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 八關 / 고전문헌 자료 (1 )

2018. 12. 30. 19:25차 이야기






팔관  八關 / 고전문헌 자료 (1)


   1. 이곡  <가정집> 제10권  소어(疎語)  '팔관재에 올린 소'

   2. 이색  <목은집>  '팔관' 詩

   3.  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5권 / 거마(車馬)    '왕마(王馬)'

   4.  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6권 / 관부(官府)  '대성(臺省)'  

   5.  김종서(金宗瑞) 등  <고려사절요> 제1권 /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무인 원년(918)'조

   6.   <팔관재계 수행 관련 지엄 린포체 법문 요약>   : 현대의 글.

   7.    <팔관(八關)>  : 현대의 글.

   8.  <동문선 산문 규보(李奎報)    '교방(敎坊)에서 팔관(八關)을 하례하는 표[敎坊賀八關表] '

   9.   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 '사우(祠宇)'    

  10.  <동문선 산문>   이숭인(李崇仁)   '하 팔관표(賀八關表)'

   11.  종서(金宗瑞) 등  고려사절요 제1권 / 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계묘 26년(943)' 조

  12.  종서(金宗瑞) 등  고려사절요 제2권 /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임오 원년(982)'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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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10권 / 소어(疏語)     ㅡ 이곡(李穀),  2006~2007년 간행


팔관재(八關齋)에 올린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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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황(覺皇 부처 )이 불법을 설한 것은 삼유(三有)의 묘한 인연이라고 모두 칭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모르고 헤매는 말세의 속인으로서는 팔관의 정계(正戒)를 지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창업 수통(垂統)하신 선조들께서 이미 신령한 불법을 숭봉하여 큰 기업을 보전하였으며 오묘하게 구원을 받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나처럼 무능한 자가 후사가 되어 제대로 정치를 행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그 법도를 준행하여 기업을 유지하고 지킬 방도를 강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시월에 의식을 거행할 길일을 잡아 서도(西都)에서 성대한 법회를 개최하게 되었으니, 불성(佛聖)이 증지(證知)하실 것이요 신룡(神龍)이 환희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사방이 업신여기지 않는 가운데 상국의 위무를 받아 더욱 안정되도록 해 주시고, 육부(六府)가 크게 닦여서 동인(東人)이 다시 풍요와 번영을 누리게 해 주소서.

[주-D001] 팔관재(八關齋) : 
팔관은 8계(戒)를 지킨다는 뜻으로, 재가(在家) 불자가 하루낮 하룻밤 동안 출가하여 절에 가서 8계를 받고 승려의 생활을 학습하면서 율의(律儀)를 익히는 것을 말한다. 8계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婬),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 불이화만장식자신(不以華鬘裝飾自身) 및 불가무관청(不歌舞觀聽), 불좌와고광화려좌상(不坐臥高廣華麗床座), 불비시식(不非時食)이다.
[주-D002] 각황(覺皇)이 …… 있습니다 : 
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개(開)ㆍ시(示)ㆍ오(悟)ㆍ입(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설법했다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보인다. 삼유(三有)는 인과율의 적용을 받으면서 생사를 반복하는 세 종류의 세계라는 뜻의 불교 용어로,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 즉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킨다.
[주-D003] 육부(六府)가 크게 닦여서 : 
《서경》 우공(禹貢)에 “육부가 크게 닦이고 모든 지역이 서로 바르게 되었다.〔六府孔修 庶土交正〕”라는 말이 나온다. 육부는 사람의 생활에 필수적인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ㆍ곡(穀)을 말한다.




八關齋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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覺皇說法。皆稱三有之妙因。末俗迷眞。宜執八關之正戒。故自創垂之先祖。已能崇奉于靈詮。用保丕基。或由妙援。矧及我無良之嗣。莫克施爲。盍遵其不易之規。庶幾持守。肆取彜儀於陽月。伻陳勝會於西都。佛聖證知。神龍歡喜。伏願四方無侮。益承上國之懷綏。六府孔修。更致東人之富庶







팔관(八關) | 이색 목은집 전문

樂民(장달수) | 조회 8 |추천 0 | 2018.11.03. 17:06

팔관(八關)

             
높고 화려한 절집은 풍연을 눌러 섰는데 / 岧嶢金碧跨風煙
예악을 닦아 밝힘이 전보다 더 호화롭네 / 禮樂修明更侈前
전상의 서린 용에겐 구름이 내리려 하고 / 殿上盤龍雲欲墜
정중의 백로 떼에겐 옥이 서로 연했어라 / 庭中振鷺玉相聯
팔방서 바친 토산품은 산악보다 높고요 / 八方壤奠高於嶽
한 심지의 향화는 임금님이 내리었도다 / 一炷爐香降自天
모두들 금년엔 서기가 많다 이르거니와 / 摠道今年多瑞氣
시신의 머리엔 고운 비단이 묵직하구려 / 侍臣頭重錦華鮮

[주-D001] 팔관(八關) : 
곧 팔관회(八關會)의 준말로, 고려 때 토속신에게 제사 지내던 국가적인 의식이었다.
[주-D002] 전상(殿上)의 서린 용(龍) : 
전상에 앉은 임금을 가리킨다.
[주-D003] 정중(庭中)의 백로 떼 : 
궁전 뜰의 만조백관(滿朝百官)을 이른다. 백로 떼란 《시경》 노송(魯頌) 유필(有駜)에, “떼 지어 훨훨 나는 백로여.[振振鷺]” 한 데서 온 말로, 즉 조정에 군집(群集)한 현사(賢士)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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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 제15권 / 거마(車馬)    ㅡ 서긍(徐兢) ,  1994년 발간


왕마(王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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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타는 말은 안장이 매우 화려하여, 금으로 된 것도 있고 옥으로 된 것도 있으니, 모두 조정(朝廷 중국을 지칭)에서 내린 것이다. 평상시 탈 때에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 않고, 오직 팔관재(八關齋)와 조서를 받는 큰 예식이 있을 때에만 마갑(馬甲) 위에 다시 안장과 고삐를 더하고, 수놓은 휘장[繡帕]을 씌우며, 혁대와 번영(繁纓 여러 가닥의 끈)에 모두 난성(鸞聲 방울소리)이 어울려 또한 매우 화려하다. 다만 중국에 비하여 안장 뒤에 다시 수놓은 방석을 더하였으니, 또한 시종관(侍從官)이 융좌(狨坐 융가죽으로 만든 방석. 융은 짐승이름)를 까는 것과 같다.



王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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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之所乘馬。鞍韉甚華。或金或玉。皆朝廷所賜也。常馭不施甲。唯八關齋。幷受詔大禮。則於馬甲之上。復加鞍轡。蒙以繡帕。革帶與繁纓。皆有鸞聲相應。亦甚華煥。但比中國。於鞍後。復加繡茵。亦猶侍從官之有狨坐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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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 제16권 / 관부(官府)      ㅡ 서긍(徐兢) ,  1994년 발간


대성(臺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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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부(官府)의 설치는 대개 모두 조정(朝廷)의 아름다운 명칭을 모방하였으나 그 직(職)을 맡기고 벼슬을 제수함에 이르러서는 실지가 이름과 맞지 아니하여, 한갓 형식만 갖춘 것이고 보기에만 좋을 뿐이다.
상서성(尙書省)은 승휴문(承休門) 안에 있다. 앞에 대문이 있고 양쪽의 행랑은 10여 칸씩이며, 중앙에 당(堂) 3칸을 만들었는데 곧 관원들이 일을 보도록 한 곳으로서, 정사가 여기에서 나온다.
상서성 서쪽과 춘궁(春宮) 남쪽 앞에 문 하나가 트였고 안에 세 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중앙의 것이 중서성(中書省)이고 왼편의 것이 문하성(門下省)이고 오른편의 것이 추밀원(樞密院)이니, 곧 국상(國相)ㆍ평장사(平章事)ㆍ지원사(知院事)가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예빈성(禮賓省)은 건덕전(乾德殿) 앞쪽 옆에 있는데 사방 이웃 나라의 빈객(賓客)을 관장하는 곳이고, 팔관사(八關司)는 승평문(昇平門) 동쪽에 있는데 재제(齋祭)의 일을 맡은 곳이고, 어사대(御史臺)는 좌동덕문(左同德門) 안에 있는데 풍헌(風憲 풍교와 헌장)을 펴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거처하는 곳이고, 한림원(翰林院)은 건덕전 서쪽에 있는데 사학(詞學)을 맡은 신하들이 거처하는 곳이고, 상승국(尙乘局)은 거마(車馬)를 관리하는 곳이고, 군기감(軍器監)은 갑장(甲仗 무기와 의장)을 간수하는 곳이다.
   빈성(賓省)은 예의(禮儀)를 맡고, 합문(閤門)은 찬도(贊導)를 맡아 보고, 대영창(大盈倉)은 보화(寶貨)를 저장하는 내탕(內帑)이고, 우창(右倉)은 곡식을 축적(蓄積)하는 곳인데, 이것들은 모두 왕이 거처하는 내성(內城)에 있다.
광화문(廣化門) 밖으로 말하면 관도(官道)의 북쪽에 있는 것은 상서호부(尙書戶部)요, 또 그 동쪽의 것은 공부(工部)ㆍ고공(考功)ㆍ대악국(大樂局)- 양온국(良醞局)이라고도 하는데 문이 네 개이다. - 이 모두 북으로 열지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각각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관도의 남쪽에는 병(兵)ㆍ형(刑)ㆍ이(吏) 삼사(三司)가 있는데, 그 문은 남쪽에 열지어 북쪽을 향하였고, 또 동남쪽으로 수십 보쯤에 있는 것은 주전감(鑄錢監)이고 조금 북쪽의 것은 장작감(將作監)이다.
감문(監門)ㆍ천우(千牛)ㆍ금오(金吾) 3위는 북문 안에 있는데, 금오가 조금 동쪽에 가까이 있는 것은 호위의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대시(大市)ㆍ경시(京市) 2사(司)는 남쪽 큰 거리에 있는데 동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관시(關市)의 정사를 균형 있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관현(管絃 악기) 같은 것에 있어서도 방(坊)이 있고, 궁전(弓前)은 사(司)가 있으며, 복두(幞頭)는 소(所)가 있고 점천(占天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대(臺)가 있으니, 무릇 이들은 모두 외성(外城) 안에 있다.
또한 개성부(開成府)가 성(城)과 40리 거리에 있는데, 모든 백성들의 혼인ㆍ전답ㆍ투송(鬪訟)하는 일을 총괄한다.



    臺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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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府之設。大抵皆竊取朝廷美名。至其任職授官。則實不稱名。徒爲文具。觀美而已。尙書省。在承休門內。前有大門。兩廊十餘間。中爲堂三間。卽令官治事之所。政事之所自出也。自尙書省之西。春宮之南。前開一門。中列三位。中爲中書省。左曰門下省。右曰樞密院。卽國相,平章,知院。治事之所。禮賓省。在乾德殿前之側。所以掌四隣之賓客。八關司。在昇平門之東。所以掌齋祭之事。御史臺。在左同德門內。所以張風憲之任。翰林院。在乾德殿之西。所以處詞學之臣。尙乘局。以貯車馬。軍器監。以藏甲仗。以至賓省之典禮儀。閤門之職贊導。大盈倉。寔寶貨之帑。右倉。卽積粟之地。凡此皆在王居內城也。自廣化門外言之。官道之北。則尙書戶部。又其東。曰工部。曰考功。曰大樂局。 曰良醞局。四門並北列而南向。各有摽名。道之南。則兵,刑,吏三司。其門。南列而北向。又東南數十步。卽鑄錢監。稍北。卽將作監也。監門,千牛,金吾三衛。在北門內。而金吾稍近東。所以典兵衛之禁。大市,京市二司。在南大街。而東西相望。所以平關市之政。以至管絃有坊。弓箭有司。幞頭有所。占天有臺。凡此皆在外城之內也。又有開成府。拒城四十里。凡民庶婚,田,鬪訟之事。悉摠之。












고려사절요 제1권 /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ㅡ 김종서(金宗瑞) 등 , 1968년 간행


무인 원년(918), 후량(後梁) 말제 정명(貞明)4년ㆍ거란 태조 신책(神冊)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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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6월 병진일에 태조포정전(布政殿)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고쳤다. 과거에 세조(世祖)가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지었는데, 중 도선(道詵)이 문 밖 나무 아래에 와 쉬면서 탄식하기를, “이 땅에 마땅히 성인이 날 것이다."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신도 거꾸로 신은 채 따라 나가 맞이하여 그와 함께 송악산에 올랐다. 도선이 굽어 살피고 우러러 보더니 글 한 통을 지어 세조에게 주면서, “공이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자라거든 이것을 주십시오." 하였는데, 글은 비밀에 부쳐져 세상에서 알지 못하였다. 태조의 나이 17세 때에 도선이 다시 와서 보기를 청하고서, “족하(足下)는 백육(百六)의 운수를 만났으니 말세의 창생은 공이 널리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오." 하고, 곧이어 군사를 내고 진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지리ㆍ천시(天時)의 법과 산천에 제사지내는 데 관한 감통과 보우(保佑)의 이치를 말하여 주었다. 이때는 신라의 정치가 문란하여 뭇 도적들이 다투어 일어나던 때로 견훤(甄萱)은 반역하여 남쪽 고을을 점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일컫고, 궁예(弓裔)는 고구려의 옛땅을 점거하여 철원(鐵圓)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세조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飡)이었는데, 그 고을을 거느리고 궁예에게 귀부(歸附)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즉시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가 곧이어 궁예를 설득하여 아뢰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肅愼)ㆍ변한(卞韓) 땅의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군에 성을 쌓고 저의 맏아들을 그 성주(城主)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궁예가 그 말에 따라 태조에게 발어참성(勃禦槧城)을 쌓게 하고, 이어 성주로 삼으니 이때 태조의 나이 20세였다. 그 후에 광주(廣州)ㆍ충주(忠州)ㆍ당성(唐城 경기 남양(南陽))ㆍ청주(靑州)ㆍ괴양(槐壤 충북 괴산(槐山)) 등의 고을을 쳐서 이를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飡)을 임명받았다. 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금성군(錦城郡)을 쳐서 이를 함락시키고 10여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이어서 금성을 나주(羅州)라 고쳤다. 양주(良州 경남 양산(梁山))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궁예가 태조더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돌아와서 변방을 안정시키고 국경 지역을 개척할 계책을 말하니, 좌우의 신하가 모두 눈여겨 보았으며 궁예도 역시 기이하게 여겨 벼슬을 올려 알찬(閼飡)으로 삼았다.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을 쳐서 견훤과 여러 번 싸워 이겼다. 태조는 궁예가 교만하고 포학함을 보고 다시 외방에 장수로 나갈 뜻을 가지게 되었는데, 마침 궁예가 나주의 일을 근심하여 드디어 태조더러 가서 진압하게 하고 벼슬을 올려 한찬 해군대장군(韓飡海軍大將軍)으로 삼았다. 태조가 성심으로 군사를 위무하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푸니, 적이 두려워하여 굴복하였다. 궁예가 알찬인 종희(宗希)와 김언(金言) 등을 부장으로 삼아 주었다. 전함(戰艦)을 수리하여 광주(光州) 진도군(珍島郡) 고이도성(皐夷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덕진포(德眞浦)로 나아가 머무르자 견훤이 전함을 배열하였는데 목포(木浦)에서 덕진포까지 전함이 서로 앞뒤로 잇닿아, 바다와 육지를 누비며 군사의 세력이 심히 강성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걱정하였으나 태조는, “군사가 이기는 것은 화합(和合)하는 데 달린 것이지, 수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진군하여 급히 치니, 적의 전선이 조금 물러났다. 그러자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지르니,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반수 이상이나 되었고 5백여 급(級)을 베었는데,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왕의 군진이 나주 관내의 여러 고을과 거리가 먼데 적병이 길을 차단하였으므로 서로 응원할 수가 없어 자못 근심과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김언 등이 스스로 공은 많은데 상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못 마음이 흐트러지자 태조가 말하기를, “부디 태만하지 말라. 오직 힘을 다하고 딴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이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권세를 잡아 조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 몸도 보전하지 못하니,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여 힘을 다해 나라를 위함이 나을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드디어 반남현(潘南縣 전남 나주군(羅州郡) 반남면(潘南面)) 포구에 이르러 적의 국경에 간첩(間諜)을 놓았다. 이때에 압해현(壓海縣 전남 무안군(務安郡) 압해면(押海面))에 있던 적의 장수 능창(能昌)은 해도(海島) 출신으로 수전을 잘하여 수달이라고 불렸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갈초도(葛草島)의 작은 도적들과 서로 결탁하여 태조가 올 때를 엿보아 해치고자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능창은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섬의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다. 적의 무리가 비록 적지마는 만약 힘과 세력을 합쳐서 우리의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헤엄을 잘 치는 자 10여 명을 시켜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가볍고 작은 배를 타고 밤중에 갈초도 나룻가에 가서, 왕래하면서 일을 꾸미는 적을 사로잡아서 그 꾀를 저지시켜야 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이 말을 따랐다. 과연 작은 배 한 척을 잡아보니, 바로 능창이므로 잡아서 궁예에게 보내어 목베었다. 궁예태조파진찬(波珍飡) 시중(侍中)으로 임명하고 불러들였다. 이에 태조는 지위가 백관 중에 가장 높았으나 감정을 누르고 조심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참소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모두 해명하여 구해 주니, 조신(朝臣)과 장사들이 모두 흡족하여 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그러자 태조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다시 외직(外職)에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궁예 역시 말하기를, “수군의 장수가 인망이 가벼워서는 적을 위압할 수 없다." 하고, 태조의 시중 벼슬을 해임하고 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羅州)에 주둔하게 하니 후백제와 해상의 도적들이 태조가 다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 복종하여 감히 난동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돌아와서 배를 이용하는 이점과 변고에 대응하는 알맞은 방법에 대해 고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서 이 사람과 겨룰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였다. 이때 궁예는 터무니없는 반역죄를 꾸며서 날마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어느 날 태조를 급히 불러 성난 눈으로 뚫어지게 보며 말하기를, “경이 어젯밤에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궁예가 일찍이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컬었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남의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내가 지금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관찰할 것이다." 하고,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는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때,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이를 줍고는 곧이어 빠른 걸음으로 태조의 곁을 지나면서 귓속말로, “자복하지 않으면 위태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곧 깨닫고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궁예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정직하다고 하겠다." 하면서, 곧 금과 은으로 장식한 말 안장을 태조에게 내려 주었다. 태조가 일찍이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해 3월에 객상(客商) 왕창근(王昌瑾)이 당 나라에서 와 저잣거리의 가게에 있었는데, 문득 저자 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니, 용모가 웅장하고 수염과 머리털은 희며 옛 관을 쓰고 거사(居士)의 옷을 입었으며 왼손에는 바리때를 들고 오른손에는 헌 거울을 쥐고서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느냐?" 하므로, 창근이 쌀을 주고 거울을 사서 시장 담벼락에 걸어 놓았다. 거울에 햇빛이 비치자 은은히 가느다란 글자가 드러나 읽을 수 있었는데 그 대략에, “삼수중(三水中) 사유하(四維下)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辰)ㆍ마(馬)에 내려보내어 먼저 계(鷄)를 잡고 뒤에 압(鴨)을 칠 것이다. 사년(巳年) 안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금(黑金) 동쪽에 형상을 나타내어, 성함을 보이기도 하고 쇠함을 보이기도 하는데 하나가 성하고 하나가 쇠하면 나쁜 진재(塵滓)를 없앨 것이다." 하였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를 보고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여기고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가 창근에게 명하여 물색(物色)해서 그 사람을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다만 동주(東州) 발삽사(勃颯寺)진성(鎭星)의 낡은 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모양과 같았으며 왼손과 오른손에 역시 바리때와 거울을 쥐고 있었다. 창근이 기뻐서 자세히 그 모양에 대해 아뢰었더니, 궁예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文人) 송함홍(宋含弘)ㆍ백탁(白卓)ㆍ허원(許原) 등을 시켜 이를 해석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말하기를, “삼수중 사유하 상제가 아들을 진ㆍ마에 내리셨다는 것은 진한(辰韓)ㆍ마한(馬韓)이요, 사년 중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 중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금 동쪽에 형상을 나타낸다 한 것은,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 용(龍) 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을 이른 것이다. 왕시중(王侍中)이 왕후(王侯)의 상(相)이 있으니, 이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鐵圓 철원(鐵原))을 이름이다. 지금의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성하였는데 아마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것인가 보다. 먼저 계를 잡고 뒤에 압을 친다는 것은 왕시중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 뒤에 먼저 계림(鷄林 신라(新羅))을 얻고 뒤에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였다. 세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왕이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며, 우리들 역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이윽고 거짓으로 꾸며서 고하였다.

○ 6월 을묘일에 기병장(騎兵將) 홍유(洪儒)ㆍ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등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으로 가서 왕으로 추대할 뜻을 말하려 하였는데, 부인(夫人) 유씨(柳氏)에게는 이 일을 알리지 않으려고 하여 유씨에게 말하기를, “동산에 아마 새 오이가 열렸을 테니 그것을 따 오시오." 하였다. 그러나 유씨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북쪽 문으로 나가서 몰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아뢰기를, “지금 왕의 정치가 문란하고 형벌이 지나쳐서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베어 죽이며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져 왕을 원수처럼 미워하니 걸(桀)ㆍ주(紂)의 악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이니, 공은 은(殷) 나라와 주(周) 나라의 일을 행하소서." 하였다. 태조가 정색을 하고 거절하여 이르기를, “나는 충의를 자부하는 터이니, 왕이 비록 포학하더라도 어찌 감히 딴마음을 가질 수 있겠소. 신하로서 임금을 치는 것을 혁명이라 하지마는, 나는 실상 덕이 없는 사람이니 어찌 감히 탕왕(湯王)ㆍ무왕(武王)이 한 일을 본받을 수 있겠소. 훗날 이를 구실로 삼으려 할까 두렵소.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루 임금이 되면 종신토록 임금이 된다.' 하였으며, 더구나 연릉계자(延陵季子)는, '나라를 차지함은 나의 일이 아니다.' 하고는, 떠나가 밭을 갈았으니, 내가 어찌 계자의 절개보다 낫겠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아뢰기를, “때는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우니,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나쁜 정치의 피해를 입은 나라 안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데다가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니, 지금 공보다 덕망이 높은 사람이 없으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공에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공이 만약 이 말에 따르지 않으시면 우리들은 얼마 안 가 죽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왕창근의 거울에 쓰인 글이 그러한데, 어찌 하늘의 계시를 어겨서 독부(獨夫)의 손에 죽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유씨가 나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학한 임금을 대체함은 예로부터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들으니 저도 오히려 분기가 일어나는데, 하물며 대장부이겠습니까." 하고, 손수 갑옷을 가져다 태조에게 입혔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부축하고 나와, 동이 트자 곡식더미 위에 태조를 앉히고서 군신(君臣)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소리치게 하기를, 왕공(王公)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 하니, 바삐 달려와 이르는 백성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자 역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微服)으로 북문을 빠져 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 후에 부양(斧壤 평강(平康))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 정사일에 조(詔)하기를,태봉주(泰封主)는 사군(四郡)이 흙무너지듯이 붕괴할 때에 도적들을 제거하고 영역을 점차로 개척하였으나, 국내를 통일하기도 전에 다만 혹독하고 포학하게 백성을 억압하고, 간사함을 지극한 도리로 삼았으며, 위협과 모욕을 요긴한 술책으로 삼아 부역이 번거롭고 납세가 과중하여 인구는 줄고 국토는 황폐해졌는데, 궁실이 제도를 지나치고 노역(勞役)이 끊이지 않자, 원망과 비난이 마침내 일어났다. 이에 참람히 존호(尊號)를 일컬으며 아내를 죽이고 아들을 죽였으니,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고 신과 사람이 함께 원망하여 왕업을 실추시켰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짐이 추대에 응하여 외람되이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망한 왕의 전철(前轍)을 경계로 삼고 벌가(伐柯)의 법칙을 취하여 백성들과 함께 새로 출발하여 풍속을 고치고 임금과 신하는 고기가 물을 얻은 듯한 즐거움을 같이하여 나라 안이 태평의 경사로 화합하게 할 것이니, 조정 안팎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짐의 뜻을 잘 알지어다." 하니, 뭇 신하들이 배사(拜謝)하며 아뢰기를, “신들은 태봉의 세상을 만나, 어질고 착한 신하가 해를 입고 죄없는 백성들은 학대를 받아 늙은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울부짖으며 원한을 품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제 다행히 성스럽고 밝으신 주상을 만나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감히 힘을 다하여 보답하기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왕이 청주(靑州 충북 청주(淸州)) 사람 한찬(韓飡) 총일(聰逸)에게 이르기를,태봉주가 청주 고을이 토지가 비옥하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으므로,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 그리하여 윤전(尹全)ㆍ애견(愛堅) 등 80여 명의 군인이 모두 죄가 없는데도 칼을 씌워 끌려 가고 있는 도중이니, 경은 빨리 가서 그들을 전리(田里)에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기졸(騎卒) 태평(泰評)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았다. 평(評)은 서책을 많이 보아 행정에 밝았으므로 일찍이 염주(鹽州)의 적장인 유긍순(柳矜順)의 기실(記室)이 되었었는데, 궁예가 긍순을 쳐부수자 평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그가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은 데에 화가 나 군졸로 편입시켰으므로 드디어 태조에게 속했는데, 건국할 때에 참가하여 공이 있었던 것이다.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죽음을 당하였다. 일찍이 선길은 그 아우 향식(香寔)과 함께 왕을 추대한 공이 있으므로, 왕이 심복으로 위임하여 늘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을 숙위(宿衛)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재주와 능력이 남보다 훨씬 나으므로 사졸들이 복종하고 있으며, 또 큰 공이 있는데도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하니, 선길이 마음속으로 그 말을 옳게 여겨, 드디어 병사들과 몰래 결탁하고 틈을 엿보아 변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복지겸(卜智謙)이 이를 알고 은밀히 왕에게 고하였으나, 왕은 그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면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날 왕이 전상(殿上)에 앉아서 학사(學士) 두서너 사람과 국정을 의논하고 있는데, 선길이 그 무리 50여 명과 함께 병기를 가지고 내정(內庭)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와서 바로 왕을 범하려 하였다. 그러자 왕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임금이 되었지마는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었겠는가.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였다. 선길이 왕의 말과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이 침착함을 보고 복병(伏兵)이 있는가 의심하여 무리들과 함께 달아났는데, 숙위하던 군사가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향식은 뒤에 오다가 일이 실패한 것을 알고 역시 도망했으나, 추격하던 군사가 그를 죽였다.

○ 조(詔)하기를, “관직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먼저 할 일이요, 풍속을 변화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는 어진 사람을 쓰는 일이 시급한 것이니, 진실로 관직에 소홀함이 없으면 어찌 정사가 황폐해지는 일이 있겠는가. 따라서 짐이 자나깨나 걱정하는 것은 오직 사람을 밝게 알아보지 못하여 관직을 살핌에 실수가 많을까 하는 문제일 뿐이다. 조정 안팎의 여러 관료들이 각기 그 직무에 충실하면, 당시에는 다스림을 이룩하고 훗날에는 훌륭하였다고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제후(諸侯)들을 등용하고 여러 공경(公卿)을 두루 시험함에 인재를 정하게 뽑도록 힘써서 모두 여러 사람이 화합하게 하여야 할 것이니, 조정에서 외방(外方)까지 모두 짐의 뜻을 알지어다." 하였다. 드디어 김행도(金行濤)를 광평시중(廣評侍中)으로, 금강(黔剛)을 내봉령(內奉令)으로, 임명필(林明弼)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희(林曦)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진원(陳原)을 창부령(倉部令)으로, 염장(閻萇)을 의형대령(義刑臺令)으로, 귀평(歸評)을 도항사령(都航司令)으로, 손형(孫逈)을 물장성령(物藏省令)으로, 진경(秦勁)을 내천부령(內泉部令)으로, 진정(秦靖)을 진각성령(珍閣省令)으로 삼았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일을 처리함이 공평하고 성실하여 창업한 시초부터 왕을 추대하는 데 공로가 있던 사람들이다. 임적여(林積璵)를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능준(能駿)과 권식(權寔)을 함께 내봉경(內奉卿)으로, 김인(金堙)과 영준(英俊)을 함께 병부경(兵部卿)으로, 최문(崔汶)과 견술(堅術)을 함께 창부경(倉部卿)으로, 박인원(朴仁遠)과 김언규(金言規)를 함께 백서성경(白書省卿)으로, 임상란(林湘煖)을 도항사경(都航司卿)으로, 요인휘(姚仁暉)와 향남(香南)을 함께 물장경(物藏卿)으로, 능혜(能惠)와 희필(曦弼)을 함께 내군경(內軍卿)으로 삼았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일찍부터 사무에 통달하고 공직에 종사함에 태만함이 없으며, 처결하는 데 민첩하여 진실로 여러 사람의 뜻에 흡족한 사람들이었다. 강윤형(康允珩)을 내봉감(內奉監)으로, 신일(申一)과 임식(林寔)을 함께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국현(國鉉)을 원외랑(員外郞)으로, 예언(倪言)을 내봉이결(內奉理決)로, 곡긍회(曲矜會)를 평찰(評察)로, 유길권(劉吉權)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았으며, 그 밖의 사성(司省)에는 각기 낭사(郞史)를 두었으니, 대개 건국한 초기에 어진 인재를 잘 골라 뽑아서 모든 정무를 성취하려고 함이었다.

○ 박질영(朴質榮)을 시중으로 삼았다.
소판(蘇判) 종간(宗偘)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犾鈇)가 죽음을 당하였다. 간(偘)과 부(鈇)는 모두 간사함과 아첨으로 궁예의 사랑을 얻어 어질고 착한 이들을 참소하여 해쳤으므로, 왕이 즉위하자 맨 먼저 이들을 목베었다.
은사(隱士) 박유(朴儒)가 와서 왕을 뵙자, 왕이 예를 갖추어 그를 접대하고 이르기를, “다스림을 이룩하는 도리는 오직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 달려 있는데, 이제 경이 왔으니 부암(傅巖)위빈(渭濱)의 선비를 얻은 것과 같다." 하고, 관대(冠帶)를 내려 주고, 그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맡게 하였으며, 왕씨(王氏)의 성을 내려 주었다. 유(儒)는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일찍이 궁예에게 벼슬하여 원외(員外)가 되었다가 벼슬이 옮겨져서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었는데 궁예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드디어 집에서 나와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왕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온 것이다.
○ 조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에는 절약하고 검소하도록 힘써야 하니, 백성이 넉넉하고 창고가 차 있으면 비록 물난리나 가뭄ㆍ굶주림 등의 재앙을 당하더라도 근심이 없을 것이다. 내장(內莊) 및 동궁(東宮)의 식읍(食邑)에 쌓여 있는 곡식이 썩어 손실되기까지 한 것이 많으니, 내봉낭중(內奉郞中) 능범(能梵)을 심곡사(審穀使)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비로소 관제(官制)를 정하고 조하기를, “짐이 듣건대, 알맞은 때를 타서 제도를 고칠 때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데 상세히 하여야 하며, 풍속을 인도하고 백성을 가르칠 때는 호령을 반드시 신중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봉주가 신라의 품계와 관직ㆍ고을의 이름이 모두 비루하고 저속하다고 하여, 새 제도로 고쳐서 이를 시행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백성들이 익혀 알지 못하여서 미혹하고 어지럽게 되었으니, 이제 모두 신라의 제도를 따르되 그 명의(名義)가 알기 쉬운 것은 새 제도를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일길찬(一吉飡) 능윤(能允)이 상서로운 지초(芝草) 한 포기를 바쳤다. 자기 집의 동산에서 얻었는데 아홉 줄기에 세 개의 이삭이 패었다. 왕이 내창(內倉)의 곡식을 내려 주었다.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을 저자에 내어 죽였다. 흔암은 무인(武人)으로 이익을 취하는 데 조급하였고 궁예를 섬겨 은밀한 일을 탐지해 바치는 것으로 신임을 받았었다. 궁예의 말년에 이르러 웅주(熊州)를 습격해 빼앗았으므로 그대로 그 곳을 지키게 하였었는데 왕이 즉위한 소식을 듣고 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서,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떠나오니 사졸들이 많이 도망해버렸으므로 웅주가 다시 후백제의 소유가 되었다.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閻萇)이 흔암과 서로 이웃에 있었으므로 그 음모를 알고 왕에게 자세히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흔암이 지키던 땅을 버리고 제 마음대로 와서 변경의 땅을 잃었으니, 그 죄는 실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군을 섬겨 그전부터 정분이 있었으니 차마 죽일 수는 없는 데다가 그 반역한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저도 반드시 변명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염장이 은밀히 사람을 시켜 흔함을 살펴보도록 청하였으므로, 왕이 나인(內人)을 염장의 집으로 보내어 장막 안에서 흔암의 집을 엿보게 하였는데, 흔암의 아내 환씨(桓氏)가 뒷간에 갔다가 그 곳에 사람이 없는 줄로 알고 오줌을 누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남편의 일이 만약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당할 텐데." 하고는 말을 마치자 들어가 버렸다. 나인이 사실대로 아뢰자, 드디어 흔암을 옥에 내려 가두니 모두 자백하였다. 백관(百官)에게 그 죄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마땅히 목베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친히 흔암을 꾸짖어 이르기를, “네가 평소부터 흉한 마음을 먹고 있다가 스스로 죽을 죄에 빠졌구나. 법이란 것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니, 사사로운 정 때문에 법을 어지럽힐 수는 없다." 하니, 흔암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목베게 하고 가산을 적몰(籍沒)하였으나 그 도당들에게는 죄를 캐묻지 않았다.
○ 가을 7월에 조하기를, 태봉주가 백성을 괴롭혀 제 욕심을 채워서 오직 거둬들이기만 하고 예전 제도를 따르지 않아 토지 1경(頃)에 조세(租稅)를 6석이나 받으며, 역(驛)에 소속된 호(戶)에 실[絲]을 3속(束)이나 부과하여 드디어 백성이 농사를 걷어치우고 길쌈을 그만두고서 떠돌아다니고 도망하게끔 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조세의 부과는 마땅히 천하에 공통된 법을 써서 상례(常例)로 삼으라." 하였다.
○ 광평시랑(廣評侍郞) 순필(荀弼)이 병으로 면직되고 병부경(兵部卿) 열평(列評)이 이를 대신하였다.
○ 청주(靑州)의 영군장군(領軍將軍) 견금(堅金)과 부장(副將) 연익(連翌)ㆍ흥현(興鉉)이 와서 뵙자, 각기 말 한 필씩을 내려 주고 능백[綾帛]을 차등 있게 주었다. 이전에 왕이, 청주 사람은 속임수를 쓰는 이가 많으니 일찍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 하여, 그 고을 사람인 능달(能達)ㆍ문식(文植)ㆍ명길(明吉) 등을 보내어 가서 탐지하게 하였다. 능달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문식과 명길은 그 고을 사람인 김근겸(金勤謙)과 관준(寬駿)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능달은 비록 다른 마음이 없다고 아뢰었지마는, 새 곡식이 익으면 변란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였었다. 이때에 와서 견금 등이 말하기를, “본 고을 사람이 서울에 있는 근겸(勤謙)ㆍ관준ㆍ김언규(金言規) 등과 마음이 다르니, 이 두서너 사람만 제거하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르기를, “내 마음은 죽이는 것을 그치는 데 있으니 죄가 있는 사람도 오히려 나는 이를 용서하고 싶다. 하물며, 저들 두서너 사람은 모두 힘을 써서 의거를 도운 공이 있으니, 한 고을을 얻자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내 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견금 등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물러나갔다. 근겸과 언규 등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일전에 능달이 다시 '청주 사람이 다른 마음이 없다.'고 아뢰었으나, 신들은 진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견금 등이 말하는 것을 보니, 그들이 다른 마음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니 그들을 머물러 두어 그 동태를 보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얼마 후에 견금 등에게 이르기를, “지금 네가 말한 것을 비록 따르진 않지마는, 너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기니 일찍 돌아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라." 하였다. 견금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외람되게 이해(利害)를 진술한 것이 도리어 무고와 참소 같았는데도 죄를 주지 않으시니 이보다 큰 은혜가 없습니다. 고향에 돌아간 뒤에는 성심으로 나라를 돕기로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고을의 사람도 사람마다 각기 제 마음이 있으니, 만약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제어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그러하니 관군을 보내어 성원하여 주소서."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ㆍ유금필(庾黔弼) 등을 보내어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鎭州 충북 진천(鎭川))에 주둔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이 후에 도안군(道安郡 충북 괴산군(槐山郡) 도안면(道安面))에서 아뢰기를, “청주(靑州)에서 은밀히 후백제와 서로 화호(和好)를 통하며 반역하려 합니다." 하므로, 왕이 마군장군 능식(能植)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반역하지 못하였다.
○ 직예(職預)를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삼았다.
○ 8월에 왕이 뭇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짐은 여러 도의 도적들이 짐이 처음 즉위함을 듣고 혹시 틈을 타서 변방의 근심이 될까 염려하여 사자를 보내어 폐백을 후하게 하고 언사(言辭)를 낮추어 화호의 뜻을 보였더니, 과연 귀부하는 자가 많았으나 후백제 견훤만은 교빙하지 않는다." 하였다.
삭방(朔方) 골암성(鶻巖城)의 장수 윤선(尹瑄)이 항복하였다. 선(瑄)은 침착하고 용맹이 있으며 병법을 잘 알았다. 궁예의 말년에 화를 피하여 북쪽 변방으로 달아나 무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골암성에 있으면서 흑수(黑水) 오랑캐를 불러들여 변방 고을들을 침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이 사자를 보내어 초유(招諭)하는 말을 듣고 드디어 항복하였으므로 북쪽 변방이 편안해졌다.
○ 조하기를, 태봉주가 참서(讖書)를 믿어 송악(松嶽)을 버리고 부양(斧壤)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궁실을 지으니, 백성이 토목공사에 피곤하고 삼시(三時 봄ㆍ여름ㆍ가을)에 농사 시기를 놓쳤으며, 더구나 기근이 거듭 이르고 뒤이어 전염병이 일어나서 부부가 헤어지고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끊이지 않으며, 세포(細布) 1필 값이 쌀 5승(升)과 맞먹게 되었다. 평민들이 몸을 팔고 자식을 팔아 남의 종이 되게까지 하였으니, 짐이 매우 민망히 여긴다. 그 지방의 해당 관원을 시켜 실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에 1천여 명을 찾아내어 내고(內庫)의 포백(布帛)으로 몸값을 갚아 주고 돌려 보냈다.
○ 조하기를,주(周) 나라 무왕(武王)은 은(殷) 나라 주(紂)를 내쫓고 곡식과 재물을 흩어 백성을 구제했으며, 한(漢) 나라 고조(高祖)는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산택에 은신한 백성을 각기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였다. 짐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왕업을 창건한 것을 깊이 부끄럽게 여긴다. 비록 하늘이 도와주는 위엄에 힘입었으나 역시 백성이 추대하는 힘에 의뢰하였으니, 백성들이 편안히 살면서 집집마다 모두 착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한다. 그러나 무너진 국운을 잇고 있는 마당에, 만일 조세를 면제해 주고 농사와 길쌈을 권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는 자는 전리로 돌아가게 하며, 곧 크게 사면령을 내려 함께 휴식하게 하라." 하였다.
○ 조하기를, “개국(開國)을 도와 기이한 계략을 운용(運用)하고 세상을 뒤덮는 높은 공을 세운 신하에게 모토(茅土)를 나누어 주고 높은 관작으로 포상하는 것은 여러 대에 걸친 떳떳한 법이요, 영원토록 전해오는 큰 규범이다. 짐은 미천(微賤)한 출신으로 재주와 식견이 용렬하나, 진실로 뭇 사람의 신망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으니, 포학한 임금을 폐하던 때에 나에게 충신의 절개를 다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포상을 시행하여 훈공을 권장해야 할 것이다. 홍유(洪儒)ㆍ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을 제1등으로, 견권(堅權)ㆍ능식(能寔)ㆍ권신(權愼)ㆍ염상(廉湘)ㆍ김낙(金樂)ㆍ연주(連珠)ㆍ마난(麻煖)을 제2등으로 삼아 각기 금은 그릇과 비단 요이불과 능라ㆍ포백을 차등 있게 주고, 제3등인 2천여 명에게도 능라ㆍ포백과 곡식을 차등 있게 주라. 짐이 공들과 함께 생민을 구제하고자 하여 마침내 신하의 절의를 지키지 못하고 이것을 공으로 삼게 되었으니 어찌 부끄러운 덕이 없겠는가. 그러나 공이 있는데 포상하지 않으면 장차 공을 권장할 수 없게 되므로 오늘 포상을 하니, 공들은 짐의 뜻을 밝게 알지어다." 하였다.
견훤이 일길찬(一吉飡) 민합(閔郃)을 보내어 왕의 즉위를 축하하였으므로, 왕이 대중전(大中殿)에 나아가서 축하를 받고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여 보냈다.
○ 병부경(兵部卿) 훤식(萱寔)을 내봉경(內奉卿)으로 삼았다.
○ 웅주(熊州 충남 공주(公州))ㆍ운주(運州 충남 홍성(洪城)) 등 10여 주ㆍ현이 배반하여 후백제에 붙었으므로, 전 시중(侍中) 김행도(金行濤)를 동남도 초토사 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知牙州諸軍事)로 삼아 대비하도록 명하였다.
○ 유문율(柳問律)을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삼았다.
○ 9월에 마군장군(馬軍將軍) 복지겸이 아뢰기를,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이 그 고을 청주(靑州) 사람 배총규(裵悤規)와 계천(季川 전남 장흥(長興)) 사람 강길(康吉)ㆍ아차귀(阿次貴)와 매곡(昧谷 충북 회인(懷仁)) 사람 경종(景琮)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잡아서 신문하니 모두 자백하므로 명하여 그들을 목베게 하였으나 총규(悤規)는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청주(靑州) 사람 현율(玄律)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으니 마군장군(馬軍將軍) 현경(玄慶)ㆍ숭겸(崇謙) 등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임춘길이 순군리가 되어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곧 병권을 맡고 청주를 후원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현율을 순군낭중으로 삼으니 신들은 의아하게 여깁니다." 하니, 왕이 "옳다." 하고 곧 현율을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전 시중 구진(具鎭) 나주도 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으로 삼았는데, 구진은 태봉(泰封) 때 오랫동안 힘들었다고 하면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왕이 불쾌하게 여겨 유권열(劉權說)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나는 험난한 일을 두루 겪었지만 한번도 힘들었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은 진실로 왕의 위엄을 두려워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구진이 굳이 사피하고 가지 않으니 옳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권열이 대답하기를, “상을 주어 선을 권장하고, 벌을 내려 악을 징계하는 것이니, 마땅히 엄한 형벌을 내려 여러 신하들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구진이 두려워하여 사죄하고 드디어 떠나갔다.
상주(尙州)의 장수 아자개(阿字盖)가 사자를 보내와 항복하자, 왕이 명하여 의식(儀式)을 갖추어 맞이하게 하였다. 구정(毬庭)에서 의식을 연습할 적에 문무관(文武官)이 모두 반열(班列)에 나아갔는데, 광평낭중(廣評郞中) 유문율(柳問律)이 직성관(直省官) 주선길(朱瑄劼)과 위차를 다투었다. 왕이 듣고 이르기를, “사양은 예의 으뜸이요, 공경은 곧 덕의 근본이다. 지금 예를 갖추어 손님을 맞이하여 그 완성을 보려 하는데, 문율과 선길이 위차를 다투니 어찌 공경하고 신중히 하는 것이겠는가. 마땅히 둘 다 변방으로 귀양보내어서 그 죄를 드러내라." 하였다.
○ 왕이 뭇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 도읍인 평양이 황폐한 지 이미 오래되어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번인(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침략하니 마땅히 백성을 평양에 옮겨 살게 하여서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드디어 황주(黃州 황해 황주)ㆍ봉주(鳳州 황해 봉산(鳳山))ㆍ해주(海州)ㆍ백주(白州 황해 배천(白川))ㆍ염주(鹽州 황해 연안(延安)) 여러 고을의 인호(人戶)를 나누어 평양에 살게 하여 대도호(大都護)로 만들고, 당제(堂弟) 식렴(式廉)과 광평시랑 열평(列評)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참좌(參佐) 4, 5명을 두게 하였다.
진각성경(珍閣省卿) 유척량(柳陟良)을 광평시랑으로 삼았다. 혁명할 즈음에 갑자기 일어난 일로 여러 관료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척량만은 그 직책을 조심스럽게 지켜서, 맡아보던 창고에서는 잃은 것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광평시랑으로 임명하였다.
○ 겨울 10월에 능률(能律)을 광평시랑으로, 직예(職預)를 내시서기(內侍書記)로 삼았다.
○ 청주(靑州)의 장수 파진찬(波珍飡) 진선(陳瑄)이 그의 아우 선장(宣長)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 11월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었다. 유사가 아뢰기를, “전대의 임금이 해마다 중동(仲冬)에 팔관재(八關齋)를 크게 베풀어서 복을 빌었으니 그 제도를 따르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이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을 지키게 되었으니 어찌 불교에 의지하여 국가를 편안하게 하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구정(毬庭)의 한 곳에 윤등(輪燈)을 설치하고 향등(香燈)을 곁에 벌여 놓고 밤이 새도록 땅에 가득히 불빛을 비추어 놓았다. 또 가설 무대를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각각 높이가 5장 남짓하고 모양은 연대(蓮臺)와 같아서 바라보면 아른아른 하였다. 갖가지 유희(遊戲)와 노래ㆍ춤을 그 앞에서 벌였는데 사선악부(四仙樂部)의 용(龍)ㆍ봉(鳳)ㆍ상(象)ㆍ마(馬)ㆍ차(車)ㆍ선(船)은 모두 신라의 고사였다. 백관이 도포를 입고 홀(笏)을 들고 예를 행하였으며, 구경하는 사람이 서울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기었다.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나가서 이를 관람하고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

[주-D001] 백육(百六) : 
《음양서(陰陽書)》에, “1백 6년 만에 세상에 액운(厄運)이 온다." 하였다.
[주-D002] 은(殷)……일 : 
은(殷) 나라 탕(湯)이 신하로서 임금인 걸(桀)을 내쳤고,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임금인 주(紂)를 쳐서 멸하였다.
[주-D003] 훗날……할까 : 
은 나라 탕이 임금인 걸을 내친 뒤에 말하기를, “후세에서 나를 구실로 삼을까 두려워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후세에 자기를 핑계하여 신하로서 반역하는 자가 생길까 염려한 말이다.
[주-D004] 연릉계자(延陵季子)는……아니다 : 
춘추시대 오왕(吳王)의 동생인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왕위를 사양한 말이다.
[주-D005] 독부(獨夫) :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민심(民心)을 잃어 고립된 것을 독부(獨夫)라 한다.
[주-D006] 조(詔) : 
진 시황(秦始皇)이 정하기를, 천자(天子)의 영(令)은 조(詔), 명(命)은 제(制)라 하였는데, 고려는 칭호에 있어서도 자주성이 있었으므로 짐(朕)과, 조(詔)ㆍ제(制)등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주-D007] 벌가(伐柯)의 법칙 :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벤다는 뜻으로 그 자르는 나무의 길이는 손에 쥔 도끼자루를 표준으로 하므로 표준이 눈앞에 있음을 말한다.《시경(詩經)》
[주-D008] 부암(傅巖) : 
은 나라의 어진 정승인 부열(傅說)이 부암(傅巖)에서 일하다가 등용되었다.
[주-D009] 위빈(渭濱) : 
강태공(姜太公)이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하는 것을 주 문왕(周文王)이 맞아 왔다.
[주-D010] 모토(茅土) : 
천자가 제후를 봉해 줄 때에 띠(茅)에다 흙을 싸서 나누어 주었다.
[주-D011] 부끄러운 덕 : 
은 나라 탕이 신하로서 임금을 쳐서 내쳤으므로, “부끄러운 덕이 있다." 하였다.


   [戊寅元年 後梁 末帝 貞明四年,契丹 太祖 神冊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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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六月丙辰,太祖卽位于布政殿,國號高麗,改元天授,初世祖築室松嶽之南,僧道詵,來憩門外樹下,嘆曰,此地當出聖人,世祖聞之,倒屣出迎,相與登松嶽,道詵俯察仰觀,就爲書一封,授世祖曰,公明年,必得貴子,旣長,可以與之,書秘,世莫知也,太祖年十七,道詵,復至,請見曰,足下値百六之會,三季蒼生,待公弘濟,因告以出師置陣,地利天時之法,望秩山川,感通保佑之理,時新羅政衰,群賊競起,甄萱,叛據南州,稱後百濟,弓裔據有高句麗之地,都鐵圓,國號泰封,世祖,爲松嶽郡沙粲,以郡歸于裔,裔喜,卽以爲金城太守,世祖因說裔曰,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莫如先城松嶽,以吾長子,爲其主,裔從之,使太祖,築勃禦槧城,仍爲城主,時太祖年二十,後伐廣州忠州唐城靑州槐壤等郡縣,平之,以功授阿粲,又率舟師,攻錦城郡拔之,擊取十餘郡縣,仍改錦城,爲羅州,良州告急,裔令太祖往救之,及還,陳安邊拓境之策,左右皆屬目,裔亦奇之,進階閼粲,攻尙州沙火鎭,與甄萱,累戰克之,太祖,見裔驕虐,復有志於閫外,適裔以羅州爲憂,遂令太祖往鎭之,進階爲韓粲,海軍大將軍,推誠撫士,威惠竝行,敵境讋服,裔令閼粲宗希,金言等爲副,修戰艦,攻拔光州珍島郡皐夷島城,進次德眞浦,甄萱列戰艦,自木浦至德眞,首尾相銜,水陸縱橫,兵勢甚盛,諸將患之,太祖曰,師克在和,不在衆,乃進軍急擊,敵船稍却,乘風縱火,燒溺者太半,斬獲五百餘級,萱以小舸遁歸,先是,羅州管內諸郡,與我阻隔,賊兵遮絶,莫相應援,頗懷虞疑,及是,衆心悉定,金言等,自以功多無賞,頗解體,太祖曰,愼勿怠也,唯戮力無貳心,庶可獲福,今主上,多殺不辜,讒諛得志,在內者,人不自保,莫如外事征伐,殫力勤王之爲愈也,諸將然之,遂至潘南縣浦口,縱諜賊境,時有壓海縣賊帥能昌,起海島,善水戰,號曰水獺,嘯聚亡命,與葛草島小賊相結,候太祖至,欲害之,太祖謂諸將曰,能昌已知我至,必與島賊,同謀爲變,賊徒雖小,若幷力合勢,遏前絶後,勝負未可知也,使善水者十餘人,擐甲持矛,乘輕舫,夜至葛草渡口,擒來往計事者,以沮其謀可也,諸將皆從之,果獲一小舸,乃能昌也,執送于裔,斬之,裔授太祖波珍粲,侍中,以召之,於是,位冠百僚,抑情謹愼,每見人被讒,輒悉解救,朝臣將士,洽然歸心,太祖,懼禍及,復求外寄,裔亦謂水軍帥輕,不足以威敵,乃解太祖侍中,使復領水軍,鎭羅州,百濟與海上草竊,聞太祖復至,皆懾伏莫敢動,太祖還,告舟楫之利,應變之宜,裔喜謂左右曰,我諸將帥中,誰可比擬乎,時裔誣構叛罪,日殺百數,一日,急召太祖,怒目熟視曰,卿昨夜,聚衆謀叛,何耶,太祖笑對曰,烏有是哉,裔嘗自謂彌勒佛,乃曰,卿莫紿我,我能觀心,所以知也,我將入定以觀,乃合眼負手,仰天良久,時掌奏崔凝在側,佯墜筆下庭,取之,因趨過太祖,微語曰,不伏則危,太祖乃悟曰,臣實謀叛,罪當死,裔大笑曰,卿可謂直也,卽以金銀粧鞍賜之,太祖嘗夢見九層金塔,立海中,自登其上,是年三月,有商客王昌瑾,自唐來寓市廛,忽於市中,見一人狀貌瑰偉,鬚髮皓白,頭戴古冠,披居士服,左手持垸,右手持古鏡,謂昌瑾曰,能買我鏡乎,昌瑾以米買之,懸於市壁,日光斜映,隱隱有細字可讀,其略曰,三水中,四維下,上帝降子於辰馬,先操雞,後搏鴨,於巳年中,二龍見,一則藏身靑木中,一則現形黑金東,或見盛,或視衰,盛衰爲滅惡塵滓,昌瑾初不知有文,及見之,謂非常,獻于裔,裔令昌瑾物色,求其人不得,唯東州勃颯寺,有鎭星古像,如其狀,左右亦持垸鏡,昌瑾喜,具以狀白,裔歎異之,令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解之,含弘等曰,三水中,四維下,上帝降子於辰馬者,辰韓馬韓也,巳年中,二龍見,一則藏身靑木中,一則現形黑金東者,靑木,松也,謂松嶽郡人,以龍爲名者之子孫,可以爲君主也,王侍中,有王侯之相,豈謂是歟,黑金,鐵也,今所都鐵圓之謂也,今主初盛於此,殆終滅於此乎,先操雞,後搏鴨者,王侍中御國之後,先得雞林,後收鴨綠之意也,三人相謂曰,王猜忌嗜殺,若告以實,王侍中必遇害,吾輩亦且不免矣,乃詭辭告之,六月乙卯,騎將洪儒裴玄慶,申崇謙,卜智謙等,密謀,夜詣太祖第,將言推戴之意,不欲令夫人柳氏知之,謂柳氏曰,園中豈有新瓜乎,可摘來,柳氏知其意,出從北戶,潛入帳中,於是,諸將曰,今王,政僭刑濫,殺妻戮子,誅夷臣僚,民墜塗炭,疾之如讎,桀紂之惡,無以加也,廢昏立明,天下之大義,請公行殷周之事,太祖作色,拒之曰,吾以忠義自許,王雖暴亂,安敢有二心,以臣伐君,斯謂革命,予實不德,敢效湯武之事乎,恐後世,將以爲口實,古人云,一日爲君,終身爲主,況延陵季子曰,有國,非吾節也,乃去而耕焉,吾豈過季子之節乎,諸將曰,時難遭而易失,天與不取,反受其咎,國中民庶,受毒痡者,日夜思欲復之,且權位重者,皆遭殺戮,今之德望,未有居公之右者,衆情所以望於公也,公若不從,吾等死無日也,況王昌瑾鏡文如彼,豈可違天,死於獨夫之手乎,柳氏出,謂太祖曰,擧義代虐,自古而然,今聞諸將之議,妾猶憤發,況大丈夫乎,手提甲領,以被之,諸將扶擁而出,黎明,坐於積穀之上,行君臣之禮,令人馳且呼曰,王公已擧義旗矣,國人奔走來赴者,不可勝記,先至宮門,鼓譟以待者,亦萬餘人,裔聞之,不知所圖,微服出北門,遁于巖谷,尋爲斧壤民,所害。○丁巳詔曰,泰封主,當四郡土崩之時,剷除賊寇,漸拓封疆,未至兼幷,惟以酷暴御衆,以姦回爲至道,以威侮爲要術,徭煩賦重,人耗土虛,而宮室過制,勞役不止,怨讟遂興,於是竊號稱尊,殺妻戮子,天地不容,神人共怨,荒墜厥緖,可不誡乎,朕謬膺推戴,叨處崇高,庶幾戒覆車之轍,取伐柯之則,與民更始,移風易俗,君臣,諧魚水之歡,河海,協晏淸之慶,內外群庶,宜悉朕懷,群臣拜謝曰,臣等値泰封之世,毒害良善,淫虐無辜,老稚嗷嗷,莫不舍冤,幸今遭遇聖明,得保首領,敢不竭力,以圖報效。○王謂靑州人韓粲,聰逸曰,泰封主,以靑州沃饒,人多豪傑,恐其爲變,將欲殲之,乃召軍人尹全,愛堅等,八十餘人,俱以非辜,械繫在途,卿其亟往,放還田里。○以騎卒泰評,爲徇軍郞中,評博涉書史,明習吏事,初爲鹽州賊帥柳矜順記室,裔破矜順,評乃降,裔怒其久不服,令屬卒伍,遂從太祖,開國之際,與有力焉。○馬軍將軍桓宣吉,伏誅,初宣吉,與其弟香寔,俱有翊戴之功,王委以腹心,常令率精銳以宿衛,其妻謂曰,子才力過人,士卒服從,又有大功,而政柄在人,可不懊乎,宣吉心然之,遂陰結兵士,伺隙爲變,卜智謙知之,密告,王,以跡未形,不納,一日,王坐殿上,與學士數人,議國政,宣吉與其黨五十餘人,持兵突入內庭,直欲犯之,王策杖而立,厲聲叱之曰,朕雖以汝輩之力至此,豈非天乎,天命已定,汝敢爾耶,宣吉見王辭色自若,疑有伏甲,與衆走出,衛士追殺之,香寔後至,知事敗亦亡,追兵殺之。○詔曰,設官分職,爲國所先,化俗安民,用賢爲急,誠無官曠,何有政荒,朕知人不明,審官多失,寢興疚懷,職此而已,內外庶僚,各稱其職,今時致理,後世稱休,宜其登庸列辟,歷試群公,用懋精選,咸使僉諧,自中及外,具悉朕懷,遂以金行濤,爲廣評侍中,黔剛,爲內奉令,林明弼,爲徇軍部令,林曦,爲兵部令,陳原,爲倉部令,閻萇,爲義刑臺令,歸評,爲都航司令,孫逈,爲物藏省令,秦勁,爲內泉部令,秦靖,爲珍閣省令,是皆稟性端方,處事平允,創業之始,推戴有功者也,林積璵,爲廣評侍郞,能駿,權寔,竝爲內奉卿,金堙,英俊,竝爲兵部卿,崔汶,堅術,竝爲倉部卿,朴仁遠,金言規,竝爲白書省卿,林湘煖,爲都航司卿,姚仁暉,香南,竝爲物藏卿,能惠曦弼,竝爲內軍卿,是皆夙達事務,奉公無怠,敏於決斷,允愜衆心者也,康允珩,爲內奉監,申一,林寔,竝爲廣評郞中,國鉉,爲員外郞,倪言,爲內奉理決曲,矜會,爲評察,劉吉權,爲徇軍郞中,其餘司省,各置郞史,蓋開國之初,妙簡賢材,以諧庶務也。○以朴質榮,爲侍中。○蘇判宗偘,內軍將軍犾鈇伏誅,偘與鈇,俱以姦佞得幸弓裔,譖害良善,王卽位,首誅之。○隱士朴儒來見,王以禮待之,謂曰,致理之道,惟在求賢,今卿之來,如得巖渭濱之士,因賜冠帶,令管機要,賜姓王,儒性質直,通經史,初仕弓裔,爲員外,遷至東宮記室,見裔政亂,遂出家,隱於山谷,聞王卽位,乃來。○詔曰,爲國,當務節儉,民富倉實,雖有水旱,飢饉之災,可無患也,所有內莊及東宮食邑,積穀,多致朽損,其以內奉郞中能梵,爲審穀使。○始定官制,詔曰,朕聞乘機革制,正謬是詳,導俗訓民,號令必愼,往者,泰封主,以新羅階官郡邑之號,鄙野,改爲新制,行之累年,民不習知,以至惑亂,今悉從新羅之制,其名義易知者,可從新制。○一吉粲能允,獻瑞芝一本,得之家園,九莖三秀,王賜內倉穀。○馬軍大將軍,伊昕巖,棄市,昕巖業弓馬,見利躁求,事弓裔,以鉤距,得見任用,至裔末年,襲取熊州,因而鎭之,聞王卽位,潛懷禍心,不召自至,士卒多亡,熊州復爲百濟所有,守義刑臺令,閻萇,與昕巖,比隣,知其陰謀具奏,王曰,昕巖,棄鎭自來,以喪邊疆,罪實難原,然與我竝肩事主,情分有素,不忍加誅,且其叛形未露,彼必有辭,萇請密令伺之,王,遣內人,至萇家,從帳中候之,昕巖妻桓氏至厠,謂其無人,旋已長吁曰,吾夫事若不諧,則吾受禍矣,言訖而入,內人以狀聞,遂下昕巖獄,具伏,令百僚議其罪,皆曰當誅,王親讓之曰,汝素畜兇心,自陷刑辟,法者,天下之公也,不可私撓,昕巖流涕而已,令斬於市,籍其家,黨與不問。○秋七月,詔曰,泰封主,以民從欲,惟事聚斂,不遵舊制,一頃之田,租稅六碩,置驛之戶,賦絲三束,遂使百姓,輟耕廢織,流亡相繼,自今,租稅征賦,宜用天下通法,以爲恒例。○廣評侍郞荀弼,以病免,以兵部卿列評,代之。○靑州領軍將軍,堅金,副將連翌,興鉉,來見,各賜馬一匹,綾帛有差,初王,以靑州人,多變詐,不早爲備,必有後悔,乃遣州人能達,文植,明吉等,往覘之,能達還奏云,無他,文植,明吉,私謂州人金勤謙,寬駿曰,能達,雖奏無他,新穀熟,恐有變,及是,堅金等,言,本州人,與勤謙,寬駿,金言規等,在京都者,其心異同,去此數人,可無患矣,王曰,予心存止殺,有罪者,尙欲原之,況彼數人,皆有宣力扶義之功,欲得一州,而殺忠賢,予不爲也,堅金等,慚懼而退,勤謙言規等聞之,奏曰,日者能達,復曰無他,臣等固以爲不然,今觀堅金等所言,不可保其無他,請留之,以觀其變,王從之,旣而,謂堅金等曰,今汝所言,雖不能從,深嘉乃忠,可早歸,以安衆心,堅金等言,臣等冒陳利害,反類誣譖,不以爲罪,惠莫大焉,歸骨之後,誓以赤心,輔國,然一州之人,人各有心,如有始禍,恐難制也,請遣官軍,爲之聲援,王,然之,遣馬軍將軍洪儒,庾黔弼等,率兵千五百,鎭鎭州,以備之,是後,道安郡,奏,靑州,密與百濟,通好,將叛,王遣馬軍將軍能植,將兵鎭撫,由是不克叛。○以職預,爲廣評侍郞。○八月,王謂群臣曰,朕慮諸道寇賊,聞朕初卽位,或有乘間,爲邊患,分遣單使,重幣卑辭,以示惠和之意,果歸附者衆,百濟甄萱,獨不交聘。○朔方鶻巖城帥尹瑄,來附,瑄沈勇善韜鈐,弓裔末,避禍,走入北邊,有衆二千餘人,居鶻巖城,召黑水蕃,侵害邊郡,至是,聞王遣使招諭,遂來降,北邊以寧。○詔曰,泰封主,信讖緯,棄松嶽,還居斧壤,營立宮室,百姓困於土功,三時失於農業,加以飢饉荐臻,疾疫仍起,室家棄背,道殣相望,一匹細布,直米五升,至使齊民,賣身鬻子,爲人奴婢,朕甚憫焉,其令所在,具錄以聞,於是,得一千餘口,以內庫布帛,贖還之。○詔曰,周武黜殷,發粟散財,漢高滅項,令民保山澤者,各歸田里,朕深慚寡德,獲統丕基,雖資天助之威,亦賴民推之力,冀使黎元按堵,比屋可封,然承圮運,苟不蠲租稅,勸農桑,何以臻家給人足乎,其免民三年租役,流離四方者,令歸田里,仍大赦,與之休息。○詔曰,人臣,運佐時之奇略,樹蓋世之高勳者,錫之以分茅胙土,褒之以峻秩崇班,是百代之常典,千古之宏規也,朕出自側微,才識庸下,誠資群望,克踐洪基,當其廢暴主之時,竭忠臣之節者,宜行賞賚,以奬勳勞,其以洪儒,裴玄慶,申崇謙,卜智謙,爲第一等,堅權,能寔,權愼,廉湘,金樂,連珠,麻煖,爲第二等,各賜金銀器,錦繡綺被褥,綾帛,有差,其第三等二千餘人,亦賜綾帛穀米有差,朕與公等,欲救生民,未能終守臣節,以此爲功,豈無慚德,然而有功不賞,無以勸將來,故有今日之賞,公等,明知朕意。○甄萱遣一吉粲閔郃,來賀卽位,王御大中殿,受賀,厚禮遣之。○以兵部卿萱寔,爲內奉卿。○熊,運等十餘州縣,叛附百濟,命前侍中金行濤,爲東南道招討使,知牙州諸軍事,以備之。○以柳問律,爲廣評郞中。○九月,馬軍將軍卜智謙,奏曰,徇軍吏林春吉,與其鄕靑州人裴忩規,季川人康吉,阿次貴,昧谷人景琮,謀叛,王,使人,執而訊之,皆伏,命誅之,忩規逃免。○以靑州人玄律,爲徇軍郞中,馬軍將軍玄慶,崇謙等言,往者,林春吉,爲徇軍吏,圖不軌,事泄伏辜,此乃典兵權,而以靑州爲恃也,今又以玄律,爲徇軍郞中,臣等竊惑之,王,曰善,乃改授兵部郞中。○以前侍中具鎭,爲羅州道大行臺侍中,鎭辭以久勞泰封,不肯行,王,不悅,謂劉權說曰,昔予歷試險阻,而未嘗告勞者,實畏威也,今鎭固辭不行,可乎,權說對曰,賞以勸善,罰以懲惡,宜加極刑,以戒群下,王然之,鎭惶恐謝罪,遂行。○尙州帥阿字蓋,遣使來附,王命備儀迎之,習儀於毬場,文武俱就班,廣評郞中柳問律,與直省官朱瑄劼,爭列,王,聞之曰,讓,爲禮宗,敬,乃德本,今接賓以禮,將觀厥成,而問律,瑄劼,爭列,豈敬愼者乎,宜並徙邊,以彰其罪。○王,謂群臣曰,平壤古都,荒廢已久,荊棘滋茂,蕃人,遊獵於其間,因而侵掠,宜徙民實之,以固藩屛,遂分黃,鳳,海,白,鹽,諸州人戶,居之,爲大都護,遣堂弟式廉,廣評侍郞列評,守之,仍置參佐四五人。○以珍閣省卿柳陟良,爲廣評侍郞,革命之際,事起倉卒,群僚散走,陟良獨謹守其職,所典倉庫,無所亡失,故特授之。○冬十月,以能律,爲廣評侍郞,職預,爲內侍書記。○靑州帥波珍粲陳瑄,與其弟宣長,謀叛伏誅。○十一月八關會,有司言,前王每歲仲冬,大設八關齋,以祈福,乞遵其制,王曰,朕以不德,獲守大業,盍依佛敎,安輯邦家,遂於毬庭,置輪燈一所,香燈旁列,滿地光明徹夜,又結綵棚兩所,各高五丈餘,狀若蓮臺,望之縹緲,呈百戱歌舞於前,其四仙樂部,龍鳳象馬車船,皆新羅故事,百官,袍笏行禮,觀者傾都,晝夜樂焉,王,御威鳳樓,觀之,名爲供佛樂神之會,自後,歲以爲常。





























모바일 작성글 팔관재계 수행 관련 지엄 린포체 법문 요약| 불교자료실(염불,찬불가,독경...)

| 조회 26 |추천 0 | 2018.12.27. 22:38

(2014년 3월 31일 큰스님 법문 중)

ㅁ 팔관재계를 잘 지킨 사람은 하늘신이 재앙을 피하게 해 준다. 재수없는 일들은 영가들 귀신들의 장난인데 이것을 막아준다. 인도환생하려면 팔관재계를 지켜라.

ㅁ 7일동안 팔관재계를 지키면 천상에 태어난다. 하루라도 제대로 지키면 귀하게 태어난다. 중국 티벳 불자는 스스로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은 지킨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지키면 그 공덕이 훨씬 더 크고 수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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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관 재계 수행 강설 >

지엄 큰스님
4/30/16, 상해 용화선원 법당
팔관재계 기도 입재시 하신 법문

ㅁ 팔관재계는 재가 불자를 위한 "특별 수행법"
- 재가 불자가 왕생극락할 수 있는 특별법. 부처님께서 특별 가피를 주는 것임

ㅁ 팔관재계 수행법은 엔론상스님 주요 수행법 중 하나
- 엔롱스 밥맥의 중요한 4가지 수행법은 팔관, 육가행, 회공, 대원만 수행법으로, 팔관재계는 그 중 하나임. 상스님깨서도 한달에 두번씩 평생 수행하셨음
- 팔관 수행을 하면 부처님 가피와 법맥의 가피가 같이 들어옴

ㅁ 팔관재계의 의미
- 재. 계.
. 계는 다른 중생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고, 재는 본인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임
- 팔관의 관
. 죽어서 윤회계로 빠지지 않고 왕생극락할 수 있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종자를 심는다는 뜻임

ㅁ 오후 불식에 대하여...
- 남방불교에서는 평생 오후 불식을 함
- 재가자는 하루만이라도 오후불식을 하면 그 공덕이 한량이 없음

ㅁ 가무를 안 한다는 것은 차분히 자신의 본성을 잘 관찰하는 것임. 알아차림을 항상 유지하여, 걸을 때도 항상 조심하며 본성을 계속 살피는 것이며, 이것이 그대로 참선과 같은 것임. 팔관재계 수행동안 행동도 항상 차분하고 조심하시기 바람

ㅁ 팔관 수행시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안 됨. 6시간이상 자지 말 것

ㅁ 맛있는 것 먹고 싶어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팔관 재계을 어기는 것임

ㅁ 팔관 재계의 이익
- 병의 원인을 소멸시키므로 건강해 짐
- 모든 오역죄를 소멸함
- 스님을 비방하거나 공물을 훔친 죄, 삼귀의를 파한 죄가 모두 소멸됨. 단, 본인의 근본 금강 스승을 비방한 죄는 팔관재계로는 소멸이 안 되고, 특별 참회 기도법을 해야 함
- 삼재팔난을 피하고, 죽을 때 왕생극락함. 정토 왕생을 해야 해탈을 하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임
- 재물이 풍부해짐. 재물이 모자라 수행 못 하는 것들이 없음. 경전에 따르면 한번 팔관재계 수행을 하면 60만생동안 재물에 대한 걱정을 안 해도 됨
- 해탈을 앞당겨 줌
- 내생에도 품위있고 귀하게 태어나고, 누진통을 얻고 해탈함
- 삼매에 쉽게 들어가 해탈로 빠르게 들어감
- 진언 염송은 본래 면목을 찾아가는 수승한 수행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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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01. 03. 제9회 팔관재계 수행 회향 후 법문 >

1) 팔관재계 수행에 많이 동참하기 바랍니다. 업장 소멸과 복덕증장에 큰 이익이 있습니다

2) 사정상 법당에서 같이 참여 못 하시는 분들은 집에서 시간에 맞추어 수행하면 되니 많은 신도님들이 참석해야 합니다.

3) 묵언, 오후 불식 등 계율에 관하여

- 팔관 수행 중 묵언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수행중에는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불가피하게 의사 소통을 할때는 필담을 하기 바랍니다. 묵언을 지키지 못 하면 그만큼 공덕이 깎이고 덜 쌓입니다

- 재가에서 팔관재계 수행할 때도 묵언, 오후불식 등 주어진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이익이 큽니다

- 무문관 수행시에도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묵언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관재계 수행 관련 지엄 린포체 법문 요약

2018.12.27

                                                        cafe.daum.net/shbanya/Jnbd/135   상해용화선원






팔관(八關)| 풍경소리

peter | 조회 26 |추천 0 | 2010.02.24. 00:14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은 대개 음력 10월경으로 겨울절기인 입동(立冬), 소설(小雪)이 드는 달로 오늘날에는 특별히 기리는 명절절기도 없어 이때 즈음의 날씨처럼 스산하게 느껴지는 달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음력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크게 반겼는데 상달맞이 고사도 지내고 조상님들을 기리는 시제(時祭)도 지내는 등 우리 조상님들은 여느 달과 달리 중요하게 여긴 달이었습니다.

 상달이란 말도 일년 중 가장 윗달(上月)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고, 고대에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등 제천행사(祭天行事)를 지낸 역사적 사실 등에서 10월 상달을 중요하게 여겼던 선조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불기 2549년 영산대재


 

최남선「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상달은 10월을 말하며, 이 시기는 일 년 내 농사가 마무리되고 신곡신과(新穀新果)를 수확하여 하늘과 조상께 감사의 예를 올리는 기간이다. 따라서 10월은 풍성한 수확과 더불어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게 되는 달로서 열두 달 가운데 으뜸가는 달로 생각하여 상달이라 하였다."라고 풀이한 것에서도 이런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달에는 예로부터 무수한 종교적 행사가 전승되어 왔는데 앞서 말한 고대 제천의식이 이어져 고려 때에는 팔관회(八關會), 조선시대 민가의 고사 혹은 안택의식, 그리고 오늘날의 상달고사로 이어지지 않았나 짐작됩니다.


   이 중 팔관회는 오늘날에는 전승되고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10월 상달을 대표하는 가장 성대한 행사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팔관회 서기 551년(진흥왕 12) 처음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는데 국가의례로서 가장 성행한 것은 고려시대였습니다. 팔관회에 관한 고려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의 간신들이 건의하여 증감하려는 것을 일체 금지하라. 나 역시 당초에 맹세하기를 이 행사날을 국가 기일(忌日)과 상치되지 않게 하고 군신이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이대로 시행할 것이다.”  - 『고려사』권2, 세가2, 태조 26년 4월 태조 훈요 십조 중 6조

   아울러 고려시대에 행해진 팔관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려사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태조 원년 11월에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전주(前主)는 매해 중동(仲冬)에 크게 팔관회를 설하여 복을 빌었사오니 빌건대 그 제도를 따르소서.’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드디어 구정(毬庭)에 윤등 일좌를 두고 향등을 사방에 나열하였다. 또 채붕 둘을 맺었는데 각각 높이가 5장(丈)이 넘고, 가무백희를 앞에서 보였는데 그 사선악부(四仙樂府)와 용, 봉, 상(象), 마(馬), 거(車), 선(船)은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 백관이 포홀(抱笏)로 행례하니 보는 자가 도성을 기울였고, 왕이 위봉루에서 이를 보았다. 해마다 상례로 하였다.”

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화려하고 성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행사를 위해 임시로 지은 커다란 누마루인 채붕의 높이가 20m나 되었다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 규모와 성대함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팔관회는 조선시대로 오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상달 고사로나마 그 흔적을 헤아릴 뿐이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한편 팔관회가 사라진 10월 상달에 조선시대에는 재미있는 풍속이 있었는데 우유로 만든 타락죽(駝酪粥)을 임금님과 70세 이상의 늙은 정승들에게 올렸다고 하는 ‘타락진상’이 그것입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紀)에 보면“내의원에서는 10월 삭일부터 정월에 이르기까지 우유락을 만들어 국왕에게 진상하고, 또 기로소(耆老所)에 보내 기신(耆臣)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궁중의 내의원에서 매년 10월 상달이면 이듬해 정월까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창신동지역인 낙산에 있었던 목장에서 우유를 채취하여 이것으로 죽을 만든 후 임금님께 올렸는데 임금님만 드신게 아니라 정 2품 이상의 벼슬을 했던 늙은 신하들에게도 나누어 먹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로소(耆老所)에서 기(耆)는 70세 이상의 노인을, 로(老)는 80세 이상의 노인을 말하는데, 장유유서의 유교적 질서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에는 건국초기부터 이를 설치하여 운영했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10월부터일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음력 10월을 겨울의 시작으로 여겼기에 기력이 부족한 노인들이 춥고 힘든 겨울 계절을 잘 이겨내시라는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 용맹정진

   이렇듯 고려시대에는 팔관회가 열렸고, 조선시대에는 타락진상의 노인공경이 시작된 10월 상달은 여러 가지 뜻깊은 의미가 깃든 달인데 특히 불가에서는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되는 달이기 때문입니다.

동안거가 시작되면 스님들을 비롯해서 신심 깊은 재가불자들도 각처의 선방에 들어가 3개월 동안 깨달음을 향한 용맹정진을 시작하는데 동안거 수행의 뜨거운 열기는 추운 겨울날씨도 비켜갈 정도라고 합니다.


   아울러 10월하면 예로부터 김장 등 겨울준비를 빼놓을 수 없는데 「농가월령가」의 한 대목에서 옛 풍속의 정취를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시월은 초겨울이니 입동 소설 절기로다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 소리 높이 난다.
듣거라 아이들아 농사일 끝났구나
남의 일 생각하여 집안 일 먼저 하세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 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출처 : jogyesa.org


                                                                         팔관(八關)

201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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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敎坊)에서 팔관(八關)을 하례하는 표[敎坊賀八關表] -이규보(李奎報)| 동문선 산문

樂民(장달수) | 조회 59 |추천 0
교방(敎坊)에서 팔관(八關)을 하례하는 표[敎坊賀八關表]

 

 

이규보(李奎報)

   운운.
   조종(祖宗)의 구제(舊制)를 받들어 팔관(八關)의 아름다운 모임을 차리고, 백성과 함께 즐겨 만국(萬國)의 환심을 고르게 하오니, 기쁨이 신지(神祇 천신(天神)과 지신(地神))를 흡족하게 하고 경사가 조야(朝野)를 휩쓰나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성상폐하께서 신도(神道)로 교(敎)를 베푸시고 태평을 조심으로 지키시며 팔장을 끼고 옷을 드리우고 앉아 나는 한 것이 없는데도 백성이 스스로 감화하여 제 고장마다 편안히 살면서 업(業)을 즐긴다 하시니 이는 모두가 임금님의 덕이오나 백성이 어찌 이를 알리이까. 이제 중동(仲冬)의 가절(佳節)을 만나 크게 성전(盛典)을 거행하오니, 아름다운 상서가 답지(畓至)하여 큰 거북[鼇]은 산을 이[戴]고 작은 거북은 도(圖)를 지고 나오며, 온갖 음악을 다 벌이니 용이 피리를 불고 범이 비파를 타나이다. 첩(妾)등이 자부(紫府)에 몸을 두고 동정(彤庭)에 발을 옮겨, 구주(九奏)의 음악 소리를 들으니 균천(鈞天)의 꿈나라에 들어온 듯, 만세수(萬歲壽)를 받들어 숭악(嵩岳)의 환호를 간절히 기약하나이다.

 

[주-D001] 구주(九奏) : 
악율(樂律)의 구성(九聲), 곧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 등 오성(五聲)과 상청(商淸)ㆍ각청(角淸)ㆍ치청(徵淸) 등 사청(四淸)을 겸하여 곡조가 아홉 번 변하는 곡(曲). 순(舜)임금의 음악 구성(九成). 《書經 益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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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 사우(祠宇)    ㅡ 서긍(徐兢), 1994년 발간

사우(祠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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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陰陽)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고 부자(父子) 사이 같은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저주와 압승(厭勝)을 알 따름이다. 전대의 역사에 이르기를 ‘그 풍속이 음란해서 저녁이 되면 으레 남녀가 떼지어 노래하고 즐기며 귀신ㆍ사직ㆍ영성(靈星)을 제사하고, 10월에 하늘을 제사하기 위해 큰 모임을 갖는데 그것을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그 나라 동쪽에 굴이 있는데 수신(襚神)이라 부르고, 역시 10월에 맞아다가 제사한다.’ 하였다. 왕씨(王氏)가 나라를 차지한 이후 산에 의지하여 나라 남쪽에 성을 쌓고 건자월(建子月 북두성의 자루 끝이 자(子)의 방향을 가리키는 달)에 관속들을 거느리고 의장물(儀仗物)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한다. 후에 거란의 책명(冊命)을 받을 때와 그들이 세자(世子)를 세울 때에는 역시 거기서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10월에 동맹하는 모임은, 지금은 그 달 보름날 소찬(素饌 육류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음식)을 차려놓고 그것을 팔관재(八關齋)라 하는데 의식이 극히 성대하다. 그 조상의 종묘는 나라의 동문 밖에 있는데, 왕이 처음 습봉(襲封 왕위의 계승을 말함)할 때와 3년에 한번씩 하는 큰 제사 때에만 거복(車服)과 면규(冕圭)를 갖추고 친히 제사하고 그 나머지는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한다.

   원단(元旦) 매달 초하루와, 춘추와 단오에 다 조상의 신주에 제향을 드리는데, 부중(府中)에 그 화상을 그려 놓고 중들을 거느리고 범패(梵唄)를 하며 밤낮을 계속한다. 또 일반이 부처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는 모든 불사(佛寺)에서 촛불을 켜는데 극히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왕과 비빈이 다 가서 구경하고 나라 사람들은 도로를 시끄럽게 메운다. 그들이 신사(神祠)로 백리 안에 있는 것에는 사시에 관원을 보내어 태뢰(太牢 제물로 쓰는 소)로 제사하게 한다. 또 3년에 한 차례씩 있는 큰 제사는 그 경내에 두루 다 베풀어진다. 그러나 기일이 되어 신을 제사한다는 명목으로 분담시켜 백성의 재물을 거둬들여 백금(白金 은을 말함) 1천 냥을 모으고, 나머지 물건들도 이와 맞먹는데 그것들을 신하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왕이 거처하는 궁실 말고는 오직 사우(祠宇)의 만듦새만이 화려하다. 여러 사찰 중에서 안화사(安和寺)가 으뜸인데, 그것은 거기에 신한(宸翰 임금이 쓴 글을 말함)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곳에서의 일로 도로에서 지내온 것과 재사(齋祠)를 가 보고서 보고 들은 것들을 취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나머지 보지 못한 제도는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주-D001] 압승(厭勝) : 
사악한 기를 꺾어 힘을 못 쓰게 만든다는 방술의 일종.
[주-D002] 그 풍속이……제사한다 : 
이상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 고구려 조의 기사를 추린 것이다. 영성(靈星)은 천전성(天田星)이라고도 하는데 농사를 맡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한초(漢初)에 영성을 제사한 기록이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보인다.


[祠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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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臣聞高麗。素畏信鬼神。拘忌陰陽。病不服藥。雖父子至親。不相視。唯知呪咀厭勝而已。前史。以謂其俗淫。暮夜輒男女群聚。爲倡樂。好祠鬼神,社稷,靈星。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穴。號禭神。亦以十月。迎而祭之。自王氏有國以來。依山築城於國之南。以建子月。率官屬,具儀物。祠天。後受契丹冊。與其立世子。亦於此行禮焉。其十月東盟之會。今則以其月望日。具素饌。謂之八關齋。禮儀極盛。其祖廟。在國東門之外。唯王初襲封。與三歲一大祭。則具車服冕圭。親祠之。其餘則分遣官屬。歲旦,月朔,春秋,重午。皆享祖禰。繪其象於府中。率僧徒歌唄。晝夜不絶。又俗喜浮屠。二月望日。諸僧寺。然燭極繁侈。王與妃嬪。皆往觀之。國人喧闐道路。其神祠在百里內者。四時遣官。祠以太牢。又三歲一大祭。徧其境內。然及期。以祠神爲名。率斂民財。聚白金千兩。餘物稱是。與其臣屬分之。此爲可哂也。自王居宮室之外。唯祠宇制作頗華。諸觀寺。唯安和爲冠。以尊奉宸翰故耳。今取其人使道路所歷。與夫齋祠游覽。耳目所及者。圖之。其餘不見制度。則略而不載。










하 팔관표(賀八關表) -| 동문선 산문

樂民(장달수) | 조회 5 |추천 0 | 2017.09.26. 19:56


하팔관표(賀八關表)



이숭인(李崇仁)


  병록(丙鹿)의 천년에 응하는 큰 명(命)은 오직 옛것이나 새롭고, 의봉(儀鳳)의 팔관회(八關會)는 지금이 아니라 옛 제도이니, 보좌(寶座)에 높이 앉아 계심에 여정(輿情)이 모두 기뻐하옵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운운, 성덕(盛德)이 몸에 있고 지인(至仁)으로 만물을 기르시니, 넓고 크사 실로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이 구비(俱備)되고, 예(禮)다 악(樂)이다 함은 옥백(玉帛)과 종고(鍾鼓)만을 갖춘 것을 말함이 아니므로 신인(神人)이 번갈아 유쾌하고 복록(福祿)이 와 높이 쌓이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운운,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 빛나는 성시(聖時)를 만나, 호산(湖山)에 땅이 멀어 숙목(肅穆)한 반열(班列)에 참가치 못하오나, 위궐(魏闕)에 구름이 열린 데로 강녕(康寧)의 축원을 올리옵나이다.

丙鹿應千之景命。雖舊惟新。儀鳳關八之朝章。匪今斯古。寶座高拱。輿情擧欣。恭惟云云。盛德在躬。至仁育物。廣矣大矣。實元亨利貞之俱全。禮云樂云。非玉帛鐘鼓之徒備。神人交暢。福祿來崇。伏念云云。猥以庸資。叨逢煕旦。湖山地逈。阻參肅穆之班。象魏雲開。願上康寧之祝。


                                                             팔관 표(賀八關表) -

2017.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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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번역서 >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제1권 > 태조 신성대왕 > 최종정보


   고려사절요 제1권 /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계묘 26년(943), 후진 출제(出帝) 잉칭(仍稱) 천복 8년ㆍ거란 회동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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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4월에 왕이 내전에 나아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친히 훈요(訓要)를 주며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대순(大舜)역산(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마침내 요(堯)의 선위를 받았고, 한(漢) 나라 고제(高帝)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 나라 제업(帝業)을 일으켰다. 나 또한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잘못 추대되어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괴롭힌 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고, 외람되이 왕위에 있은 지 25년이니 이 몸은 이제 늙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후사(後嗣)들이 기분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무너뜨릴까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요를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니 아침 저녁으로 펴 보고 길이 거울로 삼기를 바란다.
1조는,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여러 부처님의 호위를 힘입었다. 그러므로 선종(禪宗)ㆍ교종(敎宗)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住持)를 임명하여 분수(焚修)하여 각각 그 업(業)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훗날 간특한 신하가 정권을 잡으면서 중의 청탁을 들어주어 사원(寺院)을 다투어 서로 바꾸고 빼앗으니 꼭 이를 금지할 것이다.
2조는, 모든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의 형세를 추점(推占)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추점하여 정한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왕업이 장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짐이 생각건대, 후세의 국왕ㆍ공후(公侯)ㆍ후비(后妃)ㆍ조신(朝臣)들이 각기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면서 행여 더 창건할까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의 말기에 사탑(寺塔)을 앞다투어 짓다가 지덕을 손상시켜 망하기까지 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3조는, 적자(嫡子)ㆍ적손(嫡孫)에게 나라를 전하고 집안을 전하는 것이 비록 상례(常禮)라 하지마는, 요의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하므로 요는 순에게 선위(禪位)했으니 실로 공심(公心)인 것이다. 무릇 원자(元子)가 불초하거든 그 차자(次子)에게 전하여 주고, 차자가 모두 불초하거든 그 형제 중에서 뭇 신하들이 추대하는 자에게 전하여 주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하라.
4조는,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당(唐) 나라의 풍속을 본받아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으나, 나라가 다르면 사람의 성품도 다르니 반드시 구차히 같게 하려 하지 말라. 거란(契丹)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나라이므로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역시 다르니 부디 의관(衣冠) 제도를 본받지 말라.
5조는, 짐은 삼한 산천의 드러나지 않은 도움을 힘입어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사계절의 중월(仲月)에는 행차하여 백 날이 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安寧)을 이루도록 하라.
6조는, 연등(燃燈)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八關)은 천령(天靈)ㆍ오악(五嶽)과 명산(名山)ㆍ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특한 신하가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꼭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 나 역시 처음부터 마음에 맹세하기를 법회일(法會日)은 국기일(國忌日)을 침범하지 않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공경스러이 이에 따라 행해야 한다.
7조는, 왕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마음을 얻으려면, 간(諫)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요점이 있을 뿐이니,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스럽게 되며, 꿀처럼 달디단 참소도 믿지 않으면 참소가 저절로 그치는 것이다. 또 백성을 시기에 맞추어 부리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납세를 적게 해 주고,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 주면, 저절로 민심을 얻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편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고소한 미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기가 낚시에 걸리고, 상을 중하게 주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당기는 앞에는 반드시 새가 피하고, 인덕(仁德)을 베푸는 곳에는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으니, 상벌이 정당하면 음양이 순조로울 것이다.
8조는, 차현(車峴 차령산맥(車嶺山脈))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형(山形)과 지세가 모두 배역(背逆)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ㆍ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ㆍ국척(國戚)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백제가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의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津)ㆍ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王侯)나 궁원(宮院)에 붙어 말을 간사하고 교묘하게 하여 권세를 부리고 정치를 어지럽혀서 재변(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그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 자리에 두어 권세를 부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9조는, 모든 제후(諸侯)와 뭇 관료들의 녹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이미 제도가 정해져 있으니 늘이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또 고전(古典)에, '공적(功績)에 따라 녹을 제정하고, 관작(官爵)은 사정(私情)으로 주지 않는다.' 하였으니, 만약 공이 없는 사람이거나 친척ㆍ사사로이 친한 사람들이 헛되이 국록을 받게 되면 백성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만 아니라 그 본인들 역시 복록(福祿)을 길이 누리지 못할 것이니 꼭 이를 경계해야 한다. 또 강하고 악한 나라(거란(契丹)을 가리킴)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병졸에게는 보호하고 구휼하며 부역을 참작하여 면제해 주어야 하며, 해마다 가을에는 용맹하고 날랜 인재를 사열(査閱)하여 그 중에서 뛰어난 자는 알맞게 계급을 올려 주어야 한다.
10조는, 나라나 가정을 가진 이는 근심이 없을 때에 경계를 하여야 하니,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 일을 거울삼아서 오늘날의 일을 경계하라. 대성인이신 주공(周公)도 무일(無逸) 한 편을 성왕(成王)에게 올려 경계하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그림을 그려 벽에 걸어 두고 출입할 적에 보고 반성하여야 한다." 하였다. 10훈요의 끝마다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中心藏之]'는 네 글자로 끝맺었다. 이로부터 왕위를 이은 왕들이 서로 전하여 보배로 삼았다.
○ 5월에 왕이 병환이 났다.
○ 정유일에 재신(宰臣) 염상(廉相)과 왕규(王規)ㆍ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한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 '대개 생명이 있는 천하 만물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며 만물의 자연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것이 있으랴.' 하였으니, 전고(前古)의 명철한 군주는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에 걸린 지 이미 20일이 지나 죽음을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도성 안팎의 중요한 일은 경들이 태자 무(武)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 하였다.
○ 병오일에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신덕전(神德殿)에 나아가 학사(學士) 김악(金岳)에게 명하여 유조(遺詔)를 쓰게 하였다. 유조가 완성되었는데, 왕이 다시 말씀하지 못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매우 슬피 통곡하니, 왕이,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물었다. 대답하기를,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뭇 신하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웃으며 이르기를, “덧없는 생명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 조금 있다가 훙(薨)하였다. 태자와 제왕(諸王)ㆍ종실ㆍ근신들이 모두 땅을 치면서 슬피 부르짖고 백관들은 내의성(內議省) 문 밖에 벌여 섰다. 왕규가 나가서 유명(遺命)을 선포하기를, “도성 안팎 여러 신료들은 모두 동궁(東宮)의 처분을 따르라." 하였다. 이에 태자가 왕위에 올라 뭇 신하들을 거느리고 통곡하였다.
○ 6월 무신일에 상정전(詳政殿)에서 상을 발표하고, 김악이 유조를 선포하였다.
○ 기유일에 상정전(詳政殿)의 서쪽 뜰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 경오일에 신성대왕(神聖大王)이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였다.
○ 임신일에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는데, 유명에 따라 상장(喪葬)과 원릉(園陵)의 제도는 한 문제와 위 문제의 고사에 따라 모두 검약하게 하고,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를 부장(祔葬)하였다. 왕후는 정주(貞州) 사람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천궁(天弓)의 딸이다. 천궁은 집이 큰 부자인데 고을 사람이 그를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태조가 장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정주를 지나다가 오래 묵은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었는데, 태조가 길 옆 냇가에 서 있던 왕후의 용모가 덕성스러움을 보고, “뉘 댁의 딸이냐?"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이 고을 장자 집의 딸입니다. 잠시 저의 집에 쉬어 가시지요." 하니, 태조가 그 집에 가서 유숙하였다. 그 집에서는 온 군사를 매우 풍족하게 먹이고 왕후에게 태조를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 후에 소식을 끊고 서로 알리지 않았는데, 왕후가 절개를 지켜 머리를 깎고 여승[尼]이 되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불러 부인(夫人)으로 삼았는데 궁예를 쫓는 의거를 일으킬 때에 갑옷을 들고 입혀 대업을 도와 이룩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하기를, “신이 충선왕(忠宣王)을 섬길 때에, 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태조의 규모와 덕량(德量)은, 중국에 나셨더라면 마땅히 송(宋) 나라 태조(太祖) 못지 않았을 것이다. 송 태조는 주(周) 나라 세종(世宗)을 섬겼는데, 세종은 현명한 군주였다. 송 태조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고, 송 태조 역시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공제(恭帝)의 나이가 어려서 정사가 태후의 손에서 결정되자, 여러 사람의 추대에 몰려서 주 나라 공제의 선위(禪位)를 받았으니 대개 마지 못한 데서 나온 일이었다. 우리 태조께서 시기심 많고 포학한 임금인 궁예를 섬기셨으니, 삼한의 땅을 궁예가 그 3분의 2나 차지하게 된 것은 태조의 공이었다. 세상에 드문 큰 공을 세워 의심받을 만한 처지에 있었으니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나라 사람들이 진심으로 따르고 장졸들이 그를 추대하는 데도 오히려 굳이 사양하고 연릉(延陵)의 절조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임금을 친 일이야 어찌 그만둘 수가 있었으랴.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며,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공신들을 성심껏 대접하면서도 권세는 빌려 주지 않았으며, 제왕(帝王)의 기업을 세워 자손에게 이어 준 일은 진실로 그 법도가 송 태조와 한 가지였던 것이다. 송 태조는 강남(江南)의 이씨(李氏)를 와탑(臥榻)에서 코를 골고 잠자는 사람에게 비하였으며, 석진(石晉)은 거란에게 분양한 산후(山後) 16주를 대개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보아서 이미 북한(北漢)을 회수하고는 멀리 군사를 몰아 진(秦)ㆍ한(漢) 시대의 영토를 평정하려고 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왕위에 오른 후에, 김부(金傅)가 아직 귀순하지 않았고 견훤이 포로가 되기 전이었는데도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巡狩)하였었다. 그 의도 또한 동명왕(東明王)의 옛 영토를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처럼 여겨서 반드시 모조리 거두어 차지하려 하였으니, 어찌 다만 계림(鷄林)을 취하고 압록강(鴨綠江)을 칠[操鷄搏鴨] 뿐이었으리오. 이렇게 본다면 비록 크고 작은 형세는 같지 않으나, 두 조(祖 송 태조와 고려 태조)의 규모와 덕량은 이른바, '그 처지를 바꾸면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선왕은 총명하여 옛 글을 좋아하였으며, 중국의 박학(博學)한 선비인 왕구(王構)ㆍ염복(閻復)ㆍ요수(姚燧)ㆍ소구(蕭㪺)ㆍ조맹부(趙孟頫)ㆍ우집(虞集) 같은 이들이 모두 그 북경 저택(北京邸宅)의 문정(門庭)에서 어울렸으니, 아마도 일찍이 그들과 함께 옛 사람의 행적에 관해 논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仁德)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父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김부(金傅 신라)는 군신(君臣)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渤海)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西京)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주-D001] 무일(無逸) : 
《서경(書經)》의 편명으로, 임금이 잠시도 안일하지 말고 부지런하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니,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훈계한 글이다.
[주-D002] 도탄에……일 : 
탕왕(湯王)ㆍ무왕(武王)이 상(商) 나라와 은(殷) 나라의 백성을 위로하고 포학한 걸(桀)과 주(紂)를 친 것을 말한다.
[주-D003] 송……비하였으며 : 
강남(江南)에 있는 남당(南唐) 임금 이욱(李煜)이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니, 송 태조(宋太祖)가 말하기를, “내가 잠자는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코고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였다.





[癸卯二十六年 後晉 出帝 仍稱天福八年,契丹 會同六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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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四月,王,御內殿,召大匡朴述煕,親授訓要,曰,我聞,大舜,耕歷山,終受堯禪,高帝,起沛澤,遂興漢業,予亦起自單平,謬膺推戴,夏不畏熱,冬不避寒,焦身勞思,十有九載,統一三韓,叨居大寶,二十五年,身今老矣,第恐後嗣,縱情肆欲,敗亂綱紀,大可憂也,爰述訓要,以傳諸後,庶幾朝披夕覽,永爲龜鑑,其一曰,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是故創立禪敎寺院,差遣住持焚修,使之各治其業,後世,姦臣執政,徇僧請謁,各業寺社,爭相換奪,切宜禁之,其二曰,諸寺院,皆是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者也,道詵云,吾所占定外,妄有創造,則損薄地德,祚業不永,朕念後世國王,公侯,后妃,朝臣,各稱願堂,或增創造,則大可憂也,新羅之末,競造浮屠,衰損地德,以底於亡,可不戒哉,其三曰,嫡子嫡孫,傳國傳家,雖曰常禮,然丹朱不肖,堯禪於舜,實爲公心,凡元子不肖者,與其次子,次子皆不肖者,與其兄弟之中,群下推戴者,俾承大統,其四曰,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殊方異土,人性各異,不必苟同,契丹,是禽獸之國,風俗不同,言語亦異,衣冠制度,愼勿效焉,其五曰,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脉之根本,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其六曰,燃燈,所以事佛,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後世姦臣,建白加減者,切宜禁止,吾亦當初,誓心會日,不犯國忌,君臣同樂,宜當敬依行之,其七曰,人君,得臣民之心,爲甚難,欲得其心,要在從諫遠讒而已,從諫則聖,讒言如蜜,不信則讒自止,又使民以時,輕徭薄賦,知稼穡之艱難,則自得民心,國富民安,古人云,芳餌之下,必有懸魚,重賞之下,必有良將,張弓之外,必有避鳥,垂仁之下,必有良民,賞罰中,則陰陽順矣,其八曰,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並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銜統合之怨,犯蹕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灾變者,必有之矣,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其九曰,百辟群僚之祿,視國大小,已爲定制,不可增減,且古典云,以庸制祿,官不以私,若以無功人,及親戚私昵,虛受天祿,則不止下民怨謗,其人,亦不得長享福祿,切宜戒之,又以强惡之國爲隣,安不可忘危,兵卒,宜加護恤,量除徭役,每年秋,閱勇銃出衆者,隨宜加授,其十曰,有國有家,儆戒無虞,博觀經史,鑑古戒今,周公大聖,無逸一篇,進戒成王,宜當圖揭,出入觀省,十訓之終,皆結以中心藏之四字,自是嗣王,相傳爲寶。○五月,王不豫。○丁酉,宰臣廉相,王規,朴守文等侍,王曰,漢文遺詔曰,蓋天下萬物之萌生,靡有不死,死者,天地之理,物之自然,奚可甚哀,前古哲王,秉心如此,予遘疾,已歷二旬,視死如歸,有何憂也,漢文之言,卽予意也,內外機務,久不決者,卿等,竝與太子武,裁決而後聞,丙午,疾大漸,御神德殿,命學士金岳,草遺詔,文成,王不復語,左右失聲大哭,王,問此何聲也,對曰,聖上,作民父母,今日欲棄群臣,臣等,痛不自勝耳,王笑曰,浮生,自古然矣,言訖,有頃而薨,太子,諸王,宗室,近臣,皆擗地哀號,百官,列位於內議省門外,王規,出宣遺命曰,內外庶僚,竝聽東宮處分,於是,太子卽位,率群臣擧哀,六月戊申,發喪於詳政殿,金岳宣遺詔,己酉,殯于詳政殿之西階,庚午,上諡曰神聖大王,廟號太祖,壬申,葬顯陵,以遺命,喪葬園陵制度,依漢魏二文故事,悉從儉約,以神惠王后柳氏,祔葬,后貞州人,三重大匡天弓之女也,天弓,家大富,邑人稱爲長者,大祖,爲將軍,引兵過貞州,息馬古柳下,治,立路旁川上,見其有德容,問誰氏,女對曰,此邑長者家女也,請暫憩弊廬,太祖因至宿焉,其家饗一軍甚豐,以后侍寢,厥後絶不相聞,后守節剃髮爲尼,太祖聞之,召以爲夫人,擧義提甲,贊成大業。
李齊賢贊曰,臣及事忠宣王,王,嘗言,我太祖,規模德量,生於中國,當不減宋太祖,宋太祖,事周世宗,世宗,賢主也,待宋太祖甚厚,宋太祖,亦爲之盡力,及恭帝幼沖,政出太后,迪于群情,而受周禪,蓋出於不得已也,我太祖,仕弓裔猜暴之君,三韓之地,裔有其二,太祖之功也,以不世之功,處必疑之地,可謂危矣,而國人,歸心,將士,推戴,然猶固讓,欲徇延陵之節,弔伐之事,亦豈得已哉,其好生惡殺,而信賞必罰,推誠功臣,而不假以權,創業垂統,固宜一揆矣,至若宋祖,以江南李氏,此之鼾睡臥榻,則石晉所賂契丹,山後之十六州,蓋視以爲橐中物,旣收北漢,將長驅以定秦漢之疆耳,我太祖,卽位之後,金傅,未賓,甄萱,未虜,而屢幸西都,親巡北鄙,其意亦以東明舊壤,爲吾家靑氈,必席卷而有之,豈止操雞搏鴨而已哉,由是觀之,雖大小之勢不同,二祖,規模德量,所謂易地皆然者也,忠宣,聰明好古,中原博雅之士,如王構,閻復,姚燧,蕭㪺,趙孟頫,虞集,皆遊其門,蓋嘗與之尙論也。
史臣曰,太祖,御下以寬,而賢智,效力,待人以誠,而遠近,響應,好生之仁,出於天性,恤民之心,發乎至情,甄萱,父子相夷,則伐而取之,金傅,君臣來附,則禮以待之,以契丹之强,而侵滅與國,則絶之,以渤海之弱,而失地無歸,則撫之,屢幸西京,以爲根本之地也,親巡北鄙,以連獷悍之俗也,草創更始,雖未遑於禮樂,而其規模遠略,深仁厚澤,固已培養五百年之國脈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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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권 /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ㅡ 김종서(金宗瑞) 등, 1968년 간행


임오 원년(982), 송 태평흥국 7년ㆍ요 건형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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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3월에 백관의 칭호를 고쳤다. 내의성(內議省)을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광평성(廣評省)을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하였다.
○ 여름 4월에 10세 이상인 남자는 모자를 쓰도록 하였다.
○ 6월에 제(制)하기를, “임금의 덕은 오직 신하의 보필에 달려 있다. 짐이 새로 정무를 총괄하게 되었으니 잘못된 정사가 있을까 걱정된다. 경관(京官) 5품 이상은 각기 봉사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라." 하였다.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상서(上書)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보건대,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의 사신 오긍(吳兢)《정관정요(貞觀政要)》를 지어 올려 현종(玄宗)에게 태종(太宗)의 정치를 닦도록 권한 것은, 대개 사체(事體)가 서로 비슷하여 한 집안의 일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정치는 아름답고 밝아서 본보기가 될 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태조가 건국한 때로부터 신이 아는 것은 모두 신의 마음에 기억하고 있으니, 이제 삼가 5조(朝)의 정치와 교화에서 본받을 만하거나 경계로 삼을 만한 잘되고 잘못되었던 자취를 기록하여 조목별로 아뢰어 드리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우리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이 왕위에 오르실 때, 시기는 백육(百六)에 해당하고, 운수는 천 년에 해당하였습니다. 당초 흉악한 도적들을 평정할 때에는 하늘이 전주(前主 궁예)를 내어 그의 손을 잠깐 빌렸었고, 그 뒤에 도참에 응하여 천명(天命)을 받으니, 사람들이 태조의 성덕(聖德)을 알아 마음으로 따랐습니다. 이에 금계(金鷄 신라)가 스스로 멸망하는 시기를 만나고 병록(丙鹿 려(麗))이 다시 일어나는 운수를 타서 향리(鄕里 송악(松岳))를 떠나지 않고 문득 그대로 대궐이 되어, 요수ㆍ패수[遼浿]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韓 진한(辰韓))의 옛땅을 얻어서 19년 만에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이보다 높은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란은 우리나라와 국경이 닿아 있으니 마땅히 먼저 우호 관계를 닦아야 할 것인데, 그들이 또 사신을 보내어 화호(和好)를 구했으나 우리나라가 이내 그 교빙(交聘)을 끊은 것은 그 나라가 일찍이 발해(渤海)와 화호를 맺었다가 별안간 다른 마음을 품어 옛날의 맹약은 돌아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조는 거란의 무도함이 심하므로 그 나라와 교빙할 수 없다고 하여 그들이 바친 낙타마저 모두 버리고 기르지 않았으니, 그 심원한 계책이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위태로워지기 전에 나라를 보전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발해는 이미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고 나서 홀한(忽汗)이 멸망할 때에, 그 세자 대광현(大光顯) 등이 우리 국가가 의(義)로 일어난 나라라 하여 그 남은 무리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두 배로 재촉하여 도망해 오니, 태조께서 더욱 깊이 가엾게 여기고 그를 맞아 매우 후하게 대접하며, 성명(姓名)까지 내려 주고 또 종적(宗籍)에 붙여서 그 본국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며, 그 문무 참좌(文武參佐) 이하 또한 모두 넉넉히 작명(爵命)의 은전을 입었으니, 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는 데에 급히 하여 먼 곳의 사람이 와서 복종하게 함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후백제의 견훤(甄萱)은 흉악하고 패역(悖逆)하며 난리를 일으키기 좋아하여 임금을 죽이고 백성에게 포학하게 구니,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겨를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마침내 죄를 바로잡고 옛땅을 회복해 주었으니, 옛 임금[新羅王]을 잊지 않고 기울어 위태한 나라를 안정시키고 도와준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 말기부터 우리나라 초기까지 서북 변방의 백성이 매양 여진의 번기(蕃騎)가 오가며 침략하는 일에 피해를 입자, 태조가 마음속으로 결단하여 훌륭한 장수 한 사람을 보내 이 지방을 지키게 하니, 무기 한 번 사용하지 않고서도 번인(蕃人)들이 귀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변방 바깥에 전쟁이 그치고 국경에 근심이 없어졌으니, 사람을 알아보고 잘 임용하여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고 가까운 곳의 사람을 편안하게 한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의 군신(君臣)이 나라의 운수가 다되어 스스로 귀화하기를 구하자 이를 두 번 세 번 사양한 뒤에야 허락하였습니다. 동쪽으로 명주(溟州)부터 흥례부(興禮府)까지 그 사이에 있는 1백 10여 성이 모두 인덕(仁德)을 사모하여 즉시 와서 승복하니, 태조께서 능히 예로써 사양하시나,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음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다만 남으로 후백제를 평정할 적엔 마지못하여 전쟁을 하였고, 군사를 크게 일으킨 일이 모두 두서너 번 있었으나 깃발 아래나 전마(戰馬) 앞에 군진과 맞닥뜨리자마자 갑자기 항복하는 자도 있고, 소문만 듣고 두려워서 굴복하는 자도 있었으며, 비록 서로 접전을 하더라도 살상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인(仁)한 이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다.' 한 옛말 그대로라 할 수 있습니다.
견훤이 죄악을 쌓은 지 수십 년 만에 마침내 반역한 자식들에게 갇혔다가 우리나라에 도망해 와서 반역한 자를 베고자 군사를 청하니, 태조가 이를 듣고 후한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했으며, 그가 죽자 또한 부의(賻儀)를 후히 주었으니, 도(道)가 유명(幽明)을 관통하고 의(義)가 생사에 두루 미친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후백제를 평정하고 거가(車駕)가 그 도성에 들어가자, 빈궁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후히 위유(慰諭)하고 모든 군사에게 영을 내려 털끝만큼도 범함이 없었습니다. 또 남방과 북방이 오랫동안 나누어져 있었고, 새로 항복한 사람과 전에 있던 사람이 스스로 구별되지마는 한결같이 이들을 어루만져 시종 변하지 않았으니, 남을 포용하고 너그러움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통일을 이룬 이후로 정사에 부지런한 지 8년 동안에 예를 갖추어 큰 나라를 섬기고, 도를 가지고 이웃 나라를 사귀었습니다. 편안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안일함이 없고 아랫사람과 만날 때엔 공손히 하며, 도덕을 소중히 여기고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여, 궁실은 낮게 지어 겨우 비나 바람을 가릴 정도이고, 의복은 검소하여 추위나 더위만 막을 정도였습니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하며, 자기 생각을 버리고 남의 의견에 따르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로 사양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습니다. 더구나 민간에서 생장하여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었으므로 여러 사람의 진정과 거짓을 모두 알지 못함이 없으며, 모든 일의 성공과 위험을 또한 능히 먼저 알아 이 때문에 상이나 벌을 줌이 제때를 잃지 않고, 사인(邪人)과 정인(正人)이 그 길을 함께 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여 제왕의 체통을 얻은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게다가 사람을 알아보면 그 재주를 잃지 않고 아랫사람을 다스릴 때는 반드시 그의 힘을 얻었으며, 어진 사람을 임용할 적엔 의심하지 않고 간사한 사람을 제거할 적에도 주저하지 않으며, 불교를 높이고 유술(儒術)을 소중히 여겼으니, 왕으로서의 어진 덕이 이에 구비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아름다운 계책은 준수할 만합니다. 다만 창업한 초기에 태평 정치를 이룩한 세월이 짧아서, 종묘 사직은 아직 빛나고 숭상받지 못하고 예악ㆍ문물은 아직도 빠진 것이 많으며, 모든 관사(官司)의 품식(品式)과 조정 안팎의 여러 규칙이나 의식이 미처 제정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태조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대개 국인(國人)의 불행이요, 진실로 천도(天道)를 믿기 어려운지라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혜종(惠宗)은 오랫동안 동궁에 있으면서 여러 번 감무(監撫)를 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사부를 높이고 빈료(賓僚)를 잘 접대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명성이 조정과 민간에 들리었으므로 처음 왕위를 계승하실 적에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정종(定宗)의 형제를 참소하여 반역할 뜻이 있다고 하였는데, 혜종(惠宗)은 듣고도 답하지 않고 또한 이를 묻는 바도 없었으며 은혜로 대우함이 더욱 융숭하여 처음과 같이 그들을 대우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혜종의 큰 도량에 감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덕정(德政)을 닦지 않고 자신의 생명만을 너무 염려하여 좌우 전후에 항상 갑사(甲士)를 따르게 하였으니, 대개 사람을 의심함이 너무 심하여 임금의 체통을 크게 잃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장사(將士)들에게만 치우치게 상을 주어 은택이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안팎에서 원망하여 인심이 떠났습니다. 또 즉위한 지 한 해가 지나자마자 갑자기 고질을 얻어 병석에서 오래도록 세월을 보내니, 이에 조신(朝臣)의 현사(賢士)는 앞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향리의 소인만이 항시 침실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병환이 더욱 위독해지자 화를 내는 것이 날로 더하여 왕위에 있던 3년 동안에는 백성이 덕을 입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날에야 겨우 뜻밖의 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정종(定宗)은 번저(蕃邸 왕자의 사저(私邸))에 있을 적에 일찍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혜종은 병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고 왕규(王規) 등이 몰래 음모를 꾸며 왕실을 엿보자, 정종이 이를 먼저 알고 은밀히 서도(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 있는 장수와 함께 계책을 정하고 대비를 해서 내란이 일어나려 할 때에 위병들이 크게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간악한 꾀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여러 흉인(兇人)들은 죽음을 당했으니 비록 천명을 따른 것이지만 또한 사람의 계책에서 이루어졌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정종부터 지금까지 38년이 되었는데 그간에 왕통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또한 정종의 힘입니다. 정종이 이미 지자(支子)로서 왕위를 계승하자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을 써서, 촛불을 켜놓고 조사(朝士)를 불러 보기도 하고, 밥먹을 시간까지 늦추어 가면서 정무를 처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하신 초기에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릇 도참(圖讖)을 믿어 천도(遷都)하기로 결정하자, 또 천성이 강하고 굳세어 고집하며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강제로 사람을 징발하여 역사를 시켜 인부를 괴롭히니, 원망이 이로 인하여 일어나고 재앙의 조짐이 아주 빨리 나타나 미처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하고 영영 왕위를 떠났으니 진실로 원통한 일입니다.

   광종(光宗)은 정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즉위하셨는데, 아랫사람을 접대할 때에는 예를 더욱 더하였고 사람을 알아 보는 데 실수하지 않는 감식이 있으며, 친하고 귀한 사람에게 잘보이려 하지 않고 항상 부유하고 강한 자를 누르며, 사이가 멀거나 신분이 천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환과(鰥寡)를 구휼하였습니다. 즉위한 해로부터 8년 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아지고 공평해졌으며 상과 벌을 내릴 때는 지나친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쌍기(雙冀)가 귀화한 후로 문사(文士)를 존중하여 은전과 예우가 너무 융숭하니 변변치 못한 재주(쌍기)가 외람하게 진출하여 계급을 뛰어 갑자기 승진되어 한 해 안에 바로 경상(卿相)이 되었으며 밤이면 밤마다 날이면 날마다 불러 보고 이야기하니, 이를 즐거움으로 삼아 정사에 게을리하고 연회와 놀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남방과 북방의 변변치 못한 사람까지도 모두 남다른 예로 접대하니 이 때문에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나아오고 덕망 있는 장로들이 점차 쇠진하여졌습니다. 비록 중국의 풍속은 존중하였으나 중국의 좋은 법은 취하지 않았으며, 중국의 선비는 예우하였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백성에게는 피땀어린 재물을 더욱 소모시키면서, 사방에서는 헛된 명예를 지나치게 얻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시는 정무에 부지런하지 않고 빈료를 접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신하를 시기함이 날로 심해지고 군신 사이의 의논이 날로 막혀 감히 누구도 정치의 잘잘못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불사(佛事)를 믿어 상시 행하는 재(齋)도 이미 많은데 별도로 기원하는 분수(焚修)가 적지 않아, 오로지 복과 수명을 빌고 기도만 하여서 한계가 있는 재력을 다 써서 끝도 없는 인연을 맺으며, 지존의 높은 몸을 스스로 낮추어 작은 선행을 하기 좋아하였습니다. 또 출입하고 연회와 놀이에는 극도로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눈앞에 큰 사고가 없는 것을 가지고 아마도 불법(佛法)의 힘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하는 일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궁실은 반드시 제도에 넘치게 짓고 의복과 음식은 꼭 지독히 사치스럽게 하며, 토목의 공사는 제때에 맞게 하지 않고 기교(伎巧)를 제작하는 데는 그칠 날이 없었으니, 보통 때 한 해의 비용을 대략 계산하더라도 태조 때 10년의 비용이 넉넉히 될 것입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광종께서 항상 공검(恭儉)과 절용(節用)만 생각하여 즉위 초기와 같이 정사에 부지런하였더라면 어찌 그 수명이 길지 못하여 겨우 50세만 누리셨겠습니까. 하물며 경신년(960)에서 을해년(975)까지의 16년간은 간흉(姦兇)이 앞다투어 진출하여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용납될 곳이 없고 소인만이 제 뜻대로 되어, 마침내는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하여 상하가 마음이 갈라지고 신하들은 해이해져서 구신(舊臣)과 묵은 숙장(宿將)이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골육ㆍ인척도 또한 모두 멸망되었습니다. 하물며 혜종이 형제를 능히 보전한 일과 정종이 국가를 능히 보호한 일은 은혜나 의리를 논한다면 중하다고 이를 만한데, 두 왕이 모두 다만 아들 하나만을 두었는데도 또한 그 생명까지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한 아들에게까지도 또한 의심과 시기를 내어, 그 때문에 경종(景宗)이 그때 동궁에 있으면서 매양 스스로 불안해했는데 다행히 그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 어찌 처음에는 잘하여 일찍부터 아름다운 명예를 얻어 놓고 뒤에 잘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매우 원통한 일입니다.

   경종은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부인(婦人)의 손에서 자랐으므로 대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보아 안 적이 없었는데, 다만 천성이 총명하여 능히 허물을 면하고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여러 해 쌓인 참소의 글을 불사르고 여러 해 동안 갇힌 무고한 죄수를 놓아 주어 원통하고 분한 일을 모두 제거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경사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정사를 하는 체통을 알지 못하여 오로지 권신(權臣)에게 맡겨서 해악이 종친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재변이 먼저 나타나서 뒤에 비록 깨닫기는 하였으나 책임을 돌릴 데가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사(邪)와 정(正)이 구분이 없고 은상(恩賞)과 형벌이 균일하지 않았는데, 미처 다스려지기도 전에 다시 게을러지기까지 하여 드디어 여색에 빠지고 향악(鄕樂 국악(國樂)) 듣기를 좋아하며, 잇달아 장기와 바둑을 즐겨 종일토록 물리지 않으며,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은 오직 중관(中官)과 내수(內豎)뿐이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군자의 말은 받아들여질 길이 없고 소인의 말만 때때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훌륭한 덕이 없어, 이른바 '시초가 없는 사람은 없으나 훌륭한 결과가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니, 충신ㆍ의사(義士)라면 누구인들 이를 원통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곧 성상께서도 친히 보고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종 또한 찬미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대개 그 당초에 병환이 나서 아직 위독해지기 전에, 드디어 침실 안으로 성상을 불러 손을 잡고 말씀하시며 군국(軍國)을 부탁하였으니, 사직의 복일 뿐만이 아니요, 또한 이는 인민의 다행이었습니다. 다만 혜종과 경종 두 임금이 왕위를 계승한 것은 모두 동궁의 신분에서 계승했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지마는, 당종형제에 있어서는 분명한 부탁이 없으면 다툼의 단서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혜종이 두 해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끝내는 흥화랑군(興化郞君)이란 아들을 두었는데, 비록 나이가 적기는 했지만 분명한 부탁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가 아우에게 돌아갔던 것입니다. 정종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대업을 계승하였으며, 임종할 때에 또한 일찍이 광종에게 왕위를 전하여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정종ㆍ경종 두 임금의 유명(遺命)은 분명하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또 일찍이 보건대, 혜종ㆍ정종ㆍ광종 세 임금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던 초기로 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한 즈음에 양경(兩京 개경 서경)의 문무관(文武官)이 반이나 이미 살상되었으며, 하물며 광종의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 형벌에 걸린 모든 이가 대부분 죄없는 사람이었으며 역대의 훈신(勳臣)ㆍ숙장(宿將)들도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여, 경종이 왕위에 오를 때에는 구신(舊臣) 중의 남은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해에도 또한 살해를 당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는 모두 후생(後生)ㆍ참적(讒賊)들이었으므로 진실로 애석히 여길 것은 없지마는, 다만 천안(天安)ㆍ진주(鎭州) 두 낭군(郞君)은 본래 황가(皇家)의 지손(支孫)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종께서도 오히려 너그럽게 대우하여 마침내 처형하지 않았으며, 경종 때에 와서는 번병(藩屛)이 될 만도 하였는데 문득 권신의 해침을 당했으니 어찌 원통하고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상성(上聖)의 덕을 가지고 중흥의 시기를 만나 선군(先君)께서 왕위를 전하신 은혜를 따라 열성조의 대업을 계승하여, 한 물건도 그 삶을 즐기지 않는 것이 없고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한 자가 없어, 조정과 민간이 함께 즐거워하고 사람과 신(神)이 서로 경하하고 있으니 이른바 '하늘이 내리고 사람이 준' 것입니다. 성상께서 만약 태조의 유풍을 능히 따르신다면, 어찌 당 나라 현종이 태종을 추모했던 고사와 다르겠습니까. 성상께서 또 능히 사조(四朝)의 가까운 일에서 선택하신다면, 혜종은 친족을 보전한 공이 있으니 우애하였다고 이를 수 있으며, 정종은 난리가 일어날 징조를 먼저 알고 왕실 내부에서 생긴 환난을 능히 평정하여 종묘사직을 다시 안정시키고 왕위를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지모(智謀)가 밝다고 이를 수 있으며, 광종이 8년 동안 다스린 것은 삼대(三代)에 견줄 수 있으며 또 조정의 의례와 제도가 자못 보기에 훌륭하였으니 이른바 잘잘못이 골고루 있는 셈입니다. 경종은 앞 시대의 원통한 죄수 수천 명을 놓아 주고 여러 해 쌓였던 참소 문서를 불살라 버렸으니 이른바 지극히 너그럽고 어질었던 것입니다. 무릇 사조에서 정사를 행한 자취는 대략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는 마땅히 잘한 것은 취하여 이를 행하고 잘못한 것을 보고서는 이를 경계하여, 긴급하지 않은 일은 제거하고 이로울 것이 없는 노역은 폐지해서 다만 임금은 위에서 편안하고 백성은 아래서 기뻐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시작을 잘하는 마음을 이어 유종의 미를 생각하여, 날로 더욱 조심하여 비록 훌륭하여도 훌륭하게 여기지 말며, 비록 귀하게 군주가 되었지만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고, 재덕을 많이 가졌지만 교만하고 자랑하지 않는다면, 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재앙은 기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될 것이니, 성군께서 어찌 만년을 누리지 않으며, 왕업이 어찌 백세만 전할뿐이겠습니까. 신은 또 시무(時務) 28조를 기록하여 장계와 함께 별도로 봉하여 올립니다.
(1) 우리 국가가 삼국을 통일한 지 47년이 되었는데 사졸은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고 군량이 허비됨을 면치 못하는 것은, 서북 지방이 오랑캐와 닿아 있어 방비해 지키는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이것을 염두에 두소서. 마헐탄(馬歇灘)을 경계로 삼은 것은 태조의 뜻이요, 압록강가의 석성(石城)을 경계로 삼은 것은 대조(大朝)가 정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요해지를 가려 국경을 정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는 토인을 뽑아서 방어하고 지키는 데 충당하고 또 그 가운데 2, 3명의 편장(偏將)을 뽑아서 이를 통솔하게 한다면, 경군(京軍)은 번갈아 수자리하는 노고를 면하게 되고 마초와 군량은 운반 비용을 덜게 될 것입니다.
(2) 듣건대 성상께서 공덕재(功德齋)를 설치하여 친히 차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손수 보리도 찧으신(본문 중 마맥 磨麥 ㅡ맥과차 麥顆茶를 갈으신)다 하니, 신은 성체(聖體)가 근로하심을 깊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 폐단은 광종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참소와 간사함을 믿어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미혹되어 죄업을 제거하고자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불사를 많이 베풀었습니다. 비로자나(毗盧遮那)의 참회법(懺悔法)을 설치하기도 하고, 중을 구정(毬庭)에 모아 공양하기도 하며, 귀법사(歸法寺)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를 설치하여 매양 부처에게 재를 올리는 날이 되면 반드시 걸식하는 중에게 밥을 먹이기도 하고, 내도량(內道場)의 떡과 과일을 걸인에게 내어 주기도 하며, 신지(新池)ㆍ혈구(穴口)와 마리산(摩利山) 등의 어량(魚梁)을 방생소로 삼아 한 해 동안에 네 번이나 사자를 보내어 그 지방의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강연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살생을 금하여 어주(御廚)의 육선(肉膳)은 재부(宰夫 음식을 만드는 하인)를 시켜 짐승을 도살하지 않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으며, 대소 신민이 모두 다 참회하도록 하여 미두(米豆)ㆍ시탄(柴炭)ㆍ마료(馬料)를 운반하여 서울이나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참소를 믿었기 때문에 사람을 지푸라기처럼 하찮게 여겨 베어 죽인 사람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항상 백성의 고혈을 다 짜내어 재를 올리는 데 이바지했으니, 부처가 영험이 있다면 어찌 기꺼이 공양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이때에 자식이 부모를 등지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며, 여러 범죄자들이 모양을 바꿔 중이 되고,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무리들이 와서 여러 중들과 서로 섞여서 재에 가는 자 또한 많았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또 중 선회(善會)를 시켜 그 보시를 주관케 하였는데, 그 중이 떡과 쌀을 함부로 다른 데에 허비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선회가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길가의 송장이 되었으니, 당시의 의논이 이를 기롱하였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군왕의 체통을 바루어서 이로울 것이 없는 일은 하지 마소서.
(3) 우리 왕조의 시위 군졸은, 태조 때에는 궁성을 숙위하는 데만 충당하였으므로 그 수효가 많지 않았습니다. 뒤에 광종이 참소를 믿어 장상(將相)을 베어 죽이고는 스스로 의구심이 생겨 주ㆍ군의 풍채 좋은 자를 뽑아 들여 시위하게 하니, 그 당시의 의논으로는 번거롭기만 하고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경종 때에 와서 비록 조금 그 수효를 줄였으나 지금까지 그 수효가 아직도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태조의 법을 따라 날쌔고 용맹스러운 자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폐하여 돌려보낸다면 사람들에겐 원망이 없고 나라에는 저축이 있게 될 것입니다.
(4) 성상께서 미음과 술과 두부국을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하시니, 신은 생각건대 성상께서도 광종이 죄업을 소멸하고 은혜를 널리 베풀어 인연을 맺으신 뜻을 본받고자 하시나, 이는 이른바 '작은 은혜는 두루 베풀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상벌을 분명히 하여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한다면 복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잘한 일은 임금이 정치를 하는 체통이 아니니 이를 폐지하소서.
(5) 우리 태조는 대국을 섬기는 데 전일하셨으나 그래도 수년 만에 한 번 사신을 보내어 교빙의 예를 행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신을 보낼 뿐만 아니라 또 이로 인하여 무역까지 하니, 사신의 내왕이 번거롭고 많아서 아마 중국에서 천하게 여길 것이며 또 왕래로 인하여 배가 침몰되어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그 교빙하는 사신편에 겸하여 무역을 행하고 그 나머지 수시로 매매하는 것은 일체 금지시키소서.
(6) 불보(佛寶)의 돈과 곡식은 여러 절의 중이 각기 주ㆍ군에서 사람을 보내 관장하는데, 해마다 장리(長利)를 주어 백성을 괴롭히니 이를 모두 금지하소서. 그 돈과 곡식은 사원에 옮겨 두고, 전장(田莊)에는 그 주인이 전정(田丁)을 맡고 있는 것은 모두 이를 취하여 사원의 장소(莊所)에 소속시킨다면 민폐가 조금 줄어들 것입니다.
(7) 왕자(王者)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집집마다 가서 돌보고 날마다 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분견(分遣)하여 가서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후에 외관(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에 일이 번다하여 미처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보건대 향리의 토호가 매양 공무를 핑계대고 백성을 침노하여 백성이 명령을 견뎌내지 못하니 청컨대 외관을 두소서. 비록 한꺼번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10여 주ㆍ현에 한 관청을 두고 관청마다 각기 두서너 관원을 두어서 백성 다스리는 일을 맡기소서.
(8) 살피건대, 성상께서 사자를 보내어 굴산(屈山)의 중 여철(如哲)을 맞아 대궐에 들이셨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철(哲)이 과연 능히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자라면, 그가 사는 산천 또한 성상의 소유이며 조석으로 먹고 마시는 것 또한 성상께서 준 것이니 반드시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매양 축원하기를 일삼을 것이지, 어찌 번거롭게 맞아 와야만 감히 복을 베풀겠습니까. 예전에 선회(善會)란 자가 요역을 피하려고 출가하여 산에 있었는데, 광종이 그를 공경하고 예를 극진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선회는 길가에서 급사하여 그 시신이 버려진 채 방치되었으니, 그와 같이 범용(凡庸)한 중은 제 몸조차 화를 당하는데 어느 겨를에 남에게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철을 내쫓아 산으로 돌려보내어 선회가 받았던 기롱을 면하게 하소서.
(9) 신라 때는 공경ㆍ백관과 서인의 의복ㆍ신ㆍ버선이 각기 품색(品色)이 있어, 공경과 백관은 조회할 적엔 공란(公襴 공복(公服))을 입고 가죽신을 신으며 홀(笏)을 가지고 있다가 조회에서 물러나오면 편리한대로 옷을 입었으며, 서인과 백성은 문채 있는 옷을 입지 못했던 것은 귀천을 구별하고 존비를 분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공란은 비록 토산물이 아니지마는 백관들이 스스로 준비해 썼던 것입니다. 우리 왕조에서는 태조 이후로 귀하고 천한 것은 논하지 않고 공란을 마음대로 입으니, 벼슬은 비록 높더라도 집이 가난하면 공란을 능히 갖추지 못하고 비록 관직은 없더라도 집만 넉넉하면 능라(綾羅)와 금수(錦繡)를 사용합니다. 우리나라의 토산물은 좋은 물건이 적고 나쁜 물건이 많아서 문채 있는 물건은 모두 토산물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이를 입으니, 다른 나라 사신을 영접할 때에 백관의 예복이 법대로 되지 않아서 수치를 당할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백관이 조회할 적엔 한결같이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을 입고 가죽신을 신으며, 홀을 들고 조정에 일을 아뢸 때는 버선을 신고 명주실로 만든 신[絲鞋]과 가죽신을 신게 할 것이며, 서인은 문채 있는 깁과 주름진 비단은 입지 못하게 하고 굵은 명주만 쓰게 해야 합니다.
(10) 신이 듣건대 중들이 군ㆍ현에 왕래하면서 관(館)ㆍ역(驛)에 유숙하고 지방의 아전과 백성을 매질하여 영접과 공궤(供潰)가 소홀하다고 꾸짖는데 아전과 백성들은 중들이 왕명을 받들고 나왔는가 의심하여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도 못하니, 이보다 큰 폐단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들이 관ㆍ역에 유숙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 폐단을 제거하소서.
(11) 중국의 제도는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사방의 습속은 각기 그 토질을 따르니 다 고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예악ㆍ시서의 가르침과 군신ㆍ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비루한 풍속을 고쳐야 되겠지마는, 그밖의 거마ㆍ의복의 제도는 지방의 풍속대로 하여 사치와 검소를 알맞게 할 것이며, 구태여 중국과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12) 여러 섬에 사는 백성들은 그 선대의 죄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생장하여 생계가 매우 어려운데 또 광록시(光祿寺)에서 수시로 조세를 거두어들이니, 그들이 날로 곤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주ㆍ군의 예(例)에 따라 그 공물과 요역을 공평하게 하소서.
(13) 우리나라에서는 봄에는 연등을 설치하고 겨울에는 팔관(八關)을 베푸는데, 사람을 많이 동원하고 노역이 심히 번다하니, 원컨대 이를 더 덜어서 백성의 힘을 펴주소서. 또 갖가지의 우인(偶人)을 만들어 공비(工費)가 매우 많이 드는데 한 번 바치고 난 후에는 바로 부수어 버리니, 이 또한 매우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인은 흉례(凶禮)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이므로 서조(西朝 중국)의 사신이 그 전에 와서 이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쳤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사용을 허락하지 마소서.
(14) 《역경(易經)》, '성인(聖人)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천하가 화평하다.' 하였으며, 《논어(論語)》에, '한 일 없이[無爲] 세상이 다스려진 이는 순(舜)이다. 대체 무엇을 하였던가? 자기 몸을 공손히 하여 바르게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순일한 덕과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고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신하를 예우한다면, 누군들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와서는 좋은 계책을 말씀드리고 물러가서는 임금을 바로잡고 도우려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논어》에 이른바, '임금이 신하를 예의로 대우하면 신하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 한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날로 더욱 조심하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접할 적에 공손히 할 것을 생각하고, 혹시 죄지은 자가 있을 때 처벌의 경중을 모두 법대로 결정한다면 태평의 업(業)을 곧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 태조는 궁내에 소속된 노비가 궁내에서 공역(供役)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교외에 나가 살면서 밭을 갈아 세를 바치게 하고, 내구(內廏)의 말은 현재 타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구(外廏)에 나누어 보내 기르도록 하여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였습니다. 그런데, 광종 때에 와서는 불사를 많이 베풀어 역사(役使)가 날로 번다해져서 이내 밖에 있는 노비를 불러들여 역사에 충당하니, 내궁(內宮)의 용도로는 이를 지급하는 데 부족하여 창고 쌀까지 모두 소비하였습니다. 지금은 내구에서 많은 말을 길러 소비하는 비용이 매우 많아서 백성들이 그 해를 입으니 만약 변방의 난리라도 난다면 군량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일체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중의 노비와 내구마의 수효를 참작하여 정하고, 그 나머지는 다 밖으로 나누어 보내소서.
(16) 세속에서 선근(善根)을 심는다는 명분을 내어 각기 소원에 따라 절을 지어 그 수효가 매우 많은데, 또 서울과 지방의 중들이 앞다투어 절을 지으려고 주ㆍ군에 널리 권하니, 수령이 백성을 동원하여 관가(官家)의 역사(役事)보다 더 서둘러 일을 시키므로 백성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컨대, 엄하게 더욱 금단(禁斷)하여 노역을 덜어주소서.
(17) 《예기(禮記)》에, '천자는 당(堂)의 높이가 9척이며 제후는 당의 높이가 7척이다.' 하였으니 본래 일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근래에는 사람의 지위가 높고 낮은 구분도 없이 재력(財力)만 있으며 모두 집짓는 일을 먼저 할 일로 여깁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ㆍ군ㆍ현과 정(亭)ㆍ역(驛)ㆍ진도(津渡)의 세력 있는 자들이 앞다투어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어기니, 한 집안의 힘만 다 들였을 뿐 아니라 실상은 백성을 괴롭힌 것이므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지위가 높고 낮은 사람의 가옥 제도를 참작해 정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이를 준수하도록 하고, 이미 제도에 어긋나게 지은 집 또한 헐어내어 뒷날의 사람에게 경계하소서.
(18) 불경을 쓰고 불상을 만드는 것은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일 뿐이니, 어찌 진귀한 보배로 장식하여 도적이 도둑질할 마음을 내도록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전에 불경은 모두 황지(黃紙)에 쓰고 또 전단목(旃檀木)으로 두루마리축을 만들었으며, 그 초상은 금ㆍ은ㆍ구리ㆍ철은 쓰지 않고 돌ㆍ흙ㆍ나무만 썼으므로 이를 훔쳐 가거나 부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라 말기에 불경과 불상에 모두 금ㆍ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정도에 지나치자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고, 장사아치들이 불상을 훔치거나 부수어 서로 사고 팔아서 생계를 도모하기까지 하였는데 근대에 와서도 그 남은 풍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원컨대 엄중히 금단하여 그 폐단을 고치게 하소서.
(19) 옛날에 진(晉) 나라의 덕이 쇠하자, 난(欒)ㆍ극(郤)ㆍ서(胥)ㆍ원(原)ㆍ호(狐)ㆍ속(續)ㆍ경(慶)ㆍ백(伯)(진 나라 귀족의 성씨)이 천인 신분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우리 삼한은 공신의 자손이 매양 왕의 특사(特赦) 명령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공신의 자손을 포록(褒錄)한다고 하면서도 작(爵)을 받은 일은 없고 천인 속에 섞여 있으니 신진(新進)의 무리들이 대부분 업신여겨서 원망이 이 때문에 일어납니다. 더구나 광종은 말년에 조정의 신하를 죽이고 내쫓아 세가(世家)의 자손이 가계를 계승하지 못하였으니, 여러 차례 은사(恩赦)의 명령에 의하여 그 공신의 등제(等第)에 따라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소서. 또 경자년(940)의 전과(田科)와 삼한의 후손으로 벼슬한 자 또한 관계(官階)와 직(職)을 헤아려서 준다면 억울함이 풀려 재변이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20) 불법(佛法)을 높이고 믿는 일이 비록 불선(不善)은 아니지마는, 제왕과 사서인이 불법을 위하는 공덕은 실로 같지 않습니다. 서민이야 불법의 공덕을 위하여 노고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요, 허비하는 것은 자기의 재물이니 해가 다른 데 미치지 않으므로 그래도 괜찮지마는, 제왕은 백성의 힘을 노고시키고 백성의 재물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무제(梁武帝)가 존귀한 천자로서 필부의 착한 일을 닦자,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여겼던 것은 이런 이유였습니다. 이 때문에 제왕은 그러한 점을 깊이 염려하고 일을 모두 적당하게 참작하여 폐단이 신민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사람의 화복과 귀천은 모두 날 때부터 타고 났으니 마땅히 순하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불교를 높이는 자는 다만 내생의 인과를 위하여 덕을 심을 뿐이므로, 현재의 응보에는 이익을 받기가 드무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아마도 이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삼교(三敎 유(儒)ㆍ불(佛)ㆍ선(仙))가 각기 업으로 삼아 행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 혼합하여 통일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오늘날의 할 일입니다. 오늘날은 지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머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또한 그릇된 것이 아닙니까. 임금은 마땅히 사사로움이 없는 한 마음으로 만물을 널리 구제해야 될 것인데, 어찌 원하지도 않은 사람을 노역시키고 창고의 저축을 허비하여 결코 없을 이익을 구하겠습니까. 옛날에 당 나라 덕종(德宗) 비(妃)의 아버지 왕경선(王景先)과 부마(駙馬) 고염(高恬)이 임금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금동으로 된 불상을 만들어 바치자, 덕종이 말하기를, '짐은 일부러 공덕을 쌓는 것은 공덕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 보내었습니다. 이것은 그 실정이 비록 진실은 아니더라도, 신민에게 이익이 없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왕조에서는 겨울과 여름에 강회(講會)를 하고 선왕ㆍ선후(先后)의 기일에 재를 올리는 일을 해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취하거나 버릴 수는 없지마는, 그 밖의 줄일 만한 것은 줄여 주소서.
(21) 《논어(論語)》에, '제게 해당된 귀신이 아닌데도 이를 제사지내면 아첨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좌전(左傳)》에, '귀신은 그 족류(族類)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른바 '음사(淫祀)는 복이 없다.' 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는 종묘ㆍ사직의 제사는 오히려 법대로 하지 않는 것이 많으면서 그 산악의 제사와 성수(星宿)의 초제(醮祭)는 도에 지나치게 번거로우니, 이른바 '제사는 자주 지내서는 안 되니, 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불경(不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는 마음을 재계하고 공경을 다하여 진실로 게으름이 없으시지마는, 그 제향하는 관원이 이를 예사로운 일로 보아 싫어하고 게을리하여 공경을 다하지 않으니 귀신이 기꺼이 흠향하려 하겠습니까. 옛날에 한문제(漢文帝)는 모든 제사에는 유사를 시켜서 공경만 하고 복을 빌지 않았으니, 그 식견이 뛰어나 성덕(盛德)이라 이를 수 있겠습니다. 만약 신명이 앎이 없다면 어찌 능히 복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가 앎이 있다면, 자기만 이익을 보려고 아첨하는 것은 군자에게도 오히려 기쁘게 하기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신명이겠습니까.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그 역력(力役)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만약 백성의 힘을 쉬게 하여 환심을 얻는다면 그 복이 반드시 기원하는 복보다 많을 것이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별례(別例)로 기원하는 제사를 없애고 항상 자신을 공손히 하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을 지니고서 하늘을 감동시키면 재변은 저절로 가고 복록이 저절로 올 것입니다.
(22) 본조의 양민과 천민에 관한 법은 시행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태조가 창업하신 초기에 본래 노비를 가졌던 사람을 제외하고 그 외에 본래 노비가 없던 신하들이 종군하여 포로를 얻기도 하고 사람을 사서 노비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태조께서 일찍이 포로를 석방하여 양민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공신의 마음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편의에 따르도록 허용했더니 60여 년에 이르도록 공소(控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노비를 안험(按驗)하여 그 시비(是非)를 분별하게 하자, 이에 공신의 무리들이 모두 원망하였으나 간(諫)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대목왕후(大穆王后)가 간절히 간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천한 노예들이 때를 만난 듯이 존귀한 이를 업신여기며 앞다투어 허위 사실을 지어내 본주인을 모함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광종은 스스로 화(禍)의 원인을 만들어 놓고도 능히 이를 막아 끊지 못했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억울한 사람을 잘못 죽인 일이 매우 많아 크게 덕을 잃었습니다. 옛날에 후경(侯景)이 양(梁) 나라 대성(臺城)을 포위하였을 때에, 근신(近臣)인 주이(朱异)의 집 종이 성벽을 넘어 후경에게 항복했는데 후경이 의동(儀同)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 종이 말을 타고 금포(錦袍)를 입고 성에 다다라 부르짖기를, '주이는 벼슬한지 50년 만에 겨우 중령군(中領軍)이 되었으나 나는 처음 후왕(侯王 후경)에게 벼슬하여 벌써 의동이 되었다.' 하니, 이에 성 안의 종들이 앞다투어 나와 후경에게 항복하여 대성이 드디어 함락되었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전대의 일을 깊이 거울삼아, 천한 자가 귀한 이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노비와 주인의 신분에 있어서는 중도(中道)를 잡아 처리하소서. 대저 벼슬이 높은 이는 이치를 알기에 법에 어긋나는 일이 적지마는, 벼슬이 낮은 이는 진실로 자기의 잘못을 치장해 꾸밀 수 있을 만큼 지혜가 있는 이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속여서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궁원(宮院)과 공경(公卿) 중에 간혹 위세를 가지고 나쁜 일을 한 자가 있지마는, 지금은 정치가 밝아 사정(私情)이 없으니, 어찌 능히 방자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周) 나라 유왕(幽王)ㆍ여왕(厲王)이 도를 잃었다 해서 선왕(宣王 여왕의 아들)ㆍ평왕(平王 유왕의 아들)의 덕을 가릴 수는 없으며, 한(漢) 나라 여후(呂后 문제(文帝)의 적모(嫡母))가 덕이 없었다 해서 문제ㆍ경제(景帝)의 어짊에 누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하니 지금 노비와 주인의 송사를 판결할 때는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힘쓸 것이며, 전대에 판결한 것은 다시 캐고 따져서 세상을 어지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승로(承老)가 왕이 정치에 뜻이 있어 함께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보고 이내 이 글을 바쳤는데, 나머지 6조는 경술년의 병란에 잃어버렸다.
○ 겨울 10월에 제(制)하기를, “민간에서 빚을 내주어 이자를 받는 자는 원금과 이자가 서로 같으면 이자를 다시 받지 말라." 하였다.
○ 12월에 제(制)하기를, “백관이 부모의 기일을 당하면 하루 낮과 이틀 밤의 휴가를 주고, 조부모의 기일은 친아들이 없으면 또한 부모 기일의 예(例)에 따르라." 하였다.
○ 이해에 시랑(侍郞) 김욱(金昱)을 송에 보내어 왕위의 계승을 알렸다.
○ 왕의 생일을 천춘절(千春節)로 삼으니, 절일(節日)의 이름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주-D001] 봉사 : 
중요한 일로 임금에게 소(疏)를 올릴 때에 밀봉하여 올리는 것을 말한다.
[주-D002] 운수는 천 년 : 
천 년만에 황하수(黃河水)가 한 번 맑아지면 성인(聖人)이 난다는 말이 있다.
[주-D003] 감무(監撫) : 
임금이 출정할 때에 태자가 남아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 감국(監國)이요, 임금을 따라 출정하는 것을 무군(撫軍)이라 한다.
[주-D004] 재력을……맺으며 : 
불법을 숭배하여 절을 짓는 등의 좋은 일을 베풀면 착한 인연을 심어 복을 받는 것이다.
[주-D005] 삼대(三代) : 
고대 중국의 태평였던 하(夏)ㆍ은(殷)ㆍ주(周)를 말한다.
[주-D006] 작은……못한다 : 
춘추시대에 노(魯) 나라 장공(莊公)이 제(齊) 나라와 싸울 때에 조귀(曹劌) 묻기를, “싸울 만한 준비가 무엇입니까?" 하니, 장공이 답하기를, “모든 음식을 백성과 나누어 먹었다." 하니, 조예가, “적은 은혜는 두루 베풀어지지 못합니다." 하였다.
[주-D007] 불보(佛寶) : 
보(寶)는 고려 때 공공 사업을 운영하기 위하여 재단을 설정하고 그 이익으로 경비를 지출하는 공적인 이식 기관(利息機關)인데, 불보(佛寶)는 불교에 속한 보를 말한다.


   *** 초록색 글<예, 마맥 磨麥 ㅡ 보리알 처럼 작은 움싹차로 만든 아차(芽茶)인 맥과차 麥顆茶를 갈으신> 등은 본문의 이해를 위하여 전재자가 보충함.




   [壬午元年 宋 大平興國七年,遼 乾亨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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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春三月,改百官號,以內議省,爲內史門下,廣評省,爲御事都省。○夏四月,令男子十歲以上,著帽。○六月,制曰,后德惟臣,朕新摠萬幾,恐有闕政,其京官五品以上,各上封事,論時政得失,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崔承老,上書,略曰,臣竊見開元史臣吳兢,撰進貞觀政要,勸玄宗,勤修太宗之政,蓋以事體相近,不出一家,而其政休明,可爲師範故也,自我太祖,開國已來,臣所及知者,皆誦在臣心,今謹錄五朝政化善惡之跡,可鑑可戒者,謹條奏以聞,伏審我太祖神聖大王之御極也,時當百六,運協一千,當初翦亂夷凶,天生前主,而假手在後,膺圖受命,人和聖德以歸心,於是,値金雞自滅之期,乘丙鹿再興之運,不離鄕井,便作闕庭,定遼浿之驚波,得秦韓之舊地,十有九載,統一寰瀛,可謂功莫高矣,若契丹者,與我連境,宜先修好,而彼又遣使求和,我乃絶其交聘者,以彼國嘗與渤海連和,忽生疑貳,不顧舊盟,一朝殄滅,故太祖以爲無道之甚,不足與交,所獻駱駞,亦皆棄而不畜,其深策遠計,防患乎未然,保邦于未危者,有如此也,渤海旣爲丹兵所破,忽汗亡時,其世子大光顯等,以我國家擧義而興,領其餘衆數萬戶,日夜倍道來奔,太祖,憫念尤深,迎待甚厚,至賜姓名,又附之宗籍,使奉其本國祖先之禋祀,其文武參佐以下,亦皆優霑爵命,其急於存亡繼絶,而能使遠人來服者,又如此也。百濟甄萱,兇悖好亂,殺主虐民,太祖聞之,不遑寢食,行師討罪,卒成匡復,其不忘舊主,定傾扶危者,又如此也。自新羅之季,至我國初,西北邊民,每被女眞蕃騎,往來侵盜,太祖斷自宸衷,遣一良將鎭之,不勞寸刃,反令蕃衆來歸,自是塞外塵淸,邊境無虞,其知人善任,柔遠能邇者,又如此也。新羅君臣,以運盡數窮,自求歸化,讓至再三,然後許之,東自溟州,至興禮府,其間百十餘城,莫不懷于有仁,應時來服,其能以禮讓,而人無不服者,又如此也。唯南平百濟,不得已而用兵,凡大興師,前後數次,然旌麾之下,戎馬之前,或有臨陣便降,或有望風懾伏,雖交鋒刃,不欲殺傷,可謂仁者無敵也,及甄萱,積惡數十餘年,然後,終爲逆豎所囚,逃犇于我,而請兵誅逆,太祖,聞之,厚禮迎致,及其殞沒,而亦優賻贈,其道貫幽明,義周存沒者,又如此也。洎平百濟,車駕入城,哀恤窮民,厚加慰諭,下令諸軍,秋毫無犯,且南北久分,新舊又別,撫之如一,終始不渝,其含弘寬簡,又如此也。自成一統以來,勤政八年,事大以禮,交隣以道,居安無逸,接下思恭,貴道德,崇節儉,卑宮室,而期於粗庇風雨,惡衣服,而取其但禦寒暑,好賢樂善,捨己從人,恭儉禮讓之心,發於天性,況生長民間,備嘗艱險,衆人情僞,無不具知,萬事安危,亦能先見,所以賞刑不失其時,邪正不同其路,其知勸懲之方,得帝王之體者,又如此也。加以知人,不失其才,御下,必得其力,任賢勿貳,去邪勿疑,尊釋敎,重儒術,爲君之令德斯備,有國之嘉猷可遵,但以創業之初,致平日淺,宗廟社稷,且未光崇,禮樂文物,猶多闕乏,凡百官司之品式,及諸內外之規儀,未及修定,忽遺弓劍,蓋國人之不幸,寔天道之難諶,深可惜也,惠宗久在東宮,累經監撫,尊禮師傅,善接賓僚,由是令名,聞於朝野,及初嗣位,衆擧欣然,時,有人,譖定宗兄弟,謂有異圖,惠宗聞而不答,亦無所問,恩遇愈隆,待之如初,故人皆服其大度,旣而,不修德政,過惜身命,左右前後,常以甲士相隨,蓋爲疑人太甚,大失爲君之體,加以偏賞將士,恩澤不均,故內外怨嗟,人心携貳,又卽位踰年,便致沈痾,牀枕之間,淹延歲月,於是,朝臣賢士,不獲近前,鄕里小人,常居臥內,厥疾彌篤,嗔恚日增,三年之間,民不見德,至于晏駕之日,粗得免其橫禍,可不痛哉。定宗在藩邸,早有令聞,及惠宗寢疾彌留,王規等,潛有所圖,窺覦王室,定宗先認之,密與西都忠義之將,定計而爲備,及內難將作,衛兵大至,故姦計不成,群兇受誅,雖由天命,亦在人謀,豈不偉歟,自定宗至今,三十有八年,其間洪祚之不絶,亦定宗之力也。定宗旣以連枝得繼,夙夜孜孜,銳情求理,或燃燭而引見朝士,或旰食而聽斷萬幾,故卽位之初,人皆相慶,及乎誤信圖讖,決議遷都,又天性剛毅,固執不移,暴徵作役,勞動人夫,怨讟由是而興,灾應速於影響,未及西遷,求辭南面,誠可痛也。光宗受定宗顧命,禮有加於接下,鑒不失於知人,不阿親貴,而常抑豪强,無棄疎賤,而惠鮮鰥寡,自卽位之年,至于八載,政敎淸平,刑賞不濫,及雙冀投化以來,崇重文士,恩禮過隆,由是非才濫進,不次驟遷,未浹歲時,便爲卿相,或連宵引見,或繼日延容,以此圖歡,怠於政事,讌遊靡絶,於是,南北庸人,皆接以殊禮,所以後生爭進,舊德漸衰,雖重華風,不取華之令典,雖禮華士,不得華之賢才,於百姓,則益消膏血之資,於四方,則剩得浮虛之譽,因此不復憂勤庶政,而接見賓僚,故猜忌日深,都兪日阻,時政得失,無敢言者,加以酷信佛事,常行之齋設,旣多,別願之焚修,不少,專求福壽,但作禱祈,窮有涯之財力,造無限之因緣,自輕至尊,好作小善,又於出入宴遊,莫不窮奢極侈,以其目前無事,將謂法力使然,凡所作爲,不欲悛改,宮室,必踰於制度,服食,須極於珍纖,土木之功,不以時,伎巧之作,無休日,略計常時一歲之費,足爲太祖十年之費,又及末年,多殺無辜,臣愚以爲,若使光宗恒思恭儉節用,勤政如初,豈其祿命不永,纔得享年五十而已哉。況自庚申,至乙亥,十六年間,姦兇競進,讒毀大興,君子,無所容,小人,得其志,遂至子逆父母,奴論其主,上下離心,群臣解體,舊臣宿將,相次誅夷,骨肉親姻,亦皆翦滅,而況惠宗之克全兄弟,定宗之能保邦家,若論恩義,可謂重也,兩朝皆唯有一子,亦不使保其性命,又至末年,於己一子,亦生疑忌,故景宗,方在東宮,每不自安,幸而得嗣其位,嗟乎,何其善於前,而早得令名,不善於後,乃至斯乎,深可痛也。景宗生於深宮之中,長於婦人之手,門外之事,不曾見知,但以天性聰明,能免悔尤,得嗣天位,焚積年讒毀之書,放累歲無辜之獄,冤憤悉除,朝野稱慶,然不諳政體,專任權豪,害及宗親,咎徵先見,後雖覺悟,責無所歸,自此邪正不分,賞刑不一,未及于理,復倦于勤,遂至色荒,喜觀鄕樂,繼以博奕,終日無厭,左右唯中官內豎而已,由是,君子之言,無自而入,小人之語,有時而從,早有美名,而晩無令德,所謂靡不有初,鮮克有終,忠臣義士,誰不痛之,此乃聖上,親所見知者也。然景宗,亦有足稱美者焉,蓋其當初遘疾,未及危篤,遂於臥內,引見聖上,執手與言,付囑軍國,不唯社稷之福,亦是人民之幸也,唯惠景二宗,嗣位皆自春宮,人無異望,至於堂從兄弟,非有分明付托,則爭端必起,惠宗兩年寢疾,而終有子,曰興化郞君,而雖或年少,以無明囑,故事歸於諸弟,定宗自被群臣翊戴,以纂大業,臨終亦早傳位於光宗,以安宗社,定景二王之遺命,可謂明矣。又曾見惠定光,三王相繼之初,百事未寧之際,兩京文武,半已殺傷,況屬光宗末年,世亂讒興,凡繫刑章,多是非辜,歷世勳臣宿將,皆未免誅鋤而盡,及景宗踐祚,舊臣之存者,四十餘人耳,其年亦有遇害者多,皆是後生讒賊,誠不足惜,唯天安鎭州二郞君,本皇家之枝葉也,光宗猶自寬容,意不置之於法,至景宗朝,足爲藩屛,却被權臣之賊害,寧不痛惜,伏惟殿下,以上聖之德,遇中興之期,因先君,遜讓之恩,纂烈聖厖鴻之業,無一物不樂其生,無一夫不獲其所,內外同歡,人神相慶,所謂天授人與者也。聖上,若克遵太祖之遺風,何異玄宗,追慕文皇之故事耶,聖上,又能取捨四朝之近事,則惠宗有保全骨肉之功,可謂友于之義也。定宗,先知亂萌,克定蕭墻之難,而再安宗社,傳授至命,可謂智謀之明也。光宗,八年之理,可方三代,又朝廷儀制,頗有可觀,所謂善否之均也。景宗,放先朝冤獄數千,燒積年讒毀之文,所謂寬仁之至也。凡四朝爲政之跡,大略如是,聖上,宜取其善者而行之,見其不善而誡之,除不急之務,罷無益之勞,但要君安於上,民悅於下,因善始之心,慮克終之美,日愼一日,雖休勿休,雖貴爲君主,而不自尊大,富有才德,而不自驕矜,則福不求而自至,灾不穰而自消,聖君,胡不萬年,王業,豈唯百世而已哉。臣,又錄時務二十八條,隨狀別封以進。一,我國家,統三以來,四十七年,士卒,未得安枕,糧餉,未免糜費者,以西北,隣於戎狄,而防戍之所,多也,願聖上以此爲念,以馬歇灘爲界,太祖之志也,鴨江邊,石城爲界,大朝之所定也,乞擇要害,以定疆域,選土人,能射御者,充其防戍,又選其中二三偏將,以統領之,則京軍,免更戍之勞,芻粟,省飛輓之費。一,竊聞聖上,爲設功德齋,或親碾茶,或親磨麥,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此弊,始於光宗,崇信讒邪,多殺無辜,惑於浮屠果報之說,欲除罪業,浚民膏血,多作佛事,或設毗盧遮那懺悔法,或齋僧於毬庭,或設無遮水陸會於歸法寺,每値佛齋日,必供乞食僧,或以內道場餠果,出施丐者,或以新池穴口,與摩利山等處魚梁,爲放生所,一歲四遣使,就其界寺院,開演佛經,又禁殺生,御廚肉膳,不使宰夫屠殺,市買以獻,至令大小臣民,悉皆懺悔,擔負米豆柴炭馬料,施與中外道路者,不可勝紀,然以旣信讒愬,視人如草莽,誅殺者,堆積如山,常竭百姓膏血,以供齋設,佛如有靈,豈肯應供,當是時,子背父母,奴婢背主,諸犯罪者,變形爲僧,及遊行丐乞之徒,來與諸僧,相雜赴齋者,亦多,有何利益,又使僧善會,主其施與,其僧以餠米,妄費於他,緣此不得壽終,曝尸道傍,時議譏之,願聖上正君王之體,不爲無益之事。一,我朝侍衛軍卒,在太祖時,但充宿衛宮城,其數不多,及光宗,信讒,誅責將相,自生疑惑,簡選州郡有風彩者,入侍,時議以爲繁而無益,至景宗朝,雖稍減削,洎于今時,其數尙多,伏望,遵太祖之法,但留驍勇者,餘悉罷遣,則人無嗟怨,國有儲積。一,聖上,以漿酒豉羹,施與行路,臣,竊謂,聖上,欲效光宗,消除罪業,普施結緣之意,此,所謂小惠未遍也,若明其賞罰,懲惡勸善,足以致福,如此碎事,非人君爲政之體,乞罷之。一,我太祖,情專事大,然猶數年一遣行李,以修聘禮而已,今非但聘使,且因貿易,使价煩夥,恐爲中國之所賤,且因往來,敗船殞命者多矣,請自今,因其聘使,兼行貿易,其餘非時,買賣,一皆禁斷。一,佛寶錢穀,諸寺僧人,各於州郡,差人勾當,逐年長利,勞擾百姓,請皆禁之,以其錢穀,移置寺院田莊,若其主典,有田丁者,幷取之,以屬于寺院莊所,則民弊稍減矣。一,王者之理民,非家至而日見之,故分遣守令,往察百姓利害,我聖祖,統合之後,欲置外官,蓋因草創,事煩未遑,今竊見鄕豪,每假公務,侵暴百姓,民不堪命,請置外官,雖不得一時盡遣,先於十數州縣,幷置一官,官各設兩三員,以委撫字。一,伏見聖上,遣使迎屈山僧如哲,入內,臣愚,以爲,哲果能福人者,其所居水土,亦是聖上之有,朝夕飮食,亦是聖上之賜,必有圖報之心,每以祝釐爲事,何煩迎致,然後,敢施福耶,曩者,有善會者,規避徭役,出家居山,光宗,致敬盡禮,卒之善會,暴死道傍,曝露其尸,如彼凡僧,身且取禍,何暇福人,請放哲還山,免致善會之譏。一,新羅之時,公卿,百僚,庶人,衣服鞋韤,各有品色,公卿百僚,朝會則著公襴,具穿執,退朝則逐便服之,庶人百姓,不得服文彩,所以別貴賤,辨尊卑也,由是,公襴,雖非土產,百僚,自足用之,我朝,自太祖以來,勿論貴賤,任意服著,官雖高,而家貧,則不能備公襴,雖無職而家富,則用綾羅錦繡,我國土宜,好物少,而麤物多,文彩之物,皆非土產,而人人得服,則恐於他國使臣迎接之時,百官禮服,不得如法,以取恥焉,乞今百僚,朝會,一依中國及新羅之制,具公襴穿執,奏事之時,著韤靴,絲鞋,革履,庶人不得著文彩紗縠,但用紬絹。一,臣,聞,僧人,往來郡縣,止宿館驛,鞭撻吏民,責其迎候供億之緩,吏民,疑其銜命,畏不敢言,弊莫大焉,自今禁僧徒,止宿館驛,以除其弊。一,華夏之制,不可不遵,然四方俗習,各隨土性,似難盡變,其禮樂詩書之敎,君臣父子之道,宜法中華,以革卑陋,其餘車馬,衣服,制度,可因土風,使奢儉得中,不必苟同。一,諸島居民,以其先世之罪,生長海中,活計甚難,又光祿時,徵求無時,日至窮困,請從州郡之例,平其貢役。一,我國春設燃燈,冬開八關,廣徵人衆,勞役甚煩,願加減省,以紓民力,又造種種偶人,工費甚多,一進之後,便加毀破,亦甚無謂也,且偶人,非凶禮不用,西朝使臣,嘗來見之,以爲不祥,掩面而過,願自今勿許用之。一,易曰,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語曰,無爲而治者,其舜也,夫何爲哉,恭己正南面而已,聖人所以感動天人者,以其有純一之德,無私之心也,若聖上執心撝謙,常存敬畏,禮遇臣下,則孰不罄竭心力,進告謨猷,退恩匡贊乎,此所謂君使臣以禮,臣事君以忠者也,願聖上,日愼一日,不自驕滿,接下思恭,儻或有罪者,輕重並論如法,則大平之業,可立待也。一,太祖,除內屬奴婢,在宮供役外,出居外郊,耕田納稅,廏馬,當御者外,分遣外廏喂養,以節國用,至光宗,多作佛事,役使日繁,乃徵在外奴婢以充役使,內宮之分,不足支給,幷費倉米,今內廏,養馬數多,糜費甚廣,民受其害,如有邊患,糧餉不周,願聖上,一依太祖之制,酌定宮中奴婢,廏馬之數,餘,悉分遣於外。一,世俗,以種善爲名,各隨所願,營造佛宇,其數甚多,又有中外僧徒,競行營造,普勸州郡長吏,徵民役使,急於公役使,民甚苦之,願嚴加禁斷,以除勞役。一,禮云,天子堂九尺,諸侯堂七尺,自有定制,近來,人無尊卑,苟有財力,則皆以營室爲先,由是,諸州郡縣,及亭驛,津渡豪右,競構大屋,踰越制度,非但盡一家之力,實勞百姓,其弊甚多,伏望命禮官,酌定尊卑,家舍制度,令中外遵守,其已營造踰制者,亦令毀撤,以戒後來。一,寫經塑像,只要傳久,何用珍寶爲飾,以啓盜賊之心,古者,經皆黃紙,且以旃檀木,爲軸,其肖像,不用金銀銅鐵,但用石土木,故無竊毀者,新羅之季,經像,皆用金銀,奢侈過度,終底滅亡,使商賈,竊毀佛像,轉相賣買,以營生產,近代餘風未殄,願嚴加禁斷,以革其弊。一,昔晉德衰,而欒郤,胥原,狐續,慶伯,降在皁隷,我三韓功臣子孫,每蒙宥旨,必云褒錄,而未有受爵,混於皁隷,新進之輩,多肆陵侮,怨咨以興,且光宗末年,誅黜廷臣,世家子孫,未得承家,請從累次恩宥,隨其功臣等第,錄其子孫,又庚子年田科,及三韓後入仕者,亦量授階職,則冤屈得伸,而灾害不生矣。一,崇信佛法,雖非不善,然帝王士庶之爲功德,事實不同,若庶民所勞者,自身之力,所費者,自己之財,害不及他,猶之可也,帝王則勞民之力,費民之財,昔梁武帝,以天子之尊,修匹夫之善,人以爲非者以此,是以帝王,深慮其然,事皆酌中,弊不及於臣民。臣聞人之禍福貴賤,皆稟於有生之初,當順受之,況崇佛敎者,只種來生因果,鮮有益於見報,理國之要,恐不在此,且三敎,各有所業而行之者,不可混而一之也,行釋敎者,修身之本,行儒敎者,理國之源,修身是來生之資,理國乃今日之務,今日至近,來生至遠,舍近求遠,不亦謬乎。人君,惟當一心無私,普濟萬物,何用役不願之人,費倉庫之儲,以求必無之利乎,昔,德宗妃父,王景先,駙馬高恬,爲聖壽延長,鑄金銅佛像,獻之,德宗曰,朕,以有爲功德,謂無功德,還其佛像於二人,是其情,雖不實,然欲令臣民,不得作無利事者,如此。我朝,冬夏講會,及先王先后忌齋,其來已久,不可取舍,其他可減者,請滅之。一,語曰,非其鬼而祭之,諂也,傳曰,鬼神,非其族類不享,所謂淫祀,無福,我朝,宗廟社稷之祀,尙多未如法者,其山嶽之祭,星宿之醮,煩黷過度,所謂祭不欲數,數則煩,煩則不敬,雖聖上,齋心致敬,固無所怠,然其享官,視爲尋常事,厭倦而不致敬,則神,其肯享之乎,昔漢文帝,凡祭祀,使有司,敬而不祈,其見超然,可謂盛德也。如使神明,無知,則安能降福,若其有知,私己求媚,君子,尙難悅之,況神明乎,祭祀之費,皆出於民之膏血,與其力役,臣愚,以爲,若息民力,而得歡心,則其福,必過於所祈之福,願聖上,除別例祈祭,常存恭己責躬之心,以格上天,則災害自去,福祿自來。一,本朝良賤之法,其來尙矣,我聖祖創業之初,其群臣,除本有奴婢者外,其他本無者,或從軍得俘,或貨買奴之,聖祖,嘗欲放俘爲良,而慮動功臣之意,許從便宜,至于六十餘年,無有控訴者,逮至光宗,始令按驗奴婢,辨其是非,於是,功臣等,莫不嗟怨,而無諫者,大穆王后,切諫不聽,賤隷得志,陵轢尊貴,競搆虛僞,謀陷本主者,不可勝紀,光宗自作禍胎,不克遏絶,至於末年,枉殺甚多,失德大矣。昔侯景,圍梁臺城,近臣朱异家奴,踰城投景,景,授儀同,其奴乘馬披錦袍,臨城呼曰,朱异,仕宦,五十年,方得中領軍,我始仕侯王,已爲儀同,於是,城中僮奴,競出投景,臺城遂陷,願聖上,深鑑前事,勿使以賤陵貴,於奴主之分,執中處之,大抵官高者識理,鮮有非法,官卑者,苟非智足以飾非,安能以良作賤乎,惟宮院及公卿,雖或有以威勢作非者,而今政鏡無私,安能肆乎,幽厲失道,不掩宣平之德,呂后不德,不累文景之賢,唯當今判決,務要詳明,俾無後悔,前代所決,不須追究,以啓紛紜,承老見王有志,而可與有爲,乃進此書,餘六條,逸於庚戌兵難。○冬十月制,令民間貸債出息者,子母相侔,更勿取息。○十二月制,百官遇父母忌,給暇一日兩宵,祖父母遠忌,無親子,則亦依父母忌例。○是歲,遣侍郞金昱,如宋,告嗣位。○以王生日,爲千春節,節日之名,始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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