸에 울타리가 없었는데,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그 집에 가서 대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알리지 않게 했다. ○ 일찍이 장마비가 달이 지나도록 내려서 집이 마치 삼대 같이 새는데, 공이 우산을 들고 비를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까.”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은 반드시 대비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웃었다.
영순군(永順君) 부(溥)의 집 안암동(安巖洞)에 있다. 성종 14년에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비 윤씨)가 온천에 갔다가 행궁(行宮)에서 돌아가시어 찬궁(欑宮)으로 봉환할 때 이 집에 임시로 봉안했다. 후손들이 지금까지 전하여 지킨다.
서남문(西南門) 밖 이정보(李廷俌)의 집 □□방 만리현(萬里峴)에 있다. 한양에 서울을 정할 때에 무학(無學)의 말에 따라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뒤에 6세손 정암(廷馣)의 3형제가 모두 한림(翰林)이 되어 드디어 한림동이라 부르게 됐다.
홍윤성(洪允成)의 집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다녀간 일이 있다.
강희맹(姜希盟)의 집 숭례문 밖에 있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일찍이 잠시 그곳에 머물러 우거하였다. 매양 그 동산 안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뒤에 즉위하게 되자, 그 소나무에 관작을 내리고 금띠를 두르게 하고, 또 그 문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했다.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다.
윤두수(尹斗壽)의 집 하나는 청파리(靑坡里)에 있었는데, 선지당(先志堂)이 있고, 또 애산당(愛山堂)이 있어, 최립(崔岦)이 기문을 지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하나는 반송방 동자동에 있었는데, 공이 죽은 뒤에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나와서 공의 큰 아들 방(昉)을 찾아와 말하기를, “선공(先公)의 충효가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내가 마땅히 편액을 써서 늘 마음에 두고 사모하던 뜻을 붙이겠습니다.” 하고, 충효당(忠孝堂)이란 세 글자를 벽 위에 특별히 쓰고 돌아갔다.
기건(奇虔)의 집 만리현에 있다. 건이 일찍이 걸어서 반궁(泮宮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과 《대학》을 외웠다.
정광필(鄭光弼)의 집 숭례문 밖 전생서(典牲署) 앞에 있다. 수풀이 빽빽해서 단오에 서울 사람들이 그네 타는 곳이 되었다. 또 남부에도 있다.
이지남(李至男)의 집 숭례문 밖 자연암(紫煙巖)에 있다. 지남이 효행으로 정표 받고, 아내 정(鄭)씨가 정렬(貞烈)로 정표 받고, 큰아들 기직(基稷)ㆍ둘째 아들 기설(基卨)ㆍ딸 처녀가 모두 효행으로 정표 받고,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가 충성으로 정표 받고, 돈오의 아내 김씨가 정절(貞節)로 정표 받고, 돈서(惇敍)가 충성으로 정표 받았으니, 한 가문에서 8정표를 받은 것이 된다. 영종 21년에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 능행(陵幸 임금이 능에 참배하는 것)하는 길에 이지남의 3대가 충ㆍ효ㆍ열 정려(旌閭)로 삼강(三綱)이 모두 한 집안에 빛난 것을 보았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 칭찬하는 법전을 시행하여야겠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제사 받드는 자손에게 녹을 주어 등용하게 하였다.
정연(鄭淵)의 집 반송방 미정동(尾井洞)에 있는데, 지금껏 대대로 전하여 오는 집이다.
서성(徐渻)의 집 숭례문 밖 약현(藥峴)에 있다. 공의 어머니인 이씨는 두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일에 익숙해서, 일찍이 집을 짓는데 공장들을 감독하여 거짓을 부리지 못하게 했다. 목수가 원한을 품고 일을 함부로 해서 손해를 끼치려고 대청의 첫 기둥을 거꾸로 세웠는데, 부인이 나뭇결을 만져보고 목수를 불러서 꾸짖었더니, 목수가 놀라고 감복해서 감히 다시는 속이지 못했다.
민유중(閔維重)의 집 반송방의 고거자동(古車子洞)에 있다. 인현왕후가 탄생한 옛집으로서 영종 37년에 누각을 세우게 하고 임금이 손수 글씨를 써서 비를 세우고, 그 동리를 추모동(追慕洞)이라고 명명했다.
무슨 동리인지 알 수 없는 것.
이득분(李得芬)의 집 태조 5년에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비 강씨)가 옮겨 살다가 돌아가신 곳이다.
안기지(安耆之)의 집 세조 5년에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의 비 한씨)가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기지】 연서별서(延曙別墅) 북부 연서역촌에 있었다. 인조가 즉위하기 전의 별서(別墅 별장)였으며, 숙종 을해년에 임금이 글을 지어 비를 세웠다.
추흥정(秋興亭) 용산강에 있으며,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이 있다.
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쌍계재(雙溪齋) 성균관(成均館)의 반수(泮水) 동쪽에 있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의 부(賦)가 있다.
침류당(枕流堂) 한강에 있었는데, 경력(經歷 관직명) 이사준(李師準)의 별장이다.
무풍정(茂豐正)의 별서 양화도(楊花渡)에 있었다.
성현(成俔)의 집 약전현(藥田峴)에 있었는데, 언덕을 뒤에 두고 집을 지었다. 개국 초에 중 무학이 터를 잡아서 성씨에게 주었다. ○ 허백당(虛白堂 성현의 별호)이 밤 경치를 감상하며 홀로 뒷동산에 올라 시를 낭송하는데, 때마침 밤 닭이 울려하고 달빛은 희미하게 밝았다. 손이 와서 자고있다가 잠을 깨서 창문 틈으로 엿보고는, 신선이 내려왔다고 여겨 황망히 일어나 뒤쫓아갔는데, 서로 보고서는 크게 웃었다고 한다. 성씨가 서로 전한 지 또 2백여 년이었고, 그 뒤로는 더 지키지 못하였다. 뒤에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의 집이 되었다.
남재(南在)의 집 남부 명철방(明哲坊) 제이리(第二里)에 있었는데, 바로 나라에서 내려준 집이다. 집 근처에 한 바위가 있어서 그 모양이 거북을 닮았으므로 드디어 귀정(龜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남소동(南小洞) 안에 구유바위[槽巖]가 있는데 귀정의 옛 터라고 한다. 아마도 구유바위의 말소리가 바뀌어 귀정이 된 것 같다.
남이(南怡)의 집 동부 □방에 있었는데, 사람이 감히 살지 못했기 때문에 드디어 없어져서 채소밭이 되었다. ○ 뜰에 반송(盤松)이 있는데 비길 데 없이 커서, 32 개의 기둥으로 떠 받쳤다. 애송(愛松)이라 부른다. 이 소나무는 바로 영종 정해년에 부사(府使) 조진세(趙鎭世)가 심은 것이라 한다.
손순효(孫舜孝)의 집 남부 명례방(明禮坊) 상층(上層)에 있었다. 성종이 어느 날 저물녘에 두세 명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慶會樓) 올라 남산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몇 사람이 숲이 드문 곳에 둘러 앉아 있었다. 성종이 그것이 순효인줄 알고 곧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가 두 손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에는 오이뿐이었다. 임금이 술과 안주를 하사하니 순효가 손들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실컷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이 집은 지금은 없어졌다.
이행(李荇)의 서옥(書屋 서재) 목멱산(木覓山) 기슭의 청학동(靑鶴洞)에 있었다. 집 뒤에 병풍 바위[屛巖]와 반석이 있어서 그윽하고 고요하기가 사랑할 만하였다. 중국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모두 시를 읊은 것이 있다. ○ 길 양쪽에 소나무ㆍ노송나무ㆍ복숭아나무ㆍ버드나무를 심었다.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서 여기에서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며 늙음을 마쳤다.
정여창(鄭汝昌)의 집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었다. 그래서 일두(一蠹 정여창의 호)의 후손이 해마다 그곳에 사는 민가에서 텃세를 거둔다.
윤관(尹寬)의 정사 쌍계동(雙溪洞)에 있었다. 윤이 동리 안에 삼휴정사(三休精舍 삼휴는 별호)를 짓고 공부하면서 늙음을 마쳤다.
수진동(壽進洞)에 정도전(鄭道傳)의 집터가 있었다. 제용감ㆍ사복시ㆍ중학이 모두 그 옛터라 한다. ○ 송현(松峴)에 있는 달성위(達城尉 이름은 서경주(徐景霌)의 집은 바로 옛날 판서 유자신(柳自新)이 살던 곳이다. ○ 대정동(大貞洞)에 하징(夏徵)의 집터가 있다. ○ 누국동(漏局洞)에 김사계(金沙溪 이름은 장생(長生))의 옛집이 있는데, 지금까지 서로 전해 온다. ○ 태평관(太平館)에 박사암(朴思庵 순(淳))과 이아계(李鵝溪 산해(山海))의 옛집이 있다. ○ 창동(倉洞)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옛집이 있다. ○ 회현동에 선복교(善復橋)가 있다. ○ 장흥동(長興洞)에 박읍취헌(朴挹翠軒 은(誾))과 심일송(沈一松 희수(喜壽))의 옛집이 있다. ○ 낙동(駱洞)에 정고옥(鄭古玉 작(碏))의 옛집이 있다. ○ 나석좌(羅碩佐)가 살던 곳은 나대장동(羅大將洞)이라고 일컫는다. ○ 교서관동(校書館洞)에 임경업(林慶業)과 채호주(蔡湖洲 유후(裕後))의 옛집이 있고, 예관 부군당(藝館府君堂)에 임 장군의 화상을 그려놓고 제사지낸다. ○ 필동(筆洞)에 윤미촌(尹美村 선거(宣擧))의 옛집이 있다. ○ 옛날 묵사(墨寺)가 있던 곳에 송송정(宋松亭)이 있으니, 곧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송정이다. ○ 쌍리문동(雙里門洞)은 이첨(爾瞻 성은 이)이 살던 곳인데, 광해군 폐위시에 권세가와 귀족들이 많이 살았고, 윤희굉(尹希宏)도 살았다. ○ 묵사동(墨寺洞)에 찬신정동(纘新井洞)이 있고 남소동(南小洞)에 이동고(李東皐 준경(浚慶))의 옛집이 있다. ○ 허적(許積)이 현종조에 동현(銅峴)에 체찰부(體察府)를 설치했으므로 체부청동(體府廳洞)이 동현에 있다. ○ 대은암(大隱巖) 바위 곁에 옥랑(屋廊 제(第)와 같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한 작은 집)이 있는데, 바로 송귀봉(宋龜峯 익필(翼弼))이 태어난 곳이며, 낭옥은 지금도 있다. ○ 삼청동문 곁에 민로봉(閔老峯 정중(鼎重))의 옛 집이 있다. ○ 만리탄(萬里灘)은 곧 백악산 기슭 남곤(南袞)의 집 뒤에 있는데, 박읍취헌이 이름지어졌다. ○ 청석동(靑石洞)은 대사동 서쪽에서 전의감동으로 통하는 작은 동리인데, 청성(淸城 부원군 김석주(金錫冑))이 옛적 살던 곳인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살던 대사동 집은 바로 정승 신만(申晩)의 집이라 한다. ○ 계생동(桂生洞)은 바로 제생원(濟生院)이다. 이동고의 옛집과 연암(燕庵) 박지원(朴趾源)의 중국식 집이 있다. ○ 맹감사현(孟監司峴)은 감사 맹만택(孟萬澤)이 살던 곳이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 누각동(樓閣洞)은 인왕산 아래에 있다.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지금 그 거리에는 아전으로 늙어 퇴직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꽃과 과실나무를 많이 심어서 생업으로 한다. ○ 장동(壯洞)에는 정송강(鄭松江 철(澈))의 옛집이 있다. ○ 독암(獨庵) 조종경(趙宗敬)의 집은 남문 밖의 염초청(焰硝廳) 곁에 있다. 담 안에 이른 감 두 그루가 있어 잘 열었는데, 길가는 사람이 보고 말하기를, “올 감이 저렇게 만발했는데 팔아서 돈을 거둔다면 그 이익이 얼마나 될까.” 하니, 부인 이씨는 헌납(獻納 관직명) 잠(箴)의 딸인데,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겨 말하기를, “양반 집에서 과일 나무를 심어서 이익을 본다는 이름이 나면 그 어찌 세상에서 떳떳하겠느냐.” 하고, 곧 그 나무를 베어 없애고 집을 팔아 이사했다.
【사묘】 백악신사(白岳神祠) 백악산 정상에 있는데, 봄ㆍ가을에 초제(醮祭)를 거행한다. 중악(中岳)인 삼각산(三角山)을 이곳에서 제사지낸다. 삼각산 신위는 북쪽에 있고 백악산 신위는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목멱신사(木覓神祠) 목멱산 정상에 있는데, 봄ㆍ가을에 초제를 거행한다. 지금은 없어지고 사당만 있다.
한강단(漢江壇) 한강의 북쪽 언덕에 있는데, 봄ㆍ가을마다 제사지낸다.
부군사(符君祠) 각사(各司) 아전의 청방 곁에 있으며, 해마다 10월 1일에 제사지낸다. 세상에서 혹 말하기를, 고려의 시중(侍中 고려 관제의 수상직) 최영(崔瑩)이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깨끗하고 징수를 하지 않아서, 이름이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존숭한다고 한다. 각 고을에도 모두 있다.
통명청(通明廳) 맹인청(盲人廳)이라고도 한다. 영희전(永禧殿) 동쪽 담 밖에 있는데, 김자점(金自點)의 집 옛터라 한다. 국복(國卜 나랏일을 점치는 점쟁이) 한 사람에게 지중추(知中樞)의 직함을 주어 주관하게 한다.
이색(李穡)의 영당(影堂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 중부 수진방에 있는데, 봄ㆍ가을마다 후손이 제사지낸다.
지덕사(至德祠) 숭례문 밖 청파리에 있는데, 곧 양녕대군의 사당이며, 숙종이 이름을 내렸고 정종이 편액을 내렸다. 사당기(祠堂記)가 있다.
신수근(愼守勤)의 사당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다. 영종 기미년에 공에게 영의정 익창부원군(領議政益昌府院君)을 증직(贈職)하고, 임금이 손수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네 글자의 큰 글씨를 써서 내리고, 호조에 명하여 사당 옆에 각(閣)을 지어서 간직하게 했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사당 흥인문(興仁門) 밖 안암동의 옛 집터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사당기가 있다.
심희수(沈喜壽)의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을 때에 제사지내는 사당) 반촌(泮村 반궁 곧 성균관 근처 마을)에 있다. 선조 병오년에 투서한 자가 있어서 명하여 체포하니, 학관원(學官員)이 법을 잘못 집행하여 반례(泮隷 성균관 하인)에 미쳤는데, 공이 장관으로서 밝히기 어려움을 힘써 아뢰어 송사를 종결지을 수 있었다. 공이 죽은 뒤에는 반촌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지낸다.
윤집(尹集)의 사당 서부 반송방 옛집에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지은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윤성준(尹星駿)의 생사당 반촌에 있다. 옛 규례로는 재실 유생들의 식당에서 여종이 상을 나르는데, 급식이 끝난 다음에 규례를 어기고 야비한 짓을 하는 일이 심해졌으므로, 숙종 기축년에 윤성준이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의 장관)으로서 상소하여 이 규례를 폐지하니, 반촌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생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낸다.
화순옹주(和順翁主)의 사당 서부 적선방에 있다. 옹주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상을 당하자, 음식을 끊고 죽었는데, 영종이 손수, “정성이 부족해서 돌이키지 못했구나, 네가 정절을 따랐음을 가상히 여긴다[誠淺莫回嘉隨貞].”라는 8자를 써서 내려 사당 안에 받들어 걸게 하고, 뒤에 정렬을 정표하게 했다.
【역원】 노원역(蘆原驛) 흥인문 밖 4리 떨어진 곳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 밖 3리에 있다. ○ 위의 두 역은 병조에 직속되어 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에 있는데, 누각이 있어 상원(上元 음력 1월 15일)과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에 기로소의 재상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한다. ○ 조말생(趙末生)의 서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홍제원(洪濟院) 홍(洪)은 홍(弘)으로도 쓴다. 추모현(追慕峴) 북쪽에 있는데, 고려 성종 을유년에 중 정현(鼎賢)이 창설한 것이다. 누각이 있어 중국 사신의 옷 갈아입는 곳인데, 뒤에 폐지했다. 인조 26년에 태평관(太平館)과 인경궁(仁慶宮)의 자재를 거두어 관우(館宇)를 옮겨 지어 중국 사신이 유숙하는 곳으로 삼았다.
이태원(梨泰院) 목멱산 남쪽에 있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진란 뒤에 왜인의 귀순한 자를 숭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하여 자연히 한 마을을 이룬 까닭에 이타인(異他人)이라고 일컬었으므로 동리 이름이 되었는데, 뒤에 이름을 고쳤다.
전관원(箭串院) 전관교(箭串橋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다.
【시가】 운종가(雲從街) 곧 종루서가(鐘樓西街)인데 속칭 생선전이라 한다. 영종 경진년에 다시 개국초의 옛 이름을 회복하여 운종가로 고쳤다.
【장시】행상이 모여서 물건을 바꾸고 헤어지는 것을 장(場)이라고 한다.
○ 세상에 전하기를, 신무문(神武門) 밖 북쪽에 예전에 시장이 있었으니, 곧 주례(周禮 주(周) 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책 또 그 제도를 뜻함) 후시(後市)의 뜻이라고 하는데, 지금 상고할 수가 없다. 모두 네 곳이 있다. 종루가상(鐘樓街上)ㆍ이현(梨峴)ㆍ칠패(七牌)ㆍ소의문외(昭義門外)이다.
【시전】 정종(定宗) 원년에 비로소 시전을 설치하니, 좌우 행랑(行廊) 8백여 칸이 혜정교(惠政橋)로부터 창덕궁 입구까지 이르렀다.
유분각전(有分各廛) 각 전 가운데서 형편이 괜찮은 자로, 분수를 헤아려 정해서 국역(國役나라의 일)에 응하게 하고, 유분각전이라고 부르며, 10분에서 1분까지 모두 37전인데, 국역을 당할 때마다 10분전은 10분의 일에 응하고 1분전은 1분의 일에 응하여, 대궐 안팎 여러 상사(上司)의 각처 수리와 도배, 재봉하는 사람도 이에 준해서 나가 일한다.
선전(縇廛) 전의감 동구의 동ㆍ서쪽 곧 종루로(鐘樓路) 북쪽에 있다. 모두 42방(房)인데, 중국산 필로 된 단(緞 겨울 비단)ㆍ초(綃 여름 비단)ㆍ견(絹 봄ㆍ가을 비단) 같은 것을 판다. ○ 저자가 서는 처음에, 먼저 선전을 세웠다. 속칭 입전(立廛)이라 하며, 국역 10분에 응한다.
면포전(綿布廛) 종루로 서쪽에 있는데, 은붙이도 겸하여 팔기 때문에 은목전(銀木廛) 또는 백목전(白木廛)이라고도 부르며, 국역 9분에 응한다.
면주전(綿紬廛) 면포전 뒤, 전옥서 앞에 있는데, 국산 면포와 명주를 팔고, 국역 5분에 응한다.
내어물전(內魚物廛) 이문(里門) 동ㆍ서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건어물을 팔고, 국역 5분에 응한다.
외어물전(外魚物廛) 소의문 밖에 있는데, 국역 4분에 응하며, 내전과 합쳐서 9분역이다.
지전(紙廛) 동전(東廛)은 포전 남쪽에 있고, 서전은 면포전 남쪽에 있는데, 9분역에 응한다.
저포전(苧布廛) 진사전 동쪽에 있는데, 모시와 황모시를 팔며, 국역 6분에 응한다.
포전(布廛) 면포전 건너편에 있으며, 국역 5분에 응하고, 저포전과 합쳐서 11분역이다. ○ 선전으로부터 여기까지 6전을 육의전(六矣廛)이라 하는데, 속칭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 하며, 각 전 중에서 가장 큰 전이다. ○ 예전에는 선전ㆍ면포전ㆍ면주전ㆍ지전ㆍ저포전 및 내외어물전ㆍ청포전을 합쳐서 육의전으로 구분했는데, 지금은 고쳐서 선전ㆍ면주전ㆍ면포전ㆍ내외어물전ㆍ내전을 합쳐 구분하고, 지전ㆍ저포전ㆍ포전의 저ㆍ포를 합쳐 구분해서 육의전으로 하며, 육의전 외에는 난전(亂廛)을 금하지 않는다.
청포전(靑布廛) 종루 동쪽에 있는데, 중국산 삼승포(三升布)와 양털, 모자를 팔며, 국역 3분에 응한다.
연초전(煙草廛) 도가(都家)가 하량교(河良橋) 남쪽에 있으며, 국역 5분에 응한다.
상전(床廛) 물건들을 상 위에 늘어 놓은 까닭에 속칭 상자리전(箱貲利廛)이라 한다. 말총ㆍ가죽ㆍ초[燭]ㆍ실ㆍ책ㆍ휴지 같은 잡물(雜物)을 파는데, 모두 13곳이다. 망문(望門) 상전은 의금부 앞에 있으며 국역 3분에 응하고, 신(新) 상전은 안국동에 있으며, 묘(廟) 상전과 국역 2분씩에 응하고, 동(東) 상전은 종루 남쪽에 있으며, 수진(壽進) 상전과 국역 1분씩에 응하고, 포(布) 상전ㆍ철(鐵) 상전ㆍ필(筆) 상전ㆍ남문(南門) 상전ㆍ염(鹽) 상전은 이전(履廛 신전) 동쪽에 있다. 정릉동(貞陵洞) 상전ㆍ동현(銅峴) 상전ㆍ지(紙 종이) 상전은 모두 국역 분수가 없다.
생선전(生鮮廛) 병문(屛門) 동남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생선을 팔며, 국역 3분에 응한다. 미전(米廛) 여러 가지 곡식을 팔며, 모두 다섯 곳인데, 상ㆍ하 미전은 상전(上廛)이 의금부 서쪽에 있고 하전이 이현에 있어, 국역 3분씩에 응하며, 문외(門外) 미전은 소의문 밖에 있어 국역 2분에 응하며, 서강(西江) 미전과 마포(麻布) 미전은 모두 분수가 없다.
잡곡전(雜穀廛) 철물교(鐵物橋)의 서쪽 가 남ㆍ북쪽에 있으며, 국역 3분에 응한다. ○ 남문안 미전 도가는 수각교(水閣橋) 서쪽에 있어 한달에 40냥을 잡곡전에 납세한다.
유기전(鍮器廛) 바리전이라고도 한다. 내어물전의 서쪽 행랑 뒤에 있는데, 여러 가지 놋그릇을 판다.
은면전(銀麪廛) 전의감 동구 동쪽 가에 있다.
의전(衣廛) 잡곡전 서쪽에 있는데, 남녀가 입는 옷을 판다.
면자전(綿子廛) 광통교 북쪽 가 동ㆍ서쪽에 있는데, 면화전(綿花廛)이라고도 하며, 씨를 뺀 솜을 판다.
이전(履廛) 청포전 동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가죽신을 판다. 이상 5전은 국역 5분에 응한다. ○ 신전은 여러 곳에 있으나 종루전(鐘樓廛)만이 유정혜(油釘鞋 기름 바르고 징을 박은 신)를 판다.
화피전(樺皮廛) 동상전 동쪽에 있다. 여러 가지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데, 물건을 벗나무 껍질로 쌌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부른다.
인석전(茵席廛) 수진동 동구 서쪽에 있으며, 용수석(龍鬚席 용수풀로 만든 자리)ㆍ책상ㆍ걸상 같은 물건을 판다.
진사전(眞絲廛) 의금부 문 밖 동쪽에 있고 여러 가지 당사실ㆍ과실ㆍ갓끈ㆍ띠ㆍ실을 엮어서 만든 끈 같은 물건을 판다.
청밀전(淸蜜廛) 도가는 하피마병문(下避馬屛門) 동쪽 가에 있다.
경염전(京鹽廛) 숭례문 밖에 있으며, 서해에서 구운 소금을 판다.
체계전(髢髻廛) 칠목기전 남쪽에 있는데, 속칭 다리전이라 하며, 부인네의 머리 장식하는 다리를 판다.
내장목전(內長木廛) 여러 곳에 있는데 집을 짓는 재목을 판다.
철물전(鐵物廛) 여러 곳에 있으며, 여러 가지 철물을 판다.
연죽전(煙竹廛) 도가가 둘인데, 하나는 군기시 앞에 있고 하나는 약현에 있으며, 여러 가지 물들인 담뱃대, 담배통을 판다. 위의 9전은 모두 국역 1분씩에 응한다.
시저전(匙箸廛) 모두 내ㆍ외 2전인데 내전은 염탄전(鹽炭廛) 동쪽에 있고 외전은 소의문 밖에 있으며, 국역 1분씩에 응한다.
우전(牛廛)ㆍ마전(馬廛) 양전이 모두 태평교(太平橋)의 남쪽 언덕에 있으며, 1분씩에 응한다. 이상의 41전 가운데서 10전은 분수가 없고, 나머지 31전과 위에 나온 6주비전을 아울러 37전이 된다. 무분각전(無分各廛)ㆍ외장목전(外長木廛) 성 밖에 있다.
채소전(菜蔬廛) 하나는 종루에 있고, 하나는 이현에 있다.
모전(毛廛) 속칭 우전[隅廛]이라 하는데, 처음에 길모퉁이에 설치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으며 토산(土産 그 지방 고유의 산물)의 과실을 판다. 모두 여섯 곳인데 송현(松峴) 모전ㆍ정릉동(貞陵洞) 모전ㆍ상 모전ㆍ하 모전ㆍ전의감동 모전이다.
혜정교잡전(惠政橋雜廛) 우산ㆍ갈대발ㆍ용지(龍脂)ㆍ중간치 횃불[炬] 같은 것을 판다. 세물전(貰物廛) 여러 곳에 있는데 도가는 혜정교 남쪽에 있으며, 혼례ㆍ상례에 쓰는 제구를 세준다.
양대전(涼臺廛) 돈의문 밖에 있다.
잡철전(雜鐵廛) 여러 곳에 있다.
염전(鹽廛) 숭례문 밖에 있고, 마포에도 있다.
백당전(白糖廛) 여러 곳에 있다.
좌반전(佐飯廛) 곧 반찬전인데, 절인 생선ㆍ젓갈 따위를 판다. 모두 네 곳인데, 생선 좌반전ㆍ상미(上米) 좌반전ㆍ내어물(內魚物) 좌반전ㆍ외어물 좌반전이다.
계전(鷄廛) 광통교에 있다.
생치전(生雉廛) 생선전 병문에 있으며, 꿩을 판다.
계란전(鷄卵廛) 생치전 곁에 있다.
저전(豬廛) 각처에 있다. ○ 큰 상사[喪]에는 준례로서 저전 사람이 방상시(方相氏 장례 행렬 맨 앞에서 탈을 쓰고 귀신을 쫓으며 가는 사람)가 된다.
복마제구전(卜馬諸具廛) 종루에 있는데, 나무안장ㆍ말가슴걸이ㆍ고삐ㆍ채찍 같은 것을 판다.
세기전(貰器廛) 잔치에 쓰이는 것을 세주는데, 사기 그릇과 홍칠반(紅漆盤 나무에 붉은 칠을 한 그릇)은 숙수도가(熟手都家 숙수는 요리사 숙수가 모여 있는 곳)에 있다.
승혜전(繩鞵廛) 생마혜(生麻鞋)와 숙마혜(熟麻鞋 삼으로 만든 신. 숙마혜는 익힌 삼으로, 생마혜는 익히지 않는 삼으로 만든 것)를 파는데, 여러 곳에 있으며 도가는 의금부 문밖의 동쪽에 있다.
상ㆍ하목기전(上下木器廛) 상전은 육조 앞에 있고, 하전은 이현에 있는데, 모판ㆍ싸리농[杻籠]ㆍ성긴 싸리농ㆍ키ㆍ궤짝 같은 것을 판다.
칠목기전(漆木器廛) 여러 가지 나무 그릇과 장(欌)을 팔기 때문에 장전이라고도 부르며, 무늬 있는 나무장ㆍ종이장ㆍ방장(房欌) 따위를 판다. 여러 곳에 있는데, 효경교(孝經橋)에 지금 가장 많다.
등전(鐙廛) 곧 마상전(馬床廛)인데, 광통교 곁에 있으며, 지상전(紙上廛)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는 지전 앞에 있는데 말안장을 판다.
백립전(白笠廛 국상이 있으면 사용하는 흰말총으로 만든 갓)ㆍ흑립전(黑笠廛) 양전의 도가는 어의동 병문에 있다.
초립전(草笠廛) 청포전 서쪽에 있다.
자기전(磁器廛) 종루와 숭례문 밖에 있는데, 토산 자기와 중국 자기를 판다.
침자전(針子廛) 은침(銀針)과 크고 작은 보통 바늘을 판다.
분전(粉廛) 모두 넷인데, 하나는 영희전 동쪽 안팎에 둘씩 있다. 또 여러 곳에 있는데, 분ㆍ연지ㆍ색실을 팔며, 방물전(方物廛)이라 부른다. 여자 장사가 다니며 팔거나, 앉아서 팔기도 한다.
족두리전(簇頭里廛) 종루에 있는데, 부인네의 머리 장식품을 판다.
망건전(網巾廛) 하나는 종루에 있고, 하나는 소의문 밖에 있다.
내전립전(內氈笠廛) 마전교에 있다.
외전립전(外氈笠廛) 돈의문 밖에 있다.
파립전(破笠廛) 여러 곳에 있는데, 도가는 어의동에 있다.
고초전(蒿草廛) 숭례문 밖과 흥인문 밖에 있는데, 지붕을 잇는 짚과 울타리 대싸리를 판다.
초물전(草物廛) 소의문 밖에 있는데, 생삼[生麻], 삶은 삼ㆍ칡[葛]ㆍ노끈ㆍ왕골ㆍ기령풀 따위를 판다.
죽물전(竹物廛) 숭례문 밖에 있는데,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대로 만든 물건들을 판다.
이저전(履底廛) 창전(昌廛)이라고도 한다. 입전동(笠廛洞)에 있는데, 소가죽신 창을 판다. 시목전(柴木廛) 용산 강변에 있다.
파자전(笆子廛) 성 밖에 있다.
합회전(蛤灰廛 조개껍질을 구워서 만든 회) 하나는 이현 아래에 있고, 하나는 육조 앞에 있다.
전족전(箭鏃廛 화살과 촉) 이교남천(二橋南川) 가에 있다.
도자전(刀子廛) 종루 거리 위에 있는데 거리에 앉아서 장도ㆍ은비녀ㆍ부인네의 패물ㆍ금 은 가락지ㆍ담배통을 판다.
염수전(鹽水廛)ㆍ종자전(種子廛) 여러 곳에 있으며, 채소ㆍ쪽ㆍ연지풀의 씨앗을 판다.
교자전(轎子廛) 회현방 동구에 있으며, 여러 가지 가마를 판다.
형파전(荊把廛) 성 밖에 있으며, 나무꾼이 쓰는 갈퀴를 파는데, 갈퀴라는 것이 즉 형파(荊把)이다. 이 밖에 소소한 여러 전은 종류가 번다해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전에 없거나 드문 물건은 평시서(平市署)에서 나누어 정해주어서 육의전에 무역해 들인다. 붙임 감고(監考) 일이소(一二所)가 있는데 각 전 사람 중에서 착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뽑아서, 일이소의 감고로 정하고, 해마다 중국으로 사신이 갈 때 세폐(歲幣)로 가져갈 생상목(生上木 상등면포)을 일이소 감고처에서 2통 40자씩 값을 받고 올린다. 뒤에 금계(金契)의 공인(貢人 조공을 바치러 가는 사람)과 더불어 요역(徭役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것)하여 삯을 받고, 세폐 1백 25바리를 평산부(平山府)에 운반해 놓는다.
【포사】 서적포(書籍舖) 정도전의 서문이 있다. ○ 상고해 보건대, 개국 초에 가게를 열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만둔 것 같다.
책사(冊肆) 정릉동 병문에도 있고, 육조 앞에도 있는데,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百家 여러 학자 또는 그 학파)의 여러 가지 책을 판다.
서화사(書畫肆) 대광통교(大廣通橋) 서남쪽 개울 가에 있는데, 여러 가지 글씨와 그림을 판다.
금교세가(金轎貰家) 여러 곳에 있는 종친ㆍ옹주ㆍ공주의 옛집에서 세주는 것인데, 혼인하는 신부의 집에서 쓴다.
약국(藥局) 동현의 좌ㆍ우 거리에 있고 또 여러 곳에 산재하는데, 대신의 관청이나 여러 군영에는 다 약방이 있다.
현방(懸房) 소를 잡아 고기를 파는 곳이다. 반인(泮人 성균관에 딸려 있으며 대대로 쇠고기를 팔던 사람. 관인이라고도 한다.)이 그 파는 일을 맡았는데, 고기를 걸어 놓고 파는 까닭에 현방이라 부른다. 중부 다섯 곳인데, 하량교ㆍ이전(履廛)ㆍ승내동(承內洞)ㆍ향교동(鄕校洞)ㆍ수표교이고, 동부 세 곳인데 광례교(廣禮橋)ㆍ이교(二橋)ㆍ왕십리이고, 남부 네 곳인데, 광통교ㆍ저동ㆍ호현동(好賢洞)ㆍ의금부이고, 서부 일곱 곳인데, 태평관ㆍ소의문 밖ㆍ정릉동ㆍ허병문(許屛門)ㆍ야주현(冶鑄峴)ㆍ육조 앞ㆍ마포이고, 북부 세 곳인데, 의정부ㆍ수진방ㆍ안국방으로 합쳐서 스물 세 곳이다.
붙임 향도(香徒 상여꾼) 는 소광통교(小廣通橋) 남쪽에 있고, 수표교의 남쪽 개울 가의 동쪽에도 있으며, 또 여러 곳에 산재한다.
【장방】 금방(金房) 여러 곳에 있으며, 또 금박(金箔 금을 엷게 입히는 것)하는 집이 있다. 은방(銀房) 도가가 둘인데, 하나는 백목전 도가(白木廛都家) 남쪽에 있고, 하나는 내어물전 북쪽의 향도정동(香徒井洞)에 있다.
옥방(玉房) 여러 곳에 있는데, 비녀ㆍ가락지 따위를 판다.
두석방(豆錫房 두석은 주석) 도가는 다래전 남쪽에 있다.
능라방(綾羅房) □산루(□山樓)에 있고 또 여러 곳에 있다.
주피방(周皮房) 안장 따위를 만들며, 도가는 장악원 건너편에 있다.
궁방(弓房) 내방(內房)은 도총부 북쪽에 있고, 외방은 마전교에 있다.
시방(矢房) 역시 내ㆍ외방이 있고, 또 여러 곳에 있다.
사모방(紗帽房) 여러 곳에 있다.
각대방(角帶房) 여러 곳에 있다.
도자방(刀子房) 여러 곳에 있다.
안경반(眼鏡房) 여러 곳에 있다.
석경방(石鏡房 예전의 구리 거울 등에 대하여 지금의 유리 거울을 말함) 여러 곳에 있다. 모의방(毛衣房) 여러 곳에 있다.
필방(筆房) 여러 곳에 있다.
입방(笠房) 여러 곳에 있다.
연죽방(煙竹房) 여러 곳에 있다.
【공장】서울의 여러 중앙 관서의 장인(匠人 기술자)은 그 관계 서류를 작성하여 공조와 소속 관서에 비치하며, 가장 긴요한 장인이 궐원이 있을 때에는 군인ㆍ보솔(保率)ㆍ관속(官屬 관청의 최하급 관원)ㆍ공천(公賤 관청 소속의 하인)을 막론하고 합당한 사람으로 차출하여 정한다. ○ 옹기점 장인은 군병이거나 공천ㆍ사천을 물론하고 그릇 굽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자를 공조에서 세를 거두어 채용하며, 무쇠 장인의 인원수가 모자라는 것은 모자라는 대로 곧 보충한다. ○ 사옹원(司饔院)의 사기그릇[沙器] 장인은 그 자손이 다른 일에 충당되지 않고 대를 잇는다. ○ 공조에는 초립장(草笠匠) 8명, 사모장(紗帽匠) 2명, 도다익(都多益) 2명, 다회(多繪) 2명, 망건장(網巾匠) 2명, 모자장(帽子匠) 2명, 옹장(瓮匠) 13명, 화장(和匠) 4명, 은장(銀匠) 8명, 금박장(金箔匠) 2명, 과피장(裹皮匠) 2명, 화혜(靴鞋) 6명, 숙피장(熟皮匠) 10명, 화아(花兒)10명, 사피장(斜皮匠) 4명, 전장(氈匠) 4명, 입사장(入絲匠) 2명, 칠장(漆匠) 10명, 두석장(豆錫匠) 4명, 주장(鑄匠) 20명, 나전장(螺鈿匠) 2명, 유장(鍮匠) 8명, 배첩장(褙貼匠) 2명, 침장(針匠) 2명, 경장(鏡匠) 2명, 조각장(雕刻匠) □명, 동장(銅匠) 4명, 주피장(周皮匠) 6명, 한치장(汗致匠) 2명, 안롱장(鞍籠匠) 2명, 간다개(看多介) 2명, 필장(筆匠) 8명, 죽장(竹匠) 2명, 추골장(鞦骨匠) 2명, 인장(印匠) 2명, 수철장(水鐵匠) 30호(戶), 대ㆍ중ㆍ소야장(大中小冶匠) 각 10명, 야장(冶匠) 4명, 주장(珠匠) 2명, 점보로(䩞甫老) 2명, 매즙(每緝) 2명, 안자장(鞍子匠) 10명, 어적(於赤) 4명, 점장(䩞匠) 2명, 목소장(木梳匠) 2명, 소성장(梳省匠) 2명, 통개장(筒介匠) 2명, 첩선장(貼扇匠) 4명, 표통장(表筒匠) 2명, 칭자장(稱子匠) 2명, 원선장(圓扇匠) 2명, 죽소장(竹梳匠) 10명, 침선장(針線匠) 6명, 초염장(草染匠) 6명, 목영장(木纓匠) 4명이다. ○ 봉상시에는 옹(瓮) 10, 화(花) 6, 변두(邊荳) 4이다. ○ 내의원에는 분(粉) 2, 향(香) 2이다. ○ 상의원에는 능라(綾羅) 1백 5, 장립(章笠) 6, 유립(襦笠) 2, 사모 4, 양태(涼太) 2, 도다익 2, 다회(多繪) 4, 망건 4, 모자 2, 도련(擣鍊) 2, 잠(箴) 10, 옥(玉) 10, 옹(瓮) 10, 화(和) 8, 은 8, 금박 4, 과피 4, 화(靴) 10, 피혜(鞁鞋) 8, 숙피 8, 화아(花兒) 4, 침피(針皮) 4, 모의 8, 전 8, 입사(入絲) 4, 모관(毛冠) 2, 사금(絲金) 4, 칠 8, 두석 4, 마조(磨造) 4, 궁현(弓絃) 4, 유칠(油漆) 2, 주(鑄) 4, 나전 2, 하엽사(荷葉絲) 2, 생피(生皮) 2, 유(鍮) 2, 배첩(褙貼) 4, 침 2, 경(鏡) 2, 풍물(風物) 8, 조각 4, 묵(墨) 4, 동(銅) 4, 궁인(弓人) 18, 시인(矢人) 21, 도자(刀子) 6, 야(冶) 8, 연(鍊) 10, 매즙 4, 목소(木梳) 2, 재금(裁金) 2, 도목개(都目介) 2, 도결아(都結兒) 2, 웅피(熊皮) 2, 전피(猠皮) 2, 화빈(火鑌) 2, 죽소(竹梳) 2, 환도(環刀) 12, 침선 40, 합사(合絲) 10, 청염(淸染) 10, 홍염(紅染) 10, 세답(洗踏) 8, 도침(擣砧) 14, 연사(鍊絲) 75, 방직(紡織) 20, 초염(草染) 4이다. ○ 군기시에는 칠 12, 마조(磨造) 12, 궁현(弓絃) 6, 유칠 2, 주 20, 생피 4, 갑(甲) 35, 궁인(弓人) 90, 시인(矢人) 1백 50, 쟁(錚) 11, 아교(阿膠) 2, 고(鼓) 4, 연사(鍊絲) 2이다. ○ 교서관에는 야 6, 균자(均字) 40, 인출(印出) 20, 각자(刻字) 14, 주 8, 조각 8, 목(木) 2, 지(紙) 4이다. ○ 사옹원에는 사기 3백 80이다. ○ 내자시에는 옹 8, 화(花) 20, 방직 30, 잠(箴) 2이다. ○ 내섬시에는 옹 8, 방직 30, 잠 2이다. ○ 사도시(司導寺)에는 옹 8이다. ○ 예빈시에는 옹 8, 화 6이다 ○ 사섬시(司贍寺)에는 인출 2, 저폐(楮幣) 2 이다. ○ 선공감에는 마조 8, 조각 10, 죽 20, 목 60, 석(石) 40, 개(蓋) 20, 이(泥) 20, 도분(塗粉) 20, 돌(堗) 8, 거(車) 10, 우산(雨傘) □, 단(簞) 10, 염(簾) 14, 파자(把子)10, 상화롱(牀花籠) 4, 석회(石灰) 6, 마미사(馬尾篩) 4, 통(桶) 10, 아교 2 이다. ○ 제용감에는 숙피 2, 모관(毛冠) 2, 화엽사(花葉絲) 2, 분 2, 황단(黃丹) 2, 절죽(截竹) 2, 홍염(紅染) 10, 도침(擣砧) 6, 세답(洗踏) 4, 침선 24, 방직 30, 잠 2, 청염(靑染) 20이다. ○ 장악원에는 풍물 4, 황엽(簧葉) 2이다. ○ 관상감에는 자격(自擊) 10이다. ○ 전설사(典設司)에는 침 2, 다회(多繪) 6이다. ○ 전함사에는 선(船) 10이다. ○ 내수사(內需司)에는 옹 7, 야 2, 도 10, 유 5, 수철(水鐵) 6호(戶), 대중소야 각2, 사기 6, 목 2이다. ○ 소격서에는 옹 4이다. ○ 사온서는 옹 4이다. ○ 의영고는 옹 4, 촉(燭) 4이다. ○ 장흥고는 균(菌) 8, 도배(塗褙) 8이다. ○ 장원서에는 옹 8이다. ○ 사포서는 옹 10이다. ○ 양현고는 옹 □이다. ○ 조지서는 목 2, 염(簾) 8, 지 81이다. ○ 도화서는 배첩 2이다. ○ 와서는 와(瓦) 40, 잡상(雜象) 4이다. ○ 귀후서는 목 4, 야 2, 칠 2이다. (봉상시 이하는 장(匠) 자를 쓰지 않았다.) ○ 이상의 여러 관서 중에서 사섬시ㆍ전함사ㆍ소격서ㆍ사온서ㆍ귀후서는 지금 모두 폐지되고, 내자시ㆍ내섬시ㆍ사도시ㆍ예빈시ㆍ제용감, 전설사ㆍ장악원ㆍ사포서ㆍ양현고ㆍ도화서는 지금 공장(工匠)이 없으며, 그 밖의 여러 관서는 명색이 새로운 것과 예전대로 있는 것이 서로 차이가 있고, 인원수의 더하고 덜한 것이 일정하지 않은데, 적(籍)을 만들어서 공조에 두는 규례를 폐지하여 행하지 않고 속전(續典 속대전)을 만들 때에도 거론되지 않은 까닭에 지금도 모두 예전 그대로 하고 고치지 않았다. 금장ㆍ은장ㆍ옥장ㆍ두석장(豆錫匠)ㆍ목수ㆍ석수ㆍ소목장(小木匠)ㆍ대정(大丁) 쇠를 부어 칼이나 잡물을 만드는 사람을 속칭 대정이라 한다. ㆍ조주장(造主匠 신주 만드는 공장)ㆍ관곽장(棺槨匠)ㆍ모의장(毛衣匠)ㆍ안장장(鞍粧匠)ㆍ주자장(鑄字匠)ㆍ숙수장(熟手匠)ㆍ각수장(刻手匠)ㆍ장책장(粧冊匠)ㆍ칠장은 모두 지금 세상에서 통용하는 장색(匠色 색은 종류라는 뜻)이다.
【원묘】 의소묘(懿昭墓) 북부 아현(阿峴)의 서쪽, 연희궁(延禧宮)의 동쪽에 있다.
효창묘(孝昌墓) 서부 청파(靑坡) 서쪽에 있다.
선희묘(宣禧墓) 연희궁(延禧宮) 대야동(大野洞)에 있다. 의빈성씨 묘(宜嬪成氏墓) 효창묘의 왼쪽 언덕에 있다.
【불우】대체로 절은 새로 창건하지 못하며, 다만 옛터를 중수하는 자는 양종(兩宗 교종ㆍ선종의 두 종)에 고하고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啓聞 임금에게 알리는 것)하며, 능침(陵寢)에 가까운 곳에 사찰을 새로 세우는 것은 엄금한다. 서울의 여러 관서나 궁방(宮房)의 원당(願堂 부처에게 원하는 집)은 일체 혁파했다. ○ 승과시험을 보아 승(僧)이 된 자는 3개월 안으로 선종(禪宗)에 고하고, 혹 교종(敎宗)은 경의 암송을 시험보는데,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하고 정전정포(丁錢正布 부역이나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에 바치는 포목) 30필을 걷고 도첩(度牒)을 내어 준다.
흥천사(興天寺) 서부 황화방의 정릉 동쪽에 있는데, 본래 고려의 옛절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 태조의 연호) 정축년에 중건하여 선종이 되었다. 권근의 기문이 있으며, 사리각(舍利閣)이 있어 우뚝한 높이가 5층이고 서울 안에 높이 섰으며, 보물과 불경을 그 안에 간직하였다. 능을 옮긴 뒤에 절은 예전대로 두었다. 연산군 때에 폐지하여 분사복시(分司僕寺)로 삼았고, 중종 반정 뒤에 계속 관청을 삼았다. 절은 이미 무너졌고 사리각만 남았는데, 경오년 3월에 이르러 중학의 유생들이 이단(異端)을 쓸어버린다고 부르짖으며 밤을 타서 부수고 불살라서 불길이 공중에 치솟고, 불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도성 안의 깊은 골짜기의 그윽한 굴 속의 조그만 것까지도 다 들어내어 불태웠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걸었고,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이 있었는데 지금은 흥인문 안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각을 세웠는데 뒤에 무너졌으며 지금은 광화문 루에 걸려 있다.
흥덕사(興德寺)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으니, 바로 정종(定宗)의 잠저 동쪽이다. 연못이 있다. 교종(敎宗)이 됐고 지금은 없어졌다. ○ 변계량(卞季良)이 늘 이 절에 거처하면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지었다. 권근의 〈덕안전기(德安殿記)〉가 있다.
내불당(內佛堂) 인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흥복사(興福寺)인데, 개국 초에는 조계종(曹溪宗)의 본사(本社)가 되었다가 뒤에 폐지되어 관청이 되었다. 세조 10년에 고쳐 창건하여 원각으로 삼았으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고 또한 큰 종이 있는데, 바로 지금의 종루의 종이다. 연산군 때 흥청(興淸)ㆍ운평(運平) 등을 두고서 연방원(聯芳院)이라 부르고 이 절에 국(局)을 설치하였다. 중종 7년에 양종(兩宗)과 원각을 철거하여, 그 재목을 연산군 때 집을 헐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내려주었다. 이름난 탑 13층에 12회상(會相)을 새겼는데, 새긴 불상이 매우 정밀하고 기교하며, 또 처마 밑에 각각 해서로 쓴 작은 액자 다보회(多寶會)ㆍ영산회(靈山會) 등 글씨가 있고, 탑 기둥 사면에는 모두 용의 모양을 새겼다. 위 3층은 임진년에 왜적들이 무너뜨렸다. ○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르기를, “원각사는 옛 큰 절의 터이며, 처음에는 대전(大殿)과 동ㆍ서의 선당(禪堂)뿐이었는데, 관습도감(慣習都監)을 대전의 서선당에 붙이고, 예장도감(禮葬都監)을 동선당에 붙이고, 대전의 북쪽은 중학의 유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삼았다. 세조가 일찍이 철거하여 다시 대가람(大伽藍)을 창건하게 하고 이름하여 원각이라 하였으며, 임금이 여러 번 행행하였고,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가 되어 내리고, 사리가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중부청사가 가각고(架閣庫) 자리에 옮겼고, 예장도감을 송현행랑(松峴行廊)에 붙여서 귀후서에 속하고, 관습도감을 봉상시의 악학(樂學)에 합쳐서 이름하여 악학도감이라 했다가 얼마 안 되어 장악원으로 고쳤다.” 하였다.
인왕사(仁王寺) 인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강굴(金剛窟) 인왕사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륜사(金輪寺) 성 안에 있는데, 이 절 안에 사국(史局 춘추관)을 개설하였다. 유관(柳寬)이 일찍이 영수사(領修史)로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갔었다는데, 바로 흥덕사인 듯하다.
복세암(福世菴) 인왕산에 있었으며 세조조에 세웠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장의사(藏義寺) 창의문 밖에 있다. 신라가 백제 군사와 황산벌에서 싸웠는데,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 싸움터에서 죽었으므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이 절을 집현전의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여 그 안에서 글을 읽게 했으며, 성종조에 나이 적은 문관 채수(蔡壽) 등을 뽑아서 말미를 주어 이 절에서 글을 읽게 하니, 문장접(文章接)이라고 했다. 뒤에 없어졌다. 연산군 병인년에 장의문(藏義門) 밖에 수각(水閣)을 세웠는데, 지금은 탕춘대(蕩春臺)가 되었다.
연굴(演窟) 소격서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향림사(香林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현종 경술년의 사변(거란의 2차 침입), 무오년의 난(거란의 3차 침입) 때에 태조의 재궁(梓宮 임금의 관)을 이 절에 옮겨 모셨다.
적석사(積石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청량사(淸涼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의 이자현(李資玄)이 청평산(淸平山)으로부터 불려와서 머물렀다.
승가사(僧伽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의 상서(尙書) 이오(李䫨)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 옛날 신라 낭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 어령대사(飫聆大師)의 성적(聖跡)이다. 삼각산 남쪽에 좋은 곳을 가려서 바위를 깨고 굴을 만들며, 돌을 깎아 대사의 도용(道容 도통한 이의 성스러운 모습)을 본따 새겼다. 나라에 재난과 이변이 있으면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쳤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한다.
삼천사(三川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 서쪽에 있다. 태조가 수륙도량(水陸道場)의 상ㆍ중ㆍ하 3 단(壇)을 만들게 하고 여러 번 행행하였으며,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가 있다. 세종 조에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말미를 주어, 이 절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도성암(道成庵)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願刹 어느 사람을 위해서 기도 드려 주는 절)이다.
자수원(慈壽院) 바로 개국 초의 북학이 있던 자리이다.
인수원(仁壽院) 현종 2년에 자수, 인수 양원을 철거하고 그 재목으로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축하여, 중과 여승들은 환속(還俗 중이 도로 세상에 나와 보통 사람이 됨)하게 하며, 북학을 다시 세웠다. 북학조에 상세하다.
정업원(淨業院)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성 안에 있다고도 한다. 정순왕후(定順王后 단종의 비 송씨)를 부인으로 강봉(降封)할 때 세조가 흥인문 안의 연미정동에 집을 내려주었는데, 주인이 따로 초가를 짓고 자칭 정업원 주지(住持)라 했다. 앞에 돌산 봉우리가 있는데, 주인이 때때로 올라가서 영월(寧越)을 바라보았으므로 동망봉(東望峯)이라고 부른다. 영종 계묘년에 어필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5자를 써서 동망봉 아래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장릉지(莊陵志)》의 〈해평가전(海平家傳)〉에 이르기를,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 세조 찬위 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 송씨가 살아 있을 때 성 안에 있으려 하지 않고 동쪽 교외에 살면서 노릉(노산군의 능 곧 장릉)을 바라보기를 원하므로 조정에서 동문 밖에 집을 짓고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불렀는데, 부인이 따로 초가 몇 칸을 짓고 살면서 소의소식(素衣素食 흰옷을 입고 채소 음식을 먹음)으로 일생을 지냈다. 성종조에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불상을 만들어서 이 원에 보냈는데, 유생 이벽(李鼊) 등이 빼앗아서 불태웠다. 선조 계유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철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했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 이상의 3원은 모두 여승이 사는 곳이다. ○ 성현의《용재총화》에, “성 안에 여승의 절간이 이미 철거되고 정업원만이 남았으며 여승들은 모두 다 흥인문 밖으로 쫓겨나 안암동 등지에 서너 집이 있었다. 숭례문 밖 종약산(種藥山) 남쪽에 예전에 한 집이 있었는데, 그 후에 그 곁에 작은 집들을 지어서 지금은 10여 집이 있다.” 하였다.
중흥사(重興寺) 북한 삼각산 등안봉(登岸峯) 아래에 있다. ○ 고려의 중 보우(普愚)가 늘 이 절의 동쪽 봉우리에 살았으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했다. ○ 목은 이색이 지은 원증국사 보월(圓證國師寶月)의 〈승공탑명(昇空塔銘)〉이 있다. ○ 총섭(摠攝 승병(僧兵)의 사령관)이 여기에 군영을 개설했다. ○ 1백 49칸이다.
태고사(太古寺) 북한 등안봉(登岸峯) 태고대(太古臺)아래에 있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옛 당 나라의 당시(唐詩) 등의 판을 저장했다. ○ 1백 36칸이다.
보국사(輔國寺) 금창(禁倉) 아래에 있다. ○ 67칸이다.
진국사(鎭國寺) 노적봉(露積峯)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 1백 4칸이다.
부왕사(扶旺寺)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 1백 11칸이다.
국영사(國寧寺)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 70칸이다.
보광사(普光寺)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 75칸이다.
원각사(圓覺寺) 증봉(甑峯) 아래에 있다. ○ 81칸이다.
용암사(龍巖寺) 일출봉(日出峯) 아래에 있다. ○ 88칸이다.
상운사(祥雲寺) 영취봉(靈鷲峯) 아래에 있다. ○ 89칸이다.
서암사(西巖寺) 수구문(水口門) 안의 민지암(閔漬巖)의 옛 집터에 있다. ○ 1백 7칸이다. ○ 위의 11절에는 승장(僧將)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씩을 두었다.
봉성암(奉聖菴)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 25칸이다.
원효암(元曉菴) 원효봉(元曉峯) 아래에 있다. ○ 10칸이다.
문수암(文殊菴) 문수봉 아래에 있다. ○ 이상의 여러 절은 모두 북한성 안에 있다.
【고적】남평양성(南平壤城)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성과 궁궐을 세워 서울을 옮겼으며, 진사왕(辰斯王) 7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땅을 파서 산을 만들고 기이한 풀을 심으며 기이한 새를 길렀다. 개로왕(蓋鹵王)이 궁실을 크게 세우고 도성 안의 사람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쪄서 토성을 쌓았다. 누각(樓閣 누나 각이나 비슷하나 누에는 다락이 있음)ㆍ대사(臺榭 높은 곳에 있다는 점에서 같고 사에는 집이 있다고 한다)가 웅장하고 수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나라가 피폐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죽게까지 되었다. ○ 진사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을 세웠다.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쪽에 있다. 신라 때에 중요한 진(鎭)을 두었는데, 뒤에 고구려가 점거한 것을 신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서 회복하고 장한성가를 지어서 그 공을 기념하였다.
대성락영(大星落營) 용삭(龍朔) 당 고종의 연호) 원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일으켜서 진군하여 북한산성을 에워싸서 성 안이 위태로웠는데,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우레치고 비오며 벼락치니, 적들이 놀라서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신혈사(神穴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의 현종이 머리 깎고 이 절에 거처하였다.
면악(面嶽) 고려 숙종이 최사추(崔思諏)ㆍ윤관(尹瓘) 등을 시켜 남경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더니, 사추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노원역ㆍ해촌(海村)ㆍ용산 등지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니 도읍을 세우기에 합당치 않은데, 삼각산 면악의 남쪽 만은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됩니다. 원줄기의 중심이 임좌병향(壬坐丙向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함)이니 형세에 따라 도읍을 세우소서.” 하였다. 여기서 형세를 따라서 동쪽으로는 대봉(大峯)까지, 남쪽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쪽으로는 기봉(岐峯)까지, 북쪽으로는 면악까지를 경계로 하여 남경을 세우며,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를 택해서 윤(尹 서울 지방의 장관)으로 삼고, 임금이 또한 한 해에 한 번씩 순행하며 용봉장(龍鳳帳 임금의 포장)을 묻어, 지기(地氣)를 진압하였다. ○ 지금 상고해보면 면악은 바로 백악인 듯하다.
【제영】 8영(八詠) 기전(圻甸 임금 직할의 지역 곧 경기)의 산하, 도성의 궁원, 여러 관서가 별처럼 모여 있음, 여러 동리가 바둑처럼 펼쳐 있음, 동대문의 교련장, 서강의 조선(漕船)이 머무름, 남쪽 나루터의 길손, 북쪽 교외의 기르는 말. 10영 목멱산의 꽃구경, 마포의 배 띄우기, 제천정의 달 구경, 양화도의 눈밟기, 반송정의 손님 배웅, 장의사의 중 찾기, 흥덕사의 연꽃 구경, 입석포의 낚시질, 전관교의 꽃찾기, 종가의 등불 구경하기. 남산 8영 북쪽 대궐에 비낀 구름, 남쪽 강에 가득한 물, 바위 아래의 그윽한 꽃, 고개 위의 긴 소나무, 봄철 3월의 푸른 풀 밟기, 9월 9일에 높은 곳에 오름, 산봉우리에 올라가 등불 구경하기, 시내 따라가며 갓끈 빨기. 국도(國都) 8영 필운대의 꽃과 버들, 압구정의 배 띄우기, 삼청동의 녹음, 자각의 관등, 청계의 단풍놀이, 반지의 연꽃 구경, 세검정의 시원한 폭포, 광통교의 맑은 달.
【명환】 고려의 강감찬(姜邯贊) 현종 때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았다. 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에 있는 산골짜기에 반드시 두 중이 있을 것이니, 갖다 주어라.” 하였다. 아전이 그 말대로 하니, 과연 두 중이 있어 아전을 따라와서 배알하였는데, 감찬이 꾸짖기를,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한성유수(漢城留守)가 그 말을 괴상하게 여겼는데, 감찬이 또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곧 옷을 벗고 두 범으로 바뀌어서 크게 울부짖었다. 감찬이 말하기를, “빨리 가라.” 하니, 범은 곧 뛰어서 사라졌는데 이후로 호환(虎患)이 드디어 없어졌다.
사공(司空)은 휘(諱)가 한(翰)인데 신라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 10세 손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았고, 시중이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고, 복야가 아간(阿干) 광희(光禧)를 낳았고, 아간이 사도 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고, 사도가 긍휴(兢休)를 낳았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았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고,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았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았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고, 충민이 화(華)를 낳았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았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았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았고, 용부가 내시집주(內侍執奏) 인(璘)을 낳았고, 인이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고, 양무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목조(穆祖)다.
전주(全州)에서 강릉도(江陵道)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겼다가, 삼척에서 바다를 건너 덕원(德原)으로 갔는데, 고려에서 그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하고, 고원(高原)에 진(鎭)을 설치하여 원 나라 군사를 막게 하였다. 당시 영흥(永興) 이북은 개원로(開元路)에 속하였다. 원 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이 와서 쌍성(雙城 영흥)에 주둔하여 철령(鐵嶺) 이북을 차지하려고 계획하면서 목조에게 원 나라에 항복할 것을 요청하자, 목조가 부득이하여 김보로(金甫奴) 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때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1254)이니, 송 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이었다. 지원(至元) 갑술년(甲戌年 1274) 12월에 목조가 경흥부(慶興府)에서 흉(薨)하므로 성 남쪽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함흥부의 의흥부 달단동(義興部韃靼洞)에 이장(移葬)하였다.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행리(行里)를 낳았으니, 이분이 곧 익조(翼祖)다.
적도(赤島)로 피란하였다가, 뒤에 덕원(德原)에 옮겨 살았다. 안변호장(安邊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에게 장가들고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 아들 낳기를 빌었는데, 아들을 낳고서 선래(善來)라 이름지었으니, 이분이 곧 도조(度祖)다. 휘는 춘(椿)인데, 어릴적 이름은 선래요, 몽고(蒙古) 휘로 학안첩목아(學顔帖木兒)다. 문하시중 박광(朴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는 자흥(子興)이요, 다음은 곧 우리 환조(桓祖)이니, 휘는 자춘(子春)이요, 몽고 휘는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다.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태중대부 사복경(太中大夫司僕卿)이 되었고, 집 한 구역을 하사받아서 거기서 머물러 살았다.
문하시중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으로 시호가 정효공(靖孝公)인 최한기(崔閑奇)의 딸에게 장가들어 지원 원년(至元元年), 충숙왕(忠肅王) 4년(을해 1330) 10월 11일 기미에 영흥부(永興府) 사적에서 태조(太祖)를 낳았다. 즉위(卽位)하게 되자, 4대의 존호(尊號)를 추존하되, 고조고(高祖考)를 목왕(穆王), 그 능(陵)을 덕릉(德陵), 비(妣) 이씨(李氏)를 효비(孝妣), 능을 안릉(安陵)이라 하고, 증조고(曾祖考)를 익왕(翼王), 그 능을 지릉(智陵), 비 최씨(崔氏)를 정비(貞妣), 능을 숙릉(淑陵)이라 하고, 조고를 도왕(度王), 능을 의릉(義陵), 비 박씨를 경비(敬妣), 능을 순릉(純陵)이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능을 정릉(定陵), 비 최씨를 의비(懿妣), 능을 화릉(和陵)이라 하여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4대의 신주(神主)를 만들게 하였다.
○ 신우(辛禑) 때에 태조가 최영(崔塋)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죽일 때에, 태조와 최영이 정방(政房)에 앉았는데, 최영이 임견미와 염흥방을 등용한 사람은 모두 축출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모든 사대부(士大夫)가 다 그에 의해 등용된 사람들이다. 지금은 다만 그 재질이 현명한지 않은지만 물을 일이지, 어찌 지나간 일까지 허물하리오.”
하였으나, 최영은 듣지 않았다.
태조가 호발도(胡拔都)를 토벌하고 돌아오다가 안변(安邊)에 이르렀는데, 비둘기 두 마리가 밭 가운데 뽕나무에 앉아 있었다. 태조가 활로 쏘니 한꺼번에 두 마리가 다 떨어졌다. 길 가에서 두 사람이 밭을 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한충(韓忠)이요 또 한 사람은 김인찬(金仁贊)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탄복하기를,
“도령(都領)의 활쏘는 솜씨가 기묘합니다.”
하였다. 태조가 웃으며
“내 이미 도령은 지났다.”
하고, 인하여 두 사람에게 가져가 먹게 하니, 두 사람도 조밥을 마련하여 올렸다. 태조가 그들을 위해 음식을 먹자, 두 사람이 마침내 따라다니면서 떠나지 아니하여 뒤에 모두 개국공신(開國功臣)의 반렬에 참여하였다.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리기 전에 태조가 살던 마을에,
서경성 밖 불빛이요 / 西京城外火色
안주성 밖 연기로세 / 安州城外煙光
그 사이 왕래하는 이원수여 / 往來其間李元帥
백성 구제 소원일세 / 願言救濟黔蒼
라는 동요(童謠)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돌리는 일이 있었다.
○ 군사를 돌린 후에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해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면서 《곽광전(霍光傳)》을 품고 와서 바쳤다.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었는데, 인옥이 왕씨를 다시 세우자는 의론을 극력 진술하므로 태조가 왕씨의 후손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조민수(曺敏修)는 우(禑)의 외삼촌인 이임(李琳)의 척당(戚黨)으로서, 우의 아들 창(昌)을 세우려고 이색(李穡)에게 문의하여 드디어 의론을 확정하여 창을 세웠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문 앞에 찾아와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지리산(智異山) 바윗돌 속에서 얻었습니다.”
하였다. 그 글에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 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지경을 바로잡으리라.”
는 등의 말이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시켜 영접해 들이게 하였는데, 이미 떠나버려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비장된 기록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고, 또 「왕씨가 망하고 이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끝내 고려가 망할 무렵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또 사람의 운명을 잘 알아 맞히는 혜징(惠澄)이란 자가 사사로이 그의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운명을 점친 것이 많으나 이성계(李成桂)만한 이는 없었다.”
하였다. 그 친한 사람이 묻기를,
“타고나 운명이 비록 좋더라도 지위가 정승에 이를 뿐이겠지.”
하니, 혜징이 말하기를,
“정승쯤이면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내가 알아 맞힌 것으로는 임금이 될 운명이니, 그가 왕씨를 대신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가 도성(都省)과 헌부(憲府)를 사주(使嗾)하여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 등을 죽이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공정왕(恭靖王 정종 定宗) 및 아우 화(和), 사위 이제(李濟), 휘하(麾下)인 황희석(黃希碩)과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 변론하게 하였다. 태종이 숭교리(崇敎里)에 있는 옛 사저의 사랑(斜廊)에 앉아 걱정을 하면서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급히 나가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은
“민생(民生)의 이해(利害)가 이 시점에 결정될 것이요,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느냐?”
라고 극력 말하였다. 태종이 곧 태조의 집으로 돌아와서 공정왕, 아우 화, 사위 이제와 더불어 이두란(李豆蘭)을 시켜 몽주를 쳐 죽이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공(公)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조영규에게 말하니 영규가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조영무(趙英茂)와 고여(高呂) 및 이부(李敷) 등이 길에서 몽주를 맞이하여 쳤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몽주가 꾸짖으며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달아났는데, 영규가 뒤쫒아 가서 말 머리를 치니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급히 달아나니 고여가 추격하여 죽였다. 태종이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가 매우 성내어 태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가문은 본래부터 충효(忠孝)로 이름이 났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남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라 하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것은 충신되고 효자되기를 바래서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가 약이나 먹고 죽어버리고 싶다.”
하였다. 강비(康妃)가 옆에 있다가 안색을 가다듬고 고하기를,
“공께서 매양 대장군으로 자처하셨는데, 어찌 놀라고 겁내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다.
○ 가을, 7월 17일 병신에 태조가 공민왕비(恭愍王妃) 안씨의 교지를 받들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백관들이 반열을 지어 궁문 서쪽에서 맞이하므로, 태조가 말에서 내려 보행으로 전(殿)에 들어가 즉위하되 용상(龍床)을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군신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정유(丁酉 18일)에 비가 왔다. 그때까지 오래도록 가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흐뭇하게 비가 내리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 정사(丁巳)에 명을 내려, 전조(前朝) 태조(太祖)의 신주를 마전군(麻田郡)에 옮겨 모시고, 때에 따라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조의 혜왕(惠王)ㆍ현왕(顯王)ㆍ충경왕(忠敬王)ㆍ충렬왕(忠烈王)이 모두 백성에게 공이 있었으니, 마전의 태조의 사당에 같이 제사지내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조의 성왕(成王)이 중화(中華)를 높이 사모하여 문물(文物)을 일으키자,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고, 문왕(文王)이 근신하여 선대가 이룩해 놓은 것을 지켜 나아가 세상을 태평하게 하자, 백성들이 그 생활을 편안히 누렸고, 공민왕은 두 번이나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삼한(三韓)을 흥복(興復)시켰으며, 상국(上國)을 잘 섬겨서, 온 나라를 편케 하였으니, 모두 동방에 공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태조묘(太祖廟)에 같이 제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 공민왕 19년에 태조가 기병(騎兵)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고, 또 7백여 리를 행군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에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태조가 온다는 것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으로 옮겼다가,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원경(李原景, 李吾魯帖木兒)이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얼마 후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도 본시 고려 사람입니다. 항복하여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하고 3백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어 그 괴수 고안위(高安慰)를 쳐서 쫓아냈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 북으로는 동녕부, 서로는 해남(海南), 남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가 텅 비게 되었다. 황성은 옛날 여진(女眞)의 황제성(皇帝城)이다.
○ 태조는 높은 콧대에다 용(龍)의 상을 하여, 기특하고 웅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릴 적에 함흥과 영흥 사이를 다니며 놀았는데, 북도의 매[鷹]를 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기를,
“이모(李某, 성계(成桂)와 같이 정기 있고 기특하게 생긴 사람을 얻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쏘는 법이 신묘(神妙)하였다. 함주(咸州)에서 큰 소가 서로 싸우므로 여러 사람이 제지하려 하여도 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옷을 벗어 던지고, 어떤이는 불을 피워 던졌어도 오히려 금지시키지 못하였는데, 태조가 양손으로 갈라 쥐어 잡으니 소가 싸우지 못하였다. 신우(辛禑)를 따라 해주(海州)에 사냥갔는데 좌우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짐승을 잡되, 다 등성이를 맞혀라.”
하였다. 태조가 평소에 짐승을 쏠 때에는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鴈翅骨)과 왼쪽 넙적다리 앞 근처를 맞혔는데, 이날에는 사슴 40마리를 모두 그 등성이를 바로 적중시켰다. 또 임강현 화장산(臨江縣華藏山)에서 사냥할 때에 사슴을 쫓아 절벽에 이르렀는데, 높이가 수십 척에 지형이 험하여 사람은 내려갈 수 없는데 사슴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태조 또한 말을 채찍질하여 미끄러져 내려가 밑바닥에 이르렀는데, 말이 넘어져 일어나기도 전에 곧 사슴을 쏘아 죽였다. 길을 가다가도 엎드린 꿩을 만나면 반드시 놀라 날게 하여 두어 길쯤 높이 올라간 다음에 올려다 보고 쏘면 영락없이 맞혔다. 나무 공을 배[梨]만큼 크게 만들어 사람을 시켜 50~60걸음 거리에서 공중에 던지게 하고는 박두(撲頭)로써 쏘아도 번번히 맞혔다. 그러나 항상 겸손함으로 자처하여 남보다 위에 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매양 남과 더불어 활쏘기를 비교할 때에는 다만 상대방의 능력과 맞힌 횟수의 많고 적음을 보아서 겨우 상대방과 동등하게 할 뿐이요, 이기고 짐이 없게 하였다. 권하는 사람이 있어도 또한 한 번이나 더 맞히는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 신우(辛禑) 경신년(6년, 1380)에 우리 태조가 왜적을 운봉(雲峯)에서 크게 격파하여 그 장수 아기발도(阿只拔都)를 베고 개선(凱旋)하였는데,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적 소탕하기를 정말 썩은 가지 꺾듯 하였으니, / 掃賊眞將拉朽同
삼한의 기쁜 기색이 여러 장군 것이네 / 三韓喜氣屬諸公
충성이 환히 드러나니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 忠懸白日天收霧
위엄이 청구에 떨치자 바다에 풍파가 없네 / 威振靑邱海不風
개선하는 빛난 자리에는 무훈을 노래하고 / 出牧華筳歌武烈
능연의 높은 누각에는 영웅을 그리리 / 凌煙高閣畵英雄
앓던 끝이라 교외에 환영가지 못하고 / 病餘不得參郊迓
앉아서 새 시나 읊어 위대한 공 칭송하네 / 坐詠新詩頌雋功
하였고,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의 시에는
적의 칼날 꺾기 벼락과 같았으니 / 賊鋒摧挫興雷同
절제가 모두 우리 공에서 나온 것 / 節制無非自我公
충만한 상서 기운 독한 안개 녹이고 / 瑞霧葱葱銷毒霧
차가운 서릿 바람 위풍을 도왔네 / 霜風冽冽助威風
섬 오랑캐 간담 떨어트린 군사의 위용이 강성하고 / 島夷墜膽軍容盛
이웃 나라 심장 서늘케 한 사기가 웅장하네 / 隣境寒心士氣雄
온 나라 의관한 사람이 서로 절하며 하례하니 / 滿國衣冠爭拜賀
삼한 만대의 태평을 이룩한 공이로다 / 三韓萬代太平功
하였으며, 성균쇄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의 시에는
3천리 사람이 마음과 덕을 다같이 하였으니 / 三千心與德皆同
군사 호령이 지금 다 공에게 달려 있네 / 師律如今盡在公
나라에 바친 충성은 밝기가 해를 관통하였고 / 許國忠誠明貴日
적의 칼날 꺾은 용기는 늠름히 바람나네 / 摧鋒勇烈凜生風
붉은 활이 빛나는데 은혜와 영화가 중하고 / 彤弓赫赫恩榮重
백우가 높고 높아 기세가 웅장하네 / 白羽巍巍氣勢雄
한번 개선하자 나라가 안정되니 / 一自凱旋宗社定
말 위에 기특한 공이 있음을 반드시 알리로다 / 須知馬上有奇功
하였다.
조무(趙武)는 원 나라 장수인데, 원 나라가 쇠약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孔州)에 점거하고 있었다. 이때에 태조가 동북면(東北面)에 있으면서 휘하 장명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결국에는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다.”
하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쳤는데, 그의 용맹스럽고 날샘을 이끼어 쇠 화살을 쓰지 않고 박두로 수십 번이나 맞히니, 조무가 그제서야 말에서 내려 절하며 항복하여 끝내 하인이 되어 종신토록 심부름하였는데,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까지 이르렀다.
○ 고려 말기에 국가에서 병적(兵籍)을 관리하지 않고 모든 장수들이 각기 점유하여 군사를 삼았는데, 이를 패기(牌記)라고 하였다. 대장 중에 최영ㆍ변안렬(邊安烈)ㆍ우인렬(禹仁烈) 등과 같은 사람은 오로지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그 막료(幕僚)와 사졸(士卒)이 뜻에 맞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꾸짖어 못하는 짖이 없다가, 매를 쳐 죽는 자까지 있으므로, 휘하 장병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태조는 유독 진심으로 휘하들을 예(禮)로 접대하여 평소에 꾸짖는 말이 없었으므로, 모든 장수의 휘하들이 다 예속되기를 원하였다.
○ 태조가 전쟁할 때에 탄 준마(駿馬)가 여덟이었다. 「횡운골(橫雲鶻)」이라 이름한 것이 여진산(女眞産)으로, 납씨(納氏)를 쫓아내고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두개를 맞았으며, 「유린청(遊麟靑)」이라 이름한 것은 함흥산으로, 오라(兀刺)를 잡고, 해주에서 싸우고, 운봉에서 승전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세 개를 맞았으며, 31세에 죽었는데, 석조(石槽)를 만들어 묻어 주었다. 「추풍오(追風烏)」는 여진산으로 화살 한 개를 맞았고, 「발뢰자(發雷赭)」는 안변산이요, 「용등자(龍騰紫)」는 단천산인데, 해주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한 개를 맞았으며, 「응상백(凝霜白)」은 제주산(濟州産)으로 압록강에서 회군(回軍)할 때에 탔던 것이며, 「사자황(獅子黃)」은 강화매도산(江華煤島産)으로 지리산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이며, 「현표(玄豹)」는 함흥산으로, 토아동(兎兒洞)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이다.
세종 때에 호군(護軍)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그 팔준마(八駿馬)의 형상을 그리게 하고 집현전(集賢殿)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찬(贊)을 지어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 태조가 본시 경학(經學)을 중히 여겨, 비록 군중에 있을 때에도 매양 창을 놓고 쉬는 틈에는 이름난 선비를 불러다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는데, 더러는 밤중이 되도록 자지 아니하였다. 가문(家門)에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태종에게 유학을 공부하게 하였는데, 태종이 날마다 부지런히 하여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매양 태종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왜 나의 소생이 되지 아니하였을까.”
하였다. 신우(莘禑) 때에 태종이 과거에 급제하자 태조가 대궐 뜰에서 절하고 사례하여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으며, 뒤에 제학(提學)에 제수되자, 태조가 기쁨이 대단하여 사람을 시켜 관교(官敎)를 두 번 세 번 읽어보게 하였다. 태조가 매양 손님들과 연회할 때에는 태종으로 하여금 시구(詩句)를 짓게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손님들과 즐기는 데는 너의 힘이 많다.”
고 하였다.
일찍이 오라를 칠 적에 무너진 담장 안에서 곡성이 나는 것을 듣고 사람을 시켜 가 보았더니, 한 사람이 옷을 벗고 서서 울고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원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한 사람인데, 귀국의 이인복(李仁復)이 나의 동년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장원이란 말을 듣고는 곧 자기 옷을 벗어 입히고 드디어 데리고 오니, 공민왕이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를 제수하고 성명을「한복(韓復)」이라 내려 주었다.
○ 태조는 천성이 인후(仁厚)하여 구족(九族)들에게 화목하였는데, 비록 10촌이 넘더라도 애호하기를 매우 돈독하게 하였다. 서형 원계(元桂)와 서제 화(和)와 더불어 우애가 극진하여 항상 같이 거처하였으며, 화(和)의 어머니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를 경저(京邸)로 맞아들여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으며, 나아가 뵐 때에는 항상 계단아래 꿇어 앉았었다. 공민왕이 자주 연석(宴席)을 마련하여 화에게 주어 어머니에게 드리게 하였고, 또 교방(敎坊)의 음악을 하사하여 표창하고 총애함을 표시하므로, 태조가 임금의 하사인 것을 영화롭게 여겨 전두(纏頭)를 많이 주었다.
처음에 환조(桓祖)가 돌아가시자 원계(元桂)는 자기가 장자라 하여 마음으로 태조를 꺼렸었다. 마침 태조의 양민(良民)이 되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자, 원계가 그의 누이동생인 강우(康祐)의 처와 공모하여 그 사람의 편이 되어 일을 내고자 하다가 성사하지 못하였었다. 태조는 그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전과 같이 대접하였다. 원계가 고려에 벼슬하여 장작판서(將作判書)가 되었다가 살인죄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자 태조가 구제하려고 하여 두 번 세 번 극력 청하였으나, 되지 않으므로 심히 애통이 여기고, 여러 고아들을 부양하여 혼인시켰다. 강우의 처는 집이 가난하므로 태조가 그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었으며, 개국한 뒤에 원계의 아들들이 모두 높은 벼슬에 제수되었다.
○ 고려 공민왕이 돌아간 뒤부터 천자가 매양 집정 대신을 부르게 되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 못하였는데, 신창(辛昌)이 즉위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색(李穡)이, 신창이 감히 가서 조회하고 또 왕관(王官)이 나와서 감국하게 할 목적으로 스스로 원 나라에 들어가 조회하기를 자청하자, 태조가 칭찬하기를,
“강개(慷慨)하도다. 이 늙은이여.”
하였다. 이색은 태조의 위풍과 덕망이 날로 성해지므로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변이 날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한 아들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는데, 태조가 태종으로 서장관(書狀官)을 삼아 주었다. 도중에 한 관원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최영(崔瑩)이 정병 10만 명을 거느렸어도 이성계가 그를 잡으려 하면, 파리잡듯 쉽게 할 것이다. 너희 나라 백성들이 이성계의 망극(罔極)한 덕을 입고 있는데 무엇으로 갚으려는가.”
하였다. 명 나라 천자는 평소에 이색의 이름은 들은 터라, 조용히 말하기를,
“네가 원 나라에 벼슬하여 한림이 되었다 하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겠구나.”
하였다. 이색이 얼른 한어로써 대답하기를,
“고려 왕이 친히 조회하려 오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천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므로, 예부(禮部)의 관원이 전하여 아뢰었다. 이색이 오랫동안 중국에 들어가지 아니한 탓으로, 말이 분명치 못하였던 것이다. 천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한어가 바로 납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다.
○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한 중이 문 밖에 찾아와 이상한 글을 주면서,
“지리산 바위를 속에서 얻었다.”
고 하였는데, 그 글에 「나무 아들이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의 강토를 바로잡으리라.(木子乘猪下復正三韓境)」는 구절이 있었다. (태조가 을해년에 탄생하였음)사람을 시켜 영접하려 하자 이미 가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 덕원부(德源府)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말라 썩은 지 여러 해가 되었었다. 개국하기 1년 전에 다시 가지가 나고 잎이 피므로, 당시 사람들이 개국의 징조라 하였다. 도참(圖讖) 속에 「조명(早明)」이란 문구가 있었으나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고황제(高皇帝)가 특별히 개국하는 호칭을 조선이라 명하였다.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성지(聖旨)를 받들어 보니,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그 이름을 근본삼아 계승하여 하늘을 본받고 백성을 다스려 길이 후사(後嗣)를 번성하게 하라.’하였다.”
고 하였다.
○ 태조가 즉위하자 예부에서 글을 보내 왔는데 이르기를,
“성지를 받들어 보니, ‘하늘과 땅 사이에 백성의 임금노릇하는 사람이 크게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혹 흥하기도 하고, 혹 폐하기도 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세상의 명령이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다. 삼한의 신하와 백성들은 이미 이씨를 높이고,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어 사람마다 각기 하늘이 준 낙을 즐기고 있으니, 이것이 곧 상제의 명이다.’하였다.”
고 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들어가 조회하자, 고황제가 편전(便殿)으로 불러 보고, 한참 동안 조용히 이야기하면서 천하를 얻게 되는 연유를 상세히 말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너희 임금이 나라를 얻은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하늘이 주지 아니하고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면, 힘으로써 차지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 경흥부(慶興府)의 남쪽 10리쯤에 있는 적지(赤地) 가운데 둥근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가 35보쯤 되고 둘레가 90보쯤 되며, 사방이 진흙이어서 통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목조(穆祖)의 덕릉(德陵)이 봉우리 위에 있었는데, 장사지낼 적에, 중국 사람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뒤에 반드시 그 자손이 일어나 임금노릇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안릉(安陵)도 덕릉의 북쪽에 있었는데, 태종 10년에 야인의 난리로 인하여 두 능을 함흥부(含興府) 음란(吟蘭) 북쪽에 옮겨 합장(合葬)하였다.
○ 홍무(洪武) 갑술년(1394, 태조 3)에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이직(李稷) 등을 명하여 한양에 도읍터를 보게 하였는데, 전조(前朝) 숙왕(肅王) 때에 경영하였던 궁궐의 옛터가 좁고 협소하므로, 다시 그 남쪽에 터를 잡아 해산(亥山)을 주용(主龍)으로 하여 임좌 병향(壬坐丙向)으로 하였다. 이해 12월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 9월에 태묘(太廟)와 궁전이 낙성(落成)되어 임금께서 법가(法駕)를 갖추어 들어갔으니, 곧 경복궁(景福宮)이다. 병자년(1396, 태조 5)에 도성(都城)을 쌓는데, 정월달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서북 방면 안주(安州) 이남, 인부 18만 9천 명을 징발하여 취역시켰다가 2월 그금에 돌려 보냈고, 가을에는 강원ㆍ경상ㆍ전라 세 도의 인부 7만 9천 명을 징발, 8월에 시작하였다가 9월에 역사를 마쳤는데,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 등이 역사를 감독하였다.
○ 태종이 이색과 더불어 명 나라에서 돌아와 발해에 이르자, 객선(客船)이 동행하였는데 반양산(泮洋山 곧 전횡(專橫)의 식객 5백여 인이 자살한 곳이다.)에서 구풍(颶風)이 크게 일어나 두 객선이 다 침몰되었다. 태종이 탓던 배도 거의 구출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엎어지며 자빠졌으나 태종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하였으며 결국 온전히 돌아오게 되었다.
○ 태조조(太祖朝)에 고황제(高皇帝)가 수조(手詔)를 내려 책하였는데,
“너희 나라에서 사람을 요동까지 보내어 포백(布帛)과 은(銀)을 싸가지고 와서 예(禮)를 행한다 핑계하고 우리 변방 장수를 유혹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여진(女眞)을 달래고 꾀어 몰래 압록강을 건넜다.”
는 등의 일이었다. 우리 조정에서 표(表)를 올려 변명하였는데, 그 대략은
“요동에 가서 예를 행한 것으로 말하면, 이 또한 상국(上國)을 우러러 사모한 것입니다. 사자(使者)가 왕래할 즈음에 있어 손님과 주인이 교제하는 의식(儀式)이 있는 것은 예의상 그러한 것이지, 어찌 감히 꾀었겠습니까. 여진(女眞)은 동녕(東寧)에 예속하였으므로, 이미 모두 군(軍)이 되어 차역(差役)에 당하고 있는데, 어찌 사람을 보내어 달래고 꾀었겠습니까. 다만 요동 도사(都司)가 탈환불화(脫歡不花)를 데려갈 적에 그 관하 인민들이 바로 따라가지 아니한 사람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살던 곳을 옮기기 어려워 그러한 것이요, 신이 억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받치는 것도 없으며, 각자가 그 전일의 생업(生業)을 그대로 해가고 있습니다.”
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정도전(鄭道傳)의 글이었다. 황제가 우리의 올린 표(表)의 말이 거만하다 하고 더욱 노하여 요동에 명령하여 조선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므로, 사신이 요동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온 경우가 모두 다섯 차례나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라고 타이르므로 태조가 태종에게 이르기를,
“천자가 만일 묻는 말이 있게 되면 네가 아니면 능히 자세하게 대답할 사람이 없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신이 사직을 위한 큰 계획에 어찌 응당 핑계대고 회피하겠습니까?”
하므로, 드디어 태종에게 명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 조반(趙胖)과 더불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명 나라 서울로 가게 하였는데, 태조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기질이 여위고 약한데 만리 길을 병없이 돌아오겠는냐.”
하였다. 이번 행차를 조정 신하들은 모두 태종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다. 참찬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재(南在)가 말하기를,
“정안군(靖安君)이 만리 길을 가시는데 우리들이 여기서 편안하게 자서 되겠는가?”
하고, 모시고 가기를 자청하였다.
찬성사(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이 시를 지어 태종의 행차에 전송하기를,
아들과 신하 알아보는 지감이 밝으시니 / 知子知臣睿鑑明
사대하는 정성도 민생을 위해서로다 / 畏天誠意爲民生
사람들이 이르기를 조선 만세의 경사가 / 皆云萬世朝鮮慶
이 더위 장마속 발섭하는 행차에 달려 있다고들 하네 / 在此炎霧跋涉行
라고 하였다. 상국의 선비들이 태종을 보자, 모두 조선의 세자라 하면서 매우 존경하였다. 남경에 도착하자 황제가 두세 차례 불러 보았는데, 태종이 진술하여 아뢰기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므로 황제가 우대하여 돌려 보내고 그제야 길을 개통하여 주라고 명령하였다.
○ 공양왕 때에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부름을 받고 귀양 살던 곳에서 서울에 돌아와 태조를 사택으로 찾아 뵙자, 태조가 놀라고 기뻐하여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 앉아 술을 드리며 이색에게 마시기를 청하므로 이색이 사양하지 않고 매우 즐기다가 헤어졌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겼다. 후일에 본조(本朝)가 되어서는 이색을 편전에 청하여 볼 때에 태조가 반드시 중문까지 전송하였다.
○ 태조가 즉위하여 어휘(御諱)를 고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자(字)를 지어 올리게 하므로, 도전이 교지를 받들어 「군진(君晉)」이라고 지어 받쳤다. 그 자설(字說)에 이르기를,
“일(日)에다가 일(一)을 하였으니, 해가 처음 떠오르는 것이다. 진(晉)은 밝은 해가 떠오르는 뜻이니, 하늘에 해가 떠오르자 그 밝음이 넓게 비치게 되어, 어둡고 가리운 데가 소멸되고, 만상(萬象)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임금의 첫 정사가 청명하자, 온갖 사특한 것이 제거되고 온갖 법이 모두 새로워진 것이요, 하늘의 해가 이미 떠오르자, 그 밝음이 점차 퍼져가는 것이니, 곧 임금이 즉위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천만세에 전하는 것이다.……”
하였다.
○ 태조가 일찍이 경신일(庚申日) 밤에 정도전 및 모든 공신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가 얼큰하자 도전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이렇게 되게 한 것은 경의 힘이로다.”
하니, 도전이 대답하기를,
“제 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에게 묻기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꼬.’하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 거(莒)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마소서.’하자, 환공이 말하기를 ‘원컨대 중부(仲父)는 함거(檻車)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하였습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말에서 떨어지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도 항쇄(項鎖)에 묶이던 때를 잊지 아니하면 자손 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렇다.”
하고, 사람을 시켜 문덕곡(文德曲)을 부르게 하면서 도전에게 눈짓하기를,
“이것은 경이 지은 것이니 경이 일어나 춤을 추어야 한다.”
하자, 도전이 곧 일어나 춤을 추니 태조가 웃옷을 벗고 춤추게 하고는, 드디어 귀갑구(龜甲裘)를 주었고, 밤새도록 매우 즐기다가 헤어졌다,
○ 감찰(監察) 김부(金扶)가 감찰 황보전(皇甫琠)과 더불어 새로 감찰이 된 김중성(金仲誠)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의 집 앞을 지나다가 말하기를,
“비록 큰 집은 지었지만 어찌 능히 오래 살게 되리오. 뒤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
하였다. 황보건이 이 말을 듣고 주부(注簿) 이양수(李養脩)에게 이야기하자 양수가 성귱악정(成均樂正) 김분(金汾)에게 말하였다. 김분은 조준의 문인이므로 조준에게 고하니, 조준이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조준은 개국(開國)한 원훈으로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는데, 김부는 조준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가 이것은 조선 사직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 말이다.”
하고, 김부를 극형에 처하게 하고, 황보전과 이양수는 곧바로 조정에 고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황보전은 장형(杖刑)을 주고 양수는 태형(笞刑)을 가했으며 김부와 같이 술 마신 열 여덟 사람에게는 감찰의 직을 파면하였다.
○ 봉상시(奉常寺)에서 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안양(安煬)ㆍ안황(安荒)ㆍ안혹(安惑) 등으로 의논하여 예조에 보고하므로, 예조에서 문하부(門下府)에 보고하였다. 문하부에서 문서를 갖추어 결재를 청하였는데, 태조가 시호를 정한 봉상박사(奉常博士) 최견(崔蠲)을 불러서 묻기를,
“희계는 원훈인데, 시호를 주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심하게 하였는가. 또한 다만 그 사람의 허물만 논하고 그 공을 듣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는, 곧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문초하고, 또 봉상소경(奉常少卿) 안성(安省), 시승(侍丞) 김분(金汾), 대축(大祝) 한고(韓皐), 협률랑(協律郞) 민심언(閔審言), 녹사(錄事) 이사징(李士澄)을 가두었다. 이에 형조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 김백영(金佰英)과 이황(李滉) 등을 탄핵하고, 또 예조 의랑(禮曹議郞) 맹사성(孟思誠), 좌랑(佐郞) 조사수(趙士秀)를 탄핵하였으니, 이는 봉상시에서 시호를 잘못 준 데 대해 논박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최견에게는 곤장 백 대를 쳐서 김해(金海)에 귀양보냈고, 안성은 축산(丑山)에, 김분은 각산(角山)에, 심언은 순천(順川)에, 사징은 강주(康州)에 귀양보냈으며, (축산은 영해부 바다 가운데 있고 각산은 진주 바닷가요 강주는 곧 진주임.) 김백영ㆍ이황ㆍ맹사성ㆍ조사수는 모두 파직시키고, 다시 정희계에게 양경(良景)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 홍무(洪武) 정축년(1397, 태조 6)에 정도전이 사명을 받들고 함경도에 갔을 때에 태조가 글을 보냈는데, 외면에 쓰기를 「삼봉행차개탁(三峯行次開坼)」이라고 썼으며, 내용에 이르기를,
“서로 작별한 지 여러 날이 되니 생각함이 자못 깊어 중추(中樞) 신(辛)을 보내어 행차에 가서 문안하려던 차에, 최긍(崔兢)이 마침 오게 되어 안부를 자세히 알고나니 다소 위안이 되고 마음이 풀리오, 이에 솜옷 한 벌을 이슬 바람을 방지하기 위해 보내니 받아주면 고맙겠소. 참찬관(參贊官) 이(李)나 절제사(節制使) 이(李)에게도 솜옷 각 한 벌씩 부치니, 부디 나의 간절한 생각을 전해주면 고맙겠소. 나머지 말은 중추 신의가 구전(口傳)할 것이오. 봄인데도 날씨가 추우니 철에 따라 몸을 보호하여 변방의 일을 마치시오. 이만 줄이오. 아무 해 달 아무 일에 송헌거사(松軒居士)는 서(書)한다.”
하고, 도장을 찍었다. (참찬과 절제는 부관임)
○ 태조의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공정왕(恭靖王)이 둘째요 태종이 다섯째이며,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방번(芳蕃)과 방석(芳碩)과 공주를 낳았는데, 공주는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태조가 일찍이 배극렴(裵克廉)과 조준(趙浚) 등을 내전으로 불러 세자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극렴 등이 말하기를,
“시국이 평탄하면 적장(嫡長)을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 있는 이를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니, 강씨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울었는데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므로, 드디어 파하고 나왔다. 다른 날에 또 극렴 등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다시는 적장이니 공이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극렴과 조준이 물러나와 의논하기를,
“강씨가 반드시 자기의 소생을 세우려고 하는데 방번은 광패(狂悖)하고 그 동생이 조금 낫다.”
하여 드디어 방석을 세자로 할 것을 청하므로 정도전과 남은(南誾) 등이 방석에게 붙으며 여러 왕자를 꺼려 제거하려고 모의하여 비밀히 임금에게 아뢰되, 모든 황자를 지방의 왕으로 봉하는 중국 예에 의하여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이에 따라 태종에게 이르기를,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모든 형들에게 말하여 조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점장이 안식(安植)이 말하기를,
“세자의 이복형 중에 천명을 받을 이가 한 둘이 아니다.”
하자, 도전이 말하기를,
“곧 제거하면 그만이지 무엇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의안군(義安君) 화(和)가 알고 몰래 태종에게 고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 태조가 병이 위독하자 도전 등이 임금의 거처를 옮길 일을 의논하겠다고 핑계대고, 여러 왕자들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인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그 도당으로 하여금 안에 있으면서 모의하게 하였다. 전 참찬(前參贊) 이무(李茂)도 그 당이었는데, 모두 그 계획을 몰래 태종에게 누설하였다. 이 무렵에 태종이 여러 형들과 더불어 항상 근정문(勤政門) 밖에 자고 있는데, 원경왕후(元敬王后)가 그 동생 장군 무질(無疾)과 더불어 의논하여 종[奴] 김소근(金小斤)을 보내어 태종을 청하여 모셔오게 하였다. 소근이 말하기를,
“여러 형제분들과 더불어 같이 계시는데 무슨 말로 청해옵니까.”
하니, 후(后)가 말하기를,
“내가 가슴과 배가 갑자기 아프다고 네가 급히 가서 고하면 공이 응당 속히 올 것이다.”
하였다. 소근이 달려가서 고하자 화(和)가 청심환(淸心丸) 소합환(蘇合丸) 등의 약을 주면서 말하기를,
“속히 가서 치료해 드리시오.”
하였다. 태종이 곧 집으로 돌아와 후(后) 및 무질과 더불어 둘러서서 한참 동안 비밀히 말하다가 후(后)가 눈물을 흘리며 태종의 옷을 잡고,
“대궐에 들어가지 마시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어찌 죽음을 겁내어 가지 아니할 수 있으며, 또 여러 형이 모두 대궐에 계시는데 알게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옷을 뿌리치고 나갔다. 후(后)가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조심하시오. 조심하시오.”
하였다. 후가 그 동생 대장군 무구(無咎) 및 무질과 더불어 꾀하여 무기와 말 안장을 모두 몰래 정비하여 변란에 대처할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태종이 대궐에 당도하자 낮은 환관이 안에서 나오며 말하기를,
“주상께서 병이 중하여 다른 처소로 가 계시려고 하니, 여러 왕자들은 모두 들어오시오.”
하였다. 전에는 궁문에 모두 등불을 설치하였었는데, 이날 밤에는 등불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의심하였다. 태종이 변소에 가는 체하고 생각을 하려 하였는데, 익안군(益安君) 방의(芳毅), 회안군(櫰安君) 방간(芳幹), 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이 뒤따라서 외치기를,
“정안군 정안군을 장차 어찌할꼬?”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왜 소리는 높이느냐?”
하니, 또 손으로 소매를 잡으며,
“계책이 없으니 어찌해야겠는가.”
하고, 방간과 방의, 이백경과 더불어 달아나 연추문(延秋門)으로 나갔다.
태종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광화문 밖에 말을 세우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고,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정승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을 불렀는데, 조준이 바야흐로 점치는 사람을 마주 하고서 길흉을 점치고 있었다. 연이어 재촉하자 그제서야 왔는데, 갑옷 입은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태종이 사람을 시켜 예빈시(禮賓寺) 앞 돌다리에서 그들을 막게 하고, 다만 두어 사람만을 데리고 오게 하였다. 태종이 조준에게 이르기를,
“공 등은 이씨의 사직을 걱정하지 않는가?”
하였다. 조금 후에 조신(朝臣)들이 달려온 자가 많았다. 조준과 김사형이 정부에 들어가려고 하므로 태종이 의논하기를,
“만약 궁중으로부터 군사가 나오게 되어 우리 군사가 조금이라도 후퇴하게 되면 저들이 그쪽 군사 쪽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하고, 이르기를,
“우리 형제가 길에 말을 세우고 있는데 정승이 부중(府中)에 들어가 앉아서는 안 된다.”
하여, 운종가(雲從街)에 앉게 하고 백관을 소집하니, 찬성(贊成) 유만수(柳蔓殊)가 그 아들을 데리고 왔다. 태종이 갑옷을 주어 뒤에 서게 하였다. 이무(李茂)가 말하기를,
“만수는 방석의 당입니다.”
하므로, 태종이 죽이라고 하자, 만수가 말에서 내려 태종의 안장을 붙잡고 말하기를,
“제가 마땅히 아뢰겠습니다. 제가 마땅히 아뢰겠습니다.”
하였지만, 김소근이 칼로써 그의 목을 찔렀다. 우러러보며 쓰러지자, 그를 베고, 그의 아들까지 아울러 죽였다. 태종이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등을 찾으니, 이직(李稷)과 더불어 바야흐로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 등불을 밝히고 즐겁게 웃고 있었으며, 따라간 사람들은 모두 졸고 있었다. 이숙번(李叔蕃)으로 하여금 일부러 화살을 쏘아 지붕 기왓장 위에 떨어뜨리게 하고 인하여 불을 지르니, 도전이 달아나 그 이웃에 있는 판봉상(判奉常)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는데, 민부가 소리지르기를,
“배가 불룩한 자가 우리집에 들어왔다.”
하였다. 군인들이 들어가 수색하자 도전이 엉금엉금 칼을 잡고 기어 나오므로 잡아 태종의 앞에 끌고 갔다. 도전이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만약 나를 살려주면 마땅히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너는 이미 왕씨를 저버렸다. 또다시 이씨를 저버리려 하느냐.”
하며 즉시 그를 베고, 그 아들 유(游)와 영(泳)도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은 몰래 도망하여 미륵원(彌勒院)의 포막(圃幕)에 숨어 있었는데 추격하던 군사가 죽였고, 이직은 하인인 척하여 지붕에 올라가 불을 끄는 모양을 하다가 빠져 나왔다. 궁중에서 불이 일어난 것을 바라보고 크게 떠들며 포(砲)를 놓았다. 방석의 당이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하여 군사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성에 올라가 살펴보게 하니,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무장한 기병이 가득 찼으므로, 그들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귀신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태종이 사람을 시켜 입직한 모든 군사들에게 말을 전하여 나오게 하니, 서로 따라 궁성을 넘어 나오므로 근정문 남쪽이 텅 비었다. 새벽에 태조가 청량정(淸涼亭)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조준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들어가 정도전과 남은 등의 죄를 아뢰고, 또한 다시 세자를 봉하기를 청하니, 태조가 방석에게 이르기를,
“너에게는 편하게 되었다.”
하였다. 방석이 절하고 하직하자 현빈(賢嬪)이 옷을 붙잡고 울부짖었지만, 방석은 옷을 뿌리치고 나갔다. 또 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세자는 그만이지만 너는 나간들 무슨 상관 있겠느냐?”
하였다.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가 옆에 있다가 오히려 칼을 빼어 두리번거리므로 공주가 이제에게 이르기를,
“우리 부부가 만약 정안군 집으로 간다면 살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방번이 서문으로 나가자 태종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하였는데, 도당(都堂)에서 추격하여 중도에서 죽였다. 처음에 산기상시(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이 방석에게 붙어 상소하여 모든 왕자의 병권을 빼앗기를 청하여 골육(骨肉)간을 이간시켰는데, 이때에 군중에 잡혀와서 말하기를,
“나도 근일부터 왕자에게 마음을 돌렸습니다.”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저 입도 고기 덩어리다.”
하고 죽였다. 공정왕(恭靖王)이 이날 기도 드리는 일 때문에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하고 자다가, 사변을 듣고 도보로 성을 넘어 독음(禿音) 촌가(村家)에 숨었는데, 다음날 태종이 사람을 시켜 청하므로 돌아오자, 태조가 공정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 무인년(1398, 태조 7) 정사(定社) 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朴苞)는 자기의 공이 많은데 도리어 여러 신하의 밑에 있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무(李茂)는 비록 정사의 반열에 참여는 하였지만, 공(功)이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고, 또 이랬다 저랬다 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다.”
하니, 태종이 공정왕에게 아뢰어 박포를 죽주(竹州)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소환했으나 박포가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키려고 꾀하였다. 그가 회안군(櫰安君) 방간(芳幹)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는데 이날 마침 비가 오므로 포가 말하기를,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겨울 비가 도로를 손상시키면 군사가 시가에서 교전한다.’하였으니 마땅히 조심하시오.”
하였다. 당시에 하늘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는데, 박포가 또 그 집에 가서 고하기를,
“하늘에 요망한 기운이 있으니 마땅히 조심해서 처신하십시오.”
하였다. 방간이 묻기를,
“어떻게 처신할꼬?”
하자, 박포가 말하기를,
“병권을 맡지 말고 출입을 조심하여 의관을 바르게 하고 행동을 신중히 하기를 전조의 모든 왕씨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였다. 방간이 말하기를,
“다시 그 다음 것을 말하라.”
하니, 박포가 말하기를,
“형만(荊蠻)으로 도망해 가서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처럼 하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하였다.
“또 그 다음을 말하라.”
하자,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군은 군사가 강하고 여러 사람이 따라 붙는데, 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으나, 그를 공격하여 제거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방간이 믿고 그 말대로 하여 태종을 자기 집에 오라고 청한 다음, 난을 일으키기로 하였었는데, 태종이 가려는데 창졸간에 병이 생겨 가지 못하였다.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와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는 모두 방간의 인척이었다. 방간이 그 두 사람을 보고 자신의 뜻을 말하니, 이래가 놀라며 말하기를,
“공이 소인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동기간(同氣間)을 해치고자 하니, 차마 그 말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정안군은 왕실에 큰 공로가 있습니다.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한 것이 누구의 공입니까?”
하자, 방간이 성을 내어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인부(仁富)는 꿇어 앉아 손을 당기며,
“공은 부디 하지 마십시오.”
하였으며, 이래가 말하기를,
“그와 같이 하면 공이 대역(大逆)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래가 나오는 즉시 태종에게 고하기를,
“회안군이 미쳐 날뜀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방비하소서.”
하였다. 방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의안군 화(義安君 和)와 완산군 천우(完山君天祐)가 태종의 집에 가서 침실(寢室)로 곧바로 들어가 변란을 고하고 응전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거절하고 나가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무슨 낯으로 외인(外人)을 보겠는가.”
하였다. 천우가 울면서 굳이 청하여도 따르지 아니하고, 즉시 방간에게 사람을 보내어 대의(大義)로써 타이르며 혐의를 풀고 서로 만나자고 청하였으나, 방간이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다시 돌이키랴.”
하였다. 화(和)가 태종에게 아뢰기를,
“방간이 이미 극도로 흉하고 험악하니 어찌 작은 예절을 지키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화가 태종을 힘껏 끌어 외청(外廳)으로 나와 천우는 태종을 안고 화는 갑옷을 입혀서 억지로 말에 태웠다. 태종이 공정왕에게 아뢰기를,
“마땅히 대궐문을 굳게 지키게 하여 비상사태를 방비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공신들 중에서 다만 박포와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만이 방간을 따랐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태종을 따랐다. 승선 이숙번은 선봉이 되어 힘껏 싸웠다. 방간의 아들 맹종(孟從)이 평소 활을 잘 쐈는데, 이날은 병으로 활을 쏘지 못하였다. 방간의 군사가 패하자 태종은 방간이 피살될까 염려하여 친히 스스로 계속해서 외치기를,
“우리 형에게 범하지 말라.”
하고 또 사람을 시켜 전갈하여 타일렀다. 태종은 길가에다 말을 멈추고 소리내어 통곡하였다. 방간이 말을 달려 바로 성균관 뒷 동리에 이르러 활과 화살을 버리고 누우니 추격하는 군사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방간이 말하기를,
“나를 유혹한 것은 박포다.”
하였다. 당시 태조는 상왕이 되어 공정왕과 더불어 모두 송도에 있다가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그 소 같은 사람이 어찌 이런 짓을 하였을까. 삼한(三韓)에 세족 대가가 많은데 내가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박포는 처형을 하였고, 방간은 토산현(兎山縣)으로 귀양갔다. 뒤에 태종이 즉위하자 여러 신하들이 방간을 죽이자고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따라주지 아니하였고, 또 속적(屬籍)을 끊지 아니하였다. 뒤에 방간은 병으로 죽고, 맹종(孟從)은 세종조에 이르러 대간(臺諫)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다. 태종이 정도전의 난을 평정하였을 때에 중외(中外)가 모두 태조에게 청하여 태종을 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공정왕으로 세자 삼기를 청하였다. 공정왕이 말하기를,
“당초에 의거(義擧)해서 개국(開國)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모두 정안군의 공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
하였으나, 태종이 사양하기를 더욱 굳이 하자 공정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에게 마땅히 조처할 도리가 있다.”
하였다. 공정왕이 즉위한 뒤에 남재(南在)가 대궐 뜰에서 크게 말하기를,
“지금 마땅히 정안군을 세워 저사(儲嗣)로 삼아야 하니, 이 일은 늦출 수 없다.”
하자, 태종이 듣고 노하여 책하였다. 뒤에 박포의 난을 평정하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몽주(夢周)의 난에 만약 정안군이 없었더라면 큰 일이 거의 성공되지 못하였을 것이오. 도전의 난에 만약 정안군이 없었더라면 어찌 또한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한 지난번의 일로 살펴보더라도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니, 청컨대 빨리 위호(位號)를 정하소서.”
하였다. 공정왕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매우 훌륭하다. 나는 곧 아우로서 아들을 삼겠다.”
하고, 드디어 세워 세자로 삼았다. 그제야 들어가 태조를 뵈니 태조가 말하기를,
“하려고 한다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이미 저사(儲嗣)가 되었으니 군국(軍國)의 일을 힘써 할 지어다.”
하고, 쓰던 갓을 주고, 하여금 잔을 올리게 하면서 매우 즐기다가 헤어져 나왔다.
○ 태종이 송도추동(松都楸洞)의 잠저(潛邸)에 있던(즉위한 뒤에 중수하여 경덕궁을 만들었음) 기묘년(1399, 정종 1) 가을 9월에 날이 새려고 하여 별이 드문드문 할 때에 흰 용이 침실위에 나타났다. 크기가 서까래만 하였고 비늘이 있었는데, 광채가 찬란하였으며, 꼬리를 꿈틀거리며 머리를 바로 태종이 누운 곳으로 향하였다. 시녀 김씨(金氏, 곧 경령군 배(裶)의 어머니)가 처마 밑에 앉았다가 그것을 보고 달려가 선부(膳夫) 김소근(金小斤) 등에게 말하자, 소근 등이 또한 나와서 보았는데 조금 있다가 구름과 안개가 가리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 고황제(高皇帝)가 상보사승(尙寶司丞) 우(牛)를 보내어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 태조가 종친들로 하여금 각지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게 하였는데, 그가 거만하여 가는 곳마다 예모(禮貌)가 없다가, 태종의 집에 이르러 태종을 보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례하여 의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니, 세자 방석의 당이 모두 기뻐하지 아니하여 서로 말하기를,
“천자의 사신이 배신(陪臣)에게 머리를 조아리다니 어찌 이런 예가 있는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여 인하여 태조에게 참소하려 하였지만 하지 못했다.
○ 정도전의 난에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자신이 직접 태종이 서 있는 곳에 달려가 화(禍) 당하는 것을 같이하려고 도보로 나왔는데, 태종의 부하들이 극력 만류하여 주저하는 동안에 하인 김부개(金夫介)가 도전의 갓과 칼을 가지고 오자, 후(后)가 그제야 돌아갔다. 또 방간의 난에는 군사 목인해(睦仁海)가 탔던 태종의 집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해 와 마구[廐]로 들어가는 것을 본 후(后)는 태종이 반드시 패한 줄 알고 자신이 싸움터로 달려가 태종과 죽음을 같이하려고 도보로 가려다가, 시녀(侍女) 김씨 등이 말려서 가지 못하였었는데, 조금 있다가 이웃에 사는 정사파(淨祀婆)라는 늙은 여인이 태종이 승전한 소식을 듣고 와서 고하므로 그제야 돌아갔다.
처음에 태조는 정도전의 무리가 하는 말을 듣고 여러 왕자가 관할하고 있는 군사를 해산시켰으며, 태종은 영중(營中)에 있던 군기를 모두 불태워 버렸었다. 무인년(1398, 태조 7)의 변 때 오로지 후(后)가 준비해 두었던 군기에 힘입었고, 여러 군사들도 창졸에 말 한 필과 칼 한 자루도 구할 수 없다가 역시 후가 준비한 무기에 힘입었었다. 뒤에 태종이《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왕건(王建)의 후(后) 유씨(柳氏)의 사적을 보고, 세종(世宗)에게 말하기를,
“정사(定社)하는 날에 너의 모후(母后)가 계책을 도운 것이 매우 많았고, 또 여러 친정 동생들과 더불어 갑옷과 무기를 정돈하여 대비하였으니, 유씨(柳氏)가 고려 태조에게 갑옷을 입혀준 데에 비하여 그 공이 더욱 중하다.”
하였다.
○ 공정조(恭靖朝)에 대성(臺省)에서 상소(上疏)하여 사병(私兵)을 폐지하여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므로 들어 주었는데, 문하부사(門下府事) 이거이(李居易) 등이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여 곧 패기(牌記)를 바치지 아니하자, 이거이를 계림 부윤(鷄林府尹)에 폄출(貶黜)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박(趙璞)이 지협주사(知陜州事) 권진(權軫)에게 말하기를,
“거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준(趙浚)의 말을 믿었던 것이 후회된다.’하기로 ‘무슨 까닭인가’하였더니, 거이의 말이 ‘사병(私兵)을 혁파(革罷)할 때에 있어 조준이 나에게 왕실(王室)을 호위하는 데는 강한 군사가 제일이라.’하기로, 내가 그 말을 믿고 즉시 패기(牌記)를 바치지 아니하였다가 죄를 받게 되었다.’고 하더라.”
하였다. 뒤에 권진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되자 조박의 말에 다시 더 보태어 헌신(憲臣) 권근(權近), 간신(諫臣) 박은(朴訔) 등과 더불어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과 거이의 죄를 논하였는데, 이때에 조종 신하들은 조준의 평소의 허물을 꺼집어내어 공격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조준을 옥에 가두고 참찬 이서(李舒), 순군만호(巡軍萬戶) 윤저(尹抵)ㆍ이직(李稷)ㆍ김승주(金承霔)가 국문(鞠問)하게 되었다. 권근 등이 그들을 각기 현재 있는 곳에 두고 국문하기를 청하자, 공정왕이 지신사 박석명(朴錫命)으로 하여금 태종에게 의논하게 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의논하기를 ‘거이와 조박이 있는 곳에 사람을 따로 보내어 문초함이 옳겠다’고 하니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대답하기를,
“옥(獄)에 관한 일에, 비록 지방에 있는 죄인이라도 반드시 서울로 올라 오는 까닭은 듣는 사람이 많고 분별하기를 명백히 하려는 것인데, 국문할 사람을 따로따로 보낸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므로, 공정왕이 명령하여 이거이와 조박을 잡아서 서울로 오게 하였다. 태종이 윤저(尹抵)를 불러 이르기를,
“상께서 경의 마음씀이 공정하다 하여 순군만호(巡軍萬戶)로 임명한 것이니 경은 신중하게 하라.”
하고, 대성(臺省)의 장(狀)을 보이며,
“태상왕(太上王)이 개국한 것과 주상(主上)이 왕위를 이은 것과 내가 불초한 몸으로 세자가 되어 오늘의 경사에 이른 것이 모두 조준의 공인데, 이제 전일의 공을 잊어버리며 허실(虛實)을 분명히 알아보지도 않고 다만 해당 관청의 장(狀)만을 믿는다면, 하늘이 매우 두려워할 것이다. 경이 만약 조준으로 하여금 죄를 받아 죽게 한다면 사람들이 어찌 경을 충신이라고 하겠는가? 조준이 만약 이런 말을 했다면 크게 죄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윤저가 두 번 절하고 나와 조박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문초하니, 조박의 말이 대성(臺省)의 소장(疏狀)의 뜻과 같지 아니하였고, 또 권진을 가두고 문초하니 또한 소장의 뜻과 달랐다. 거이를 조박과 더불어 대질시키자 조박이 굴하여 대단히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공정왕이 권근 등을 매우 미워하였고, 조박은 이천(利川)으로 폄직(貶職)시키고 권진은 축산도(丑山島)로 귀양보냈다. 조준이 국문을 당할 때에 넔을 잃고 정신이 없어 빤히 쳐다볼 뿐이요 한마디 말도 못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성립될 뻔하였었는데, 태종이 힘써 구원한 덕택으로 면하게 되었다.
○ 정도전이 잡혀 죽을 때에 방석(芳碩)의 당이 모두 달아나는데, 김계란(金桂蘭)이 홀로 가지 않았고, 남은이 도망할 때에는 시중하던 하인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오직 최운(崔沄)이 남은을 도와 호위하여 피해 숨고 끝내 떠나지 아니하였다. 태종이 이들을 의롭게 여겨 모두 불러다 부하에 두고 근시(近侍)의 직책을 맡겼는데, 김계란은 지위가 3품이 되었고 최운은 2품에 이르렀다.
○ 태조조(太祖朝)에 경상 전라 도안무사(都按無使) 박자안(朴子安)이 항복한 왜인(倭人)을 응접하다가 군사의 기밀을 잘못하여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되므로 이미 공문을 보내어 죽이게 하였는데, 일이 외국에 관계되어 비밀에 부치고 발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외인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 아들 실(實)이 듣고 태종의 집에 나아가 집에 나아가 땅을 치며 통곡하여 아비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마음에 불상히 여겨 여러 종친(宗親)들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 청하려고 하니, 여러 종친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비밀스러운 일인데 주상(主上)께서 만약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그 책임을 질 것이다.”
하고, 곧 함께 대궐에 들어가 내관(內官) 조순(曺恂)을 시켜 아뢰게 하니, 조순이 말하기를,
“이것은 비밀한 일인데 여러 종친이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인데 외인이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는가?”
하였다. 조순이 들어가 아뢰니, 태조가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자안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더니, 조금 있다가 중추원에 명령하기를,
“내가 자안의 죄를 감해 주고자 하니 급히 말 잘 타는 사람을 불러서 문서를 전달하라.”
하였다. 중추원에서 심귀수(沈龜壽)로써 아뢰자, 곧 명령하기를,
“네가 힘껏 빨리 달려가 자안의 죽음을 구원하게 하라.”
하였다. 귀수가 명령을 받고 빨리 달리다가 중도에 말에서 떨어져 역리(驛吏)로 하여금 대신 보냈다. 문서가 도착되던 날 관아에서 자안의 형벌을 집행하려고 그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벗겼으며 칼까지 이미 준비하였는데, 문득 너른 들판에 한 사람이 달려 오면서 갓을 벗어 휘두르는 것을 바라보고 관아에서 이상히 여겨 형의 집행을 정지하고서 기다려, 자안이 죽지 않게 되었다. 실(實)이 본래 학문도 없고 또 무예(武藝)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태종이 그가 아비를 살린 것을 장하게 여겨 금군(禁軍)을 맡겨 지위가 2품에까지 이르렀다.
○ 하륜(河崙)이 본래 사람의 상을 잘 보았는데, 민제(閔霽)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람을 상본 것이 많지만 공(公)의 둘째 사위 같은 이가 없었소. 내가 보고자 하니 소개를 하여 주시오.”
하였다. 민제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하륜이 자네를 보고자 하네.”
하였다. 태종을 보고 하륜은 드디어 마음을 기울어 교분을 맺었으며, 뒤에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태종묘정(太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 5월 16일은 태종의 탄신일(誕辰日)이다. 각도에서 모두 방물(方物)을 바치는데, 풍해도 절제사(豐海道節制使) 유은지(柳殷之)는 무일도(無逸圖) 족자(簇子)를 방물과 아울러 바쳤다.
○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고려의 신우조(辛禑朝)에 벼슬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었는데,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 선산善山)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으므로 고을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에 길재와 성균관(成均館)에서 함께 공부하였는데, 세자가 되자 서연관(書筵官)과 더불어 유일(遺逸)의 선비를 논하다가, 태종이 말하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같이 공부하였는데 보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하였다.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은 길재와 한 고을 사람이었다. 길재의 효행(孝行)을 갖추어 말하자, 태종이 영을 내려 부르니 길재가 역마를 타고 서울에 왔다. 태종이 공정왕(恭靖王)에게 아뢰어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길재가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지 아니하고 태종에게 글을 올리기를,
“제가 지난날 저하(邸下)와 더불어 성균관에서 《시경(詩經)》을 읽었습니다. 오늘 신을 부르신 것은 옛날의 정의를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신조(辛朝)에 과거하여 벼슬하다가, 왕씨가 다시 서게 되자 곧 고향에 돌아갔으며, 장차 그대로 평생을 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옛 정의를 기억하여 부르시므로 제가 올라와 뵙고서 즉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니, 벼슬을 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자제가 말한 것은 강상(綱常)으로서 바꾸지 못할 도리이니, 의리는 탈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부른 사람은 나요 벼슬을 준 사람은 주상(主上)이시니 주상께 사직함이 옳다.”
하였다. 길재가 드디어 글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본시 한미(寒微)한 처지로서 신씨의 조정에 벼슬하여 문하주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듣건대, 계집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향리(鄕里)로 놓아 보내어 신의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늙은 어미를 봉양하다가 여생(餘生)을 마치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다. 공정왕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예우하여 보내고, 본 고을에 명령하여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뒤에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上王)이 되자 전교하기를,
“길재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니 참으로 의사(義士)이다. 들으니 그가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 써주어 그 충의를 표창하라.”
하고서, 드디어 그 아들 사순(師舜)을 역마(驛馬)로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을 제수하였고, 길재가 죽자 쌀과 콩으로 부의하도록 명하였으며, 또한 장사지낼 역군(役軍)을 주었으며,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증직(贈職)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우리 태조가 너그럽고 어진 큰 도량으로 절의(節義)를 표창한 미덕(美德)이 바로 주 무왕(周武王)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놓아 보낸 것과 한 나라 광무(光武)가 엄자릉(嚴子陵)을 돌려 보낸 것과 더불어 시대는 다르나 일은 꼭 같으니, 이것은 모두 그 절의를 높이고, 그 뜻을 이어 주어 백세토록 그 고결한 유풍(遺風)을 격려하고 만세(萬世)토록 큰 기강(紀綱)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전 장령(前掌令) 서견(徐甄)이 김진양(金震陽)의 당에 연루되어 물러가 금천(衿川)에 살았는데, 시를 짓기를,
천년의 신성한 도읍이 아득히 먼데 / 千載神都隔渺茫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가 많아 밝은 임금 보좌하였네 / 忠良濟濟佐明王
삼국을 하나로 통일한 그 공이 지금 어디 있는고 / 統三爲一功安在
전조의 왕업 영원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대간(臺諫)이 그를 죄주자고 하였는데, 태종이 성을 내며,
“서견이 전조의 신하였으므로 시를 지어 생각한 것이니, 이는 백이 숙제의 무리인 것이다. 상을 주어야지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금상조(今上朝 선조조(宣祖朝))에 수찬 허봉(許篈)이 경연에서 아뢰어 표창하여 장려하기를 청하자, 명령하여 그 무덤 금천에 있음 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대사간을 증직하였다.
○ 태종이 사인(舍人)을 불러 들여 전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임신(1392, 태조 1) 연간에 곤장을 맞다가 죽은 이숭인(李崇仁)과 이종학(李種學) 등과 같은 사람들이 실은 곤장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혹은 목을 매어 죽이고 혹은 부당한 형벌로 죽였다 하니 그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숭인과 종학이 억울한 죄로 죽은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며, 실로 태조의 뜻도 아니다. 정권을 잡은 자가 보복하기 위하여 부당한 형벌로 죽인 것이니, 당시의 교서사(敎書使)였던 손흥종(孫興宗)과 황거정(黃居正)의 명을 거짓으로 꾸며 임금을 속인 죄를 국문하여 부당하게 중형(重刑)을 내린 형율을 적용하라.”
하니, 개국공신(開國功臣) 등이 아뢰기를,
“정도전과 남은 등이 거정과 흥종을 교사(敎唆)하여 곤장맞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도록 한 것이니, 일은 비록 죄가 있으나 그 실정은 용서할 만합니다. 신 등은 그 사람들의 범한 죄가 사직(社稷)에 관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도전과 거정 및 흥종은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錮)하며 남은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번갈아 글을 올려서 도전과 흥종을 법대로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영락(永樂) 기축년(1409, 태종 9)에 의정부 및 3공신<功臣 개국(開國)ㆍ정사(定社)ㆍ좌명(佐命)> 등이 아뢰기를,
“난신(亂臣) 민무구(閔無咎)ㆍ민무질ㆍ이무(李茂)ㆍ윤목(尹穆)ㆍ유기(柳沂)ㆍ조희민(趙希閔)ㆍ이빈(李彬)ㆍ강사덕(姜思德) 등을 국법에 의해 처형하여 시체를 저자와 조정에 내 놓을 것을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무구와 무질은 바다 섬에 안치하고, 나머지는 청한 대로 하라.”
하였다. 이듬해에 무구와 무질은 종친부(宗親府)에서 아뢴 대로 자진(自殺)하게 하였다. 그 뒤에 민무휼(閔無恤)과 민무회(閔無悔)가 원경왕후(元敬王后)에게 문병하기 위하여 대궐에 들어갔다가 두 대군(大君)이 안에 들어가고 세자(곧 제(褆)임)만 홀로 있는 틈을 타 무회가 고하기를,
“우리 형 무구와 무질이 어찌 반역을 도모할 리가 있겠습니까, 세자가 우리 집에서 생장하였으니 바라건대 은덕을 내리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너희 가문이 좋지 못하다.”
하였다. 이 말이 전파되어 무휼 등을 국문하였는데, 태종이 전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가 진실로 크지만 다만 송씨 무휼의 어머니 가 불안할 것이니 어찌 인정이 없겠는가.”
하고, 무휼과 무회를 지방에 부처(付處)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승정원에서 아뢴 대로 모두 죽음을 내리고, 처자는 먼 지방에 안치하였다.
○ 영락 정해년(1407, 태종 7)에 세자 제(褆)가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태종이 양철원평(梁哲院坪)에 나가서 전송하였다.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이무(李茂),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 제학(提學) 맹사성(孟思誠), 총제(摠制) 이현(李玄)과 서장관(書狀官)으로 집의(執義) 허조(許稠) 등이 수행하였는데, 일행이 백여 명이었다. 명 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황제가 매우 후하게 대접하여 용상 가까이 오게 하여 손을 잡고서 위로하고 타이르기까지 하였다. 사관에 머무는 동안에 육부(六部)의 상서(尙書)들이 윤번으로 식사를 같이하였다. 돌아올 때에 곡부(曲阜)를 경유하여 공자(孔子)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 영락 3년(1405, 태조 5)에 함길도(咸吉道) 길주(吉州)에서는 무릇 13일 동안이나 바닷물이 붉었고, 4년에는 전라도 무장(茂長) 굴포(掘浦)에서 물이 붉은 빛이 되어 강에 넘쳐 흘렀고, 7년에는 낙안군(樂安郡)에서 바닷물이 피처럼 붉었고, 그 고을 땅의 두 곳 샘물 또한 붉기가 피와 같았으며, 21년에는 거제(巨濟)에서 바닷물이 황적색(黃赤色)이었는데, 작은 물고기가 죽어 떴고, 선덕(宣德) 3년(1428, 세종 10)에는 경상도 하동현(河東縣)에서 바닷물이 검고 탁하여 팥죽과 같았는데, 무릇 3일 동안, 바다 고기가 많이 죽었으며, 금상(今上) 무자년(1588, 선조 21)에도 한강물이 피처럼 붉었다.
○ 영락 병신년(1416, 태종 16)에 예조에서 아뢴 대로 고려 최후의 임금인 공양군(恭讓君)을 봉하여 공양왕(恭讓王)으로 삼았다.
○ 영락 기축년(1409, 태종 9)에 부사직(副司直) 박화(朴和)가 일본에 사신 갔다가 억류되었는데, 뇌물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정부에서 왜사(倭使)의 돌아가는 편에 글을 보내어 타일렀더니, 이듬해에 돌려 보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벼가 패어 열매가 생길 때인데 가뭄이 심하니, 백성들의 생활이 염려됩니다. 청컨대 보사제(報祀祭)는 그만두고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소서.”
하니, 들어주었다. 경연관에게 이르기를,
“날씨가 매우 가물어 마음이 글에 있지 못하므로 경연에 나가지 못하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 또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이 다같이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직책인데, 백성이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길 때에 수령은 처벌하고 감사는 처벌하지 않으니 실로 타당하지 못하다. 감사 경력(經歷)을 모두 파직시켜 역마를 주지 말고 사마(私馬)로 상경(上京)케 하라.”
하였다.
○ 판의주 목사(判義州牧事) 김을신(金乙辛)이 뇌물을 사용한 죄로 의금부(義禁府)에 갇혔는데, 병을 얻자 보방을 명하고 의원(醫員)을 보내어 약을 주게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예조 판서 허조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중국에서는 사대부가 황제(皇帝)의 앞에 진퇴할 때에도 절대로 부복(俯伏)하는 예(禮)가 없다지.”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중국의 정치는 천하의 모든 일을 모두 임금에게 결재를 받으므로 사람이 많고 일이 번잡하여 예를 차릴 겨를이 없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원수(元首)가 자질구레하면 신하들이 태만해진다.’하였으니, 이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그렇다. 임금이 친히 온갖 사무를 보게 되면 관원들이 모두 임금의 결정을 기다리느라고 반드시 게으른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였다. 허조가 또 말하기를,
“전일에 태종이 본국 여자의 복장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게 하려고 하므로, 신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명 나라 서울에 갔을 때에 궐리(闕里)를 방문하여 공자(孔子)의 가묘(家墓)를 들어가 보았는데, 여복(女服)한 화상(畵像)이 본국과 다름이 없었고, 다만 수식(首飾)이 달랐습니다.’하였더니,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예법이라고 어찌 다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문종(文宗)이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 몸이 아직 강녕(康寧)하지 못한데도 국사에 대한 걱정과 부지런함이 지나치므로, 어떤 자가
“하루 걸러 정무(政務)를 보아 몸과 마음을 수양하시라.”
고 청하자 문종이 답하기를,
“임금이 향락에 빠진다면 비록 천년을 살아도 부족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비록 1년을 살아도 족할 것이니, 반드시 국사를 걱정하여 부지런히 하여야 할 것이요, 스스로 안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적 임금들이 안으로 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에 빠지거나 술을 즐기고 풍류를 즐기며, 궁궐을 굉장히 화려하게 짓거나 한 이가 있었는데, 한결같이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은 임금된 사람의 공통된 병통이다. 나는 성질이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비록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능히 좋아하지 못한다.”
하였다. 또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남녀와 음식의 욕망은 가장 사람에게 절실한 것으로서, 부귀한 집 자제들이 허다하게 주색으로 몸을 망치는 것이다. 내가 매양 여러 아우들을 보게 되면 이것으로써 경계하노라.”
하였다.
○ 문종(文宗) 신미년(1451, 문종 2) 무렵에 성절사(聖節使) 박이창(朴以昌)이 돌아오는 길에 신안관(新安館)에 이르러 자다가 밤중에 찼던 칼을 빼어 목과 배를 찔러 죽어가는 판이었다. 서장관 이익(李翊)이 듣고 즉시 가서보니, 이창 이익에게 이르기를,
“늙은 몸이 본시 오점(汚點)이 없이 장차 충성을 다하려고 하였다. 당초에 양식을 다만 규정에 있는 수량대로만 가지고 가려 하였는데, 통역(通譯)하는 무리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이 마침 장마철인데 팔참(八站)에 들어가 수재를 만나 중도에 지체하다가 양식이 다되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니, 양식을 더 가지고 가자고 하기에 내가 그렇게 여기고 드디어 40두를 싸가지고 갔다. 장차 아뢰려고 하였는데, 지금 이미 국법을 범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성상(聖上)을 뵈며, 또 무슨 낯으로 같은 반열의 대신들을 다시 만나겠는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살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이런 생각을 이미 정하였다. 그러나, 호송(護送)하는 중국인이 상당히 많아 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기에 이르러 이렇게 하게 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죽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창이 반드시 법을 범하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을 찌르게 된 것이니, 내 마음에 애처롭다. 만리 길에 고생하고 오는 사람을 내가 당초에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지 않으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뜻이 굳이 청하므로 억지로 따랐는데, 지금에 와서는 뒤늦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치전(致奠)하여 주고 쌀과 관곽(棺槨)을 주라.”
하였다. 이창은 안신(安身)의 아들이다.
○ 충정공(忠貞公) 허(許)는 휘(諱)가 종(琮)이요, 자는 종경(宗卿)이다. 세조 병자년의 문과(文科)에 3등으로 발탁되어 왕명(王命)을 받아 천문학(天文學)을 익히는데, 마침 일식(日食)의 변이 있었으므로 측후보고서(測候報告書)를 써 올리면서, 그 끝에 임금이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여 경연(經筵)에 나오지 아니하며,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잘못을 모두 논하였다. 임금이 그가 뜻이 있고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여, 한 자급(資級)을 승진시켰다. 그 뒤에 겸예문(兼藝文)으로서 글을 강론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전일에 일을 논한 사람인가?”
하자. 공이 전일에 아뢴 뜻을 거듭 논하였다. 세조가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려고 하여 끌어 내려 곤장을 치게 하니, 옆에서 모시던 사람들이 다리가 떨렸으나, 공은 꿋꿋하게 동요하지 않은 채 행동이 평소와 다름 없이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데, 음성이 우렁차고 분명하였다. 세조가 크게 칭찬해 주고 술잔을 들이게 하니, 공의 거동이 얌전하고 조용하여 볼만하였다. 공은 웅장한 얼굴과 넓은 이마, 아름다운 수염에 키가 11척 2촌으로 풍채가 천만 사람의 위에 뛰어나서, 바라보면 태산 교악(喬嶽)과도 같았다.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에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국경에 마중나갔다. 두 사신이 거드름을 피워 사람을 내려다 보다가, 공이 들어가 인사하자 깜짝 놀라며 일어서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절하였다. 돌아갈 때에 압록강에 이르러 섭섭하여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말하기를,
“바라건대 공이 조속히 사신으로 와 주어 중국 사람들로 하여금 해외(海外)에 이런 인물이 있는 줄을 알게 하시오.”
하였고, 중국에 돌아가서는 사대부들 사이에 누누이 칭찬하기를,
“천상(天上) 일은 모르지마는 인간에는 둘도 없다.”
하였다.
○ 영락 정유년(1417, 태종 17)에 명령하여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참서(讖書)를 소각하게 하고, 인하여 서울과 지방에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던 요망하고 허탄한 글들을 기일을 정하여 자수시켜 관청에 납입하여 불태우게 하되, 위반한 자는 누구나 고발하게 하여 요서조작법(妖書造作法)에 의하여 죄를 주게 하였는데, 이색(李穡)의 문집 제십오권(第十五卷)도 날짜를 정하여 찾아 바치게 하였다.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가 일찍이 연회석에서 모셨을 때에 태종이 앞으로 오게 하여 이르기를,
“경은 나의 주석(柱石)이다.”
하였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대관(臺官)으로서 일을 논하다가 죄를 입어,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쫓겨났다가, 뒤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결원이 되자 태종이 관안(官案)을 열람하다가 허조의 이름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적임이다.”
하고, 드디어 임명하였다.
○ 태종조(太宗朝)에 강원도 강릉 대령산(大嶺山)의 대(竹)가 열매를 맺었는데, 그 모양은 기장 이삭 같고 열매는 진맥(眞麥)과 같으며 차지기는 의이(薏苡) 같고 맛은 당서(唐黍) 같은데, 마을 사람들이 따다가 술과 밥을 만들었고, 또 함길도(咸吉道) 화주(和州)에서는 흙이 있는데, 그 모양과 빛깔이 황랍(黃蠟)과 같았다. 그것으로 떡을 만들자 맛이 목맥(木麥)과 비슷하여 배고픈 백성들이 가져다가 먹고 배를 채워 주림을 면하였다. 금상(今上) 갑오년(1594, 선조 27)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봉산(鳳山) 지방에서 차지고 미끄러워 진말(眞末)과 같은 흙이 났는데, 흙 7~8분과 쌀가루 2~3분으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 배를 채울 수 있고 또한 병도 나지 않으므로 배고픈 백성들이 그것에 힘입어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 영락 무술년 6월에 정부의 육조(六曹)와 삼공신(三功臣) 및 문무백관(文武百官) 등이 세자 지(褆)의 과실을 열거하여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폐하기를 청하자 태종이 윤허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세자를 삼으니, 곧 세종이었다.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지를 광주(廣州)로 추방하였다.
○ 영락 무술년(1418, 태종 18) 8월에 태종이 세자에게 선위하게 하자, 의정부 육조 및 여러 공신들이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와 하늘을 울부짖고 통곡하며 명(命)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자도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옥새를 세자에게 전하고 연지동궁(蓮池洞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자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한 다음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또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갖추어 상왕전에 봉사(奉謝)하고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모두 상왕에게 아뢰었다. 11월에 상이 곤룡포와 면류관 차림으로 인정전(仁政殿)에 가서 상왕을 성덕신공(聖德神功)으로, 대비를 후덕존호(厚德尊號)로 봉숭(封崇)하니, 상왕이 시어소(時御所)에 납시어 헌수례(獻壽禮)를 행하였다.
태종이 상왕이 된 뒤에 병조에서 잘못한 바가 있다고 하여 입직한 참판 강상인(姜尙仁)과 좌랑 채지지(蔡知止)를 의금부에서 국문하도록 명하였고, 이어 판서 박습(朴習), 참의 이각(李慤), 정랑 김자온(金自溫)ㆍ이안유(李安柔)ㆍ양여공(梁汝恭), 좌랑 송을개(宋乙開)ㆍ이숙복(李叔福) 등을 모두 추고하여 하옥시키고, 강상인은 찢어 죽이고 박습은 목베어 죽였으며, 이관(李灌)ㆍ심정(沈泟)등 연루된 사람도 목베어 죽이고 그 처자식은 노비로 삼았다.
영의정 심온(沈溫)도 연루되었는데, 의금부 진무(鎭撫) 이양(李楊)에게 명하여 수원(水原)으로 압송하게 하여 자진하게 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원근의 차등을 두어 부처(付處)시켰다.
○ 심온이 죽음을 당하자, 그의 처자식은 적몰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그 뒤 의정(議政) 이직(李稷) 등이 아뢰기를,
“무술년에 심온이 강상인 등의 옥사에 연루되어 태종께서 사사(賜死)하였으나, 좋은 장지(葬地)를 정하고 관을 주어 장사지내게 하였으니, 비록 의금부의 요청에 따라 그의 처자식을 적몰하였지만 전지를 내려 역사(役事)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공비 전하(恭妃殿下)께서는 바야흐로 국모(國母)이신데, 어미 안씨(安氏)를 천관(賤官)의 신분이 되게 함은 매우 타당하지 못합니다. 한 나라 소제(昭帝) 상관황후(上官皇后)의 아비 안(安)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나, 그의 아내는 추존하여 경부인(敬夫人)으로 삼아 원읍(園邑)에 안치하였으니, 청컨대, 한 나라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천안(賤案)에서 삭제하시고 관직을 돌려주소서.”
하니, 세종(世宗)이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 등을 불러 면유(面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심온이 죽자, 의금부에서는 심온의 형제를 천관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태종께서 ‘비(妃)의 자식과 형제들을 이로 인해 단죄해서는 안 된다.’하였고, 또 심온의 처자식을 천적(賤籍)에 기록할 것을 청하자, 태종께서 금천군(錦川君) 박은(朴訔)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 라고 하자, 박은이 대답하기를, ‘자기의 죄가 아니고, 또 중궁(中宮)의 어미를 적몰하여 천관으로 삼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하였다. 당시에 유정현(柳廷顯)이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였는데, 굳이 청하여 마침내 우선 천적에 기록하라고 하였고, 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죄인의 딸을 왕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공비(恭妃)를 동요시켜려는 것입니다.’하니, 태종께서 ‘이 무슨 말인가? 공비를 동요시킬 리 만무하다.’하였다.
태종께서 언젠가 내전(內殿)에 납셨을 때 대비가 곁에서 모셨고, 나도 곁에서 모시게 되었는데, 대비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비의 어미를 천적에 기록하는 것은 매우 안 될 일이니,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길, ‘고쳐야 합니다.’하였는데, 일이 시행되기도 전에 갑자기 부왕께서 승하하셨다. 내가 비록 부왕의 뜻을 알았지만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발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비의 외조부 안천보(安天保)가 공비의 집을 받들고 공비를 길러주었고, 게다가 연로하여 죽을 날을 기약하다가 어려우므로 지난 갑진년 겨울에 공비께서 집에 가서 잔치를 열어 위로해 주었는데,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기를, ‘모자지간(母子之間)에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함께 만나볼 수 있습니까?’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높은 왕비의 신분으로 아래에 있는 천한 사람을 대면하는 것은 대의에 통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하므로 내가 다만 조부만을 만나볼 수 있게 하였다. 근자에 말하는 자들이 대부분 ‘모자지간에는 이처럼 소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또 국후(國后)의 어미를 천인으로 삼는 것은 은혜와 의리에 있어서 모두 안 될 말이라고 하니, 지금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천적에서 삭제하고 관작을 돌려주어 그 자녀들을 모두 면하게 하라. 또 모자간에 만나보지 못한 것이 지금 여러 해가 되었으니, 어찌 절박한 심정이 없겠는가. 모일(某日)에 공비가 안씨의 집으로 갈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 좌의정 유정현이 죽자, 세종께서 스스로 오사모와 검은 띠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금오교 밖을 나가 장막에서 거애(擧哀)하였으며,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에도 거애하였다.
○ 건국 초기에는 산릉(山陵)에 석곽(石槨)을 사용했는데,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상사에는 태종이 백성들의 힘을 괴롭힌다 하여 온전한 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여 반듯한 바위로 짜서 만들었다. 세종이 효성스러운 마음이 독실하여 온전한 돌을 채취하자 태종이 스스로 역소(役所)에 가서 쳐서 부수어 버렸다.
○ 영락 임인년(1422, 세종 4)에 의금부에서 청산 현감(靑山縣監) 탁지(卓祉)를 조율하며 말하기를,
“임금의 상사(喪事)를 아비의 상사보다 가볍게 한 것은 마음이 불충해서이니, 대명율(大明律)의 모반 대역과 능지처참한 죄에 견주라.”
하였는데, 아뢰니, 사형을 감하여 곤장 일백(一白)에 처하고 관노(官奴)의 신분으로 정속(定屬)시켰으며, 가산을 적몰하고 처자식을 노비로 삼았다.
○ 선덕(宣德) 병오년(1426, 세종 8) 9월에 임금이 살곶이(箭串)에서 크게 열병식을 하였는데, 평명(平明)에 거가(車駕)가 출동하자 백관들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모셔 따랐다, 거가가 막사로 들어오자 병조에서 아뢰고 신포(信砲)를 놓았다. 왕세자 이하가 갑옷과 투구로 갖추고 차례로 들어가 단 앞에 나아가 동서로 나누어 북향하여 서고, 오위(五衛)의 모든 군사들은 하루 전에 단(壇)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금 갑옷을 입고 단에 오로자 왕세자 이하가 네 번 절하고 나니, 정이품 이상과 6대언(代言)은 단 위에 오르고, 종이품 이하의 백관들은 모두 단 앞에 늘어섰다. 대각(大角)을 세 번 불자 좌우상(左右廂)과 오위(五衛)에서 각(角)을 불어 응하였다. 이에 포(砲)를 쏘아 두드리며 아우성치고 혹은 진(陣)을 변경하여 도전하여 서로 이기고 지는 형용을 하였는데, 무릇 다섯 번 진을 변경하고 파하였다. 군사의 수효는 6천 6백여 명이었다.
세종이 집현전(集賢殿) 부교리 권채(權採)와 저작랑(箸作郞) 신석견(辛石堅)과 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너희들이 나이 젊고 장래가 유망하니, 지금부터 출사(出仕)하는 일을 면제하여 줄터이니 각기 집에 조용히 있으면서 전심하여 글을 읽어 성취된 효과가 있게 하되, 글 읽는 규범(規範)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으라.”
하였다.
○ 선덕 정미년에 문무과 중시(重試)에 새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은영연(恩榮宴)을 예조에서 베풀어 주었는데, 부원군 조연(趙涓), 찬성(贊成) 권진(權軫)을 압연관(押宴官)으로 삼고, 병조 판서 황상(黃象)을 부연관(赴宴官)으로 삼고, 좌대언(左代言) 김맹성(金孟性)과 우대언 김자(金赭)를 시켜 선온(宣醞)을 갔다 주었다. 신은(新恩)을 받은 사람들이 다음 날에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 좌의정 황희가 모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 후임을 내지 아니하였다가 두어 달 지난 뒤에 황희를 기복(起復)시켜 다시 임명하였다. 이때에 세자가 장차 명 나라에 조회하러 가게 되었는데 황희를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황희가 글을 올려 간절히 사양하기를 두 번까지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명 나라에서 칙서가 오기를,
“세자는 반드시 들어 올 것이 없다.”
하자, 황희가 또한 사양하기를,
“세자가 이미 중국에 가지 아니하게 되었고 또한 나라에 별 일이 없으니, 삼년상을 마치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세종이
“대신이 기복(起復)하는 것은 조종(祖宗)들의 정한 법이다.”
하여, 윤허하지 아니하였고, 이어 전교하기를,
“옛적에 나이 60이 되면 비록 상중에 있더라도 오히려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지금 황희가 이미 기복하였고 나이 60이 넘었는데 어찌 소식(素食)을 하면서 정무를 보겠는가. 내가 친히 보고 육식을 권하려 하였는데, 마침 기운이 불편하니 정원(政院)에서 불러 육식을 권하라.”
하였다. 황희가 빈청(賓廳)에 나아가자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가 임금의 말을 전하고 고기를 권하니, 황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이 현재 병이 없는데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잘 아뢰어 주시오.”
하였으나, 흠지(欽之)가 감히 아뢰지 못하겠다고 대답하니, 황희가 그제서야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고기를 먹었다.
○ 선덕 기유년에 명 나라 사신 윤봉(尹鳳)ㆍ창성(昌盛)ㆍ이상(李翔) 등이 황제의 칙명으로 어린 고자 6명과 집찬비(執饌婢) 12명과 창가비(唱歌婢) 8명을 선발하고 가야금ㆍ현금(玄琴)ㆍ향비파(鄕琵琶)ㆍ당비파(唐琵琶)ㆍ저(笛)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 우의정 유관(柳寬)이 글을 올려 당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 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종(宋太宗) 때에 사포(賜酺)하던 고사를 인용하여 청하기를,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정하여 대소 신료(大小臣僚)로 하여금 좋은 곳을 가려 놀고 즐기게 하여 태평 시대의 기상(氣像)을 나타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세종이 윤허하였다. 유관이 나이가 많다고 핑계하고서 치사(致仕)하자, 종신토록 제사록(第四錄)을 주게 하였다.
○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좌의정 황희가 감목관(監牧官) 태석균(太石均)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하여 대관(臺官) 이심 (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주선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청컨대 황희를 파면시켜 청탁으로 법을 어기는 징조를 막으소서.”
하니, 세종이 답하기를,
“대신을 경솔하게 죄줄 수 없다.”
하였다. 뒤에 사헌부의 말대로 윤허하여 황희를 파직시키고 그 후임을 내지 않았다가 이듬해에 다시 임명하였다. 간원(諫院)에서 글을 올렸는데, 대략에,
“황희가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 대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가까운 사람에게 사정을 두어 헌부에 청탁을 하였는데, 다만 그의 직책만 파면되었으니, 이것은 그의 큰 다행입니다. 또한 교하(交河)의 둔전(屯田)을 받기를 청하였으니, 옛날 베를 짜는 아내를 내쫓고 집안에 심은 채소를 뽑아 버린 사람과는 거리가 멈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1년도 되지 못하여 어느새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태연스럽게 받아 안안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니, 청컨대 파면하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모든 일을 옳고 그르고 간에 숨김없이 다 말하여 주니,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의 말을 듣고 가볍게 쉽사리 거절할 수 없다.”
하였다.
○ 선덕 신해년 동지하례(冬至賀禮) 때에 영의정 황희가 망궐례(望闕禮)에는 들어와 참여하고, 본조(本朝)의 하례에는 병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사헌부에서 통례문 영사(通禮門令史)를 불러 그 연고를 물으므로 영사가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헌부에서 그 영사에게 매를 쳤다. 의정부에서 사인(舍人)을 보내어 아뢰기를,
“통례문 영사는 상관이 없는데도 매를 맞았으며, 또한 의정부는 백관의 우두머리입니다. 당상(堂上)의 진퇴(進退)를 헌부에 고하는 것이 원래 전례가 없는데, 지금 욕을 당하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사헌부의 처사가 실로 잘못 되었으니 사간원에 내려 보내어 추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 선덕 병오년(1426, 세종 8) 9월에 세종이 서교(西郊)의 연희궁(衍禧宮)에 거쳐를 옮겼다가 다음해 3월에 창덕궁으로 돌아올 때에 좌의정 이직(李稷), 우의정 황희(黃喜) 등이 세자를 모시고 따르게 되었는데, 세자가 출발하기 전에 먼저 떠났다. 헌부에서 공함(公緘)으로 문비(問備)하였는데, 임금이 불러 직무를 보게 하였다.
○ 양영대군(讓寧大君)의 첩 건리(件里 어리)가 자디비(紫旳轡)를 입었다가 헌부의 금리(禁吏)에게 발각되었는데, 건리가 대사헌 오승(吳陞)의 시중드는 첩에게 내통하여 무사하게 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오승이 금리(禁吏)에게 고발하지 말라고 하였다. 집의(執義) 이하가 오승에게 문비(問備)하고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오승을 파직시켰다.
○ 우의정 치사(致仕) 유관(柳寬)이 아뢰기를,
“매일 상참(常參)하므로 주상께서 수고로이 거둥하시니, 청컨대 하루씩 걸러 상참을 정지하소서.”
하니, 세종이 답하기를,
“아뢴 뜻은 내가 알았소, 경이 늙은 기력으로 억지로 대궐에 들어오니 내가 실로 염려되오. 후일에 만약 아뢸 일이 있거든 사람을 시켜 아뢰고, 경은 몸을 편안히 하여 원기를 길러 노쇄한 몸을 더욱 보호하오.”
하였다.
○ 선덕 임자년 8월에 임금이 친히 양로연(養老宴)을 근정전에서 행하였는데, 2품 이상은 전내, 4품 이상은 월대(月臺), 5품 이하로부터 서인(庶人)까지는 전정(殿庭)에 앉게 하였다. 노인들이 전(殿)에 올라올 때에는 임금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날에는 중전(中殿)이 사정전(思政殿)에서 늙은 부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영락 신축년(1421, 세종 3)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송 나라 소희(紹熙) 5년(1194, 고려 명종 24)에 4조전(四祖殿)을 태묘(太廟)의 서쪽에 세워 조주(祧主)인 희(禧)ㆍ순(順)ㆍ익(翊)ㆍ선(宣) 4조(四祖)의 신주를 모시고, 해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목조(穆祖) 대왕이 조천(祧遷)하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이 제도에 의하여 종묘의 서쪽에 별묘(別廟)를 세우되 ‘영녕전(永寧殿)’이라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삼가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처음에 태조가 건국할 때에 이미 종묘를 세우고 계성전(啓聖殿)도 설치하여 선왕들을 모셨고, 뒤에 태조가 승하하자 혼전(魂殿)을 인소(仁昭)라 이름하였다가 뒤에 문소(文昭)라 고쳤고, 태종의 원묘(原廟)는 광효전(廣孝殿)이라 이름하였는데, 각기 도성 안에 있었다. 뒤에 세종이 여러 신하에게 의논하여 궁성안에 땅을 정하여 침전(寢殿)을 세우고 그대로 문소(文昭)라 이름하였다. 선덕 계축년(1433, 세종 15) 5월에 먼저 양전(兩殿)에 신주(神主)의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드리고, 의물(儀物)을 갖추고 신위(神位)를 받들어 수레에 실었다. 임금이 광화문 밖에서 공경히 영접하여 태조의 위판을 먼저 새 문소전(文昭殿)에 모셨다. 태조 양위(兩位)에 부알(祔謁)하는 예를 마치자, 임금이 친히 안신제(安神祭)를 행하고, 궁에 돌아와 하례를 받았으며, 중외(中外)에 특사(特赦)를 내렸다. 그 교서(敎書)의 대략에
“역대의 제왕들이 이미 종묘를 세워 예가 태고(太古)를 숭상하였으니 신으로 섬긴 것이요, 또 원묘(原廟)를 세워 평소처럼 섬겼으니 친애(親愛)하게 여긴 것이다. 원묘(原廟)의 설립이 역대마다 같지 아니한데, 송 나라에서 제관(諸觀)의 신어(神御)를 합하여 경령궁(景靈宮)에 모신 것이 정리(情理)와 예의 중을 얻은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 태조ㆍ태종의 원묘(原廟)가 각기 다르니, 옛 제도에 합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후세의 자손들이 각기 그 사당을 세우게 되면 백세 뒤에는 신묘(神廟)가 너무 많아질 것이기에 이에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1대(代)의 규모를 창립하여 만세의 법으로 정한다.”
하였다.
○ 강녕전(康寧殿)을 영선(營繕)할 때에 채석(採石)하던 군사 한 사람이 압사(壓死)하였다. 세종이 전교를 내려 자책하기를 간절하게 하였고, 또한 말하기를,
“만약 조정에서 사신을 대접하는 집이라면 비록 죽는 자가 많더라도 어찌 내가 거처하는 집을 영선하다가 한 사람이라도 죽게 한 참사와 같겠는가.”
하고, 쌀 열섬을 주게 하였다.
○ 세종이 북방에 육진(六鎭)을 설치하고 김종서(金宗瑞)를 관찰사(觀察使)로 삼아 맡겼다가, 임기가 차자 본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전보(轉補)하였다. 종서의 모친이 죽자 임금이 종서를 부르되 빨리 역마를 타고 오게 하고, 또 종이와 관곽(棺槨)을 부의(賻儀)하였다. 백일이 지난 뒤에는 기복(起復)시켜 환임(還任)하게 하였는데 종서가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육식을 권하여 보내게 하였다.
○ 선덕 기유년에 울진현(蔚珍縣)에 수상한 당선(唐船)이 표착되었다. 잡고보니 모두 열 여섯 사람이었는데, 모두 푸른 옷을 입었다. 머리털을 감아 목에다 매었고 채색 그림이 있는 붉은 무명으로 머리를 쌌으며 바지도 입지 아니하고 푸른색 큰 옷으로 몸 하부를 쌌는데, 역관이 자세히 살펴보니 유구(琉球) 사람이었다. 울진 현령(蔚珍縣令) 수산포(守山浦) 만호(萬戶) 둥이 처음에 적선인가 하여 많이 쏘아 죽이자 임금이 명하여 상을 주게 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논계(論棨)하기를,
“분명히 적이 아닌 줄 알면서도 서로 다투어 쏘았으니, 청컨대 상을 주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옛사람이 죽은 말을 사자 산 말이 뒤쫓아 온 일이 있었으니, 내가 마땅히 상을 주어 장래를 권면하리라.”
하였다.
○ 선덕 기유년 8월 1일에 일식(日蝕)이 있었는데, 임금이 소복(素服)차림으로 근정전 기둥 밖에 나와 일식을 구(救)하면서 어좌(御座)에 발 없는 평상을 놓고 살선(繖扇)과 의장(儀仗)을 갖추지 아니하였다. 모시는 신하들도 소복으로 대궐 뜰에 나누어 섰는데, 세자는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백관들은 각기 조방(朝房)에 나와 시위(侍衛)하였다.
○ 선덕 임자년에 예조에게 아뢰기를,
“삼가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니, 천자의 배필을 황후라 하고 왕의 배필은 왕후라 하여 역대의 제도에 다시 더 아름다운 칭호를 올린 적이 없었고, 벼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각기 칭호를 달리하여 명칭과 지위를 구별하였는데, 본조의 제도는 왕(王)……, (……이하 결)
○ 계품사(計稟使) 공녕군 인(恭寧君裀)과 부사(副使) 도통제(都統制) 원민생(元閔生)이 금ㆍ은의 공물(貢物) 면제를 청원할 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세종이 친히 모화관(慕華館)까지 가서 전송하였다. 인(裀)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아 가지고 왔는데, 금ㆍ은 공납(貢納)을 면제하되, 토산물로써 정성을 표시할 것을 허락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영의정 황희,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 허조를 불러, 시학(視學)할 때에 시취(試取)하는 절차를 의논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시취하기 위하여 시학한다면 옛 제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시학이 경한 것이 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 등의 말이 옳다.”
하였다.
○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 18)에 의정부에 전교하였는데, 그 대략에,
“개국(開國)한 처음에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설치하여 온 나라의 정치를 총리(總理)하였고, 그것을 고쳐 의정부(議政府)로 만든 뒤에는 그 직책이 처음과 같았는데, 갑오년에 대신(大臣)이 직접 소소한 사무를 간섭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여,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 같은 것은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아뢰고, 그 나머지는 육조(六曹)에서 직접 위에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으므로, 그 뒤로는 크고 작은 일이 모두 육조로 돌아가고 의정부를 거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의정부에서 참여하여 아는 일은 오직 사형수를 결정하는 것뿐이니 지난날 정승에게 위임하던 뜻에 배반됩니다. 지금부터 태조께서 만든 법에 의해 육조와 각 관직이 모두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여 가부(可否)를 의논한 뒤에 아뢰어 결재를 받아, 도로 육조에 내려 보내어 시행하게 하되 오직 이조ㆍ병조의 관원 임명 및 병조의 군사쓰는 것과 형조의 사형수 외의 판결은 그대로 해조에서 바로 아뢰어 시행한 뒤, 곧 의정부에 보고하여 시행하게 하는데, 만약 타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의정부가 조사하여 반박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선종황제(宣宗皇帝)가 일찍이 칙서를 내려 우리 나라에서 농우(農牛) 1만 마리를 요동에 보내되, 비단과 포목으로 무역하게 하였다. 세종이 정부와 육조에 명령하여 의논하게 하니, 혹은 우역(牛疫)으로 소가 부족하여 수량을 채우기 어렵다고 핑계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에게 말하기를,
“이 의논을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내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는데, 지금 이 일들 때문에 거짓말로 아뢰어 감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합당하겠는가, 이것은 아홉 길[仞]의 산을 만들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부족하게 하여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숭선(崇善)이 대답하기를,
“천하 고금의 일이 사정(邪正) 두 글자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사도(邪道)로써 상국(上國)을 섬기겠습니까.”
하였다.
○ 선덕 병진년(1436, 세종 18)에 세종이 의정부에 전교하기를, 옛적에 사시(四時)의 사냥이 있어 강무(講武)하여 금수(禽獸)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니, 이것은 선왕(先王)이 정한 제도로서 군국(軍國)의 중한 일이었다. 조정조(祖宗朝)의 옛 제도를 참작(參酌)하여, 봄 가을에 강무(講武)하는 법을 정하여 자손에게 전하였으니, 생각이 주밀하였던 것이다. 신진유생(新進儒生)들이 이것을 임금이 놀이하는 것이라 하여 매양 행사를 정지하기를 청하고, 대신(大臣)도 더러 정지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나, 나는 조종들이 정한 법을 폐하고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에는 강무(講武)할 시기에 당하여 내가 마침 병이 들어 친히 행할 수 없기에 장수를 시켜 대행(代行)하게 하려 하였는데, 대신들의 의론이 병권(兵權)을 장신(將臣)에게 주는 것이 의리에 타당하지 못한 점이 있다하므로 그만두었다. 금년에는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내가 염려되어 추기 강무(秋期講武)를 우선 정지하고, 명년 춘기 강무도 정지하여 백성들의 힘을 쉬게 하려 했는데, 근일에 병조에서 청하기를 ‘큰일을 폐해서는 안 된다.’하였고, 나도 또한 생각하니, 흉년일수록 더욱 군사를 연습하는 것이 비상사태를 방비하는 도리였다. 그러므로 우선 그 요청을 들어주되, 모든 일을 간략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한번 거둥하면 그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세자가 무군(撫軍)하는 직책이 있기에 대행(代行)하게 하려 한다. 이렇게 하면 중요한 일을 폐하지도 아니하고 비용도 반드시 감해져서 둘다 온전해질 것이니, 의론하여 아뢰라.”
하니, 영의정 황희 등이 아뢰기를,
“병권(兵權)을 세자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금년은 흉년이니, 정지하소서.”
하였는데, 들어 주었다.
○ 세종이 한재를 걱정하여 중외(中外)에 금주령(禁酒令)을 내리고 오랫동안 약술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의정(議政) 이직(李稷)이 들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에게 술 마시는 것을 금하면서 나만 홀로 마시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대사헌 원숙(元肅) 등이 지(禔)의 죄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해년에 지(禔)가 도망하여 숨자, 두 상[兩上 상왕(上王)인 태종(太宗)과 세종(世宗)]께서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하다가 내시들을 나누어 보내어 수색하여 찾아내었으며, 태종이 재신(宰臣)들을 불러 만나 보고서 지를 불러 옆에 앉게 하여 면대하여 꾸짖었는데, 대략에, ‘양녕(讓寧)의 행실이 금수(禽獸)와 같다. 그러나 반역(反逆)을 도모한 죄는 전혀 없으므로 가까운 지방에 있게 하여 보전하게 하였는데, 또다시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으니, 말하자면 부끄럽기만 하다. 부모에게 불효한 것은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오늘부터는 양녕을 의정부와 육조(六曹)에 맡기고 나는 간여하지 않겠다. 만약 또 법을 범하면 의정부에서 잡아오더라도 나는 간여하지 않겠으며, 한결같이 국가의 조치를 따르겠다.’하고, 양녕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네가 도망한 뒤부터 내가 생사를 알지 못하여 항상 눈물을 흘렸으며, 주상(主上)도 옆에 있으면서 또한 눈물을 흘렸었다. 네가 편안한데 여러 동생이 사고가 있다면 주상(主上)과 같은 우애(友愛)의 정이 있겠느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꾸짖기만 하고 차마 죄를 주지 아니하셨으며, 그 뒤에도 전하께서 모든 것을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완곡하게 들어 주었으며, 회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태종이 승하하여 빈소에 계실 때에 한 번도 애통해 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돌을 실어들여 집을 수리하면서 소주를 지나치게 먹여 인명(人命)을 상하게 하였으며, 이천 고을 수령 박고(朴翶)가 마을 사람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 본시 그의 직책인데, 양녕이 분노하여 글을 올려 박고에게 죄주기를 청하면서 말이 불순하여, ‘만약 청을 들어주지 아니하면 신과 주상(主上)의 사이가 이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하여, 불충(不忠)한 마음이 언사(言辭)에 나타났으니, 청컨대, 해당 관청에 회부하여 국문하게 하고, 글을 써준 사람도 수사하여 죄를 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 사건을 궁중에 두고 정원에 내려보내지 아니하였다.
원숙 등이 여러 날 논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양녕대군의 아들 개(?)가 나이 들자 순평군(順平君)으로 봉하니, 대간(臺諫) 및 정부(政府)에서 반대하여 관직을 주지 말고 아버지를 따라 밖에 살게 하기를 처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양녕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었으므로 밖에 추방하였지마는, 그 아들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다. 대간이 굳이 반대하자, 그제야 개를 성밖에 거주시키면서 부름을 받은 뒤에야 궁문에 들어오고, 대군을 만나 보려면 왕래할 때에 모두 정부에 고하도록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동교(東郊)에 행차하여 양녕대군 지를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주고, 저녁에 환궁(還宮)하자 지는 이천 적소(謫所)로 돌아갔다.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우연히 행차한 줄 알고 지를 부를 것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튿날 양사(兩司)에서 그 불가한 것을 논하여 다시는 접견하지 말하기를 청하였고, 또 상참(常參)하는 날에는 극력 논하였다. 이때에 우의정 맹사성(孟思誠)과 형조 판서 신개(申槪)가 입시(入侍)하였으나, 잠자코 있으면서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법사(法司)에서 사성과 신개에게 대신과 법조당상(法曹堂上)이 양녕을 다시 불러 만나 보지 마시라는 일에 한마디도 아뢰지 아니한 연유를 문비(問備)하니, 사성의 답통(答通)에,
“불러 만나 보지 마시라는 것을 일찍이 아뢰었기 때문에 아뢰지 않은 것이오.”
하였고, 신개의 답통에는,
“본래 풍절(風節)이 없는 사람이니, 지만(遲晩)하시오.”
하였다. 이에 법대로 죄를 따지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것을 궁중에 접어두고, 사성에게 명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사성이 아뢰기를,
“정승은 백관(白官)의 우두머리이므로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 수 없어야 능히 그 직책을 다였다 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사헌부의 탄핵을 당하였으니, 직무를 볼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영락 기묘년 10년 초하룻날 사시(巳時)에 머리가 희고 꼬리가 붉으며 형상이 날아가는 따오기와 같은 기운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떨어졌으며, 정통 병진년(1436, 세종 18) 7월 30일 초저녁에 크기는 동해(銅海) 같고, 꼬리는 베 한 필의 길이와 같으며, 빛은 번개 같은 유성(流星)이 하늘 중간에 나타났다가 북극(北極)으로 들어가면서 흩어졌는데, 조금 있다가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 선덕 병오년(1426, 세종 8)에 강화 마리산(摩利山)이 진동하여 울려 큰 쇠복을 치는 것과 같더니, 조금 있다가 참성단(塹城壇) 동쪽 봉우리에서 돌이 떨어졌다. 주서(注書) 장후(張厚)와 서운관 정(書雲觀正) 박염(朴恬) 등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정간(李貞幹)이 나이 70이 되었고 모친의 나이 90이 넘었으므로, 세종이 특별히 술과 풍류를 내려 주어 위로하였다. 금상(今上 금상은 선조, 뒤에도 이 글에 나오는 금상은 선조를 가리킨 것임)께서 정승 홍섬(洪暹)과 노수신(盧守愼)의 모친이 모두 높은 나이이므로 우대하여 쌀과 콩을 넉넉히 내려 주었다.
○ 의금부 도제조 영의정(義禁府都提調領議政) 유정현(柳廷顯) 등이 아뢰기를,
“헌부가 왕명(王命)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본부(금부)의 진무사(鎭撫使)ㆍ도사(都事) 등을 바로 소유(所由)를 시켜 불러오게 하여 뜰에 들여놓고는 지평 이상이 모두 의자에 앉아 심문하는 것이 왕의 전지에 어긋납니다. 하물며 조옥(詔獄)의 관리를 헌부에서 마음대로 불러 오는 것은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세종이 전교하기를,
“헌부에서 잘못했다.”
하고, 장무장령(掌務掌令) 황보인(皇甫仁)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3품은 영외(楹外), 4품 이하는 뜰 아래 세우고 일을 신문하는 것이 본부(本府)의 전례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만일 어떤 죄가 있다면 말을 갖추어 아뢰어 전지(傳旨)를 받는 것이 옳은데, 임금의 전지를 받는 것도 아니면서 3품, 4품의 조관(朝官)들을 관청 앞에 꿇어 앉히고서, 지평(持平) 이상이 모두 의자에 앉아 일을 신문하였으니, 너희들의 잘못이다. 지금부터는 혹시라도 그와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 우의정 조연(趙涓), 부원군 연사종(延嗣宗),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등이 사람들의 서로 소송하는 노비(奴婢)를 받아 몰래 힘을 써 주어 승소판결(勝訴判決)을 받았다.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조연 등을 모두 중도부처(中途付處)하였다. 세종(世宗)이 이어 헌부에 전교하기를,
“내가 들으니, 세력 없는 사람의 소송하는 노비를 소송 맡은 관리들이 청탁을 받아 받아 원통하고 억울하게 된 일이 더러 있다 하는데, 헌부의 이번 일은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동생 서달(徐達)이 신창현(新昌縣)의 아전 표운평(表芸平)을 죽였는데, 추관(推官)들이 수범(首犯) 종범(從犯)을 나누어 서달의 종을 주범(主犯)으로 삼았고, 또 그 사화(私和)를 들어 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세종이 명령하여 전후의 추관(推官) 및 충청도 관찰사를 심문하여 모두 의금부에 가두고 죄를 정하는데 차등을 두게 하였다.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도 관련되어 금부에 갇혔는데, 이튿날 보방을 명하여 다만 파면만 시키고, 후임자를 내지 않았다가 10여 일을 지나 도로 제수하였다.
○ 세종이, 다른 여러 나라는 자기 국어로 된 문자(文字)가 있어 그 나라의 말을 기록하건만 유독 우리 나라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본국의 음운(音韻)이 비록 화어(華語)와 다르나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의 청탁(淸濁)과 고저가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하여, 어제(御製)인 언문(諺文) 자모(子母) 28자를 대궐 안에 국(局)을 설치하여 성삼문(成三問)ㆍ최항(崔恒)ㆍ신숙주(申叔舟) 등을 시켜 찬정(撰定)케 하였다. 이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죄를 지어 요동(遼東)에 귀양가 있었는데, 삼문ㆍ숙주로 하여금 북경으로 가는 사신(使臣)을 따라가 요동에 가서 찬을 보고 음운을 질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요동에 왕래하기를 13번이나 하였다.
○ 선덕(宣德) 병오년에 황주(黃州)에 감로(甘露)가 내리고, 정통(正統) 병진년에는 정평(定平)ㆍ영흥(永興)에 또 감로가 내렸었는데, 색이 백랍(白蠟)같고 맛이 매우 달았다. 대신들이 하례(賀禮)를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하늘이 상서(祥瑞)를 내린 것이 제 때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상서가 아니라 곧 재변이라 여기니 하례하지 말라.”
하였다.
○ 정통 계해년(1443, 세종 25)에 장차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려 하는데, 서장관(書狀官)을 두세 번이나 바꾸어 마침내 신숙주를 추천해 임명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숙주가 오랫동안 병들었다가 새롭게 일어났다. 세종이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그대가 병으로 몸이 약해졌다 하니, 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병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나라에 당도하게 되자 시(詩)를 청하는 사람이 떼를 지어 모였다. 숙주가 붓만 들면 곧 써냈는데, 시와 글씨가 다 아름다우니 여러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출발에서 돌아올 때까지 무릇 9개월이었는데, 이전에는 통신사의 행차가 이때와 같이 완전하고 빨리 다녀온 적이 없었다. 상사(上使) 변중문(卞仲文)이 그 노모(老母)가 있었는데, 그가 돌아오자 그 집에 잔치를 내려 주어 영광스럽게 하여 주었다.
○ 변중문이 돌아올 때에 본국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가 되었던 남녀들을 데려 왔는데, 대마도에서 배를 출발시켜 미처 해안(海岸)에 닿기 전에 구풍(颶風)이 갑자기 크게 일어나 배가 거의 전복될 지경이었다. 데려 오는 포로들 가운데 아리를 밴 한 여인이 있었는데,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신한 여자는 수로(水路)의 금기(禁忌)인 것이니, 물에 던져 넣어 빌어야 합니다.”
하니, 숙주가 굳이 말리기를,
“남을 죽여 내가 살기를 구하는 것은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고, 몸으로 그 여인을 가리웠는데, 조금 뒤에 바람이 멎어 배가 가게 되었다.
○ 정통 기사년에 북쪽 오랑캐 야선(也先)이 북경(北京)ㆍ광녕(廣寧)ㆍ요동(遼東) 등지를 침범하니, 조공(朝貢)길이 어려워져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렸다. 지원(知院) 정척(鄭陟)이 성절사(聖節使)에 차출되었으나 용감하게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직하던 날 세자에게 명령하여 특별히 위로하여 보냈었다. 중도에서, 황제가 오랑캐에게 억류되고 북경이 포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지체하려 하는데, 정척은 전진하여 돌아보지 않았다. 북경에 당도하고 보니 새 황제가 이미 즉위한 뒤였다. 새 황제에게 알현(謁見)하고 나서는, 북방을 쳐다보며 성절(聖節)의 하례(賀禮)를 예식대로 하였다.
○ 문종(文宗)이 동궁에 있을 때에 상호군(上護軍) 김오문(金五文)의 딸에게 처음으로 가례(嘉禮)를 행하여 칭호를 휘빈(徽嬪)이라 하였는데, 여러 해를 요사스러운 방술 같은 것을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또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 봉여(奉礪)의 딸을 책봉(冊封)하여 순빈(純嬪)이라 하여 8년이 되었는데 허물이 있어 폐하고, 양제(良娣) 권씨(權氏)를 세워 빈(嬪)으로 삼으니, 곧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노산(魯山 단종)을 낳은 7일 만에 훙(薨)하였다.
○ 직제학 어변갑(魚變甲)이 장차 전시(殿試)를 보려 하는 차에, 대제학(大提學) 정이오(鄭以吾)가 우연히 꿈에 시를 짓기를,
세 층계 바람 뇌성 「어변갑」이요 / 三級風雷魚變甲
한 봄 풍경 「마희성」이네 / 一春煙景馬希聲
비록 대구가 원래 서로 꼭 맞는 것이라 하나 / 雖云對偶元相敵
어찌 용문 상객의 이름에야 미치랴 / 那及龍門上客名
하였는데, 변갑이 과연 장원에 뽑혔다.
○ 어변갑이 좌정언(左正言)으로 있다가 충주판관(忠州判官)이 되어나갔다. 이때에 공의 아버지 연(淵)이 전임(前任) 하양감무(河陽監務)로 산반(散班)에 있었는데, 변갑이 상소로 진정(陳情)하여 자기의 관직을 대신 주기를 원하므로 태종이 허락하여 특별히 연(淵)에게 두 계자를 승진시켜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다. 뒤에 변갑이 헌납(獻納)이 되었을 때에 동료들이 장차 상소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 윤향(尹向)을 논핵(論劾)하려 하였는데 일이 애매하게 되었다. 공이 서명(署名)하지 않으면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마침 윤공(尹公)의 처소에 있었다. 이 사람이 반드시 그런 일이 없는 것을 자세히 알고 있는데, 감히 거짓을 얽어대어 남을 모함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좌석이 파하였다.
어변갑이 신장(申檣)과 더불어 벗이 되어 매우 친하였다. 서로 언약(言約)하기를,
“우리들이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기다가 만일 이름을 얻게만 되면, 그 때에는 모름지기 돌아가 노친(老親)을 봉양하기로 하자.”
하였었는데,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게 되자, 임금의 은혜가 겹겹으로 내려 차마 얼른 서울을 떠날 수 없으므로 항상 부모 봉양하러 돌아감이 늦어지는 것을 한(恨)하여, 매양 탄식하기를,
“임금 섬길 날은 많으나 부모 섬길 날은 적다.”
하였다. 뒤에 허리 밑이 건삽(蹇澁)한 병을 얻자 곧 사표(辭表)를 올려 고향에 가서 온천에 목욕하여 병 치료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끝까지 반드시 써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이미 병을 치료하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는냐? 그의 병이 낫기를 기다려서 속히 아뢰라.”
하였다. 공이 이에 출발하여 창녕 본가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병을 핑계하고 돌아오매 한 집이 아늑하니 / 謝病歸來一室幽
황량한 풀과 나무 묵은 연못가로세 / 荒涼草樹吉池頭
나 같은 것이 어찌 공명을 피하는 자이랴 / 若余豈避功名者
다만 자애하신 어버이 위하여 멀리 가지 못함이네 / 只爲慈親不遠遊
하였다. 신장은 벼슬이 여러 번 참판에 이르렀다. 뒤에 공의 아들 한림(翰林) 효첨(孝瞻)에게 말하기를,
“내가 자네 아버지와 더불어 돌아가 부모 봉양하기를 엄밀히 언약하였었는데, 자네 아버지는 능히 뜻을 결단하여 돌아갔으나, 나는 언약을 저버렸으니, 부끄러움이 많네.”
하였다. 찬성(贊成) 권제(權踶)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벼슬을 그만둔 사람은 다만 두 사람뿐이니, 한성 판윤(漢城判尹) 허주(許周)와 어아무개이다.”
하였다. 공이 이미 사직하고 돌아오자, 부모가 모두 계신데다 여러 아우들도 무고(無故)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달고 맛진 음식을 대접하여 날마다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함으로 일삼았다. 조정의 의론이 그의 행의(行義)를 애석히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에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아니하였고, 또 사간(司諫)으로 불렀으나 끝내 취임하지 아니하고 평생을 마쳤다. 이상은 행장임
○ 정통 연간에 어느 풍수설(風水說)을 하는 사람이 건의하기를,
“궁성(宮城) 북쪽 길에 담을 쌓고 문을 만들어 사람들의 내왕을 제한하고, 또 성안에다가 흙을 메워 산을 만들며 명당(明堂)의 물에다 오물을 던지지 말게 하소서.”
하니, 어효첨이 상소하여 극력 그 불가함을 말하니, 세종이 보고 감탄하여 드디어 풍수의 설을 물리쳤다.
서울의 관청에는 으레 작은 집을 하나 따로 설치하여 지전(紙錢)을 총총 걸어 놓고 칭호를 부군(府君)이라 하여 서로 모여 자주 제사지내고, 새로 취임하는 관리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되 조심스럽게 하였는데, 비록 사헌부(司憲府)라도 그렇게 하였다. 효첨이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자 하인들이 고사(故事)로써 고하였다. 효첨이 말하기를,
“「부군」이란 무슨 물건이냐?”
하고, 걸어 놓은 지전(紙錢)을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전후로 지나온 관청의 「부군의 사당」은 대부분 다 불태우고 헐어버렸다.
○ 노산(魯山)이 어려서 왕위를 계승하고 세조(世祖)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에 궁중이 텅 비었고, 또한 후사를 잇는 것이 중하다 하여 권제(權制)를 따라 의론을 정하여 왕비를 맞아들인 것은
“이미 상(喪)을 입지 아니한 것으로서 그 실지가 없어진 것이니, 상복을 벗는 것이 옳다.”
하였다. 어효첨이 예조 찬의로 있으면서 항의하기를,
“왕비를 맞는 것은 비록 종사의 큰 일이기 때문에 부득이하였지마는, 상복의 기간을 단축하는 것은 무슨 부득이한 일이 있어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까?”
하며, 조목조목 따지고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였으나, 끝내 그 말이 시행되지 않았다.
○ 세종이 말년에 병이 많아 능히 정무를 보지 못하므로 동궁에 있는 문종에게 명령하여 모든 정무를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이에 의사당(議事堂)을 설치하고 군신(群臣)들의 조참(朝參)을 받았다.
○ 문종이 선비들에게 책문(策問)으로 시험보일 때에 친히 문제를 내기를,
“들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현인(賢人)을 구해 들이고 간하는 말을 들어주며, 욕심을 적게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요, 나라를 잘못 다스리는 사람은 이와 반대가 된다고 하니,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선대(先代)의 업을 이어 받았기에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를 깊은 못가에 임한 듯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같이 하여 나의 허물과 실책을 말해 주어 부족한 데를 보충하기를 바란다. 너의 사대부들은 성인(聖人)의 학문에 마음을 쓴 지 오래되었다. 만약 오늘날 급히 해야 할 일이 있거나 혹 내가 들어 알지 못하는 과실이 있거든 마땅히 마음을 다해 진술하여 숨기지 말지어다. 비록 문장이 기특하고 화려하여 서술한 것이 넓으나, 뜻이 도리어 부족하면 나는 한갓 그것을 도리어 배우(俳優)와 같이 볼 것이며, 임금의 덕만 칭찬하여 걸핏하면 요순(堯舜)에 견주나 실지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면, 나는 한갓 그것을 아첨하는 헛수고로 볼 것이니, 오늘의 대책(對策)은 성실하게 하기를 힘쓰라.”
하였다. 이때에 마침 황해도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므로 친히 제문을 지어 관원(官員)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치는 순전한 양[純陽]만이 아니라 음(陰)도 있고, 물(物)은 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있어, 옴이 있으면 반드시 감이 있고, 신(神)이 있으면 반드시 귀(鬼)가 있는 것이다. 귀신이란 진실로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리지 않는 것이니, 어찌 여기(癘氣)라고 주(主)가 없으랴? 감정이 없는 것을 음양이라 하고, 감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한다. 감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지만, 감정이 있는 것은 이치로써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물과 불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람을 상하게 하는 수가 있고, 귀신은 사람을 도우는 것이나 혹 때로는 사람을 해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과 불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요, 사람을 해치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추움과 더움, 비 오고 개는 것, 오미(五味 감(甘)ㆍ신(辛)ㆍ산(酸)ㆍ함(鹹)ㆍ담(淡))의 음식은 천지가 사람을 살리게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 자신이 그 조화(調和)를 잃게 되면 병이 여기에서 근원하여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거룩한 덕은 이치가 온 천지와 동일한 것이니, 지금의 여기(癘氣)는 실로 귀신이 앙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또한 사람들 자신이 허물을 저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침 한 사람이 허물을 저지른 것으로 인하여 전염되어 점차 넓어지고 여러 해 동안 그치지 아니하여 죄없이 횡액을 입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어찌 옛글에 이른바 ‘천리(天吏)로서 지나친 사람의 선악을 가리지 않고 다 죽인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한 나라 신(神)과 인(人)의 주(主)가 되었기에 항상 한 가지 사물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우리 백성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것인가?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몇 군데에 깨끗한 처소를 가려 단(壇)을 만들고, 조정 신하를 나누어 보내어 고기ㆍ술ㆍ밥ㆍ국으로써 제사지내며 거듭 간절한 말로 타일러 너희를 깨우치게 하노니, 너희 귀신들은 이러한 뜻을 잘 계승하고 잘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여, 어긋나게 성낸 기운을 거두고 만물을 낳고 살리는 본래의 덕을 펼지어다.”
하였다. 임금의 문장이 넓고 큼이 이와 같았다. 응교 이개(李愷)가 지어 올렸는데, 문종이 보고,
“내 마음에 합당치 않다.”
하고, 손수 초안하여 내보냈다.
○ 노산(魯山)이 어려서 왕위를 이어 받았는데, 8대군(大君)이 강성하므로 인심이 불안하게 여겼다. 세조가 혁제(革除)할 뜻이 있었는데, 권람(權擥)이 그의 집에 드나들어 심히 친밀하였다. 매양 들어가 뵐 때면 해가 늦도록 물러가지 아니하여 밥상을 제때에 올리지 못하므로, 그 집 하인들이 권람이 오는 것을 보면,
“국 식히는 서방님이 또 왔군.”
하였다. 즉위한 뒤에 권람을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정희 왕후(貞熹王后)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분이 전일에 국을 식히던 서방님이오.”
하였다.
○ 한명회(韓明澮)가 젊었을 때에 불우(不遇)하였는데, 큰 뜻을 품고 과거(科擧)보기를 애쓰지 아니하여 나이 30이 넘도록 오히려 포의(布衣)로 있으면서 권람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할 벗이 되었다. 세조가 권람에게 인재를 물으므로, 권람이 명회를 천거하였다. 복건(幅巾)을 쓰고 찾아 뵈었는데, 한번 만나보자 마치 오래전에 만난 듯이 투합하여 좀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것을 한(恨)하였다. 매양 찾아 뵈올 적에는 종부시 관원(宗簿寺官員)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의원(醫員)이라 칭하기도 하여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였고, 또한 밤에 찾을 적에는 밖에서 부르기 어려우므로 궁노(宮奴) 임운(林芸)의 팔에다 노끈을 매어 그 끝을 대문 밖에 드리워 놓아, 그것을 당기면 아무리 깊은 밤에도 들어가 고할 수 있었다. 혁제(革除)하는 계책은 대체로 명회에게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세조가 항상 칭하기를,
“나의 자방(子房 장량의 자)이다.”
하였다. 명회가 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와 당 태종(唐太宗)이 비록 장량(張良)ㆍ진평(陳平)과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의 꾀를 썼지만 한신(韓信)ㆍ팽월(彭越)과 포공(褒公)ㆍ악공(鄂公)이 없었더라면 무력(武力)으로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무사(武士) 홍달손(洪達孫)ㆍ양정(楊汀)ㆍ유수(柳洙) 등 30여 명을 추천하여 마침내 쓰임을 받았다.
○ 노산(魯山) 계유년에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ㆍ정분(鄭笨)이 3정승이 되었는데, 종서가 지략(智略)이 많으므로 당시에 큰 호랑이라 칭하였다. 세조가 그를 먼저 제거하려 하여 친히 무사 양정ㆍ유수ㆍ유서(柳漵) 및 궁노(宮奴)ㆍ임운(林芸) 등을 거느리고 어둠을 틈 타 종서의 집에 가면서, 권람ㆍ한명회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을 지키게 하여 비록 마지막 종소리가 나더라도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도록 경계하였다. 그것은 종서의 집이 돈의문 밖에 있기 때문이었다. 종서가 수양 대군을 영접하여 이야기를 마치고 전송하러 대문까지 나오다가 뜰 가운데 서서 또 이야기를 한참동안 하였는데, 종서의 아들 승규(承珪)가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사모(紗帽) 뿔이 다 떨어진 것을 깨닫고, 말하기를,
“대감의 사모뿔을 빌려 주시오.”
하였다. 종서가 승규를 시켜 안에 들어가 사모뿔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에 양정ㆍ임운 등이 종서를 쳐 땅에 넘어뜨렸다. 승규가 구하러 달려와 종서의 위에 엎드리는 것을 또한 쳐 죽이고서 세조가 달려 돌아왔다. 미리 순군장(巡軍將) 홍달손(洪達孫)과 약속하여 순군을 흩지 말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드디어 그 군사를 거느리고 노산의 시어소(時御所)로 갔다. 이때 노산이 대궐에서 나와 향교통(鄕校洞)에 있는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집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세조가 대문 틈으로 승정원에 고하기를,
“김종서가 반역(叛逆)을 도모하였는데, 일이 급하여 미처 아뢰지도 못하고 이미 베어 죽였으니, 직접 그 연유를 아뢰겠습니다.”
하니, 승지 최항(崔恒)이 문을 열고 맞아들였다. 세조가 그의 손을 이끌고 함께 들어갔다. 노산이 나이 어리므로, 놀라 일어나며,
“숙부(叔父), 나를 살려 주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니, 신(臣)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곧 명패(命牌)를 내어 모든 재상(宰相)을 부르고, 금군(禁軍)을 부서(部署)를 나누어 각 곳에 파수(把守)하게 하고, 또 사람으로 세겹 문을 만들어, 한명회(韓明澮)로 하여금 생살부(生殺簿)를 가지고 문 안에 앉았다가, 재상들이 첫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을 떼게 하고, 둘째 문에 들어오면 이름이 살부(殺簿)에 있는 사람은 무사를 시켜 철퇴로 쳐죽였는데, 황보인 및 이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등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종서가 다시 살아나 사람을 시켜 성문(城門)에서 외쳐 정부에 고하게 하되,
“정승이 사람에게 맞아 중상을 입어 병이 중하니, 속히 위에 아뢰어 약을 가지고 와서 구급하도록 하라.”
하였으나,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자의 가마를 타고 숭례문(崇禮門)ㆍ돈의문 등을 돌아다녔으나, 문이 닫혀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조도 종서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이튿날 새벽에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이흥상(李興商)을 시켜 살펴보니, 종서가 승규의 방안에 숨어 있었다. 끌어내니, 종서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걸어가겠느냐? 내 초헌(軺軒)을 가져오라.”
하자, 군사들이 베어 죽였다.
세조가 종서를 죽이던 날 밤에 먼저 훈련주부(訓練主簿) 홍윤성(洪允成)으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여쭙는다고 핑계하고 종서의 집에 가서 엿보게 하였는데, 종서가 안방에서 베개에 기대고 있는데, 첩 세 사람이 뒤에 있었다. 윤성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는,
“들으니, 네가 힘이 세다 하는데, 내게 강한 활이 있으니, 한번 당겨보라.”
하였다. 윤성이 연거푸 두 장을 분지르자, 종서가 말하기를,
“옛날의 번쾌(樊噲)도 이보다 못하겠다.”
하고는, 첩을 시켜 큰 그릇에 술을 부어 주므로, 윤성이 세 사발을 마시고 나왔다.
세조가 이미 김종서 등을 죽이고 나자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ㆍ이조 판서ㆍ병조 판서에 제수되어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겸하게 되었고, 또 교서를 지어 그 훈공(勳功)을 표창하게 하였다. 당시에 집현전 관원들이 그 글을 짓기 싫어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柳誠源)만이 당직(當直)으로 있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여 그 글을 짖고는 집에 돌아와 통곡하니, 가족들이 그 연유를 몰랐다. 성삼문(成三問) 등이 노산을 복위(復位)시키려는 도모에 성원이 참여했었다. 일이 실패하자, 성원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서 막 공무를 보고 있다가, 변(變)을 듣고는 말을 찾아 타고 급하게 돌아와 관대(冠帶)도 벗지 않고 가묘(家廟)로 들어 갔다. 집안 사람들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 보니, 반듯이 누워서 찼던 칼을 빼어 목에 대고 나무쪽으로 쳤는데, 미처 구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나졸(邏卒)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찢었다.
경태 을해년(1455, 단종 3)에 노산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 세조를 불러 왕위(王位)를 넘겨 주고 대보(大寶)를 내어주니, 세조가 눈물을 흘리며 사양하나 되지 않았다. 이날 박팽년(朴彭年)이 경회루 밑 연못에 가서 빠져 죽으려 하자, 성삼문이 말리기를,
“주상(主上)께서 상왕이 되어 계시고 우리들이 죽지 않았으니, 아직도 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로 모의(謀議)하여 노산을 복위시키려 하였다. 조금 있다가 팽년이 충청 감사로 나갔는데 올리는 장계(狀啓)에 신자(臣字)를 쓰지 않았고, 녹(祿)을 받아서는 먹지 않고 봉하여 한 창고에 따로 쌓아 두었다.
일이 실패하자, 세조가 힐문하기를,
“네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 칭하고 녹을 받아 먹으면서 다시 배반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반란을 일으키려는 놈이다.”
하니, 팽년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이라 칭하지 않았으며, 또한 녹도 먹지 않았소.”
하였는데, 조사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들 헌(憲)과 같은 날에 죽었는데, 헌은 생원에 합격하여 당시에 명예가 있었다. 세조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에 의정부에서 잔치를 하였는데, 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廟堂) 깊은 곳에 애처로운 음악이 울리니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를 지금은 모두 모르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르러 동풍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훤한데 봄날이 정히 더디고 더디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큰 사업은 금궤(金匱)에서 뽑아내고 / 先王事業抽金匱
성주(聖主)의 큰 은혜로 옥잔을 기울이네 / 城主鴻恩倒玉扈
즐기지 않으리 어이 길이 즐기지 않으리 / 不樂何爲長不樂
실컷 마시고 배부른 태평시대를 노래로 화답하네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는데, 세조가 그 시를 부중(府中)에 현판(懸板)하도록 하였다.
팽년의 후송 충후(忠後)가 대구에 살면서 천역(賤役)을 하였는데, 부사 박응천(朴應川)이 천적(賤籍)에서 이름을 제거해 주어 천역을 면하게 해 주었고, 금상(今上) 초기에는 벼슬을 주었다.
인종(仁宗) 때에 경연관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세조께서 박팽년 등에게 마음으로는 비록 가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위태롭고 불안할 때이므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당대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이다.’하였던 것이니, 후세에 민멸(泯滅)될까 염려하여 이런 암시의 말씀을 하여 후세 자손들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하였다.
○ 세조가 전위(傳位)를 받던 날, 성삼문이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옥새(玉璽)를 받들어 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통곡하였다. 세조가 바야흐로 땅에 엎드려 굳이 사양하다가 때때로 머리를 들어 바라보았다. 삼문이 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 및 무인 유응부(兪應孚)와 노산의 외숙(外叔)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復位)시키려고 도모하였는데, 김질(金礩)도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 팽년이 김질에게 이르기를,
“일이 성공되는 날에는 너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이 영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삼문 등의 거사 기일이 여러 번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질이 이에 그 음모를 정창손에게 누설시켰는데, 창손이 곧 질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 비밀히 아뢰기를,
“질과 삼문 등이……하였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세조가 편전(便殿)에 나와 앉으매, 삼문도 승지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세조가 무사를 시켜 끌어 내려 질이 밀고한 말대로 힐문하니, 삼문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모두 사실이오. 상왕이 나이 한창 젊으신데,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히 할 일입니다. 다시 무엇을 물으시오, 나으리가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인증하더니,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밀고한 것은 오히려 간사한 행위로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다만 이렇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쇠 조각을 불에 달구어 배꼽 밑에 놓으니 기름이 끓으며 불이 붙어 타는데, 삼문의 안색이 변하지 않고, 쇠 조각이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오너라.”
하였다. 또한 그의 팔을 끊으니 천천히 말하기를,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오.”
하였다. 이때에 신숙주가 자리에 있었는데, 삼문이 꾸짖기를,
“전일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같이 당직할 때에, 세종께서 원손(元孫)을 안으시고 뜰에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과인(寡人)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너는 잊었느냐?”
하니, 숙주가 몸둘 바를 모르므로 세조가 숙주를 피하게 하였다. 삼문이 죽음에 다다라 감형관(監刑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죽어서 돌아가신 임금을 땅 밑에서 뵈리라.”
하고, 그 아버지 승(勝) 및 아우 삼고(三顧)ㆍ삼성(三省)과 더불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 이개(李塏)는 목은(牧隱 이색)의 증손인데, 시(詩)와 문이 뛰어나 세상에서 중망을 받았다. 세종이 온양 온천(溫泉)에 갈 적에 이개가 성삼문 등과 함께 편복(便服)으로 행차를 따라가 고문(顧問)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삼문의 모사에 참여하였는데, 사람됨이 몸이 파리하고 약하나 곤장 아래에서도 안색이 변하지 아니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이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매우 친밀하게 출입하므로 이개가 경계한 적이 있었다. 이때서야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제 숙부에게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못된 놈이라 여겼더니, 과연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러하였던 것이로구나.”
하였다. 이개가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나갈 때에 시를 짓기를,
우의 솥처럼 중할 때엔 삶도 또한 크거니와 / 禹鼎重時生亦大
기러기 털처럼 가벼운 데선 죽음 또한 영광일세 / 鴻毛輕處死猶榮
일찍이 일어나 자지 않고 문을 나가니 / 明發未寐出門去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 顯陵松柏夢中靑
하였다.
○ 하위지(河緯地)는 선산(善山) 사람이다. 세종 무오년(1437)에 과거하여 장원에 뽑혔다. 문종(文宗)이 승하하자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갔다. 단종이 우사간(右司諫)으로 불러 벼슬이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는데, 삼문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위지가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국문을 받을 때엔 위지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이미 역적이란 이름을 썼으니, 그 죄가 응당 죽을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노기가 풀려 유독 그에게는 단근질을 시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인재를 양성하여 이때에 한창이었는데, 모두 위지를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 유응부(兪應孚)는 무인(武人)으로서 날랜 용기가 남보다 뛰어나 능히 담과 집을 뛰어 넘었다. 어머니를 섬김이 효성스러웠고,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삼문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시키려고 모의하여, 아무날 명 나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할 때를 타서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그날 세자(世子)가 임금과 한 자리에 오지 않고, 또 자리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가진 장수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삼문 등이 그 계획을 연기하려 하니, 응부는 그래도 들어가 거사하려 하면서 말하기를,
“일은 빠른 것이 좋은 것이오. 세자가 비록 한 자리에 오지 않았으나 우익(羽翼)들이 다 여기에 있으니 만약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제가 어찌 하겠는가.”
하였으나, 삼문 등이 만전(萬全)의 계책이 아니라 하여 굳이 말렸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일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묻기를,
“네가 어찌하려 하였느냐?”
하자, 응부가 대답하기를,
“석 자의 칼을 가지고 당신을 폐하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하였는데, 조무래기 선비들과는 같이 모사(謀事)할 수 없었소, 만약 진작 내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이 지경이 되었겠소. 더 이상 사실을 묻고 싶거던 저 서생(書生)들에게 물으시오.”
하여, 듣는 사람들이 오싹하였다. 관(官)에서 그의 집을 몰수하는데 문안에 다만 떨어진 자리만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청백을 탄복하였다. 일찍이 동지들과 모인 자리에서 팔을 뽐내며 말하기를,
“한명회ㆍ권람을 죽이는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하였었다. 일찍이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되었을 적에 시를 짓기를,
날쌘 매 삼백 마리 누각 앞에 앉았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으니, 그 기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 세종이 일찍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나인(內人)들이 무당의 말에 현혹되어 성균관(成均館) 앞에서 기도하므로 유생(儒生)들이 무녀(巫女)들을 몰아 내었다. 중사(中使)가 매우 노하여 그 연유를 아뢰자, 세종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선비를 양성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선비들의 기개가 이러한 것을 보니 내가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보니, 내 병이 나은 듯하다.”
하였다. 유 판서(柳判書)가 이 말을 명묘(名廟 명종)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사기(士氣)를 배양하기를 마땅히 이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가 정승이고, 김종서가 공조 판서였을 때 하루는 공회석(公會席)에 모였는데, 종서가 공조(工曹)에서 약간의 주찬(酒饌)을 준비하여 들여오게 하였다. 황희가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자, 하리(下吏)가 대답하기를,
“공조 판서가 시간이 오래되어 여러분이 시장하실까 염려하여 잠시 공조에서 준비하게 한 것입니다.”
하니, 황희가 노하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의정부 옆에 설치한 것은 3정승을 위한 것이니, 만약 시장하면 마땅히 예빈시에서 준비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공조에서 멋대로 가져 왔는가?”
하며, 입계(入啓)하여 죄를 주게 하려는 것을 여러 재상들이 말리자 그만두고, 종서를 앞에 불러놓고 준절히 책망하였다.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대신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조정을 통솔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 세조는 용모가 기특하고 웅장하며, 활쏘기와 말타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6세에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 사냥갔을 때에 하루아침에 사슴ㆍ노루 수십 마리를 쏘아 잡았는데,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어졌다. 늙은 무사(武士) 이영기(李永奇) 등이 보고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날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보게 될 줄 몰랐다.”
하였다. 처음에 진양 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하였다가, 뒤에 수양(首陽)으로 고쳤는데, 문종이 일찍이 그 활에다 쓰기를,
“활은 철석(鐵石)이요, 화살은 벼락이네. 죄어 있는 것만 보았지, 풀려있는 것 보지 못하였네.”
하였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정확하게 측정(測定)하기 위하여, 세조 및 안평 대군(安平大君)과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가 해지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기 그지 없어 안평대군 이하 분들이 눈이 현기(眩氣)가 나고 다리가 떨려 앞으로 가지 못하였으되, 세조는 걸음걸이가 나는 것과 같아 순식간에 오르내리므로 보는 이들이 매우 탄복하여 따라갈 수 없다 여겼다. 항상 소매가 넓은 옷을 입으므로 궁중에서들 웃었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너와 같이 용맹이 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렇게 넓고 큰 것이 좋다.”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 1)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갈 때에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대장군이라 칭하였고, 황성 궐문(皇城闕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일시에 물러서서 움츠리므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여기서 출발할 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데리고 갈 만한 사람을 권람에게 묻자 신숙주를 추천하였고, 또한 돌아오기 전에 혹 사태가 변동될까 염려하여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와 황보인의 아들 모(某)를 데리고 함께 갔다.
○ 상당군(上黨君) 한명회가 태중에 있은 지 7개월 만에 출산되어 사지가 완전하지 못하므로 유모가 솜에 싸서 밀실(密室)에 둔 얼마 후에야 완전한 어린애가 되었다. 이미 장성하자 골격이 기특하였다. 어렸을 때 산중 절에서 글을 읽을 때 한번은 밤에 산골짜기를 지나는데 범이 그의 길을 보호해주어 갈 수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멀리까지 배웅해 주니, 호의에 감사한다.”
하니, 범이 머리를 숙이고 꿇어 엎드리는 모양을 하다가, 날아 밝으려 하자 그제야 갔다. 또 언젠가는 영통사(靈通寺)에 놀러갔는데, 밤중에 얼굴이 괴상하게 생긴 한 늙은 중이 가만히 공에게 말하기를,
“공의 머리 위에 광채가 번쩍번쩍하는데, 이것은 모두 귀하게 될 징조입니다. 명년이 다 가지 않아서 공은 반드시 뜻대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
○ 경태 병자년(1456, 세조 2) 여름에 성삼문 등이 창덕궁에서 임금과 왕세자가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여, 부서를 나누어 이미 정하였다. 이날 한명회가 우승지로서 들어와 아뢰기를,
“광연전(廣延殿)이 좁고 또한 무더우니, 세자는 올 것도 없고, 운검(雲劍)을 맡은 장수들도 전내(殿內)에 입시할 것이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모의가 실패되어 모두 처형되었던 것이다.
○ 성화(成化) 기해년(1479, 성종 10)에 명 나라에서 장차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들을 치려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서 협공(夾功)하여 줄 것을 청하므로, 성종이 예성군(蘂城君) 어유소(魚有沼)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는데, 압록강 가까지 가서는 얼음이 녹아 건너기 어렵다 핑계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파하고 돌아왔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고, 중국에서도 외국이 아닌 것으로 대우해 주므로 평교(平交) 이하의 것에 있어서도 오히려 신의를 잃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천자(天子)의 명령을 이미 받아 거행하다가 중도에 어겨서야 되겠습니까. 조종(祖宗) 이후로 대국을 섬기던 정성이 전하(殿下) 때에 와서 쇠퇴될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다시 날랜 군사를 보내어 속히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조정에서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길도 험하고 눈이 쌓여 재차 거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임금도 의심스럽게 여겼다. 명회가 극력 요청하기를,
“의론하는 자들의 말은 저나 편하자는 꾀요, 신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큰 체통입니다. 승하거나 패하는 운수에 있어서는 미리 근심할 바가 아니요, 요컨대 천하에 대의(大義)를 드날리자는 것입니다.”
하여, 재삼 극력 청하므로 임금이 들어주어 우의정 윤필상(尹弼商)에게 명하여 일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는데, 크게 이기게 되자 임금이 대단히 기뻐하였고, 중국에서도 칙서(勅書)를 내려 칭찬하였다.
○ 성종조에 한명회가 아뢰기를,
“성균관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인데 읽을 서적이 없으니, 매우 안 된 일입니다. 마땅히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인출(印出)하여 장서각(藏書閣)을 지어 소장해 놓고 모든 유생들로 하여금 뜻대로 빼어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명회가 장서각 세울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여 조력하였다. 이상은 묘지(墓誌)에 있는 것인데, 어세겸(魚世謙)이 지었음.
○ 이시애(李施愛)는 길주(吉州) 사람인데, 벼슬이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지냈고, 상(喪)을 만나 집에 있으면서 딴 뜻을 품었다. 성화 정해년(1467, 세조 13)에 그의 아우 시합(施合)과 더불어 반역을 모의하였다.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이 길주에 가자, 시합의 첩의 딸이 고을 기생으로서 효문이 방에서 자는 기회에 문을 열고 군사를 불러 들여 효문을 죽이고, 드디어 성을 차지하여 반역하였다. 이에 앞서 시애가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충청도 병선(兵船)이 경성(鏡城) 후라도(厚羅島)에 왔고, 또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어 설한령(薛罕嶺)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들을 다 죽인다고 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인심이 의아하고 두려워하여 산에 올라가 피해 숨는 사람도 있었다. 시애가 또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리기를,
“각 고을 인민들이 모두 죽음을 당할까 의구심을 가져 유언 비어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니, 청컨대, 본도 출신으로 수령을 내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세조가 크게 성내어 시애의 글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친히 시애의 반역한 상황을 물었는데, 그 사람이 끝까지 시애는 국가에 충성하여 본도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요, 반역할 마음이 없는 것이라 역설(力說)하였으니, 아마 그 사람도 역시 시애에게 속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귀성군 준(歸城君浚)을 도총사(都摠使)로, 호조 판서 조석문(曹錫文)을 부총사로 삼고, 허종(許琮)은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기복(起復)시켜 본도 절도사로 제수하고, 강순(康純)과 어유소(魚有沼)를 대장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시애가 이미 군사를 일으키자, 여러 고을에서 서로 앞을 다투어 수령을 죽여 시애에게 호응하였고, 함흥부(咸興府) 사람들도 관찰사 신면(申㴐) 포위하였는데, 신면이 다락에 올라가 방어하다가 힘이 다 되자 스스로 자기의 활을 분지르고 크게 꾸짖으며 죽었다.
단천(端川) 사람 최윤손(崔潤孫)이 조정에 벼슬하여 계자(階資)가 3품이었다. 임금이 그를 보내어 본도 인민에게 역적을 따르지 말도록 타일러 깨우치게 하였는데, 윤손이 시애에게 붙어 도리어 조정의 비밀을 모두 알려 주었다. 종성(鐘城) 사람 차운혁(車云革)이 적진(賊陣) 속에 들어가 동지(同志)들과 약속하여 시합(施合)을 묶어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적당에게 빼앗기고, 운혁 등은 죽음을 당하였다. 강순과 허종 등은 홍원(洪原)에서 크게 싸우고, 또 북청에서 싸웠으며, 또 만령(蔓嶺)에서도 싸웠는데, 적이 높고 험한 곳을 점거하여 화살이 비오듯 하므로 우리 군사가 올라가지 못하였다. 유소(有沼)가 몰래 작은 배에다가 정병(精兵)을 싣되 푸른 옷을 입혀 초목의 색과 구별이 없게 하고, 바다 굽이를 따라 나무를 휘어잡고 절벽을 기어올라 상봉(上峯)으로 넘어 올라가 적진을 내려다 보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적이 크게 놀래었다. 영(嶺) 밑에 있던 군사들이 또한 기세를 타 방패로 몸을 가리고 개미 떼처럼 붙어 올라가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드디어 무너졌다.
시애가 도로 길주로 도망가 기녀(妓女)와 재화(財貨)를 모두 싣고 오랑캐의 땅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길주 사람 허유례(許由禮)가 적당(賊黨)인 이주(李珠)ㆍ황생(黃生)ㆍ이운로(李雲露) 등을 타일러 시애ㆍ시합을 생포하여 와 항복하므로, 시애ㆍ시합을 진전(陣前)에서 베어 머리를 서울로 보내었다. 처음에 현상모집하기를,
“시애를 베어 오는 사람에게는 백신(白身)이라도 가선(嘉善)의 계자(階資)를 주겠다.”
하였었기에, 임금이 허유례ㆍ이주ㆍ황생 등을 인견(引見)하여 내전(內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금대(金帶)를 띠게 하여 관직을 주었다. 준(浚) 이하는 공(功)의 등급을 정하여 훈권(勳券)을 주고, 길주(吉州)를 강등하여 길성현(吉城縣)을 만들었다.
○ 이시애의 반란 때에 유언을 퍼뜨리기를,
“한명회ㆍ신숙주ㆍ노사신(盧思愼)ㆍ한계희(韓繼禧) 등이 내통(內通)이 되어 있다.”
하므로, 세조가 그들을 대궐 안 인지당(麟趾堂)에 구금하고, 그 아들과 사위를 모두 의금부에 가두었다. 한 달 남짓하여 유언이 헛말임을 알고서야 석방하였는데, 내전(內殿)으로 불러 볼 때에, 뜰에 내려 가서 영접하여 깊이 후회하고 자책(自責)하였으며, 대면하자 눈물까지 흘렸다. 시애를 생포하였을 때에 묻기를,
“한명회 등을 모함하여 지목한 까닭은 무엇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숙주ㆍ한명회의 무리가 있으면 내 일이 성공하지 못할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소.”
하였다.
○ 천순(順天) 경진년(1460, 세조 6)에 육진(六鎭)의 번호(藩胡)가 배반하므로, 세조가 신숙주을 원수(元帥)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길을 나누어 깊이 들어가 쳐부수는데, 오랑캐가 밤을 이용하여 추격하여, 군중(軍中)이 시끄럽게 외치며 떠 들었으나, 숙주는 자리에 누운 채 꼼짝하지 않고 막료(幕僚)를 불러 시 한 수를 읊기를,
오랑캐 땅에 서리 내려 변방이 추운데 / 虜中霜落塞垣寒
백 리 사이에 철기가 종회하네 / 鐵騎縱橫百里間
야간 전투가 끝나지 않고 날이 새려하는데 / 夜戰未休天欲曉
누워서 보니 별들이 참 빛나네 / 臥看星斗正闌干
하였다. 장수와 군사들이 그의 안정되고 조용한 것을 보고 힘입어 동요하지 않았다.
○ 경태 계유년(1453, 단종 1)에 세조가 북경에 갈 적에 서거정(徐居正)이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서 수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婆娑堡)에서 자는데, 그날 저녁에 거정의 모친이 죽었다는 부고가 왔다. 세조가 숨기려고 하였는데, 밤에 거정이 이상한 꿈을 꾸다가 놀라 일어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같이 자던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거정이 답하기를,
“꿈에 달이 이상(異常)하였는데, 대저 달이란 어머니의 상징(象徵)이다. 우리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데, 꿈의 징조가 불길하기 때문에 슬퍼한다.”
하였다. 이 말을 세조에게 고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조가 탄식하기를,
“거정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다.”
하고, 마침내 사실을 알려 주었다.
○ 이시애의 반역한 보고가 오자, 중외(中外)가 흉흉(洶洶)하였다. 이때에 충청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상주(喪主)로 집에 있었는데, 기복(起復)시키고 계자를 뛰어올려 절도사(節度使)로 삼으니, 공이 곧 숙배(肅拜)하고 하직하였다. 친구들이 따라가 전송하며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한창 치열하니, 공이 조금 머뭇거리며 형세를 관찰하여야지, 바로 진격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지금 시세를 보면 마치 타는 불을 끄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아 하루에 천리라도 달리지 못하는 것이 한인데, 어찌 한 시각인들 지체하겠소. 맹세코 이 역적과 함께 살지 않겠소.”
하였다. 중도에서 관찰사 신면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길을 두 배로 재촉하여 가서 영흥(永興)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여기는 태조 진전(太祖眞殿)이 계신 곳이니, 만약 차질이 있게 되면 마땅히 여기에서 죽음을 바치겠다.”
하였다. 도총사(都摠使) 귀성군 준(龜城君浚)이 군사를 주둔시켜 놓고 전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서한(書翰)을 보내어 책망하기를,
“군사는 기민하고 빠른 것이 제일이니, 어름거리고 앉아서 기회를 잃을 수 없는 것이오. 이 도의 인민들이 유언비어에 동요되었으니, 인심이 만약 안정되면 시애가 비록 반역한들 무슨 걱정이 있겠소. 경유(經由)하는 모든 고을을 일일이 깨우치고 타일러 인심이 차츰 안정되거든 대군(大軍)을 속히 들어오게 하시오. 한번 기회를 잃으면 비록 뉘우친들 소용없는 것이오. 의심하지 말고 빨리 결정하여 국난(國難)을 풀어 주시오.”
하였다. 또 문천(文川)ㆍ덕원(德源) 등 지방에 당도하여서는 혹은 종사관(從事官), 혹은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鎭駐)하게 하여 서로 호응(呼應)토록 하였고, 또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지금 영흥(永興)에 있는데 도총사(都摠使) 준(浚)이 신을 현재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기 때문에 그래로 있으면서 적의 동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에 임지에 당도하여 고산역(高山驛)에 있으면서 인신(印信)을 가져오기 위하여 사람을 이시애에게 보냈었고, 또 시애가 처음엔 비록 반역할 마음이 없었으나, 조정의 뜻을 몰라 도리어 놀라고 의심할까 염려하여, 안변(安邊)에 있을 때에는 군관(軍官)인 길주 사람 양근생(楊根生)을 시켜 길주에 달려가서 시애를 만나보고 조정의 뜻을 통하게 하였으며, 덕원(德源)에 있으면서는 부령(富寧) 사람 조규(曺糾)를 보내어 몰래 육진(六鎭)에 가서 조정의 소식을 말해 주어 간악한 꾀에 동요되어 감히 군사를 움직이는 일이 없게 하였고, 문천(文川)에서는 종사관(從事官)인 종성(鐘城) 사람 정휴명(鄭休明)을 보내어 사람을 시켜 시애에게 전하기를,‘지금 신숙주와 한명회를 이미 옥에 가두어 놓고 반드시 자네가 오기를 기다린 뒤에 결정하려 하니, 속히 한 필 말만 타고 서울로 가라. 만약 머뭇거리고 출발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여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있을 것이다.’하였고, 또 몰래 휴명에게 이르기를, ‘시애가 만약 오지도 않고 반역한 사실이 이미 드러나면, 모름지기 여러 사람들을 비밀히 결속(結束)시켜 화(禍)와 복이 되는 길을 설명해 주어 자기들끼리 서로 도모하여 생포하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하였습니다.
단천 이남은 오직 북청이 정병(精兵)이 있는 곳이기에 군관(軍官)인 북청 사람 이효순(李孝純)을 북청으로 달려 보내어 부로(父老)들을 타일러 적과 서로 통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길주 목사 최적(崔適)은 바로 본도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선 경솔하게 들어가지 말고 천천히 가면서 사태를 보다가 시애가 만약 길주를 떠나거든 길을 배로 재촉하여 들어가 점거하여 그 복심(腹心)을 빼앗게 하였습니다.
신이 또 생각건대, 시애가 참으로 반역할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신이 이전에 보낸 사람들을 구류할 것이기에 우선 그 사람들로 하여금 봇짐을 지고 도보(徒步)로 가면서 과객(過客)을 가장하여 가만히 사세를 정탐하게 하였고, 신이 또 생각하기를, 여러 고을의 수령을 살해한 자들이 조정에서 들어와 토벌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죄가 두려워 놀라고 당황하여 시끄럽게 되겠기에 영흥 사람 박포생(朴苞生)으로 하여금 글을 가지고 여러 고을에 달려가, 위협에 이기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따른 사람은 죄주지 않는다는 조정의 뜻을 자세히 타일러 마음을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시애의 마음이 조정을 위협하여 스스로 절도사(節度使)가 되려는데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 고을 사람들이 조정의 소식을 모르고 간악한 꾀에 유혹되어 공(功)을 나타내려는 것뿐입니다. 당장의 계책은 인민들로 하여금 조정의 소식을 분명히 알아 그 마음을 진정시키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인심이 만약 진정되면 적은 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깨우치도록 하였으니, 적이 반드시 와르르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북청에 이르자, 적이 이미 만령(蔓嶺)을 점거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우러러보며 공격하게 되어 사상자(死傷者)가 너무 많았다. 공이 어유소에게 지시하되, 군사를 몰래 행군시켜 꿰미에 꿰인 고기처럼 절벽에 기어 올라가 일만 군사가 일제히 소리치니, 적이 대항하지 못하고 시애가 도망쳐 갔다. 여러 장수가 급히 추격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원흉(元兇)들이 세력을 잃으면 그 부하들이 반드시 잡아 오는 것이니, 시애의 머리도 장차 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수일 후에 적당 이주(李珠) 등이 시애를 묶어 진영 앞에 끌고 왔다.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병이 심하여 사직서를 올렸는데, 성종(成宗)이 하교하기를,
“우상(右相)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 자제들이 나에게 고하지 아니하였구나, 비록 급이 낮은 조관(朝官)이라도 이와 같이 대우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정승의 병이 위중한 지 9일 만에 내가 비로소 알았으니, 이것이 어찌 될 일인가.”
하고, 명령하여 사탕(砂糖)ㆍ감귤(柑橘) 등의 물건을 내려주고, 또 어의(御醫) 김흥수(金興守)로 하여금 치료를 전담하게 하였다. 좌승지 이종호(李宗灝)에게 전교하기를,
“들으니, 우상(右相)이 병이 위중하다 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겠는가. 네가 가서 들어보아라.”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허종의 집에 가서 전지(傳旨)를 전하였더니, 허종이 두 손을 모으며 말하기를 ‘신이 말하고 싶은 일은 없고, 다만 끝까지 조심하시기를 즉위하신 처음과 같이 하시기를 원합니다.’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이 졸하자, 임금이 소찬(素饌)을 여러 날 하였다. 승정원에서 육미(肉味)를 들이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린 것이요, 사람이 작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대신에게 누구한테는 후하고 누구한테는 박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우상(右相)이 북도 토벌에 수고하다가 한기(寒氣)에 상하여 드디어 병이 되었는데, 그 뒤에 이내 감사(監司)가 되어 추운 지방에 오래 머무르다가 전일의 병이 금번에는 더 발동한 것이니, 내가 심히 슬프고 애석히 여긴다. 내가 비록 감기에 걸렸지만 어찌 며칠 동안 소찬(素饌)을 먹는다고 더하고 덜하겠느냐.”
하였다.
○ 중종조(中宗朝)에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우리 성묘(成廟)께서 허종(許琮)에게 신임이 지극하셨기에, 그도 나라 일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종의 집이 사직단(社稷壇) 앞 길가에 있었고,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성묘께서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시고 환궁(還宮)할 때면 들러서 허종이 집에 있나 없나를 물으셨으므로 당시에 듣는 사람들이 감격되어 분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합니다.”
하였다.
○ 찬성 어유소의 원조(遠祖) 중익(重翼)은 본성이 지씨(池氏)였다. 나면서부터 체격과 얼굴이 기이하고, 무릎 아래 3개의 비늘이 있었다. 장성하여 고려 왕 태조(王太祖)에게 벼슬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어중익(魚重翼)은 3개의 비늘이 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를 만나 보고 말하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곧 물고기다.”
하고는 성을 어씨(魚氏)로 내렸다.
○ 남이(南怡)가 날쌔기가 남보다 뛰어나, 이시애를 토벌하고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에 언제나 선두에 서서 힘껏 싸웠기에 1등 공신이 되었고, 자헌(資憲)의 계자(階資)에 올라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성화 무자년(1468, 세조 14)에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睿宗)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남이가 대궐 안에 숙직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혜성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 징조이다.”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이 본시부터 남이의 재주와 명성과 벼슬이 저보다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였었는데, 이날에 역시 입직하였다가 벽 너머로 그가 말하는 것을 엿듣고는 거기에다 말을 보태고 날조하여, 남이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몰래 아뢰었다. 이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남이가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나이 26세였다.
○ 성화 정해년(1467, 세조 13)에 이시애가 북도에서 반역하였을 때, 어유소가 용기를 분발하여 앞장서서 싸워 1등 공신(功臣)이 되었는데, 첩보(捷報)가 있자마자, 명 나라 황제가 건주 삼위(建州三衛)의 야인(野人)을 협공(挾攻)하자고 요청하므로, 세조가 어유소ㆍ강순ㆍ남이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돌려 달려 가게 하였다. 유소가 좌대장(左大將)이 되어 바로 오랑캐의 소굴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기를 무수히 하였고, 서 있는 나무 한편을 깎아 글을 쓰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조선 대장 어유소가 건주(建州)를 멸하고 돌아간다.”
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뒤에 당도하여 그 글을 보고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가 가상히 여겨 칙서(勅書)를 내리고 은 50냥과 비단[緞] 생명주[綃] 각 40필을 주었다. 그가 군사를 돌릴 때에 오랑캐의 날랜 기병(騎兵) 수십 명이 우리 진에 돌진하자 우리 군사들이 분산되고 쓰러졌다. 유소가 눈을 부릅뜨고 나오면서 군사들에게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말을 달리며 쏘아 연달아 맞혀 죽이니, 적이 놀라 무너져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영안도(永安道) 성 밑에 살던 야인(野人)들이 온 부락을 몰래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조정에서 다른 사단을 낼까 염려하여 특별히 어유소를 파견하여 위안시키게 하였는데, 그것은 유소가 일찍이 북도 병사(北道兵使)로 있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켰기 때문이었다. 유소가 길을 배로 재촉하여 들어가 먼저 그 부락에 사람을 보내어 임금이 내린 교서를 전해 보였다. 야인들이 처음에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들을 속이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그 교서를 땅에 던져 버렸는데,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진실로 믿지 않는가? 어 영공(魚令公)이 오셨다.”
하니, 야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며 말하기를,
“어 영공이 과연 오셨는가? 어 영공이 과연 오셨다면 이분은 우리 아버지이다. 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소가 그 말을 듣고 오랑캐 부락으로 달려 가니, 오랑캐들이 모두 늘어서서 절하였다. 유소가 성심(誠心)을 보여 어루만지며 타이르자, 모두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드디어 그 추장(酋長)을 거느리고 돌아와 먼저 살던 데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상은 행장에 있음.
종묘 배향(宗廟配享).
태조실(太祖室) : 의안대군 화(義安大君和),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청해군(淸海君) 이지란(李之蘭),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정종실(定宗室) : 익안대군 방의(益安大君方毅).
태종실(太宗室) :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우의정 정탁(鄭擢),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
세종실(世宗室) : 익성공(翊成公) 황희(黃喜), 정렬공(貞烈公) 최윤덕(崔潤德),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병조 판서 이수(李隨).
문종실(文宗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
세조실(世祖室) :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
예종실(睿宗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
성종실(成宗室) :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 충정공(忠貞公) 정창손(鄭昌孫), 충정공(忠貞公) 홍응(洪應), 완산부원군 이복(李復).
중종실(中宗室) : 무열공(武烈公) 박원종(朴元宗), 충정공(忠貞公) 성희안(成希顔), 충성공(忠成公) 유순정(柳順汀),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인종실(仁宗室) : 문희공 홍언필(洪彦弼), 문경공 김안국(金安國).
명종실(明宗室) :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 천순(天順) 정축년(1457, 세조 3)에 명령하여 대장경(大藏經) 50부를 찍어내게 하였다. 경판(經板)이 합천 해인사에 있으므로 경차관(敬差官) 윤찬(尹贊)ㆍ정은(鄭垠)을 보내어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또한 중 신미(信眉)ㆍ죽헌(竹軒) 등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며, 각도의 관찰사에게 전지(傳旨)를 내려, 그 비용을 보조하게 하였다. 무인년 2월에 일을 시작하여 4월에 인쇄를 마쳐, 각도의 명산 거찰(名山巨刹)에 나누어 소장하였는데, 무릇 종이가 38만 8천 9백여 첩(貼)이 들었고, 식량이 5천 석이 들었으며, 다른 물건도 이만큼 들었다.
○ 서거정(徐居正)이 전문형(典文衡)으로 있는 22년 동안에 과거 시험을 맡아 선비를 뽑은 것이 23차례였는데, 좋은 인재를 많이 얻었다. 명 나라 학사(學士) 동월(董越)이 우리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거정을 보고는 매우 존경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예 학사(倪學士)의 요해편(遼海編)을 보았고, 또 기 호부(祁戶部)의 《황화집(皇華集)》을 보고서 높은 명성을 흠모한 지 오래였더니, 금번에 어찌 다행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 성화(成化) 무렵에 서거정이 경상ㆍ충청도 군용 순찰사(慶尙忠淸道軍容巡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병조에서 조정에 청하기를,
“청컨대, 총통주성 방포식(銃筒鑄成放砲式)을 간행(刊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연안(沿岸) 각 관청에 반포해 주어 항상 연습을 시키소서.”
하였다. 거정이 불가하게 여겨 아뢰기를,
“화약(火藥)은 왜국(倭國)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우리 국경이 왜(倭)와 밀접한데다가 더구나 삼포(三浦)의 왜인이 우리 나라 사람과 섞여 살고 있어, 더러 간악한 백성이 몰래 왜인과 통하여 왜적에 흘러 들어갈까 염려되오니, 우리 국가의 깊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깊이 그 폐단을 생각하지 못했으니, 이 말이 매우 당연하다.”
하였다.
○ 문양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판결을 분명하고 민활하게 하여 옥에 갇힌 사람이 없었다. 전부터 옥이 비었다고 아뢰면 상(賞)을 내리는 것이 예이므로, 하관(下官)들이 아뢰고자 하였는데, 희맹이 듣지 않았다. 뒤에 심정(沈貞)이 판서로 있을 때에 또한 어느날 옥이 비었으므로 막 아뢰려 하는데, 마침 우육(牛肉) 금령(禁令)을 범한 사람을 잡아 고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정이 늙은 아전에게 말하기를,
“사슴 고기도 꼭 소고기와 같으니라.”
하니, 아전이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곧 사슴 고기로 판정하여 석방해 버린 다음 드디어 옥이 비었다고 보고하여 상을 받았다. 당시에 기묘년의 선비(己卯士類 기묘시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말함)들이 혹은 죽임을 당하고, 혹은 귀양간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실은 심정이 그 하수인(下手人)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형벌이 필요 없어서 옥이 비었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하였으니, 그 조작하고 속이기를 기탄(忌憚)없이 함이 심한 것이요, 강희맹과 같은 겸손은 군자의 도량이 있다 하겠다.
○ 정난종(鄭蘭宗)이 북도 병사(北道兵使)로 있을 때에 일찍이 중한 병을 얻었는데, 부하들이 조정에 아뢰고자 하니, 난종이 말리기를,
“본도가 오랑캐와 접경이어서 만약 조정에서 주장(主將)의 병이 중한 것을 들으면 반드시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니, 당분간 나의 병세를 살펴보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뒤에 아뢰는 것이 옳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완쾌되었다.
○ 성종(成宗)이 즉위한 초년에 명령하여 밀부(密符)를 만들어 신숙주ㆍ한명회 등 두셋 중신(重臣)에게 나누어 주어, 궁중에서 부르는 증거로 삼게 하여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였다.
○ 천순 정축년(1457, 세조 3)에 덕종(德宗)이 동궁(東宮)으로 있다가 훙서(薨逝)하였다. 세조가 말씀하기를,
“오래 사는 것이나 단명하는 것은 천명이다. 그러나 그 아들들이 모두 어리니, 그 용모를 그려 두었다가 남겨 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화사(畵師) 최경(崔涇)ㆍ안귀생(安貴生)에게 화상을 그리게 하여 간직하였다. 성종이 즉위하자, 그 화상을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가묘(家廟)에 모시게 하고, 최경과 귀생에게 벼슬을 주자, 대간이 경연에서 그 과람함을 논하였다. 임금이 말씀하기를,
“내가 난 지 겨우 달포 만에 부친을 잃었다. 오늘날 다시 초상(肖像)을 방불하게 뵈오니, 슬피 사모하던 정을 장차 조금이라도 풀 곳이 있게 되었으니, 최경과 안귀생에게 벼슬을 주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경연에서 임금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성종이 일찍이 정사(政事)하던 날에, 이조ㆍ병조의 당상(堂上)과 6승지와 두 의빈(儀賓 부마駙馬)을 창덕궁(昌德宮) 대문 안에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안에서 은병(銀甁) 셋을 받들고 나왔다. 하나는 크고 둘은 작았으며, 병 허리 양쪽에 모두 금으로 임금의 지은 시를 새겨 월산대군에게 준 것이었는데, 향기로운 술이 다 가득차 있었다. 월산대군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그시에 화답하기를 요청하고, 이어 술을 부어 돌렸다. 이어 또 내시(內侍)가 명령을 전하기를,
“들으니, 대군이 나의 변변치 않은 시를 여러 재상에게 보였다하니, 내가 심히 부끄럽소. 시는 비록 보잘것없으나 운(韻)은 그래도 있으니, 경들은 의당 화답해 주시오.”
하였다. 어세겸(魚世謙)의 시에,
밖에는 천금의 글자가 빛나고 / 外耀千金字
안에는 만세의 봄을 간직했네 / 中藏萬歲春
임금의 글이 겨우 새어 나오매 / 奎章纔漏洩
잔을 드니 벌써 사람을 취게 하네 / 斟酌已醺人
하였다. 그 장편(長篇)은 글귀가 많아서 가록하지 못한다.
○ 성화 기해년(1479, 성종 10)에 명 나라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고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여 크게 이겼다. 어세겸(魚世謙)이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적병의 머리와 포로를 북경에 바치려고 요동(遼東)에 도달하였는데, 태감(太監) 및 총병관(摠兵官), 도어사(都御史) 등이 말하기를,
“포로된 사람과 베인 수급(首級)을 하필 모두 북경에 보내야만 하오, 수급(首級)은 변진(邊鎭)에 맡기고 포로된 인구(人口)는 그 친척에게 맡기는 것이 옳지 않겠소. 우리들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겠소.”
하므로 세겸이 말하기를,
“수급(首級)과 포로를 천자(天子)께 바치는 것은 옛적부터의 법이요, 승전(勝戰)하였다는 보고를 하면서 그 실물이 없으면 어찌 증거가 되겠소.”
하여, 말을 주고 받기를 서너 번 하였으나 마침내 굽히지 아니하였다. 세 관원(태감(太監)ㆍ총병관(摠兵官)ㆍ도어사(都御史))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공이 술을 받아 마시면서 읍(揖)만하고 꿇어 앉지 않았다. 어사가 말하기를.
“왜 꿇어앉아 마시지 않소.”
하니, 답하기를,
“내가 우리 전하(殿下)의 명령을 받들고 북경에 조회하러 오는데, 여러분이 특별히 연회를 베풀어 예로써 나를 위로하는 것 아니오. 내가 어찌 꿇어앉아 술을 마시겠소.”
하였다.
○ 성화 임인년(1482, 성종 13)에 성종이 광릉(光陵)에 거동하여 봉선사(奉先寺)에서 세조의 영전(影殿)에 배알(拜謁)할 적에, 어세겸이 대사헌으로서 모시고 따라갔다. 점심에 중들이 백관(百官)에게 밥을 대접하려고 하니, 세겸이 임금에게 간하기를,
“당당하게 임금을 모시고 온 신하들로서 중이 시주하는 밥을 먹는 것이 국가의 체통에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백관이 모두 스스로 밥을 싸가지고 왔으니, 굶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안 먹는 것을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세겸과 모든 대간들이 다 먹지 아니하였다. 이상은 행장에서 나옴.
○ 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이 정통(正統) 신유년(1441, 세조 23) 문과(文科)에 장원하였고, 또 그해 생원과 진사에 장원하였으니, 한해에 세 번 장원은 과거 생긴 이래 없던 일이다. 그 뒤에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사마시(司馬試)ㆍ전시(殿試)ㆍ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니 한 사람이 세 장원이 된 것은 또한 계승한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은,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참의 정윤희(丁胤禧)가 전시ㆍ중시에서 장원이 되었고, 양성군 이승소(李承召),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 사문 윤기(尹箕)가 초시(初試)ㆍ회시(會試)ㆍ전시에 장원이 되었고, 찬성 이이(李珥)가 회시ㆍ전시에 장원이 되고, 또 그해 사마시에 장원이 되었다.
○ 사문 이의무(李宜茂)가 문과(文科)에 올라 문명(文名)이 있었고, 벼슬이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이르렀다. 아들 다섯이 있는데, 맏아들 권(菤)은 무과(武科)에 올라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가 되고, 둘째 기(芑)는 영의정이요, 셋째 행(荇)은 좌의정이요, 넷째 영(苓)은 무과 군수(武科郡守)요, 다섯째 환(芄)은 형조 판서였다. 다섯 아들이 문과와 무과에 올랐으므로, 정덕 병자년(1516, 중종 11)에 임금이 관원을 보내 의무(宜茂)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 정극인(丁克仁)은 자는 가택(可宅)이요, 호는 불우헌(不憂軒)인데, 태인현(泰仁縣)에 살았다. 경서(經書)를 전공하여 과거에 올라 70에야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나이 많으므로 물러가 고향에 내러가 살면서 후진(後進)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고을 사람들과 더불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면서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노래하였다. 성종이 글을 내려 그 청렴 개결함을 표창하여 3품 관원의 옷을 주었고, 본도 관찰사로 하여금 때때로 생활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 함경도 유생 박윤령(朴允齡)이 글씨를 잘 썼는데, 언젠가 남의 상소를 대신 써 주었다. 성종이,
“이 글씨를 누가 썼느냐?”
고 물으므로, 박윤령의 글씨라고 대답하자, 승정원으로 불러 주육(酒肉)을 주게 하고, 전통(箭筒)을 가져다가 그 겉면을 써 들이게 하였으며, 인하여 임금의 친필로 쓴 병풍을 주었다. 비록 작은 재주라도 가상히 여겨 장려함이 이와 같았다.
○ 성종의 필법이 매우 고매하였다. 중종(中宗)이 성세창(成世昌)이 글씨를 잘 쓰고 글씨를 잘 감정한다 하여, 궁중에 간직되었던 진서(眞書)와 초서(草書) 몇 장을 내려 보내며,
“궁중에서는 이것이 성종의 글씨인지 용(瑢 안평대군)의 글씨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니, 분변하여 들이라.”
하였는데, 세창이 분류(分類)하여 아뢰었다.
○ 한명회(韓明澮)가 한강 상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압구정(狎鷗亭)이라 편액하였는데, 경치가 좋았다. 한번은 명 나라 사신이 그 정자에 놀러 가려고 하므로, 명회가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미관(美觀)을 돋구자고 청하였는데, 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명회가 노기를 띠고 일어났다. 대간(臺諫)이, 명회가 임금 앞에서 무례하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므로 외지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후에 석방시켜 돌아 왔다.
○ 유호인(兪好仁)이 성종조(成宗朝)에 문장을 잘한다 하여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어버이가 늙어 돌아가 봉양(奉養)하기를 청하므로, 수찬으로 있다가 산음현감(山陰縣監)에 제수되고, 교리(校理)로 있다가 의성(義城) 원에 제수되었으며, 최후에는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또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그 모친을 서울로 태워 오게 하였는데, 병들어 오지 못하였다. 임금이 친필로 이조에 내리기를,
“호인(好仁)은 어버이 섬길 날이 짧으니, 그 고향 이웃인 진주 목사로 제수하라.”
하였는데, 이조에서 아뢰기를,
“진주 목사를 까닭없이 중간에 갈아서 법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고, 그때 마침 결원(缺員)된 합천(陜川)으로 제수하였다. 호인이 비록 외직(外職)에 있었으나, 임금이 그로 하여금 세말(歲末)이면 저술한 시문(詩文)을 써 보내게 하고는, 그 즉시 표창하여 장려하였으며, 그의 모친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었다. 당시 매계(梅溪) 조위(曹偉)도 역시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외직(外職)으로 나갔었는데, 호인과 같이 임금의 총애를 입어 보통 사람과 특이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 연산군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遺達)이 화(禍)를 당하자, 그 아들 언충(彦忠)이 진보현(眞寶縣)에 귀양갔는데, 자기가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으로 알고 옛 사람이 자기의 만사 지은 것을 모방하여 자기의 비문을 짓기를,
“대명천하(大明天下) 해가 먼저 비치는 나라의 대장부인데, 성은 홍이요, 이름은 충이요, 자는 직(直)이다. 반평생을 쓸데없이 글만 공부하다가 세상에 산지 32세 만에 마쳤다. 명은 어찌 그리 짧으며, 뜻은 어찌 그리 길었던고, 옛 고을의 무림(茂林) 마을에 무덤을 정하니, 청산(靑山)은 위에 있고 여울은 아래 있네, 천추만세(千秋萬歲) 뒤에 누가 이 들판을 지나다가 눈여겨 보며 머뭇거릴 것인가. 반드시 슬프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시야(斯野) 두 자는 기하(其下)로 된 데도 있음.
○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연산 갑자년에 거제(巨濟)에 귀양가 있으면서
친구 중에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들을 생각하여 절운(絶韻) 10수를 짓고 각각 주석을 붙였는데, 시는 아래와 같다.
헐뜯고 추켜줌이 어지럽게 천만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건만 / 毁譽紛紛萬口騰
그분의 마음은 어름어름하지 않았네 / 此公心地不模稜
초 나라 강가 어디서 빠뜨린 옥패를 찾을꼬 / 楚江何處尋遺珮
통에 얽은 5색 끈을 부쳐 주려네 / 願寄纏筒五綵繩
정희량 순부(鄭希良淳夫)가 임술년(1502, 연산군 8) 5월 5일에 스스로 강에 빠져 죽었다.
이 사람은 천상에 있는 것이 합당한데 / 斯人合在白雲鄕
인간에 한번 귀양오자 창해가 뽕밭으로 변하였네 / 一謫塵區海變桑
통곡하노라, 광릉산이 이미 끊어져 / 痛哭廣陵今已絶
이 인생이 다시 아양을 들을 수 없구나 / 此生無復聽峩洋
박언 중열(朴誾 仲說)이 갑자년 6월 15일에 죽음을 당하였다.
흰 칼날은 무릅쓰고도 능히 홀로 나아갔는데 / 橫衝白刃獨能前
하늘이 요망한 기운으로 태양을 가리우네 / 天遺妖氣翳日邊
밤중에 꿈이 평일과 같아 / 半夜夢魂如夙夕
두 줄기 눈물이 찬 담요에 젖네 / 數行淸淚濕寒氈
권 달수 통지(權達手通之)가 갑자년 겨울에 나와 함께 두차례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하루는 내 손을 잡고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해 밑에 흰 기운이 공중으로 뻗쳤는데, 자네도 보았는가?”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보지 못했네.”
하였더니, 통지가 하늘을 쳐다 보다가 한참 만에 말하기를,
“아아, 내가 죽겠지, 저것이 나 때문이로구나.”
하더니, 12월 1일에 죽음을 당하였다. 근일 밤에 통지가 평소처럼 연달아 꿈에 보이므로 아울러 짓는다.
맑기가 가을 하늘에 흰 이슬이 흐르는 것 같고 / 澹若秋空白露溥
굳세기는 지주가 거센 물결에 버티듯 하였지 / 剛如砥柱鎭奔瀾
일생의 명성과 행실은 가야가 기록하였으니 / 百年名行伽倻記
의춘(남곤(南袞)을 지칭)을 시켜 흰 비단에 써 놓아야겠네 / 要倩宜春灑素紈
김천령 인로(金千齡仁老)가 계해년 9월에 병으로 죽었는데, 갑자년의 사화에 또한 참여하였다. 중열(仲說)이 일찍이 인로의 명행기(名行記)를 지었는데, 사화(士華 남곤의 자)의 필적(筆跡)을 빌려 후세에 전하려 하였다.
그대 아버지 높은 절개 가을처럼 맑은데 / 乃翁高節倚秋明
경학과 문장이 한(漢) 나라 유경생이네 / 經術文章劉更生
온 집안이 결국 일망타진 되었으니 / 門地終須一網盡
한 아들이 어찌 하늘 개이기를 꺼리랴 / 孼孤寧復忌天晴
이 유령 영지(李幼寧寧之)가 갑자년 4월에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부친 주계군(朱溪君)이 일찍이 곧은 말을 하다가 간신에게 밉게 보였었는데, 이해 가을에 또한 죽음을 당하여 온 집안이 남은 이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서남에서 고생살이 세월이 거듭되어 / 憔悴西南歲月重
바람과 서리가 수염을 모두 붉게 만들었네 / 風霜變盡紫髥茸
죽산 노상에서 갑자기 만났는데 / 竹山路上蒼黃面
모진 불길이 마침내 백 길 되는 솔을 꺾어 버렸네 / 烈火終摧百丈松
성중암 계문(成重淹季文)이 무오년에 사초(史草) 사건으로 의주(義州)에 귀양갔다가 경신년에 하동(河東)으로 옮겼으며, 갑자년에 귀양간 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내가 갑자년 6월에 잡혀 서울로 올라올 때에, 죽산 도중에서 계문을 만났는데, 그가 전일 사건 때문에 추가하여 다시 곤장을 맞고, 귀양살이하던 곳으로 돌아가던 길이다. 형체가 여위고 얼굴이 파리하여, 서로 보고도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가 짐짓 말[馬] 꾸짖는 소리를 크게 하므로, 그제야 계문인 줄 알았고, 울며 탄식하면서 작별하였다.
문성공의 후손인 명문으로서 / 文成之後是淸文
시와 예의 전통이 원래 근원이 있네 / 詩禮風流自有源
사나 죽으나 몸 보존한 것은 그대 뿐 / 生死保身知汝獨
4척 되는 외로운 무덤이 한강 남쪽에 있네 / 孤墳四尺漢南村
안처선 선지(安處善善之)는 고려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인데, 갑자년 4월에 병으로 죽었다. 몸과 무덤이 모두 화(禍)를 입지 않았다.
남방이라 서쪽 기러기를 만나기 어려운데 / 南塞難逢西雁來
밤 동안 비바람만 부질없이 재촉하네 / 夜床風雨漫相催
강호에 백발로 그대만이 있는데 / 白頭江湖唯君在
쌓인 회포 다시 풀길이 없네 / 懷抱無因得再開
남곤 사화(南袞士華)가 이때에 양덕(陽德)에 귀양가 있었다.
상산이 멀고 멀어 일천 봉우리 막혔는데 / 商山迢遞隔千岑
낙동강이 출렁거려 만 길도 넘네 / 洛水汪洋過萬尋
공건 못가 한 잔의 술을 / 公建池邊一杯酒
언제나 글 이야기하며 다시 들이킬꼬 / 幾時文字更奭深
권민수 숙달(權敏手 叔達)이 상주(尙州)에 귀양가 있는데, 지난 해 가을에 내가 그와 공건 못가에서 작별하면서 “공건 못가 한 잔 술이여, 가을 바람이 생이별의 슬픈 정을 돕네 公建池邊一杯酒 西風爲助生離悲”하는 시를 지었었다.
가을들자 구름끼고 비와서 갠 날 없으니 / 秋來陰雨不逢晴
울밑 국화가 걱정스럽네 / 愁殺東籬黃菊莖
아홉 번 죽다 살아난 몸 마음이 아직 있으니 / 九死一身心尙在
여생에나 태평시대 보려 하네 / 擬將餘齒看河淸
○ 사문 김명중(斯文金命仲)은 곧 우리 외가 4대조이다. 세종 정묘년(1447, 세종 29)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통정(通政)에 이르렀는데, 벼슬살이가 청렴하고 깨끗하였다. 일찍이 풍덕 군수(豐德郡守)를 지내다가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 집안 사람들이 관아(官衙)에 깔았던 자리를 걷어 가지고 와서 후일에 마루에 깔았는데, 선조(先祖)가 보고 물어 알고는 노하여 책하고, 즉시 걷어 묶어 돌려보내려 하였다. 마침 이웃 친구가 보고 말리기를,
“돌려 보내는 것은 너무 드러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두고 싶지 않으면 그것을 차라리 나를 주게.”
하니, 선조가 웃으며 주었다.
○ 성희안(成希顔)이 성종조 때에 과거하여 옥당에 들어가 가장 임금의 은총(恩寵)을 받았다. 부친의 상중에 있다가 상을 마치자, 불러 위문하고, 이어서 매(鷹)를 주며,
“이것으로 사냥하여 너의 모친을 봉양하라.”
하였다. 연산(燕山)이 왕위에 있을 때에 양화도(楊花渡) 놀이에 따라 갔는데, 연산이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희안의 시에,
임금의 마음은 원래 청류를 사랑하지 않네 / 聖心元不愛淸流
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연산이 노하여 이조 참판에서 부사용(副司勇)으로 강직(降職)시키고, 여러 해 동안 옮겨 주지 않았다. 희안이 연산의 음란과 포학이 날로 심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려는 것을 보고 개탄하여 반정(反正)할 뜻이 있었으나, 다만 같이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박원종(朴元宗)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처남으로서 걸출인데다가 일찍부터 귀하게 되어 무사(武士)들의 추앙을 받았다. 희안이 그와 일을 같이하고 싶었으나 서로 교분(交分)이 없었다. 이웃에 사는 무인(武人) 신윤무(辛允武)라는 사람이 원종과 친밀한 사이이므로 희안이 윤무를 시켜 은근히 뜻을 떠보도록 했었는데, 원종이 벌떡 일어나며,
“이것은 내 평소 간직해 오던 생각이로다.”
하고, 곧 희안과 더불어 의론을 정하였다. 또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당시에 명망이 있으므로 알리지 아니할 수 없어 그 뜻을 말하니 순정이 따라 주었다. 병인년(1506, 연산군 12) 9월에 연산이 장차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 놀이를 가려하므로 희안 등이 그날을 기하여 성문을 닫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추대하면 일이 쉽게 되리라 생각하였는데, 마침 그 놀이를 정지하였다. 이때 모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모두 날뛰며 분발하여 저지시킬 수가 없었고, 또 날짜가 오래가면 계획이 누설될까 염려되어 모일(某日) 밤에 훈련원(訓鍊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함께 약속한 사람들과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왔다. 이에 돈화문(敦化門) 동구로 나아가 진을 치고, 역사(力士)들을 나누어 보내어, 연산의 죄악을 조장한 무리 임사홍(任士洪)ㆍ신수근(愼守勤) 등을 쳐죽이자, 궁중의 숙위(宿衛), 승지(承旨) 및 장수와 사졸들이 혹은 수채구멍으로, 혹은 담을 넘어 나와 다투어 진(陣) 앞에 모여 들어 궁중이 텅 비게 되었다. 그제서야 왕대비(王大妃) 윤씨(尹氏)에게 아뢰고, 진성대군을 받들고 들어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하고, 융(窿)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현(喬桐縣)으로 추방하였다. 시장(市場) 사람들이 가게를 그대로 보고, 중외(中外)가 아무 일 없이 국가가 다시 안정된 것은 희안 등의 힘이었다.
○ 연산이 이미 폐위(廢位)되자, 대신들이 그를 안치(安置)시킬 절목(節目)을 의론하여 교동현(喬桐縣)으로 유배시켰는데 나인(內人) 4명, 내관(內官) 2명, 반감(飯監) 1명이 따라가고,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연산이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띠도 띠지 않은 채 내전(內殿) 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았습니다.”
하고, 드디어 가마를 타고 선인문(宣人門)과 돈의문(敦義門)으로 나가는데, 갓을 숙여 쓰고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첫날은 연희궁(衍禧宮)에서 자고, 이어 김포에서 자고, 통전에서 자고, 강화에서 자고는, 교동현에 당도하였다. 호송한 장수 심순경(沈順經)이 복명(復命)하여 회계(回啓)하기를,
“무사히 모시고 갔는데, 일대(一帶)의 노소(老少)가 모두 달려나와 손가락질하며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안치할 곳에 도착하니, 위리(圍籬)가 좁고도 높아 해를 볼 수 없었으며, 다만 작은 문 하나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낼 수 있었습니다. 위리 안에 들어가자, 시녀(侍女)들이 모두 울부짖었습니다. 신이 하직을 고하자,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수고하여 고맙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중종이 전교하기를,
“전왕(前王)의 소식을 듣고 보니, 마음이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겠다. 내가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위태로움과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로 여러 사람의 정에 못이겨 사양하지 못하고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왕(前王)과는 한편으로는 군신이고, 한편으로는 형제이다. 지금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의복과 먹을 것을 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신들은 이미 대의(大義)가 끊어졌으니, 감히 마음을 둘 수 없는 것이지마는, 전하(殿下)의 말씀은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보내줌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전교하기를,
“교동에는 반드시 털옷과 어물이 없을 터이니, 따로 보내려 한다.”
하니, 아뢰기를,
“임금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너무 과하면 온당치 못하오니, 겨우 기한(飢寒)이나 면하게 하면 족합니다.”
하였다. 11월에 이르러 위장(衛將)이, 연산이 역질(疫疾)로 고통스러워 한다고 급히 장계(狀啓)하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려 하였으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그 시녀(侍女)들이 말하기를,
“연산이 마지막에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愼氏)가 보고 싶다’ 하였다.”
고 하였는데, 곧 그 비(妃)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후한 예(禮)로써 장사하고, 또한 조회(朝會)와 시장(市場)을 정지시키며, 묘지기를 두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대신들이 의계(議啓)하기를,
“장례는 왕자 군(王子君)의 예로 하되,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는 것과 묘지기를 두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러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상사(喪事)를 감독하여 거행하게 하고, 본 고을 원이 화재와 벌채를 금지하게 하라.”
하였다.
○ 공조 참의 겸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유숭조(柳崇祖)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에 전왕(前王)이 인심을 크게 잃어 거의 나라를 망칠 뻔하였는데, 두서넛 대신이 천명(天命)과 인심에 순응하여 왕대비(王女妃)의 은혜로운 명령을 받들고 전하를 추대하니, 전하께서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못이겨 부득이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전왕을 공경히 받드는 정성이 더욱 돈독하시어, 재부(宰夫)를 시켜 음식을 감독하고, 사랑하던 궁녀로 하여금 모셔 따르게 하며, 장사(將士)를 시켜 호위케 하여 이외의 일을 방지하게 하였으며, 물품과 음식을 길에 잇달아 보냈으되, 불행히 역질에 걸려 갑자기 승하(昇遐)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애통하고 상심하시어 수라(水刺)를 폐하고 조회를 철폐하시며, 초상과 장사의 예절을 극진히 하려 하여 대신에게 의론하셨는데, 대신들의 의론이 의리에 합당하지 못한 듯 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금과 아버지는 일체(一體)이니, 아버지가 비록 아버지 노릇을 못하더라도 자식은 자식 도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순(舜)이 모든 일을 조심하여 고수(瞽瞍)를 뵈올 때 공경하여 조심조심하므로 고수도 믿고서 따랐다고 합니다. 어찌 고수가 완악(頑惡)하다고 하여 아들이 하여야 할 생전에 섬기는 일과 죽은 뒤에 장사하고 제사지내는 예절을 폐하겠습니까? 태갑(太甲)이 법도를 무너뜨리고 예를 방종히 하자, 이윤(伊尹)이 동궁(桐宮)에 추방하여 그가 뉘우쳐 깨닫기를 바랬습니다. 만약 혹시 태갑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죽었더라면 초상과 장사의 예절을 어떻게 대처하였겠습니까? 유왕(幽王)ㆍ여왕(厲王)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망하게 하여 비록 나쁜 시호(諡號)를 주었으나 왕이라는 칭호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전왕이 종사(宗社)에 죄를 얻었으므로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지내 줄 수는 없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위한 초상과 장사의 예절은 이와 같아서는 안 되니, 장사는 능(陵)의 의식(儀式)을 쓰고 따로 신주(神主)를 세우며, 중국에 부고(訃告)를 전하는 것이 정(情)과 의리를 지극하게 하는 것입니다. 송 태조(宋太祖)가 공제(恭帝)에게 있어서와 우리 태조(太祖)가 공양왕(恭讓王)에게 있어서 그 초상과 장사, 시호 올린 예(禮)를 또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중국 사신이 와서 만약 묻게 된다 하더라도 미리 계책을 마련해 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 꾸며 대답하는 것은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에게 보이기를 정성으로써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중종이 명령하여 널리 의론하게 하였는데, 모두 시행할 수 없다 하였고, 유자광이 극력 그 말을 배척하여 법관에게 회부하여 그 본의를 국문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박원종(朴元宗) 등은 근시(近侍)하는 직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므로, 임금이 명령하여 경연관(經筵官)의 벼슬을 체직(遞職)시켰다. 양사(兩司)에서 그것은 언론의 길을 막는 것이라 하여 체직시키지 말자고 청하여 논쟁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 연산의 비(妃)는 곧 신수근(愼守勤)의 누이 동생이었으며, 수근의 딸은 또 중종의 잠저(潛邸) 시절의 부인이었다. 바야흐로 연산이 방탕하였을 때에 수근이 정승이었고, 강귀손(姜龜孫)도 같이 정승으로 있었는데, 연산을 폐하고 중종을 세울 뜻이 있었다. 마침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조용히 수근에게,
“매부와 사위 중 어느 편이 더 친한가?”
하여, 그 뜻을 탐지해 보았더니, 수근이 얼른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영특하고 분명하니, 오직 그를 믿는다.”
하였다. 귀손이 아무 말도 못하고, 드디어 명 나라로 떠나면서 날마다 그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다가 돌아오기도 전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반정하던 날 박원종 등이 역사(力士)를 시켜 수근 및 그 아우 수영(守英)ㆍ수겸(守謙) 등을 쳐죽였다. 중종이 즉위한 이튿 날, 영의정 유순(柳洵), 좌의정 김수동(金壽童) 등이 유자광ㆍ박원종ㆍ유순정ㆍ성희안ㆍ김감(金勘)ㆍ이손(李蓀)ㆍ권균(權鈞)ㆍ한사문(韓斯文)ㆍ송일(宋軼)ㆍ박건(朴楗)ㆍ정미수(鄭眉壽)ㆍ신준(申浚) 및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의거(義擧)할 때에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수근의 딸이 궁중에서 모시고 있으니, 만약 중전(中殿)이 되게 되면 인심이 불안할 것이요 인심이 불안하게 되면 종사(宗社)에 관계가 있을 것이니, 청컨대, 애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말이 심히 당연하오.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할꼬.”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신들도 이미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대계(大計)인데, 어찌 하리까? 청컨대, 과감하게 결단하여 지체하지 마소서.”
하였다. 전교하기를,
“종사(宗社)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어찌 사정(私情)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의론을 따르겠소.”
하였다. 그날 저녁에 신씨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나가 거처하였다.
○ 연산 때에 유빈(柳濱)ㆍ이과(李顆)ㆍ김준손(金駿孫) 등이 호남(湖南)으로 귀양가 있으면서 연산의 방탕이 날로 심하여 나라가 장차 위태로운 것을 보고, 중종을 추대하기로 계획하여 격문(檄文)을 서울에 전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반정이 되었다. 그 격문의 대략에,
“태조는 건국에 애쓰셨고, 세종은 정치가 아름답고 밝았다. 성종은 한결같이 선왕의 법도를 지켜 재물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이 안정되고 산물이 풍족해져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다. 뜻밖에도 사왕(嗣王)이 포학하고 무도하여, 부왕(父王)의 후궁을 매를 쳐 죽이고, 옹주와 왕자를 유배시켜 처형하며, 바른 말하는 대간을 귀양보내고 베에 죽이며, 대신을 형벌하고 욕보이며, 충성스럽고 어진이를 해치며, 부자 형제를 연좌시키되 진(秦) 나라 법보다 심하며, 남의 무덤을 파헤쳐 해골에까지 화가 미쳤는데, 마디마디 베는 형벌을 하고 뼈를 가루로 만드는 형별을 하니, 이 무슨 형벌인고.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 음욕을 자행하고, 남의 집을 부수어 동산을 넓히며, 선왕의 능이 모두 여우와 토끼의 마당이 되고 선성(先聖)들의 사당이 모두 곰과, 범의 놀이터가 되었다. 거둬들이는 것이 한도가 없어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뿐만 아니라, 종실(宗室)과 형제의 아내와 첩을 협박하여 간통하게 하였다. 삼년상은 누구나 입는 복인데 잔인하게 그 기한을 짧게 하고, 부모의 기일(忌日)도 모두 파하여, 윤기(倫紀)가 무너지고 인도(人道)가 없어졌다. 기타 토목의 역사, 풍류와 여색의 즐김, 연못과 누대에서의 놀이와 사냥의 오락, 새 짐승과 화초의 탐호, 이루다 들 수 없으니, 한도대로 가득 찬 죄가 걸주(桀紂)보다 더하다. 민생들 일시의 고통은 아직 말할 것조차 없다. 만일 크게 간악한 자가 임금의 자리를 노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난다면, 역성(易姓)의 화(禍)도 있게 될까 또한 혹시라도 염려된다.
성종께서 26년 동안 경사(卿士)를 대우하고 충의를 배양(培養)한 것이 바로 오늘과 같은 때를 위한 것이다. 진성대군(晉城大君)은 성종대왕의 친아들이다. 현명하고 덕이 있으므로 중외(中外)에서 기대하고 촉망(囑望)하여 칭송이 돌아가고 있다. 이에 모모(某某) 등이 진성대군을 추대하려 하여, 모월 모일에 의병(義兵)을 일으키기로 각도에 격문을 보내어 기약한 날짜에 서울에 모이게 하였으니, 조정에 있는 공경과 백집사(百執事)들도 마땅히 속히 추대하여 종사(宗社)의 위기를 구제할지어다……”
하였다.
○ 정덕(正德) 정묘년(1507, 중종 2)에 참의 유숭조(柳崇祖), 행호군 심정(沈貞), 장악원 정(掌樂院正) 김 극성(金克成), 상인(喪人) 남곤(南袞) 등이 비밀히 아뢰기를,
“의관(醫官) 김공저(金公著), 서얼(庶孼) 박경(朴耕), 유생 조광보(趙光輔)와 이장길(李長吉) 등이 박원종ㆍ유자광ㆍ노공필(盧公弼)등을 해치려 합니다.”
하므로, 대궐 뜰에서 국문하는데 낙형(烙刑)을 쓰기까지 하여 자백을 받았는데, 대신들을 해치고 조정을 혼란시키려 했다하여 김공저와 박경을 참형(斬刑)에 처하고, 초사(招辭)에 관련된 사람들은 등급에 따라 유배(流配)하였다. 조광보는 대궐 뜰에 잡혀와서도 큰 소리로 글을 외웠으며, 유자광을 보고는 크게 외치기를,
“자광은 소인인데, 어찌하여 이 자리에 앉았느냐? 무오년에 어진 사람들을 모함하여 해쳐서 김종직(金宗直)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화를 당하였는데, 지금 또 무슨 일을 하려 하느냐? 청컨대,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간사한 신하의 머리를 베어버리고, 성군(聖君)을 추대하여 어진 정승에게 정치를 맡기면 훌륭한 정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성희안이 묻기를,
“간사한 신하가 누구냐?”
하니, 조광보가 말하기를,
“바로 유자광이오.”
하고는, 박원종에게 말하기를,
“네가 성군(聖君)을 추대하여 반정(反正)하였으니 공이 과연 크다. 그러나 어찌하여 집안에 폐주(廢主)의 내인(內人)을 데리고 사느냐?”
하고, 또 성희안에게 눈짓하여 말하기를,
“전에 한훈(韓訓)이 너를 이름난 선비라 하였다. 지금 어찌하여 유자광과 일을 같이하는가?”
하고, 또 사관(史官) 강홍(姜洪)과 이말(李抹)을 가리키며,
“강홍아, 너의 부친이 죄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너희들이 사관(史官)이니, 마땅히 나의 말을 특별히 사기(史記)에 써야 할 것이다.”
하며, 곤장을 10여 대 맞고는, 다만 통곡할 뿐이었다. 박원종이 말하기를,
“참으로 미치광이이다.”
하고 놓아주었다.
고발한 공(功)을 논하여, 심정ㆍ남곤ㆍ김극성 등을 가자(加資)하고, 유숭조는 일찍이 그 음모를 알고도 즉시 고발하지 않다가, 심정이 장차 고발한다는 것을 알고, 그 일이 발각될까 겁내어 자기의 죄를 면하려고 아뢴 것이라 하여, 곤장을 때려 신문하고 멀리 귀양을 보냈다.
○ 유자광은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庶子)였다. 어렸을 때부터 무뢰한(無賴漢)이었는데, 용력(勇力)이 있어 갑사(甲士)에 속하였다. 이시애가 반역하였을 때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 적 토벌에 나서기를 자청하므로 세조가 기특히 여겨 대궐 뜰로 불러 시험하였는데, 날쌔기가 원숭이와 같았다. 토벌에 종군하다가 돌아오자 심히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병조 정랑(兵曹 正郞)으로 있으면서 문과(文科)의 장원(壯元)에 뽑혔고, 예종(睿宗)이 새로 즉위하자, 남이(南怡)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공신(功臣)으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청성이 간사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다. 성종이 허심탄회하게 간하는 말을 받아 들이자, 자광이 기회를 노려 이익을 도모하려 하여, 한명회(韓明澮)가 국구(國舅)의 지위를 기화로 외람한 뜻이 있다고 논하였는데, 성종이 그의 간사함을 알고 동래(東萊)로 귀양보냈다. 김종직(金宗直)이 함양 군수(成陽郡守)였을 때 자광의 시(詩)가 현판(懸板)으로 걸린 것을 보고, 그것을 뜯어 내어 불살라 버리게 하면서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자이기에 감히 이렇게 하였느냐?”
하였다. 자광이 듣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종직이 임금에게 한창 총애와 신임을 받으므로 도리어 아부하여 사귀었고, 그가 죽자 제문(祭文)을 지어 조위하되, 옛날의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연산군 무오년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에, 이극돈(李克墩)이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이었는데, 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고는, 그것이 세조(世祖)를 가리킨 것이라 하여, 자광과 더불어 상세하게 해석하여 연산군에게 고발하고,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종직을 대역죄로 처단하고, 그 문도(門徒)인 김일손(金馹孫) 등을 혹은 베어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어, 당시의 명사가 모두 없어졌다. 자광이 그 옥사(獄事)를 국문하는데 참여하여 혹독하게 다루어 죄를 만들었으며, 죄를 의논하여 결정할 때에도 임금의 전교가 만약 더 엄중해지면, 자광이 그 전교를 전하는 내시(內侍)의 앞에 엎드려 아첨하는 추태를 가지가지로 부려서 사례하는 뜻을 표시하는 듯이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한 사람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추관(推官) 노사신(盧思愼)이 손을 흔들어 말리며 말하기를,
“무령(武靈)이 어찌 이렇게까지 말을 하시오.”
하자, 자광이 조금 주춤하였다. 전에 대궐 안각전의 액자(額字)를 김종직이 썼었는데, 자광이 모두 그것을 함양(咸陽)의 시 현판(懸板)을 불태운 보복(報復)이라 하였다. 이 밖에도 연산(燕山)의 비위를 맞추어 죄악을 조장하고 총애를 받으려 하여 또한 못하는 짓이 없었다. 박원종(朴元宗) 등이 반정할 때에 의론하기를,
“자광이 일을 많이 겪었고, 꾀가 많으니,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출발할 때에 비로소 사람을 시켜 알리면서, 만약 도망하거나 머뭇거리거든 쳐 죽이라 하였는데, 자광이 말을 듣자마자 곧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나오며, 또한 하인에게 유둔(油芚) 비올 때 쓰는 우구(雨具))을 가지고 따르게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진중(陣中)에 이르자, 무릇 장수와 사졸들을 지휘하여 보낼 때에 창졸간이라 표신(標信)을 삼을 만한 것이 없었는데, 곧 그 유둔을 잘라 표신을 만들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기지에 감복하였다. 공신(功臣)의 등급을 정하는 날에 자광이 원종에게 간청하기를,
“나는 이미 선왕조(先王朝)의 공신에 참여되었으니, 오늘의 공은 자식 방(房)에게 양여(讓與)하고 나는 간여하지 않겠소.”
하니, 원종 등이 허락하였는데, 자광이 바로 그때 자신이 붓을 들고 공신의 기록을 맡고 있었고, 또한 그를 뺄 수 없으므로 부자(父子)가 드디어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원종 등이 자광의 꾀에 떨어졌다 하였다.
중종(中宗) 초기에 공론이 신장(伸張)되자, 양사 및 옥당이 그의 죄악을 탄핵하므로 공훈이 삭탈되고, 서울 밖에 쫓겨나 죽었고, 그 아들 방(房)과 진(軫)도 모두 옳은 죽음을 하지 못하였다.
○ 유자광이 하루는 조정에 들어가서 소매 속에서 부채를 내어 두어 번 휘두르고는 느닷없이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괴상해, 이 부채에 쓰인 글이.”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혀 있는 글을 보여 주었는데, 위태로움과 멸망이 곧 다가온다 [危亡立至]는 넉 자였다. 그가 두세 번 손가락을 퉁기고 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대궐에 들어갔을 때에 처음 이 부채를 상자 속에서 꺼내어 쥐고 손에서 떠난 적이 없었는데, 누가 이 글을 썼단 말인가? 해괴하기 짝이 없다”
하였다. 옆에서 듣던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었는데 얼마 후 쫓겨나 죽었다.
○ 정덕(正德) 무진년(1508, 중종 3)에 어필(御筆)로 정원(政院)에 내리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자기 허물 듣기를 좋아하는 이는 적고, 자기 허물 듣기를 싫어하는 이가 많다. 신하로서 그 임금의 허물을 알고 맞대고 간하여 바로 인도하는 사람을 곧은 신하라 하고, 그 임금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 아양을 떨며 잘한다고 칭찬하는 사람을 아첨하는 신하라 하는 것이다. 옛적에 당 태종(唐太宗)이 밖으로는 간하는 말을 받아 들이는 도량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으니, 나는 그를 본받지 않는다. 만약 과실이 있으면 조정 밖의 여러 신하들도 모두 다 말 할 수 있은데, 하물며 임금의 말을 밖에 발표하고 밖의 말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승정원임에랴, 지금부터라도 나의 잘잘못을 너희들이 각기 진술하여 숨기지 말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죄를 주지 않겠노라.”
하고, 이어서 황모필(黃毛筆) 40자루와 먹 20개를 승정원과 예문관(藝文館)에 주면서 이르기를,
“지금 붓과 먹을 주노니, 무릇 나의 과실을 바로 쓰고 숨기지 말라.”
하였다.
○ 문종의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당초 안산(安山)에 장사하여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세조 병자년(1456, 세조 2) 성삼문 등의 난리 때에 왕후의 모친 최씨 및 그 동생 권자신(權自愼)이 극형(極刑)을 당하였으므로 인하여 왕후를 폐위(廢位)시키고 재궁(梓宮)을 물가에 옮겨 묻었는데,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겨우 그 위치만 알 정도였다.
성종조(成宗朝)에 포의(布衣) 남효온(南孝溫)이 상소하여 복위(復位)하기를 청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지목하여 미친 사람이라 하였다.
○ 종종 계유년(1513, 중종 8)에 이르러 양사와 옥당이 연합하여 청하기를 얼마 동안 하여 윤허를 얻어 지위와 칭호를 처음과 같이 회복하고, 좋은 날을 가려 현릉(顯陵 문종의 능)에 이장하였는데, 경내는 같으나 봉분이 다르다. 제조(提調) 송질(宋軼)ㆍ김응기(金應箕) 등이 역사를 마친 뒤에 아뢰기를,
“신 등이 당초에는 세월이 오래되었으므로 모두 썩어버려 남은 것이 없을까 매우 염려하였는데, 땅을 파 보니 안팎 재궁(梓宮)이 모두 있고 염습(斂襲)이 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다만 형체만 있기에 새 재궁, 새 의복으로 바꾸어 모든 일에 유감이 없게 하였으며, 또한 개렴(改斂)할 때에도 궁인(宮人)과 내관(內官)이 따라와 있었지만, 이런 지극히 중대한 일을 직접 살피지 아니할 수 없기에 신 등이 직접 염습(斂襲)을 살폈습니다.”
하였다.
○ 안남국(安南國) 사신 완장(阮莊) 등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왔다가 옥하관(玉河館) 문에 시를 쓰기를,
봉황은 보통 새와 달라 / 鳳凰異衆鳥
오색이 찬란한 옷을 입었네 / 五采耀毛衣
울음도 화하게 천 길이나 날면서 / 噦噦翔千仞
언제나 어진 덕 보기를 바라네 / 常懷覽德輝
우연히 황금 궁궐에 날아 왔다가 / 偶來集金闕
둘러 보더니 슬픈 생각을 하네 / 顧㴐生悽悲
하물며 가을 서리가 차가워 / 況復秋霜肅
온갖 초목이 날로 시드네 / 百卉日俱腓
오동나무 그늘이 이미 엷어졌고 / 梧桐陰已薄
대나무 열매 또한 드무네 / 琅玕實亦稀
지금은 소소(簫韶)를 연주하지 않으니 / 簫韶又不奏
한탄스럽다 어디로 갈거나 / 嘆息何所依
날개를 펼치고 구름 위로 나가 / 振翮凌雲去
다시 남쪽 하늘로 나네 / 更傍南天飛
하였다. 이때가 정덕 계유년(1513, 중종 8)이었다.
○ 정덕 병자년에 도승지 이자화(李自華)를 보내어 연산군의 묘에 제사지내게 하고, 좌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연산에게 한 제문에는 이르기를,
“내가 조그마한 몸으로 나라 운수가 비색한 때를 당하였소. 위로는 조종(祖宗)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에게 부대끼어, 사양해도 되지 않아 이렇게 되었오. 조심스러움과 부끄러움 실로 깊으니 내 마음 어찌 다함 있으리. 끝까지 우애하여 나의 뜻을 펴려 했는데, 한번 병 나자 그만이었으니, 하늘이여! 어찌 이다지도 모지신고. 세월이 흘러 갈수록 추모의 마음 더욱 간절하오. 이에 사람 보내어 제사 드리며, 공경히 나의 정곡을 고합니다. 제수야 지극히 박하지만, 나의 정성을 살펴 주기 바라오.”
하였고, 노산에게 한 제문에는 이르기를,
“내가 신(神)과 사람의 주(主)가 된 지 이제 거의 12년이 되어가오. 덕은 비록 부족하지마는 신(神)과 사람에게 같이하려 하오. 생각해보니, 외로운 무덤이 멀리 동쪽 시골에 있어, 향화(香火)가 적막한 지 거의 60년이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진실로 불쌍하오. 고금의 인사가 어느 것이 천운 아니리오. 황폐한 무덤의 수리도 천운이 있는 것이오. 환히 보시는 조종들이 나의 마음을 묵묵히 이끌어주시기에, 조정 신하와 의논했더니 또한 모두 말이 같았소. 하늘과 사람의 뜻이 맞아, 잃었던 절차를 즉시 거행하여 묘 지키는 사람을 두고 사철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소. 이에 연유를 들어 신하를 보내어 고하노니, 나의 정성을 양해하여 박한 제수나마 흠향(歆享)하오.”
하였다.
○ 정광필(鄭光弼)이 뜻이 크고 후덕하여 도량이 있었는데, 정승 이극균(李克均)이 한 번 보고 정승의 그릇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때에 사국(史局)을 설치하여 극균이 총재관(摠裁官)이었는데, 광필의 관직이 겨우 학정(學正)인 것을 발탁하여 도청(都廳)의 책임을 맡기고 편찬 임무를 일임하였다. 연산군 때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뒤에 잡혀오게 되어 죄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이 울면서 전송하는데 별안간 임금이 폐위되고 새 임금이 들어섰다는 기별을 전하는 사람이 있자, 좌중이 모두 기뻐하여 소리치며 질서를 잃었으나, 광필은 조용히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종사(宗社)를 위한 계책이다.”
하고는, 고기 접시를 물리치고 먹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옛 임금의 생사를 알 수 없구나.”
하니, 보는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성희안이 일찍이 말하기를,
“신용개(申用漑)가 백이라도 정광필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
하고, 천거하여 자기의 교대로 정승을 삼았다.
○ 처음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원자(元子)를 낳은 지 수일 만에 세상을 떠나 중전(中殿) 자리가 비어 있었다. 순창 군수 김정(金淨), 담양 부사 박상(朴祥)이 마침 조정에서 직언(直言)을 구하므로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신씨(愼氏)가 죄 없이 폐출(廢黜)을 당한 것은 박원종 등이 공(功)을 믿고 마음대로 하여 전하로 하여금 즉위의 시초에 부부의 도리를 바르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극력 논하고, 또 ‘첩을 처로 만드는 법이 없다’고 진술하여, 신씨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심히 간절하고 곧았다. 이행(李荇)이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주창하기를,
“신씨의 가례(嘉禮)가 장경왕후(章敬王后)보다 먼저였으니, 지금 만약 복위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원자(元子)의 지위가 난처해진다.”
하여, 김정ㆍ박상의 의론을 사론(邪論)이라 지목하자, 대사헌 권민수(權敏手) 등이 찬동하여 그들을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신의 옹호로 다만 귀양보내는 데에 그쳤다. 이때에 박빈(朴嬪)이 미(嵋)를 낳아 나이 장성하였고 총애가 후궁중에 으뜸이었으므로, 분수 밖의 왕비 자리를 엿보고 있었으니, 김정 등이 신씨의 복위(復位)를 청한 것은 비단 반정하던 당초의 처지가 잘못된 것을 바루려고 한 것만이 아니라, 대개 박빈(朴嬪)의 간교한 꾀를 미연에 방지하려 한 것이었는데, 이행(李荇) 등의 못된 의견이 이러했던 것이다.
뒤에 조정암(趙靜庵)이 정언 (正言)이었을 때에 맨 먼저 ‘이행 등이 언관(言官)으로서 도리어 바른 말한 사람을 죄주기를 청하여 언론의 길을 막았다’고 논하여 탄핵하였다. 이행이 이로 말미암아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김안로(金安老)는 옥당에 있으면서 양편이 다 옳다는 의론을 주장하다가 경주 부윤으로 나가게 되었다.
○ 중종이 일찍이 경연에서 《예기(禮記)》를 강론하다가 의론이 진여공(秦厲公)의 사실에 미치게 되자, 강관(講官) 김광(金硡)과 기준(奇遵) 등이 은연히 연산(燕山)을 위해 후사를 세워야 하는 뜻을 암시하고, 영의정 정광필 또한 그런 뜻을 넌지시 암시하므로, 임금이 다른 대신에게 자문하여 연산군과 노산군(魯山君)에게 입후하는 일의 가부(可否)를 아울러 의론하게 하고, 또 홍문관과 예조로 하여금 옛 제도를 널리 상고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의론의 일치하지 않아 그만 두고, 다만 노산군 부인 송씨와 연산군 부인 신씨(愼氏)의 생전에는 관(官)에서 제수를 내려주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뒤에 한산 군수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하여 노산군과 연산군을 위해 입후할 것을 청하고, 또 미(嵋)가 죽임을 당한 죄상이 명백하지 못한 것을 논하여 뉘우치고 깨우치는 뜻을 표시하기를 청하였는데, 미(嵋)는 곧 왕자 복성군(福城君)이다. 이보다 앞서 김안로가 박빈(朴嬪)이 세자(世子 인종)의 몸에 재앙이 있으라고 방술(方術)을 하였다는 것으로써 옥사를 일으켜 박씨와 미가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등을 불러 이약빙의 상소를 보이며 전교하기를,
“이 세 가지 일은 비록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기휘(忌諱)에 저촉될까 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지극히 귀한 일이다. 권세 있는 간신이 세력을 잡고 겉으로는 동궁(束宮)에 핑계하여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 속으로는 사사로운 독심을 품고 해쳐서, 박(朴)의 죄로 인하여 미(嵋)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위에서 비록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나 어떻게 제지할 수 있겠는가. 미의 죄는 실로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 딸자식 하나가 민간에 있는데, 이미 장성하였으나, 사족(士族)들이 혼인하여 줄 사람이 없다. 내 생각으로는 미를 복직시키면 그의 딸이 사족(士族)과 혼인할 수 있을 것이요, 나의 뒤늦게 뉘우치는 뜻을 사람들이 모두 알 것이다. 이약빙의 이 의론은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우는 큰 도리이다.”
하였는데, 윤은보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노산군ㆍ연산군의 일은 다시 의론할 수 없고, 미의 죄명(罪名)은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미 속적(屬籍)에서 끊어졌으니, 경솔하게 의론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유인숙(柳仁淑), 대사간 신거관(愼居寬) 등이 번갈아 글을 올려 논박하기를,
“약빙이 노산군ㆍ연신군을 위해 입후(立後)하게 하려고 이런 부정한 의론을 말하였으니, 지극히 흉악합니다. 미의 죄는 종사(宗社)에 관한 것인데, 약빙이 여태자(戾太子)를 죽였다가 뒤에 후회안 한 무제(漢武帝)의 일을 인용하기까지 하여 전하께서 뉘우치기를 바랬으니, 지극히 도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청컨대,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따랐는데, 홍문관에서 곧은 말을 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에 말이 부당하다 하여 말한 사람을 잡아다 국문하는 것은 언로의 길을 막는 것이라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다투므로 약빙이 죄를 면하게 되었다.
노산군ㆍ연산군을 위해 입후하자는 한 가지 일인데도 조정의 앞뒤 의론이 서로 다르기가 이와 같았다.
○ 정덕 무인년에 양사ㆍ옥당ㆍ예문관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소격서(昭格署)를 없앨 것을 청하고, 대신도 아뢰었으나, 여러 날이 되도록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 조광조(趙光祖)가 면대(面對)를 청하여 극력 논하고, 다음날에 또 관원을 거느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 네 번이나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광조가 추연(楸然)한 기색으로 동료에게 이르기를,
“해가 이미 저물어 대간들이 모두 이미 물러 갔는데, 우리들이 비록 죄책을 당하게 되더라도 마땅히 정성을 다해서 간하여 밤새도록 물러가지 말고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로 하자.”
하였다. 얼마 후 말씀하시기를,
“이 일은 나도 어찌 생각이 없으리오마는, 다만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내일 대신들을 불러 의론하여 혁파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광조 등이 죄를 당하자, 가정(嘉靖) 을유년(1525, 중종 20)에 대비(大妃)의 병환으로 인하여 대신을 불러 다시 세울 뜻을 말하므로, 정광필 등이 의론하기를, 이미 혁파한 것이니, 다시 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임금이 다시 의론하게 하므로, 광필 등이 두세 번이나 불가하다고 하다가, 최근에는 아뢰기를,
“위에서 그것이 불가한 것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대비(大妃)를 위하여 이와 같이 하교하시니, 신 등이 감히 다시 의론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드디어 다시 세웠다.
○ 을묘년 봄에, 대간이 여악(女樂)을 혁파하기를 계청(啓請)하였는데, 예조에서 의정부와 함께 의론하여 아뢰기를,
“여악을 쓴 것을 삼대(三代) 이상은 알 수 없으나, 옛글을 상고하면 궁중에서 썼습니다. 지금 내전 (內殿)에서 쓰는 여악은 폐할 수 없으니, 청컨대, 지방의 여악만 폐지하고, 경기(京妓)는 폐지하지 마소서.”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서울의 기생까지 아울러 폐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내전(內殿)의 연회 때 대신 쓸 것이 없다 하여, 대신들이 어렵게 여기므로, 폐지하지 않고 말았다.
○ 정덕 기묘년 2월 어떤 사람이 무슨 글을 건춘문(建春門)에다가 활로 쏘아 붙여 놓았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익명서(匿名書)는 열어볼 수 없는 것이나, 다만 궐문(闕門)에 쏘아 놓은 것이므로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도승지 권벌(權撥)을 불러 입대(入對)시키고 말하기를,
“지난 달 비원(秘苑)에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처음에는 새 잡으려다 오발한 것으로 의심하였다가 가져다 살펴보니, 화살의 허리를 끊었다가 도로 합치고 그 속을 비게 하여 글을 넣었는데, 조정의 일을 말한 것으로서 그 글이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의 소행이 아니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모일(某日)에는 의정부에 화살을 쏘았고, 모일(某日)에는 연추문(延秋門)에 방서(榜書)를 붙였는데도, 떼어 보지 않은 까닭에 또 여기에 쏘아 운운한 것이니, 이것은 필시 모두 한 사람의 짓이다.”
하자, 권벌이 아뢰기를,
“10여 일 전에 과연 글을 매달아 의정부 문에 쏘았었는데, 사인(舍人)이 그것을 익명서라 하여 곧 불태웠으며, 사헌부의 문에도 쏘았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보았던 이 글을 대신에게 보이려 하다가 그 꾀에 빠질까 하여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궐문에 쏜 것도 알고만 있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경연에서 장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의(講義)하게 되어, 강의를 담당할 만한 사람들을 뽑아 미리 강습하게 하였는데, 남곤ㆍ김안국ㆍ이자ㆍ김정ㆍ김세필(金世弼)ㆍ조광조ㆍ신광한ㆍ김정국ㆍ유운ㆍ김구ㆍ홍언필ㆍ김식ㆍ한충ㆍ박세희ㆍ기준ㆍ정응(鄭譍)ㆍ장옥ㆍ조우(趙佑)ㆍ이희민(李希閔)ㆍ황효헌(黃孝獻)ㆍ권운(權雲)ㆍ이충건(李忠楗) 등이 참여하였으니 모두 22인이었다.
○ 정부로 하여금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3정승 정광필ㆍ신용개ㆍ안당(安瑭) 등이, 김극성(金克成)은 문무(文武)를 겸하여 중요한 임무를 담당할 만하고, 성운(成雲)과 이기(李芑)는 재기(才氣)가 쓸 만하고, 이기는 또한 국경의 방비에도 합당하며, 이행(李荇)은 쓸 만한 재주가 있는데, 한때 탄핵 당한 것 때문에 아주 버리고 쓰지 않는 것이 부당하며, 김식ㆍ정완(鄭浣)ㆍ박훈(朴薰)ㆍ박영(朴英)은 재주와 품행이 있다고 천거하였다.
○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 14)에 의정부와 예조가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역대의 선비를 뽑는 법이 제도가 각기 달라 두루 열거하기는 어려우나, 오직 서한(西漢)의 효렴과(孝廉科)ㆍ현량과(賢良科) 등이 가장 옛 제도에 가깝고, 또 그 선거하는 방법도 《사기(史記)》를 상고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삭(元朔) 원년(기원전128)에 군(郡)ㆍ국(國)과 현관(縣官)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문학을 좋아하고 장상(長上)을 공경하며, 정교(政敎)를 엄숙히 여기고 향리(鄕里)에서 순량(順良)하여 사회에 나가서나 가정에 들어서나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지방 관리가 소속 상관에게 보고, 그 상관은 그럴 만한 사람을 잘 살펴 연말 회계보고 문서를 가지고 오는 관리와 함께 보내라.’ 하였고, 건무(建武) 12년(36)에 삼공(三公)ㆍ광록훈(光祿勳)ㆍ감찰어사(監察御史)ㆍ사예(司隸)ㆍ주목(州牧)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해마다 무재(茂才) 사행(四行)에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라.’ 하였는데, 사행(四行)이란 것은 순후(淳厚)ㆍ질박(質樸)ㆍ겸손(謙遜)ㆍ절검(節儉)을 말하는 것입니다. ‘군(郡)ㆍ국(國)의 무재(茂才)가 회계보고 관리와 함께 중앙에 오면 천자가 나와서 친히 책문(策問)을 한다…….’ 하여, 선발하는 조목이 상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지금도 이것을 모방하여, 재주와 행실이 겸비된 쓸 만한 사람을 서울과 지방에서 그 명성과 실지를 조사하여 널리 천거하게 하되, 서울에서는 사관(四館)에서 전담하여 유생과 조사(朝士)를 물론하고 성균관에 천거하면, 성균관에서 예조에 보고하고, 중추부ㆍ육조ㆍ한성부ㆍ홍문관에서도 아는 사람을 천거하여 예조에 이문(移文)하게 하며, 지방에서는 유향소(留鄕所)에서 그 고을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다시 잘 살펴서 예조에 이문하게 하여, 예조에서 서울과 지방의 천거한 사람을 합쳐 그 성명 행실을 기록하여 정부에 보고하여 위에 아뢰게 하고, 전정(殿庭)에서 책문(策問)으로 시험하는 모든 일은 그 임시에 계품(啓稟)하게 하되, 혹 명성과 실상이 어긋나서 잘못 천거하는 폐단이 있을 것도 염려되니, 추천한 사람의 성명도 아울러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기묘년 4월 10일에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서 친히 책문하였는데, 입시한 사람이 모두 1백 20명이었다. 혹은, 그 중에서 또 58명을 선발했다고 한다. 책문(策問)하기를,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덕이 없고 혼매한 몸으로 조종(祖宗)의 어렵고 큰 사업을 이어 받아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며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오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요순(堯舜) 정치의 재현을 목표로 한 지가 지금 14년이 되었으나, 정치의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여 인심이 점차 박하여지고, 민생이 날로 더욱 곤궁해지니, 내가 그윽히 마음 아프게 여기노라. 그 원인을 구명하면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있겠는가? 백성이 편안해지고 산물이 풍족해지며 풍속이 아름답게 변하여 요순의 정치가 회복되게 하려면 그 방법을 어떻게 해야겠는가? 오제ㆍ삼왕(五帝三王)의 도(道)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인지라, 사대부(士大夫) 중에 반드시 그 대체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각각 자신들이 평소 가진 포부(抱負)를 모두 기록해 내라. 내가 장차 친히 보겠노라.”
하였다.
독권관(讀券官) 신용개(申用漑) 등이 시권(試券)의 등급을 매겨 장령(掌令) 김식(金湜) 등 28인을 선발하여 입계(入啓)하니, 전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그 덕분에 안녕하도다’ 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어진 인재를 널리 구해 들여 조정에 나열해야 한다. 그리고 김식은 어진 사람이니, 이 사람을 뽑아 유생들의 스승되는 관직을 맡기려 하였는데, 혹 선발에 참여되지 못할까 염려하였더니, 지금 장원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내가 특히 기뻐하는 바이다.”
하였다. 신용개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비단 김식뿐이 아니라, 이름 있는 인재가 많이 참여되어 신들도 매우 기뻐합니다.”
하니, 또 전교하기를,
“지금 뽑힌 사람들이 진실로 모두 선비이지만, 내가 더욱 기뻐하는 것은 김식이 장원된 것이다.”
하였다.
○ 선왕조(先王朝)로부터 무릇 어전(御前)에 입시했던 사람들이 파하고 나올 때에는 아래 앉은 사람부터 먼저 나오는 것이 전례였다. 정덕(正德) 기묘년에 검열(檢閱) 신잠(申潛)이 경연(經筵)에서 사관(史官)이 먼저 나가는 것이 사체(事禮)에 타당치 않다는 뜻으로 아뢰었다. 임금이 옳다 하고, 대신에게 의론하여 위에 앉은 사람부터 먼저 나오는 것으로 규정을 삼았다.
○ 정덕 기묘년에 사인(舍人)이 3정승의 뜻으로 아뢰기를,
“조강(朝講) 때, 영사(領事 영경연사領經筵事)의 인원수가 많고 병고가 없다면 번번히 입시(入侍)할 수가 있지만, 근자에는 인원수가 매우 적어 혹 병고가 있게 되면 사세가 번번히 입시하기 어렵겠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예(例)로 보면 영사(領事)가 없어도 조강(朝講)을 하였으니, 지금 이후로는 영사가 비록 사고가 있더라도 역시 조강을 폐하지 않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옳다. 조강 때에 영사가 연고가 있으면 의정부의 다른 당상관(堂上官)이 대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명종(明宗) 초년에 대신이 의론하여 영사가 연고가 있으면 지사(知事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대신 들어가게 되었다.
○ 북경에 갔던 사신이 지은 문견록(聞見錄)에,
“정덕 무인년(1518, 중종 13) 5월 15일에 소주(蘇州) 상숙현(常熟縣)에서 흰 용 한 마리와 검은 용 두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입으로 불길을 토하며, 뒤따라 뇌성 번개가 치고 바람과 구름이 휘말아 일어나므로 부근 민가 3백여 호와 배 수십 척이 공중으로 날아 들어가다가 땅에 떨어져 분쇄(粉碎)되었다…….”
하였다. 그날 우리 나라 서울과 지방에 지진(地震)이 크게 일어나 종묘(宗廟)의 기왓장이 날아가고 대궐 안 담장이 무너졌으며, 민가가 혹 무너진 것도 있어 남녀 노소가 모두 밖으로 나와 눌려 죽는 것을 면하였다. 임금이 삼공(三公)ㆍ육경(六卿)ㆍ양사(兩司)ㆍ옥당(玉堂)ㆍ예문관( 藝文館)을 불러 자문하고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는데, 한꺼번에 들어가지 않고 삼공ㆍ육경이 파하고 나가면 양사가 잇따라 들어가고, 또 옥상과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이 차례로 입대( 入對)하였다.
기묘년 6월에 경상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가 치계(馳啓)하기를,
“경주에서 올린 보고에 의하면, ‘이달 6일에 해가 막 서쪽으로 지고 달빛이 매우 밝은데, 번개 같으면서도 번개가 아니고, 불 같으면서도 불도 아니며, 혹은 나는 화살이 공중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흐르는 별이 급히 스치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붉은 뱀이 날뛰는 것 같고, 혹은 불티가 날리는 것 같으며, 혹은 구부정하여 활맨 것 같고, 혹은 갈래져 비녀 토막 같기도 하여, 갖가지로 변화되는 모양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잠깐 나왔다 잠깐 없어지고 이리 몰렸다 저리 쫓아갔다 하며 번갈아 발동하고 차례로 나타나 연속 끊어지지 않았으니, 대개 포(砲)를 쏘는 상황과 같았다. 광채가 대단히 번쩍거려 어두운 방을 환히 비쳤는데, 서쪽에서 시작하여 점차 동북으로 향했으며, 2경(二更)이 다 지나서야 없어졌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경상도 밀양부(密陽府) 저대리(豬代里)에 있는 큰 버드나무가 정덕 병자년(1516, 중종 11) 에 풍우(風雨)로 인하여 쓰러졌는데, 3년이 지난 무인년 6월 10일에 크게 천둥치고 비가 오자 그 버드나무가 도로 일어났다. 그 나무가 높이는 37척이나 되고 둘레는 두 아름이었다. 금상(今上) 임진년(1592, 선조 25)에 통진현(通津縣)에서도 버드나무가 쓰러졌다가 1년이 지나 도로 일어섰었는데, 현감(縣監) 이수준(李壽俊)이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대사헌 조광조가 아뢰기를,
“장인 이윤형(李允泂)이 영종(永宗) 임소(任所)에서 죽었는데, 장성한 자제가 없으니, 초상 장사를 치르고 오겠습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 기묘년 6월에 승지(承旨)로 하여금 직접 들어와 일을 아뢰게 하였는데, 임금이 편복(便服)으로 편전(便殿)에 나와 있으면 승지와 주서(注書) 및 사관(史官) 두 사람이 들어가 아뢰고 물러 나왔으며, 작은 일이면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출납(出納)하게 하였다. 또한 국기일(國忌日)에는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라 임금이 천담복(淺淡服)을 입었으며, 일을 아뢰는 신하들도 천담복으로 입시하였다.
○ 기묘년 7월에 중국을 모방하여 서점을 설치하고, 소격서(昭格署)의 유기(鍮器) 및 헐린 사찰의 유기와 종(鐘) 등으로 활자(活字)를 만들어 책을 인출하게 하고, 또 공사(公私)의 흥조( 興造)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였다.
○ 기묘년 7월에 승지 한충(韓忠)을 보내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균관에 가서 관원과 유생들을 대접하고, 또 제술(製述)을 시험보였다. 이튿날 관원들이 유생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 동지사(同知事) 조광조와 윤탁(尹倬), 대사성 김식(金湜) 등을 인견(引見)하고, 또 유생 이세명(李世銘)ㆍ박광좌(朴光佐)ㆍ김경란(金景鸞) 등 3인을 지정하여 글을 강론하게 하고, 강론이 끝나자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하게 하였는데, 혹 대답하기도 하고 혹 대답하지 못하기도 하자, 임금이 웃었다.
○ 정덕 기묘년에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 원자(元子 곧 인종인데 그때 나이 5세였다)의 글 읽는 것을 보는데, 보양관(輔養官) 남곤(南袞)과 조광조 및 승지ㆍ사관(史官)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원자가 강사직령(絳紗直領)에다가 옥띠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었으며 두손을 단정하게 모으고 책상을 대하는데, 의젓하여 성인(成人)과 같았다. 《소학(小學)》을 줄줄 읽으며 훈고(訓詁)를 분석(分析)하는데, 음성이 인후(仁厚)하였다. 사관이 가만히 임금의 안색을 보니,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 기묘년 9월에 임금이 문묘(文廟)에 잔 드리기를 마치고 명륜당(明倫堂)에 좌정하여, 동지사(同知事) 윤탁, 대사성(大司成) 김식, 사성(司成) 이득전(李得全), 이조 정랑 정옥형(丁玉亨)에게《주역(周易)》〈태괘(泰卦)〉를 강론하게 하고, 첨지(僉知) 신광한(申光漢)과 윤자임(尹自任), 사인(舍人) 민수천(閔壽千), 장령(掌令) 박훈(朴薰)에게 《상서(尙書)》〈무일편(無逸篇)〉을 강론하게 하고, 또 생원 이약빙(李若氷)과 이종경(李宗慶)과 최경홍(崔景弘) 등에게 《대학(大學)》을 강하게 하되, 모두 문의(文義)를 논란(論難)하고 더러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하게 하였는데, 많은 선비들이 문에 둘러 서서 보고 들어, 천이나 만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 정덕 기묘년 10월에 좌의정 신용개(申用漑)가 죽었다. 임금이 예(禮)에 의하여 거애(擧哀)하려다가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이 어렵고 중대하게 여기므로 행하지 못하였다. 뒤에 조광조가 입대하여 이르기를,
“신용개가 죽었을 때에, 상께서 거애하려다가 도로 중지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듣건대,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에 세종께서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하였는데, 지금도 듣는 사람이면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일에 하교하신 뜻이 매우 아름다운데, 대신들이 곡할 만한 별전(別殿)이 없다고 하였다. 하니, 임금의 아름다운 뜻을 순종하여 이루어 드리지 못함이 심합니다.”
하였다. 세종이 유관ㆍ유정현(柳廷顯)의 초상에, 금천교(金川橋) 밖에 장막을 설치하고 행했으며, 처음부터 별전에서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때의 예관(禮官)이 전례를 자세히 상고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정덕 기묘년에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8도의 감사에게 모두 솔권(率眷)하게 하고 3년 만에 체직하였다. 부윤이 있는 곳은 부윤의 직을 겸임하게 하고 없는 곳은 계수관(界首官)을 판목사(判牧使)로 하비(下批)하였다. 그리고 경상도는 좌우도로 나누고, 경기는 예전대로 경영(京營)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뒤에 조광조 등이 무너지자 도로 복구하였다.
○ 기묘년 10월에 대사헌 조광조, 집의(執義) 박수문(朴守紋), 장령 김인손(金麟孫), 지평(持平 ) 조광임(趙光任)ㆍ이희민(李希閔),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사간 유여림(兪汝霖), 헌납(獻納) 송호지(宋好智), 정언 김익(金釴)과 이부(李阜) 등이 합사(合司)하여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아뢰기를,
“병인년 반정(反正)때에 공신(功臣) 녹훈(錄勳)을 너무 지나치게 하여 등급을 4등까지 나누어, 공도 없으면서 과람하게 녹공(錄功)된 사람이 많습니다. 이익의 구멍이 한번 열리자 사람마다 이익을 탐내는 마음을 갖게 되어 후폐(後弊)를 막기 어려우니, 청컨대 과람하게 녹공(錄功)된 사람들을 삭제하소서.”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김구(金絿). 전한(典翰) 정응(鄭譍), 응교(應敎) 기준(奇遵), 부응교 장옥(張玉), 교리(校理) 조우(趙佑), 수찬(修撰) 심달원(沈達源), 저작(著作) 경세인(慶世仁), 정자(正字) 김명윤(金明胤)과 권장(勸檣)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고, 대신과 육경(六卿)이 또한 아뢰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하여, 양사(兩司)가 사직(辭職)하기까지 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중대하고 어렵다는 뜻으로 타일렀다. 조광조가 그것을 삭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극력 간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에 예조 판서 남곤(南袞)이 영릉 봉향사(英陵奉香使)되기를 자청하여 나갔는데, 1품의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큰일에 당하여 관망(觀望)하여 회피하니, 심히 사특합니다. 재상(宰相)의 마음씀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고,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및 양사의 장관을 불러 의론하여, 정국 공신(靖國功臣) 2등과 3등 중의 과람하게 녹공(錄功)된 사람 및 4등 전부를 삭제하였다.
뒤에 조광조 등이 죽임을 당하자, 삭제하였던 공신을 도로 환원시켰다.
○ 기묘년 11월 15일 밤 2경(二更)에 비밀 전교를 내려,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여러 재상(宰相)들을 불러 들이면서 승정원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尹自任)과 공서린(孔瑞麟), 주서 안정(安珽), 검열(檢閱) 이구(李構) 등이 듣고 합문(閤門) 밖으로 달려가 보니,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 공조 판서 김전(金詮), 예조 판서 남곤, 병조 판서 이장곤(李長坤),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 화산군(花山君) 심정(沈貞), 병조 참지(兵曹參知) 성운(成雲) 등이 촛불을 밝히고 앉았고, 군사들이 둘러 싸고 서 있었다. 심정과 성운은 직소(直所)에서 와 모였다. 자임(自任)이 묻기를,
“정원(政院)에서 모르는데 들어 온 것은 웬일이오.”
하니, 심정이 답하기를,
“표신(標信)으로 부르시므로 왔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내시(內侍)가 성운(成雲)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성운을 승지에 제수하였으니, 빨리 입대(入對)하랍시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편전(便殿)에 나와 좌정하였는데, 성운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자임이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미리 알지 못하였는데, 어찌 다만 내시의 말만 듣고 감히 들어가려는 것이오?”
하였으나, 성운이 듣지 않고 들어가려 하자, 안정이 말리기를,
“비록 급한 일이 있더라도 사관(史官)은 같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성운이 어찌 감히 혼자 들어가려는 것이오. 우선 기다려야 하오.”
하고, 드디어 뒤따라 합문(閤門)에 이르러 그의 띠를 붙들고 같이 들어가려 하는데, 성운이 안정의 팔을 뿌리치고 들어갔다. 내시가 문지기를 꾸짖기를,
“왜 잡인(雜人)들을 금하지 않는고?”
하고는, 드디어 같이 안정을 붙들어 내보냈다. 심정이 안정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임금께서 매우 화내신 것 같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하였다. 얼마 후에 성운이 나와 소매 속에서 종이 쪽지를 내어 이장곤에게 주며,
“이것은 어필(御筆)인데, 이 사람들을 곧 의금부에 가두라 하십니다.”
하였는데, 이때 이장곤이 판의금(判義禁)을 겸임하였음. 쪽지에 쓰인 성명은 곧 윤자임ㆍ공서린ㆍ안정ㆍ이구 및 응교 기준, 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이었다. 모두 입직했던 사람들임. 조금 있다가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李耔), 형조 판서 김정,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대사성 김식(金湜) 등을 모두 대궐 뜰에 잡아왔다. 어떤 이가
“수상(首相)에게 알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
고 말하므로, 그제서야 정광필을 명소(命名)하여 입대시키고 조광조 등의 죄안(罪案)을 보이게 하니, 광필이 말하기를,
“중대한 일이어서 경솔하게 의론할 수 없으니, 여러 사람의 의론을 모아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남곤에게 명하여 전지(傳旨)를 초하여 하자, 남곤이 앞으로 나가 붓을 잡고 엎드렸다. 이때에 다만 승지 성운과 가주서(假注書) 심사순이 입시하였다. 다 쓰고서 임금 앞에 바치니, 보고 나서 전교하기를,
“죄안(罪案)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광조등 8인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그 죄인에 이르기를,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은 서로 편당을 만들어 자기네에게 붙는 사람은 등용시키고, 자기네와 다른 사람은 배척하였으며, 명성과 세력을 의지하고 권세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후진들을 유인하여 괴이하고 과격하게 풍습을 조성하여, 국론(國論)이 전도(顚倒)되고 정치가 날로 그릇되게 만듦으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며,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등은 광조 등의 무리와 더불어 괴이하고 과격한 풍습을 서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였다.”
고 하였다. 죄인 가운데, 처음에는 ‘임금을 속이고 사심을 부렸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정광필이 아뢰어 삭제하였으며, 이자의 죄명(罪名)이 김식의 위에 있었는데, 광필이 또한 아뢰어 벗겨 주었다. 이날 밤 이조 판서 남곤, 대사헌 유운(柳雲), 대사간 윤희인(尹希仁), 승지 김근사(金謹思)와 성운은 모두 임금의 특명으로 제수하고, 인하여 옥당ㆍ양사를 모두 체직시키라고 명령하였는데, 광필이 체직시키지 말기를 청하여 두세 번 아뢰니, 임금이 다만 옥당의 관원만 체직시키지 말 것을 허락하였다.
조광조 등이 이미 옥에 갇히자, 공초(供招)를 받아 입계(入啓)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 일은 조정에서 이미 의론을 정하였으니, 형장(刑杖)을 쓰지 말고 조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조율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 네 사람이 사형에 해당된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승지 김근사를 탑전(榻前)으로 불러 판부(判付)를 쓰기를,
“조광조ㆍ김정은 사사(賜死)하고, 김식ㆍ김구는 장 1백 대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은 먼 곳에 부처(付處)하라.”
하였다.
김근사가 명령을 듣고도 머뭇거리고 있는데, 사관(史官) 채세영(蔡世英)이 아뢰기를,
“대신들에게 대한 처분을 다시 의론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다시 의론하여야겠다.”
하였다. 광필 등이 빈청(賓廳)에 있었는데, 근사가 가서 임금의 말을 전하니, 이때 날이 저물어 촛불을 켜고 있었다. 광필이 전교를 듣고, 촛대를 만지다가 놀라 좌우를 돌아보며 곧 입대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이 직책에 있은지 또한 오래되었지만, 어찌 오늘날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기 때문에 사리(事理)를 몰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약간의 중한 죄를 주는 것이라면 신등이 어찌 청하지 않겠습니까?” 광필이 아뢸 때에 눈물이 흰 수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과연 중한 일이니, 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하겠소.”
하고, 승지 성운을 불러 하교하기를,
“광조 등 4명은 곤장을 쳐서 먼 곳에 안치하고, 자임 등 4명은 먼 곳에 부처하도록 하라.”
하니, 성운이 판부(判付)를 써 가지고 물러났다. 광필이 빈청으로 물러 나와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이미 죽음을 면하였으니, 이것은 천지와 같은 은혜입니다. 다만 모두 병약(病弱)한 자들인데, 만약 곤장을 맞고 멀리 가게 되면 중도에서 죽을지도 알 수 없으니,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말을 듣게 되고 죽음을 면해 준 실상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며, 다섯 차려나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또 성운에게 하교하기를,
“금부에 가서 광조 등을 뜰에 끌어내어 나의 뜻을 전하되,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던 신하로서, 본시는 임금과 신하가 마을을 같이하여 지치(至治)가 이루어질까 기대하였다. 너희들의 인물이 또한 어질지 않은 것도 아니나, 다만 근래에 와서 모든 일이 잘못되어 정상(正常)으로 되지 아니하여, 조정의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므로 부득이 죄를 준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은 어찌 편하겠으며, 조정 대신도 어찌 사심이 있었겠느냐? 너희들의 인물이 또한 취할 만한 사람들인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그 잘못은 내가 시초에 밝지 못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데에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죄를 만일 율문(律文)대로 처단한다면 어찌 이에 그치고 말겠느냐. 마땅히 중죄를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너희들이 사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나랏일을 하기 위하여 그 과격한 허물을 자신이 모른 것이다. 그러므로 감등(減等)하여 죄주는 것이다. 만약 보통 죄수라면, 이렇게 타이를 필요도 없겠지만 너희들은 시종하던 사람으로서 지금 다만 일을 그르쳤을 뿐이므로 이 뜻을 알린다.’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조광조의 무리를 만약 율문대로 한다면 그 죄가 심히 중하지만, 특별히 관대한 법을 써 감등하여 죄를 준다는 내 뜻을 자세히 전하라.”
하였다. 성운이 금부에 가서 임금의 말을 전한 뒤에 회계(回啓)하기를,
“다른 사람은 하는 말이 없었고, 오직 조광조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이번에 가더라도 임금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신 등이 과연 과격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태학생(太學生) 이약빙(李若氷) 등이 상소하여 광조 등이 죄없음을 밝히고, 서로 거느리고 대궐 뜰에 들어가 통곡하니, 소리가 임금의 처소에까지 들렸다. 임금이,
“곡성이 어디서 들려 오느냐?”
하고 묻자, 정원(政院)에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유생들 하는 짓이 심히 해괴하다. 과장(科場)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죄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대궐 뜰을 어찌 함부로 들어와 통곡한단 말이냐. 5~6인을 잡아 가두어 징계하고, 또한 금군(禁軍)을 시켜 몰아내라.”
하였다. 이약빙 및 윤언직(尹彦直)ㆍ박세호(朴世豪)ㆍ김수성(金遂性)ㆍ황계옥(黃季沃) 등 다섯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 다음날 생원 임붕(林鵬) 등이 또한 상소하여 조광조의 일을 말하고, 또한
“어제 유생들이 옥에 갇혔는데, 신 등이 홀로 편안하게 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백 명이 모두 대궐문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3일 만에 임금이 명령하여 약빙 등을 석방하고, 그들의 상소에 답하기를,
“광조 등의 애초의 뜻이 어찌 국사를 그르치려 하였겠느냐. 위에서도 지치(至治)를 보려고 기대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이들이 과격한 일이 많으므로 부득이 죄를 준 것이다. 대신도 조정을 안정시켜려 한 것이지, 참소하는 사특한 사람이 군자를 배척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광조 등이 귀양가고 나자, 뭇 소인들이 득세하였다. 황계옥ㆍ윤세정(尹世貞)ㆍ이뇌(李耒) 등 세 사람이 상소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ㆍ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 등 8인을 베자고 하여, 시론(時論)에 영합하였는데, 말이 극히 흉하고 참혹하였다. 황계옥이 처음에 광조를 구원하려다가 옥에 갇혇었는데, 한 달도 되지 못하여 또 반드시 용서없이 죽이기를 청하였으니, 그 심술의 고약함이 이와 같았다.
○ 유운(柳雲)이 조정암(趙靜庵) 대신으로 대사헌에 제수되자, 사헌부의 동료 및 사간원 관원들과 더불어 모두 취임하지 않고 연명(連名)으로 아뢰기를,
“조광조 등이 모두 철없고 경솔하기 때문에 다만 성상께서 말마다 들어주고 계책마다 들어 주는 것을 믿었었는데, 하루 아침에 죄를 주니, 신 등이 그 연유를 모르겠으며, 전 대간을 까닭없이 모두 체직시킨 것도 신 등이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반드시 조 광조 등을 다시 등용한 후에야 신 등이 취임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사람을 형벌하는 것도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해야 하고, 속이거나 비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일이 간사한 무리들의 밀계(密啓)에서 나온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들으니, 위에서 비밀히 홍경주(洪景舟 경주는 순빈(順嬪)의 아버지)에게 명령하시기를, ‘지금 조광조 등의 우익(羽翼)이 이미 이루어졌다. 전일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자고 청할 때에 내 생각에 매우 좋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것은 당파를 심으려고 한 짓이다. 지금 현량과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나, 다만 경(卿)의 사위 김명윤(金明胤)도 그 가운데 있으므로 하지 못한다.’ 하셨다 하여, 이 말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임금의 권력으로 두세명의 서생(書生)을 죄주는 것이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어두운 밤에 비밀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하셨습니까? 겉으로는 친하고 믿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제거할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이러한 것은 위태롭고 망할 징조인 것입니다. 신 등은 통곡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것은 대간(臺諫)이 잘못 들은 말이다. 당초에 홍경주가 남곤ㆍ송철(宋鐵) 김전(金詮) 등의 집에서 무사(武士)들이 결당(結黨)하여 문사(文士)들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로 인해 같이 의론하기를 ‘이렇게 되면 장차 큰 변이 생기겠다.’ 하여, 조정에서 직접 이와 같이 하였으니, 광조 등에게는 복이 된 것이다. 이번 일은 조정의 깊은 생각으로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유운이 끝내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었다. 유운이 젊었을 때 과거하였는데, 활달하여 기절이 있었다. 물러가 시골에 살면서 시국을 개탄하여 술을 함부로 마시다가 병들어 죽었다.
○ 정덕 기묘년(1519, 중종 14) 11월 21일에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덕에 밝지 못하여 한갓 정치를 잘 해 보려는 뜻만 간절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지감이 있지 못하여, 사람을 쓰고 버릴 때에 크게 잘못됨이 있었으니, 내가 심히 부끄러워 한다.
전에 조광조ㆍ김정ㆍ김구ㆍ김식ㆍ윤자임ㆍ박세희ㆍ박훈 등이 모수 시종하는 관직에 있으면서 성리학(性理學)을 아침저녁으로 강의하고 권하므로, 내가 그들의 사람됨이 나의 정치를 보좌하여 성취시킬 만하다 하여, 좋은 벼슬을 가려서 주고 계급을 뛰어넘어 승진시켜 주었으니, 내가 대우하여 준 것이 그들을 저버렸다고 할 수 없거늘, 뜻밖에도 광조 등이 서로 결탁하여 자기들에 붙는 사람은 등용시키고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였으며, 명성과 세력으로 의지하고, 권세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조종(祖宗)들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노성(老成)한 분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하며, 후진들을 유인하여 괴이하고 과격하게 풍습을 조성하여, 이를 의론하는 즈음에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극구(極口) 배척하여 반드시 굴복시켜 자기들을 따르게 하여 국록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그릇되게 만들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속으로 분개하고 탄식하면서도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의 소행을 살피건대, 마침내 정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돌아간 것이다.
사실이 이미 나타나 용서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율문에 의거하여 죄를 다스려 백관(百官)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하겠지만, 다만 전일에 시종하던 것을 생각해서 특별히 경감(輕減)하여, 광조 등 이하를 각각 그 죄대로 죄주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랴? 이러한 의론을 정부는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모두 나의 뜻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이 전지(傳旨)는 남곤이 기초한 것이었다.
대사헌 이항(李沆), 대사간 이빈(李蘋) 등이 합사(合司)하여 대궐에 나아가, 안당(安瑭)ㆍ최숙생(崔淑生)ㆍ이자(李耔)ㆍ김안국(金安國)ㆍ유운(柳雲)ㆍ김정국(金正國)ㆍ조광좌(趙光佐)ㆍ이충건(李忠楗)ㆍ유용근(柳庸謹)ㆍ신광한(申光漢)ㆍ정순붕(鄭順朋)ㆍ한충(韓忠)ㆍ정응(鄭譍) 최산두(崔山斗)ㆍ장옥(張玉)ㆍ이희민(李希閔)ㆍ이청(李淸)ㆍ양팽손(梁彭孫)ㆍ구수복(具壽福)ㆍ정완(鄭浣)ㆍ이연경(李延慶)ㆍ이약빙(李若氷)ㆍ권진(權磌)ㆍ송호지(宋好智)ㆍ송호례(宋好禮)ㆍ김광복(金匡復)ㆍ조언경(曹彦卿)ㆍ유인숙(柳仁淑)ㆍ윤광령(尹光齡)ㆍ권장(權檣)ㆍ파릉군 경(巴陵君儆)ㆍ시산정 정숙(詩山正正叔)ㆍ장성수 엄(長城守儼)ㆍ숭선부정 최(嵩善副正?)ㆍ강녕부정 기(江寧副正祺) 등 36인을 단자(單子)에 써서 아뢰어 죄주기를 청하고 또 현량과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중종이 양사 장관(兩司長官)을 인견(引見)하여, 황계옥 등이 조광조를 주벌할 것을 청한 소(疏)를 보이고 하교하기를,
“조정에 만약 공론이 있다면 유생들이 어찌 이와 같이 하랴.”
하고, 또 영의정 정광필ㆍ좌의정 김전(金詮) 등을 불러 입대하게 하여, 대간이 올린 단자 및 황계옥 등의 소를 보이며 말하기를,
“근일에 재변(災變)이 거듭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의 죄주기를 청하는 일을 어떻게 할꼬?”
하자, 광필이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고, 김전도 또한,
“근본되는 사람을 이미 죄주었으니, 그 나머지는 반드시 낱낱이 다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하더니, 이튿날 전교하기를,
“당초에 그 수괴(首魁)를 처단하였더라면 나머지 당(黨)은 비록 다스리지 않더라도 풍습이 절로 발라졌을 것이다. 대신이 국가의 일 보기를 남의 집 일 보듯하여 배회(徘徊)하고 관망하여 잘잘못을 결정하지 못하니, 이것은 사세를 보아 저 사람들의 죄 받음이 경하고 중함으로써 후일 자기 처신의 계책을 마련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무를 다루는 데 비유하건대, 근본이 이미 끊어지면 지엽(枝葉)은 절로 마르는 것이다. 대간이 근본 다스리기를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지엽만 다스리려고 하니, 이것은 일을 모르는 것이다. 영상과 우상을 빨리 체직시키고, 새로 다른 정승을 내는 것이 옳다.”
하고, 당일에 어필(御筆)로 남곤ㆍ이유청(李惟淸)을 좌상ㆍ우상으로 삼아 바로 불러 비현각(丕顯閣)에 입대하여, 광조 등에게 죄를 더 줄 뜻을 말하고, 또 금부 당상(禁府堂上) 심정(沈貞)ㆍ손주(孫澍) 등을 불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에게는 사사(賜死)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게 하라.”
하였다. 남곤ㆍ유청ㆍ심정 등이 아뢰기를,
“4인 가운데서도 마땅히 분별하여 괴수만 죄주면 족합니다.”
하고, 손주는 아뢰기를,
“4인을 모두 절도 안치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와 같은 은덕을 보여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금부옥(禁府獄)에서 불공한 말을 한 것만으로도 죽을 만하니,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절도 안치하게 하라.”
하고, 또 남곤ㆍ유청으로 하여금 어전(御前)에서 양사(兩司)가 죄주기를 청한 사람들은 경중을 나누어 죄주게 하여, 유용근ㆍ최산두ㆍ정응ㆍ정완 등은 외방에 부처(付處)하고, 최숙생ㆍ이자ㆍ양팽손ㆍ이약빙ㆍ이희민ㆍ이연경ㆍ윤광령ㆍ이충건ㆍ조광조ㆍ송호지와 호례 등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안당ㆍ김안국ㆍ유운은 파직시켰다.
○ 남곤이 대제학으로 정승에 제수되었으므로 대제학을 사면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누가 후임이 될 만한 사람이오?”
하고 물으니, 남곤이 아뢰기를,
“죄를 받고 있는 사람 중에 적합한 사람이 두어 사람 있는데, 새로 죄를 받은 사람으로 오직 이행(李荇)이 매우 적합하나, 벼슬의 계자가 낮습니다. 그러나 세종조에 신색(申穡)ㆍ신석조(辛碩祖)가 수 대제학(守大提學)이 된 일이 있는데, 이행은 아직 가선(嘉善)의 계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는 적합한 사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이행의 계자를 가선으로 올려 수 대제학으로 제수하였다.
○ 한충(韓忠)이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에 충청도로 근친(覲親)하러 가는 길에 진위현(振威縣)을 지나다가, 선비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소매속에서 긴 글을 꺼내었는데 당시 정치의 잘잘못을 조목조목 나열하였고, 또한 그 언론이 기특하고 잘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지 않고 길게 읊고 가버렸다. 한충이 매우 혹하여 그를 숨어 있는 어진 인재인 줄 알고 조정에 돌아와 그 글을 아뢰니, 임금이 지방에 유시를 내려 찾아보도록 하였다. 뒤에 들으니 그의 성명이 권탁(權鐸)인데, 전에 연산군이 사랑하는 후궁 장숙원(張淑媛 장녹수)의 집에서 서제(書題)로 있으면서 세력을 끼고 못된 짓을 방자하게 하던 자였으니, 한충이 속임을 당한 것이었다. 사림(士林)의 화(禍)가 일어나자, 이빈(李蘋)ㆍ유관(柳灌) 등이 한충이 임금을 속였다고 탄핵하여 잡아다 국문하고 장을 때려 거제(巨濟)로 귀양보냈었는데, 신사년(1521, 중종 16)에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다.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 귀양간 지 얼마 안 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공이 뜰 가운데 나와 꿇어 앉아 전지(傳旨)를 듣고 나서 임금의 기체(氣體)가 어떠한가를 물은 다음, 세 정승ㆍ여섯 판서의 성명을 물었으며, 목욕하고 새옷을 입고 자못 태연하였다. 금부도사 유엄(柳渰)이 재촉하는 기색이 있자, 공이 탄식하기를,
“옛사람은 조서(詔書)를 안고 전사(傳舍)에 엎드려 우는 이도 있었는데, 어찌 그리 다른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함과 같이 하였으니, 하늘의 해가 참된 충정을 비추리.”
하고는, 드디어 약을 마시고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끈으로 목을 졸랐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이 제주에 귀양간 지 일년 남짓이었을 때에 집의(執義) 김인손(金麟孫), 사간 채소권(蔡紹權) 등이 죄를 더 주기를 청하여 죽음을 내렸다. 죽을 때에 글을 짓기를,
먼 땅에 와 외로운 혼이 되니 / 投絶國兮作孤魂
모친과 떨어져 천륜이 막혔네 / 遺慈母兮隔天倫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이 죽으니 / 遭斯世兮隕余身
구름을 타고 상제의 문턱에 들르며 / 乘雲氣兮歷帝閽
굴원을 따라가 높이 소요하리 / 從屈原兮高逍遙
긴 밤의 어둠이여! 언제 아침이 되려는가 / 長夜晏兮何時朝
빛나는 참된 충심 초야에 묻어버리네 / 耿丹衷兮埋草萊
당당한 장한 뜻이 중도에 꺾어지니 / 堂堂壯志兮中道摧
천추만세에 응당 나를 슬퍼하리 / 千秋萬歲兮應我哀
하였다. 기준(奇遵)은 온성(穩城)에 귀양갔었는데, 또한 김정과 동시에 죽음을 내렸다.
인종(仁宗)이 왕위에 오르자, 태학생(太學生) 박근(朴謹 어떤 책에는 근(瑾)이라 하였다.) 등이 상소(上疏)하여 조광조의 학술(學術)은 바른데, 선왕(先王)이 뭇 소인에게 속았다는 것을 극력 논하고, 직첩(職帖)을 도로 주어 선비들의 추향을 바르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가상히 여겨 칭찬하였으며, 정신(延臣)들 중에도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신중히 하기 위하여 급하게 시행하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기다림이 있었던 것이다. 병이 위독하게 되자, 대신에게 전교하기를,
“조광조ㆍ김정ㆍ기준 등의 복직(復職)과 현량과(賢良斗)를 복구하는 일을, 나는 그것이 선왕 때의 일이라 하여 천천히 할까 하였는데, 지금 나의 병이 이러하니, 그것을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광조 등을 모두 복직시키고, 현량과도 도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명종(明宗) 초년에 이르러 이기(李芑)가 계청(啓淸)하여 도로 그 과거(科擧)를 없앴는데, 금상(今上)이 또 다시 명령하여 현량과를 복구시키고,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 조정암이 이미 죄를 당하자, 조정에서 현량과를 없앨 것을 의론하는데, 집의(執義) 유관( 柳灌)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 과거를 처음 뽑을 때에,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자기네와 맞지 않는 사람은 배척하였으며, 시취(試取)하는 날에도 예조에서 ‘이 사람들은 반드시 시험장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여, 서리(書吏)를 시켜 들어오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한심한 일이 있습니까. 비록 그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조정이 없는 사람이 많았고, 시험장에 참여시킨 일이 또한 매우 공정하지 못하였으니, 속히 파직시켜 임금을 속인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였고, 정언 조침(趙琛)이 말하기를,
“당초 계책을 내어 이 과거를 시행하게 한 사람이 안당(安瑭)입니다.”
하였으며, 영상 정광필이 말하기를,
“처음 이 과거를 설치할 때에 보니,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나 능히 말리지 못하였는데, 뽑아 놓고 보니, 과연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개 우리 나라 인심은 중국처럼 순박하지 못하여 후폐가 반드시 많을 것이므로, 당초 개시하지 않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거가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신이 듣지 못하였고, 안당이 주장하였다는 것도 그렇지 아니합니다. 신용개(申用漑)ㆍ최숙생(崔淑生)이 그 의론을 극력 주장하였고, 안당은 자기 아들이 뽑혔을 때에 현저한 조행이 없다 하여 피혐(避嫌)하였습니다. 어찌 자기 아들을 위하여 그 과거를 설치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뒤에 용개도 후회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나의 처음 계책이 잘못이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한형윤(韓亨允)이 말하기를,
“이 과거는 처음에 널리 인재를 취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임금께서 믿고 허락한 것인데, 마침내는 그 수(數)를 줄여 뽑아, 대개 모두 세력에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건의한 사람들이 모두 기염(氣焰)이 강성하여, 장순손(張順孫)ㆍ조계상(曹繼商)이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모두 쫓겨나는데도,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몸을 아껴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이 처음에 그릇 건의하였다가, 지금 그 폐단을 알았으니, 마땅히 속히 파하자고 아뢰어야 할 것인데, 파할 수 없다고 말하니, 어찌 이와 같은 통분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광필이 말하기를,
“처음 설치할 때에 그것이 조종(祖宗)의 법이 아니요, 또 후폐가 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미 뽑고 보니 쓸 만한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그 인재를 애석히 여겨 파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의론을 어찌 구차히 남과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헌 이항(李沆)이 말하기를,
“김식(金湜) 등은 처음부터 과거를 싫어한 사람이 아닙니다. 재주가 짧고 학문이 부족해서 반드시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소수를 뽑아서 그들을 취한 것입니다. 금번에 이 과거를 파해 버리지 않으면 간당(姦黨)을 심으려는 권신(權臣)이 반드시 이것을 빙자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관이 말하기를,
“김식은 전연 글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승지 김희수(金希壽)가 말하기를,
“어찌 김식이 전연 글을 모른다 합니까? 신이, 그가 고문(古文) 중에서도 가장 해독하기 어려운 곳을 반드시 능히 분석하여 해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였다. 수찬(修撰) 이봉(李芃) 뒤에 이름을 미(薇)로 고쳤는데, 기(芑)의 아우다.) 이 말하기를,
“조종(祖宗)들이 몰래 도우시고 전하께서 마음을 깨우치시어, 그들이 정치를 어지럽히는 줄 알고 숙청하셨는데도 대신들이 하나도 전하의 자손 만세(萬世)의 계책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일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을 깎아 추리는 것이 본시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개정하기까지 청하더니, 금번 국가의 대계(大計)는 위태로움과 멸망이 관계되는 일이로되 힘껏 하지 않습니다.”
하니, 광필이 말하기를,
“신이 어리석고 못나 어떻게 하면 국사가 좋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현량과를 파하여야 되겠습니까? 지금 백관을 인솔하고 간하는 일을 신은 능히 알지 못하겠거니와, 그러면 대신으로 하여금 백관을 인솔하고 그 사람에게 죄를 더 주기를 청하는 것입니까? 태평한 시대에 어찌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과거는 파하지 말고 다만 현직(顯職)에만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가, 끝내 파하였다.
○ 경진년(1520, 중종 15) 4월에 이신(李信)이 승정원에 와서 고하기를,
“김식이 선산(善山)의 귀양살이에서 도망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그 아들 덕순(德純) 및 문객(門客) 김윤종(金胤宗) 등으로 하여금 남곤ㆍ심정ㆍ홍경주 등을 제거하려 합니다.”
하였다. 이신은 본시 낙안(樂安) 고을의 관노(官奴)였는데, 젊었을 때 노역(奴役)을 파하여 중이 되었다가, 김식이 제자를 모아 도학(道學)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문하(門下)에서 공부하기를 청하고 머리를 기르고, 김식의 집 담 밑에 토굴을 파고 거처하고 《대학(大學)》을 배우면서 뜻을 세워 부지런히 공부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기특히 여겼다. 김식이 죄를 당한 뒤에도 오히려 따라 다니더니, 서울에 올라와 반역을 고발한 것이었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나와 묻고는, 8도에 글을 내려 인상(人相)을 적고 현상(懸賞)하여 잡게 하였는데, 5월 16일에 김식이 거창(居昌) 지경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따라 다니던 사람 우음산(于音山)이 본현(本縣)에 고하므로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하고 관찰사가 치계하였다.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김식의 얼굴을 아는 사람과 같이 가서 사실인지 아닌지를 검시(檢屍)한 후에 그 처자 등을 석방하였다.
○ 정덕(正德) 경진년(1520, 중종 15) 4월에 왕세자(王世子 곧 인종이니, 그때 나이 여섯 살이었다.)를 책봉하였다. 하례(賀禮)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며 백관에게 가자하였다. 그 책봉한 교명문(敎命文)에,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자를 세우는 것은 실로 큰 근본이 되는 것이요, 종묘의 제사를 받드는 일은 마땅히 원량(元良)에 속하는 것이다. 이제 너(□인종의 어휘(御諱))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네가 도(道)를 즐기고 스승을 높이며 어진 이를 친애하고 아첨하는 이를 멀리하여, 능히 삼선(三善)의 교훈을 명심하여 온 나라의 아름다운 운수를 오래 가게 하라.”
하였다. 성세창(成世昌)이 지어 바쳤음.
죽책문(竹冊文)에 이르기를,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자(嫡子)를 세워 하늘의 떳떳한 법을 따르는 것은 예로부터의 큰 명분(名分)이요, 명호(名號)를 정하여 백성의 마음이 우러러볼 데가 있게 함은 나라를 소유한 이의 공통된 규례(規例)이다. 이에 옛법을 상고하여 귀중한 전례(典禮)를 거행하노라. 아아, 너 원자(元子) 모(某)야, 자질이 온순하고 재주가 있으며, 마음이 깊고 넉넉하다. 효도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일찍부터 어버이에게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학문은 배우지 아니하여도 성취하는 공이 높을 것이다. 마땅히 동궁(東宮)자리를 차지하여 왕실(王室)의 큰 업(業)에 경사가 많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노니, 아아, 이 명령을 공경하고 명심하며 왕업(王業)의 계승이 어렵다는 것을 길이길이 생각하여, 착한 일을 부지런히 하여 혹 하루라도 게을리 함이 없게 하여, 마음 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선왕에게 누(累)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정사룡(鄭士龍)이 지어 바쳤음. 사룡의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본관은 동래인데, 벼슬이 판중추였다.
○ 참판 김세필(金世弼)이 한번은 경연에 입시하여 강론할 때에 아뢰기를,
“조광조를 항시 신임하고 총애하다가 하루아침에 죽음을 내렸으니, 지극히 참혹합니다. 사람마다 이것을 보고서 누가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영상 김전, 좌상 남곤, 우산 이유청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들으니, 지난날 경연에서 한 재상(宰相)이 ‘조광조에게 죄를 준 것이 그르다.’ 하였다 합니다.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가 이와 같이 말을 하였으니, 추고(推考)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홍숙(洪淑)과 대사간 조방언(趙邦彦) 등이 합사(合司)하여, 의금부에서 추국하기를 청하여 끝내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홍숙은 자가 순부(純夫), 본관은 남양인데, 벼슬이 당상이요,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조방언은 자가 빈지(贇之), 본관은 한양인데, 벼슬이 공조 참판이었다.
가정(嘉靖) 임진년(1532, 중종 27)에 동궁 근처에 쥐를 구워 방술을 한 일이 있었고, 또한 허수아비를 만들어 목패(木牌)를 달되 동궁에 대한 흉한 말을 썼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잡아 국문하자, 박빈(朴嬪)이 한 짓이라고 지목하므로, 박빈 및 복성군(福城君) 미(嵋)에게 죽음을 내리고, 두 옹주는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으며,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는 곤장을 맞아 죽고,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외지로 귀양보냈으며, 좌의정 심정(沈貞)은 박빈과 결탁하였다 하여 또한 사사(賜死)하였다. 이외에도 연루되어 죄를 당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정광필이 국문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가 사건이 명백하지 못한 의심이 있고, 또 왕실의 지친(至親)을 고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구원하려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이 일을 주장하여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옥사를 만들어 그 기회에 평일에 자기와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모함한 것이다. 심정은 악행을 쌓아서 죄가 넘치니 천도는 본래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비록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받은 것이나, 이 사건으로 죄를 다하게 된 사람들 중에 불복하는 자가 있었다.
이듬해 계사년에 또 대궐 안 대간청(臺諫廳)에 허수아비를 달고 목패를 걸어 흉한 말을 썼다. 장령 채무택(蔡無擇), 정언 정종호(鄭從濩) 등이 발견하고, 즉시 아뢰기를,
“홍여의 여당(餘黨)이 아직도 있어 또 전일의 계획을 시험해 보아 인하여 전일의 일을 발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삼공ㆍ양사ㆍ금부 당상을 불러 입대(入對)하게 하고, 또 노성(老成)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아니할 수 없다 하여 영부사(領府事) 정광필을 아울러 불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목패에 쓰인 자획(字畫)과 무릇 한 짓을 보면 전일의 목패와 서로 같으니, 대간(臺諫)이 아뢴 그 여당이 전일의 일을 발명하려 한 것이라는 말이 또한 과히 틀리지 않는 듯하나, 다만 전일에 홍가가 자기가 썼다고 자복하고 죽었는데, 이 필법이 전의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죽은 자가 다시 와서 썼단 말인가. 아마도 조정을 어지럽히려는 자의 소행일 것이다. 지난번 목패에 쓴 것을 국문한 사람들이 또한 모두 보았을 것이니, 각각 말해보오.”
하자, 좌우의 사람들이 혹은 글씨의 체가 상당히 같다고도 하고, 혹은 서로 같은지 알 수 없다고도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익명서(匿名書)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전일에는 동궁에다 하였기 때문에 놀라 국문하였지만, 이번에는 내 생각에 소각해 버리면 조정이 절로 진정될 것 같소.”
하였다. 광필이 나와서 아뢰기를,
“큰 옥사(獄事)를 자주 일으킬 수 없으니, 태워 버리자는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인심이 이러하고 큰 옥사가 자주 일어나니 근래에 천변(天變)이 매우 많은 것이 이 때문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장순손(張順孫), 좌상 한효원(韓效元), 우상 김근사(金謹思) 등은 모호하게 어물거리며 다만 임금께서 재단하시기만을 청하였다. 예조 판서 김안로가 말하기를,
“지금 글씨체를 보니, 전일의 글씨와 같이 익숙하지 못하여 전일의 것과 같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심언광(沈彦光)이 말하기를,
“위에서 글씨 체가 서로 같다고 의심하시는 것은 매우 안 될 일입니다. 윗사람의 뜻이 이러하시면 아래 사람들은 반드시 추측하여 전일의 사건을 헛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홍여 및 복성군과 두 옹주에게 죄를 정할 때에 모두 전하의 뜻으로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어버이와 자식의 사이는 지극한 정이 있어서 동요되기 쉬운 것이므로, 이것은 반드시 박씨 및 두 옹주의 집 사람들이 한 짓으로서, 혼란시켜 전일의 옥사를 의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일 국문할 때에 빠진 사람이 매우 많았고, 당시의 추관(推官)들은 물의(物議)가 지금도 비등합니다.”
하였다. 대사간 상진(尙震)이 말하기를,
“그 목패를 보면 배치하여 시행한 것이 전일과 꼭 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비록 천금을 준들 어찌 차마 쓰겠습니까. 두 옹주가 모두 서울 안에 있으므로 그 하인들이 근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시골로 보내어 하인들이 따라 가게 하면 화가 차츰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무택(無擇)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죄인을 잡아 국법으로 통쾌하게 처단하였는데, 지금 또 이런 짓을 하여 양사가 보는 곳에 걸어 놓았으니, 사실을 혼란시키려는 계책이 분명합니다. 위에서 그것을 전일의 목패에 쓰인 것과 같다고 의심하시나, 신이 자세히 보건대, 전후에 쓴 글씨의 서투르고 익숙함이 전연 같지 아니합니다. 비록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죽는 경우가 있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추궁한 다음 그만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안로와 무택 등이 반드시 같지 않다고 주장한 것은 전일에 이미 자기가 썼다고 자복하여 죽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집의 김희열(金希說), 사간 윤풍형(尹豐亨), 장령 유세린(柳世麟), 지평 안현(安玹)ㆍ김미(金미亹), 헌납(獻納) 임붕(林鵬), 정언 정종호(鄭從濩)ㆍ최보한(崔輔漢) 등이 모두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고 다만 현상(懸賞)하여 잡게 하며, 김인경의 처는 남편이 귀양사는 곳으로 따라 가게 하고, 홍여의 처는 문밖에 거주하게 하였다. 심언광ㆍ상진의 무리가 합사(合司)하여 두 옹주의 집 하인들을 국문할 것을 다섯 번이나 아뢰었지만 윤허하지 않으므로 물러갔다.
부제학 권예(權輗), 직제학 남건(南建), 전한(典翰) 조인규(趙仁奎), 응교 이임(李任), 부응교 허항(許沆), 교리 성윤(成倫)ㆍ하계선(河繼先), 부교리 황기(黃琦), 부수찬 홍춘경(洪春卿), 박사 홍섬(洪暹)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기를,
“정광필이 말하기를 ‘여러 번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천변(天變)이 이 때문에 일어난다.’ 하니, 지극히 이치에 어긋난 말입니다. 광필이 박씨에게 친척이라 핑계하여 결탁함이 매우 친밀하므로, 공론이 비루하게 여겼으며, 권세 부리던 간신(奸臣)이 패하게 되자, 왕래하면서 구호하고, 홍여의 옥사에 있어서도 요리조리 임금의 비위를 맞추더니, 이제와서는 다시 천재(天災)를 끌어다가 전하를 속이니,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친 사람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광필의 말이 참으로 대신이 임금에게 고하는 체통을 얻은 것인데, 정당한 사람을 싫어하는 무리들이 공공연하게 비방하여 배척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옛말의 이른바, ‘현명한 임금을 속이는 자’들일 것이다. 홍여(洪礪)는 본관이 남양(南陽)인데, 중종의 둘째 딸 혜정옹주(惠靜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인경(仁慶)은 본관이 광산인데, 중종의 첫째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에게 장가들었다. 두 옹주는 모두 경빈(敬嬪) 박씨의 소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