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란 무엇인가요? / 다음 Tip자료 外

2019. 1. 9. 01:13차 이야기


질문

팔관회란 무엇인가요?


   

   팔관회매년 11월 15일에 거행되던 고려시대 최고의 국가 행사로서 불교의례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습속의례가 결합된 종교 제전이자 축제였다. 팔관회는 본래 불교신도가 하루 동안 엄숙히 팔관재계(八關齋戒)를 지키기 위해 열었던 불교법회에서 기인한다.

   팔관의 '관'은 금(禁)한다는 의미로 '팔관'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 높고 사치한 자리에 앉거나 꽃과 향수로 치장함, 가무음곡, 오후 식사를 금하는 팔계를 범하지 않음을 뜻한다. 일반 재가 신자들이 일상 생활에서는 팔계를 준수하기는 어려우므로 불교에서는 매달 육재일(六齋日)인 6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에 한하여 팔계를 지키는 수행의 날로 삼았다.


   고대 인도에서는 육재일이면 악귀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질병을 안겨준다고 하여, 이 날이 되면 목욕 재계하고 오후에 금식을 하면서 근신하였다 한다. 팔관재계가 중국의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 선을 닦고 복을 지어 정토왕생(극락)에 이르는 공덕행위로 중요시되면서 점차 규모도 커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법회 형식으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팔관회는 삼국시대부터 개최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팔관회는 호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산천용신제(山川龍神祭)와 10월 제천행사 등을 불교의식과 결합하여 사찰에서 10월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신라는 팔관회를 통하여 각 부족의 토속 신앙들을 통합하여 종교의식의 단일화를 이룸으로써 중앙집권화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또한 팔관회는 위령제의 역할도 하였다. 당시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많은 전사자들이 나왔다.


  『팔관재경(八關齋經)』에 의하면 팔관회를 거행하면 그 공덕으로 병든 사람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미륵불이 있는 도솔정토로 극락왕생한다고 한다. 신라 왕실은 팔관회에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제의 기능을 부가함으로써 호국을 위해 죽어간 영령들을 추모함과 아울러 국가 차원의 결속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미륵불을 자처하였던 궁예(弓裔) 역시 팔관회를 태봉의 국가적 불교행사로 도입하여 한해를 마감하는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지닌 축제로 발전시켰다.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 태봉의 팔관회를 계승하여 918년 건국한 해 11월 15일에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팔관회는 고려의 국가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 고려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태조 훈요십조(訓要十條) 에서 "내가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인데, 연등은 부처를 섬기고 팔관은 하늘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 ············ 왕과 신하 모두가 함께 즐기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를 행하도록 하라"고 후대 왕들에게 당부할 만큼 팔관회를 중요시하였다.


   고려시대 팔관회는 수도인 개경에서는 11월, 서경에서는 10월에 보름날을 전후로 하여 사흘간 개최되었다. 특별한 사정으로 간혹 변동되기도 하였으나, 개최 날짜는 고려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대체로 지켜졌다. 나라에서는 팔관회가 열리는 사흘 동안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개경의 팔관회 14일의 소회일(小會日) 행사15일의 대회일(大會日) 행사로 진행되었다. 소회일에 국왕은 편전인 선인전(宣仁殿)을 출발하여 정전인 대관전(大觀殿)으로 행차한다. 근시관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은 후 위장대의 호위 속에서 가마를 타고 대관전을 출발하여 의봉문루(儀鳳門樓)로 행차하여 구정(毬庭)에 도열한 문무백관들로부터 조하를 받았다.


   이 때 지방관들이 파견한 봉표원들도 팔관회 축하 표문과 선물을 봉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함께 가무백희(歌舞百戱)와 음악 공연을 관람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태자를 위시한 문무 관료들이 국왕에게 술잔을 헌수하거나 꽃을 바치면, 국왕이 참여자 모두에게 술과 꽃, 과일, 봉약(封藥)을 하사하는 순서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행사가 끝나면 국왕은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여 고승들을 초빙한 법회를 열어 국운이 번창하고 민심이 편안하기를 기원하였다. 법왕사는 태조가 919년(태조 2년) 개경에 창건한 십찰(十刹) 가운데 하나로 고려의 건국과 역사를 같이하는 중요 사찰이었다. '법왕'은 '법문(法門)의 왕'을 뜻하기도 하고 '정법(正法)으로 통치하는 왕'을 뜻하기도 한다. 법왕사 행차는 법문의 왕이 계시는 법왕사로 정법으로 통치하고 있는 국왕이 행차하여 국민을 위한 법회를 열고 함께 자리를 같이 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대회일 역시 소회일과 마찬가지로 의봉루로 행차하여 문무백관들과 봉표원들로부터 축하 표문과 축하주를 헌수받는 형식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외국 사신들의 조하 의식이 행사 순서에 포함되고 있는 것이 소회일과 다른 점이었다.


   이 때 송나라 상인과 여진, 탐라, 왜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축하 표문과 특산물들을 바쳤는데, 국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음악공연과 가무백회를 관람할 수 있는 좌석을 배정하고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때 각국 상인들도 몰려 들어 국가 간의 무역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팔관회가 거행되는 사흘동안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궁궐의 구정이 개방되어 야간 백희가무가 공연되었으므로 이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궁궐로 몰려 들어 밤새도록 개경 성내가 북적거렸다.


   서경의 팔관회는 개경의 팔관회보다 한달 먼저 10월 15일에 개최되었다. 서경의 팔관회는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태조 왕건은 서경의 지덕(地德)이 왕조 번영에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서경을 중시할 것을 훈요십조에서 당부한 바 있다. 서경의 팔관회는 고구려의 10월 동맹제(東盟祭)를 계승한 것으로 고구려 건국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과 모후인 유화부인(柳花夫人)을 기리는 조상제(祖上祭)의 성격과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서경 팔관회에 재상(宰相)을 파견하여 재제(齋祭)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건국한 해부터 시행되었던 팔관회의 의례 내용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처음 시행되었던 태조 원년의 팔관회 행사를 살펴보면, 구정에 커다란 윤등(輪燈) 설치하고 사방에 향등(香燈)을 벌려 놓아 밤이 새도록 광명과 향기가 가득하도록 하였으며, 양편에 높이 15미터나 되는 연화대 모양의 누대를 설치하고 그 앞에서 백희가무를 공연하였는데 이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와 밤낮을 잊고 갖가지 묘기,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이 때 신라 팔관회의 전통에 따라 사선악부(四仙樂部)와 용, 봉황, 코끼리, 말, 수레, 배 모양의 장식물들을 화려하게 재현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사선악부 화랑의 전통으로 네 명의 국선이 이끄는 낭도들로 구성된 악단이었다. 신라 팔관회 삼국통일 전쟁기에 순국한 화랑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이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의 팔관회의 이러한 성격을 주목하고 고려 팔관회에 후삼국 통일 전쟁 시 순국한 고려의 건국 공신들을 추모하는 위령제로서의 기능을 부가함으로써 결속력을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였다.


   나아가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분열되었던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불교를 주목하고 불교 의례인 팔관회에 여러 가지 성격을 종합하여 고려 최고의 문화축제로 거듭나게 하였다. 이후 팔관회는 점차 의례 절차의 틀이 갖추어 가기 시작하여 정종(靖宗) 즉위년(1034년)에 『고려사』에 수록된 소회일과 대회일로 구성된 의례 형식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팔관회는 고려의 국가의례 가운데 가장 중시되었던 것으로 행사에 막대한 비용과 인력 동원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문종(文宗)대 이를 전담하는 팔관보(八關寶)라는 관청을 개경과 서경에 각각 설치하여 팔관회를 개최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고 지출을 담당하게 하였다. 관원으로 4품 이상 사(使) 1인, 5품 이상 부사(副使) 2인, 임시직 판관(判官) 4인이 임명되었고, 기사(記事) 2인, 기관(記官) 1인, 산사(算士) 1인이 배속되었다.


   고려왕조 500여년 동안 국가의례로서 매년 거행되었던 팔관회는 조선 건국 후 사대부들에 의해 가장 우선적인 철폐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이는 팔관회가 최고 위상의 국가의례로서 고려 문화를 유지해 가는 중요한 장치이자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문화의 청산은 팔관회의 폐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팔관회는 태조 원년(1392년) 도당이 혁파를 주청한 후 폐지되었다. 이후 팔관회는 다시 순수한 불교의 지계행사로 회귀되었고, 조하의식과 명산 대천 등의 토속신에 대한 제사는 유교의례로 편입되었다.



질문

고려 불교 문화

고려의 불교문화에 대해서 자세희 알려주세요. 부탁드려요





   936년에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국가의 창건은 제불의 힘에 의하였으니 선교(禪敎)의 사원을 세우라"고 하였다. 실제로 그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엄(利嚴) 같은 선승들의 적극적인 후원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불교의 종교적인 힘을 중요시하여 후손들에게 불교의 보호를 유언으로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는 흥왕(興王)·법왕(法王)·흥국사(興國寺) 등 10사(十寺)를 개경에다 세우는 등 많은 사찰들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사찰의 난립에서 오는 경제적인 파탄을 방지하고자 사찰 건립의 제한도 동시에 후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역대왕들은 사찰을 누가 많이 짓는가를 다투기나 하듯 서로 사찰 건립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안화사(安和寺) 같은 거찰은 제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고집으로 세운 대표적인 사찰이거니와 이러한 왕들의 시책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고려 일대는 가히 사원국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많은 사원들이 쟁립(爭立)하였다. 따라서 불교문화는 이러한 불교의 국교적인 배경 아래서 융성을 나타냈다. 수많은 불교미술들이 제작되었고, 음악과 문학 등도 불교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했으며, 모든 학문과 사상 등도 불교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깊은 관계에 있었다. 


   고려의 불교문화는 <대장경>의 조판으로 일단 정리를 보게 된다. 대장경의 첫 조조(雕彫) 현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4대 76년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에 완성한 것이지만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거란의 침입에 대항하는 의지를 결집하는 의미에서 고려문화의 우위성과 국가적인 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만들었던 것이다. <대장경> 재조(再雕)는 고종때 몽고전란 통에 이룩된 것이지만 내용의 정확함과 자체의 아름다움 제작의 정교함이 동양에서 조조된 20여 종의 대장경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이름 나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힘은 금속활자를 세계최초로 발명하게끔 했으며, 더욱이 감지(紺紙)에다 금이나 은으로 정성껏 필사(筆寫)하는 사경예술(寫經藝術)이 극도로 발달하여 탄연(坦然) 같은 신필(神筆)을 배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의 불교문화는 인쇄문화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불교는 국가적인 지원과 그들의 상업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날로 교단은 호부(豪富)를 극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호화를 극하는 사치성의 불교문화가 풍미하여 고려의 국가를 쇠퇴로 몰아가기도 하였다. 성리학으로 알려진 신유학(新儒學)이 이러한 정세를 업고 불교에 대담스럽게 도전하면서 등장하여, 불교문화 대신 유교문화를 세운 것이 조선조였다.


   연등회나 팔관회는 온 나라에서 열리고 백성들이 모두 참여하는 것이었으므로 고려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 시대 불교는 고려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팔만대장경 조판을 통해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호국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팔관회’는 고려에서 가장 큰 행사였대요. 불교의 여러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만든 모임이 고구려의 행사인 동맹제와 합쳐지면서 팔관회로 발전했다고 해요.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 10조’에는 팔관회를 ‘하늘신, 산신, 용신 등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사’고 쓰여 있어요. 불교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합쳐진 행사였던 거예요. 팔관회 때 고려 사람들은 하늘신과 바다신에게 나라와 왕실의 편안함과 개인의 행복을 빌었어요. 또 하늘신에게 가을에 추수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고 해요.(팔관회는 추수가 끝난 다음에 열렸대요.)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 각각 이틀 동안 열렸어요. 팔관회가 열리면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과 구경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거렸대요. 행사에는 고려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뿐 아니라 외국 사신과 상인들도 참석했어요. 주로 송나라, 여진, 일본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지요. 그래서 팔관회 기간에는 다른 나라와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대요.


  행사가 시작되면 왕은 궁궐의 누각에 올라가고, 신하들은 누각 아래 뜰에 앉아 축제를 즐겼다고 해요. 왕이 신들에게 절을 하고 나면 태자나 왕족, 관리들이 늘어서서 차례로 왕에게 절을 올렸어요. 그 뒤에 용, 봉황, 코끼리, 말의 모습으로 꾸민 배 모양의 수레가 나왔어요. 수레 위에는 네 명의 신선 도령이 있었고, 수레 뒤에는 음악대와 무용수들이 따라나오며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공연을 펼쳤어요. 참석한 사람들은 공연을 보며 음식을 나눠 먹고 춤, 노래, 놀이를 즐기며 나라의 평안을 빌었어요. 백성들은 팔관회 기간 동안 궁 바깥에 삼삼오오 모여 밤늦도록 축제를 즐기면서 한마음이 되었다고 해요.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의 큰 행사가 또 있었어요. 바로 ‘연등회’예요. 연등회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요. 부처님 오신 날에 하는 연등제예요. ‘연등회’는 ‘등을 달아 불을 켜 놓고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춰 주는 부처를 기리는 행사’예요. 정월 대보름에 열렸지요.


   연등회는 팔관회와 마찬가지로 전통 신앙과 불교가 합쳐진 축제였대요. 부처와 하늘 신에게 나라의 평안과 개인의 행복을 빌었거든요. 삼국 시대에도 정월 대보름에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대요.


   이런 전통 풍습에 등불을 켜 놓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춰 주는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의식이 합쳐져서 고려의 연등회가 되었다고 해요. 연등회는 개경을 비롯한 온 나라에서 열렸어요. 거리 곳곳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남녀노소가 밤새도록 행렬을 지어 돌아다닐 만큼 성대하게 이뤄졌대요. 그리고 음악과 춤, 연극 등을 공연하면서 나라의 평안과 풍년을 빌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고 해요. 2015.11.14   


  ㅡ 다음 Tip자료





최육상의 <문화콘텐츠를 찾아서>


"고려 팔관회는 단순한 불교행사가 아니다. 불교의식을 포함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통의례 등이 결합된 최고 국가축제다."


'고려 팔관회'디지털콘텐츠로 개발한 ㈜프리진 장원석 실장의 말이다. 장 실장은 "팔관회는 고려 최고의 축제인데 불교행사로 바라보기 때문에 정부차원에서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종교계에서 팔관회는 특정종교행사이므로 국가가 계승해선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종교계의 지적처럼 '팔관회(八關會)'는 불교신도가 '팔관재계(八關齋戒)'를 지키기 위해 열었던 불교법회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팔관회는 신라를 거쳐 고려 때 국가행사로 자리 잡으며 성격이 변화했다.

▲ 팔관회가 열렸던 개경 만경대 행사장 복원이미지. 국왕은 편전인 선인전(宣仁殿)을 출발해 대관전(大觀殿)으로 행차한다. 근시관들에게 조하(朝賀)를 받은 후 위장대의 호위 하에 의봉문루(儀鳳門樓)에서 구정(毬庭)에 도열한 문무백관들로부터 조하를 받았다.
ⓒ (주)프리진

팔관회는 민족 고유의 전통의례가 결합된 국가축제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의하면 신라 팔관회는 진흥왕이 산천용신제(山川龍神祭)와 10월 제천행사 등을 불교의식과 결합해 개최한 것으로 돼 있다. 각 부족의 토속 신앙들을 통합해 종교의식을 단일화함으로써 중앙집권화를 공고히 한 것이다.

미륵불을 자처하였던 궁예는 팔관회를 '태봉'의 국가적 불교행사로 도입해 한 해를 마감하는 추수감사제 성격을 지닌 축제로 발전시켰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태봉의 팔관회를 계승해 그 해 11월 15일에 개최했다.

하지만 고려 팔관회는 단순한 불교행사가 아니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국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불교를 주목, 불교의례인 팔관회에 건국 공신들을 추모하는 위령제 기능 등을 보태 고려 최고의 문화축제로 거듭나게 했다.

이후 팔관회에서는 각국 사신들이 축하하는 글과 특산물들을 바쳤고 국왕은 답례로 음악공연과 백희가무(百戱歌舞)를 관람하며 즐길 수 있게 했다. 이 때 각국 상인들이 몰려들어 국가 간의 무역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팔관회가 열리는 동안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궁궐이 개방돼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개경 성내가 밤새도록 북적거렸다. 이렇듯 고려 팔관회는 단순 종교행사를 뛰어 넘어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의례가 결합된 국가축제였다.

한편으로 팔관회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중부로 시작되는 무신정권의 출발, 고승 균여가 사자후를 토한 곳, 역성혁명을 이룬 조선 태조 이성계를 암살하려던 곳 등이 바로 팔관회가 열리던 자리였다.

장 실장은 "팔관회 장소를 중심으로 무신정권의 태동과 이성계 암살 시도 등의 내용으로 시나리오를 개발했다"며 "팔관회에는 왕을 비롯한 모든 권력자들이 매년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역사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장 실장은 이어 "팔관회는 왕을 비롯한 대열, 행렬, 움직임, 순서 등 매우 복잡한 의례로 이뤄지기 때문에 복원하는 내내 힘들었다"면서 "문화콘텐츠는 내용의 고증도 중요하지만, 다소 논란이 따르더라도 대중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문화원형사업 콘텐츠 관리가 너무 고증 중심으로 이뤄져 사업화에 애로사항이 많다는 불만이다.

▲ 팔관회에 참가한 왕을 비롯한 문무대신들의 대열 배치도 및 그래픽 복원 이미지. 백희가무와 음악 공연을 관람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태자를 위시한 문무 관료들이 국왕에게 술잔을 헌수하거나 꽃을 바치면, 국왕이 참여자 모두에게 술과 꽃, 과일, 봉약(封藥)을 하사하는 순서로 행사가 진행됐다.
ⓒ (주)프리진

연등회는 불교행사, 팔관회는 국가축제로 분명히 구분돼야

   한편 장 실장은 팔관회와 연등회는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 실장은 "'연등회'는 팔관회와 함께 고려 2대 행사로 불리며 정월 대보름이나 2월 보름에 행하던 것으로 왕과 백성들이 연등을 화려하게 밝히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풍년을 기원한 불교행사"라며 "지금처럼 연등만 건다고 팔관회로 불러선 안 된다"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부산 해운대에서는 연등 2만개를 걸고 팔관회라는 불교행사를 열었다. 하지만 이는 팔관회가 아니라 연등회라고 부르는 것이 맞단다. 팔관회는 고려왕조 내내 이어졌던 문화유산으로 종교행사를 뛰어넘는 국가축제이기에 그렇다는 지적이다.

   고려왕조의 국가의례로 매년 진행됐던 팔관회는 조선 건국 후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대부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철폐 대상으로 지목됐다. 이는 팔관회가 최고 위상의 국가의례로 고려 문화를 유지해 가는 중요한 장치이자 상징으로 고려 문화의 청산은 팔관회 폐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팔관회는 조선 태조 원년(1392년) 도당이 혁파를 주창한 후 폐지됐다. 이후 팔관회는 다시 순수한 불교행사로 바뀌었고, 조하(朝賀)의식과 명산(名山), 대천(大川) 등 토속신에 대한 제사는 유교의례로 편입됐다.

  팔관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통의례 등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화려한 연등을 밝혀 부처님께 국가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왕과 문무대신들과 백성들이 하나가 됐던 축제의 장이었다.

  고려 멸망 후 천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비록 정부차원에서 팔관회를 제대로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국민들은 시시때때로 연등 대신 촛불을 들며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곤 한다. 그 촛불이 디지털로 새롭게 탄생한 팔관회를 밝혀 온 국민을 통합해주기를 바람은 지나친 상상일까? 팔관회를 다시 들여다 볼 필요는 충분하다.



고려 팔관회는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망라한 국가행사

고려 건국과 함께 시작한 팔관회는 수도인 개경에서는 11월, 서경에서는 10월에 보름날을 전후로 사흘간 개최됐다.

서경의 팔관회는 개경보다 한달 빠른 10월 15일에 개최됐다. 서경의 팔관회는 고구려의 10월 동맹제(東盟祭)를 계승한 것으로 고구려 건국 시조인 동명성왕을 기리는 조상제와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함께 지녔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내가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인데, 연등은 부처를 섬기고 팔관은 하늘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왕과 신하 모두가 함께 즐기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를 행하도록 하라"며 팔관회를 중시했다.

팔관의 '관'은 금한다는 의미로 팔관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 높고 사치한 자리에 앉거나 꽃과 향수로 치장함, 가무음곡, 오후 식사를 금하는 팔계를 범하지 않음을 뜻한다.

다음은 개경 만월대 의봉루 앞마당에서 사흘간 개최된 팔관회 내용.

13일 준비일
팔관회 참가자들의 예행 연습과 행사 시설들을 설치했다.

14일 소회일(小會日)
소회일 행사는 공식 국가의례의 성격을 강하게 지녀 매우 엄숙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대관전과 의봉루 사이에 화려한 복장을 한 3천여명의 호위군사를 진열하고 태조영정에 술을 올리며 연희와 조하의식을 행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고려 황실의 위상을 알리고 융합을 도모했다.

15일 대회일(大會日)
대회일은 외국 사신들의 조하가 포함된 것이 소회일과 다른 점이다. 이 때 송나라 상인과 여진, 탐라, 왜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축하 표문과 특산물들을 바쳤으며, 국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음악공연과 가무백회를 관람할 수 있는 좌석을 배정하고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 최육상









































덧붙이는 글 | (주)프리진 '고려 팔관회' 콘텐츠 자료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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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도유람(2009-10-24 13:48:10, Hit : 3048, Vote : 23
 고려 팔관회는 불교의례 아니다


한흥섭 고대 연구교수 '고려시대 음악사상'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학계에는 고려시대에 거행됐던 팔관회(八關會) 불교의례로 규정하는 견해가 다수입니다. 팔관회가 처음에는 불교적 의미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팔관회의 본질은 선풍(仙風)에 따른 토속의례였습니다"

   신라 진흥왕 때 시작돼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거국적으로 시행한 팔관회는 고려의 국가의례 가운데서도 비중이 큰 의례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유훈(遺訓)으로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중략) 후세의 간신들이 이를 가감하려는 건의를 절대로 금지하라"면서 팔관회와 연등회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팔관회는 연등회와 함께 불교의례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지만 한흥섭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최근 출간한 '고려시대 음악사상'(소명출판)에서 팔관회가 불교의례가 아닌 토속의례라는 주장을 내놨다.

   한 교수는 23일 고려대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중요한 사실은 '훈요십조'에서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고 팔관회'하늘의 신령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고 명백히 그 기능을 구분했다는 점"이라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팔관회의 핵심의례는 백희가무(百戱歌舞)로 국선(國仙)이 천령과 오악, 명산, 대천, 용신 등 토속신령에게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비는 것이었다"면서 "화랑들의 정신이념이었던 풍류도(風流徒)적 특성과 관련된 가무를 통해 토속신령들에게 복을 비는 행사로 불교행사라 할 수 없으며 도교와도 다르다"고 말했다.

   추수감사제 성격의 의식인 동맹(東盟)을 했던 고구려의 유풍과 신라의 풍류도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팔관회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고려는 통일을 이룬 후 포용을 하려고 사상적 유연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유교, 불교, 도교, 선풍, 무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면서 "태조가 팔관회와 연등회를 따로 얘기한 것은 풍류도와 불교가 대등한 관계라는 것이지 불교가 풍류도를 포함했다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이 책에서 고려 예종 11년(1116)에 아악(雅樂)이 중국 송나라에서 처음 도입됐다는 한국국악계의 오랜 통설은 틀렸으며 아악은 이미 그보다 1천 년 이상 앞선 신라 유리왕(재위 24~57) 시절부터 존재했다는 주장도 폈다.

그는 "아악은 궁중음악 가운데 국가의 제사 활동이나 조회의례에서 사용한 음악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서 "삼국사기 악지에는 '회악 및 신열악은 유리왕 때 만든 것'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국가가 제정한 아악"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 고유의 아악이든 중국 아악 혹은 중국 아악의 영향을 받은 아악이든 한국에서 아악은 적어도 문헌기록상 신라 유리왕 때부터 존재했다는 것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아악은 아악기로만 연주하며 고구려, 백제, 신라에는 아악기가 있었으므로 한국 아악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제사가 있었는데 악(樂)이 없을 수 없었다"면서 "우리는 아악을 고려 예종시대에 와서야 존재하는 중국의 음악이라고만 생각해왔지만, 이는 아악이 중국의 의식 음악이라는 조선 성리학자의 사대주의적 아악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kimyg@yna.co.kr



                                                                                 자료출처 : 고려 팔관회불교의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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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要十條(훈요십조)와 고려의 불교행사| 특별한 역사상식

류수 | 조회 61 |추천 0 | 2015.04.01. 08:20




訓要十條(훈요십조)

 

1. 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하므로 禪宗(선종)과 敎宗(교종)의 사원(寺院)을 창건하고 住持(주지)를 보내어 각각 다스리도록 하되, 간신들이 승려들의 청탁을 들어 각 사원을 서로 다투어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한다.

 

2. 사원을 함부로 세우면 나라의 운수(運數)가 오래가지 못한다고 도선(道詵)이 말했으니, 도선이 산수(山水)의 형세를 살펴서 세운 사원 외에는 마음대로 사원을 창건하지 못하도록 한다.

 

  *  道詵(도선)의 風水地理說(풍수지리설)

 

      불교의 善根功德思想 + 陰陽五行說

 

   지리에는 땅 기운이 왕성하고 순조로운 곳과 쇠약하고 거슬리는 곳이 있는데 땅 기운이 왕성하고 순조로운 곳(明堂)을 택하여 陽宅(양택)이나 陰宅(음택)을 짓거나 都邑(도읍)을 정하면 국가나 개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땅 기운이 쇠약하고 거슬리는 곳(凶地)은 불행을 가져다 주므로 사람의 몸에 쑥을 놓고 뜸을 뜨듯이 裨補寺刹(비보사찰)을 세워 재앙을 막아야 한다.

 

3. 맏아들(長子)이 왕위를 잇는 것이 올바른 법도이지만, 만약 맏아들이 어리석으면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하고, 또 둘째 아들 역시 불초한 경우에는 나머지 형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추대하는 자를 왕이 되게 한다.

 

4. 우리 나라는 사람도 땅도 중국과 다르니 반드시 중국의 제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 거란(契丹)은 야만의 나라이고 풍속과 언어 또한 다르니 의관(衣冠) 제도(制度)를 함부로 본받지 않는다.

 

   * 거란(契丹, 916~1125)

   916년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 엘뤼아빠오지)가 大契丹國(대거란국) 건설. 926년 발해 멸망시키고 936년 遼(요)라고 함. 1125년 天祚帝때 金에 망함

 

   * 萬夫橋事件(만부교사건, 942년)

   태조 25년 거란이 사자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냈으나 태조는 거란이 무도한 나라라고 하며 사신은 귀양보내고 낙타는 다리 밑에서 아사시킴

 

5.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와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되니, 철마다 서경에 가서 머무르기를 모두 100일 넘도록 하여 그곳의 안녕을 이루도록 한다.

 

6. 짐(朕)이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이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니, 후세에 간신이 이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지 못하도록 한다.

 

연등(燃燈) : 上元(1월 15일)

팔관(八關) : 仲冬(11월 15일)

 

오악(五岳, 五嶽)

우리나라의 5대 명산

중국의 5대 靈山(영산)

金剛山(금강산)

泰山(태산, 東嶽, 山東省)

智異山(지리산)

華山(화산, 西嶽 陝西省) 中嶽

妙香山(묘향산)

衡山(형산, 南嶽, 湖南省)

白頭山(백두산)

恒山(항산, 北嶽, 山西省)

三角山(삼각산)

嵩山(숭산, 중악, 直隷省)

 

7. 신하의 곧은 말은 따르고 헐뜯는 말은 멀리한다. 백성을 부리되 농사철을 피하고, 요역을 가볍게 매기며,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어진 정치를 하되 상벌(賞罰)을 도리에 맞게 하면 음양(陰陽)이 순조로울 것이다.

 

8. 차현(車峴 : 車嶺) 이남 공주강(公州江 : 錦江) 밖은 산지(山地)의 형세가 모두 거슬리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그곳의 인심도 또한 그러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등용하여 권세를 쥐게 하면 혹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9. 나라의 관직을 함부로 늘이거나 줄이지 말며, 만약 공(功)이 없는 자, 사사로이 친한 자나 친척 등에게 관직을 주어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사나운 나라가 이웃에 있으니 항상 조심하고, 병졸들을 잘 돌보아 그 가운데 뛰어난 자에게는 관직을 더해 준다.

 

10. 옛 古典(고전)을 많이 읽어 나라 다스리는 일에 거울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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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교 행사와 팔관계율

 

연등회(燃燈會, 上元. 1월 15일)

   신라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고려에 와서 더욱 중요시 되었다. 전국적인 행사로서 등불을 밝히고 다과를 베풀고 왕과 신하들이 음악과 춤을 함께 즐기고 부처님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

 

팔관회(八關會, 仲冬. 11월 15일)

   개경과 서경에서 왕과 신하들이 함께 춤과 노래를 즐기고 부처, 천지신명,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에게 제사하면서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기복도량(祈福道場) : 국왕의 생일

 

기신도량(忌辰道場) : 국왕의 제삿날

 

법회(法會) : 석가탄신일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 : 6월 15일 국왕이 보살계 받는 도량

 

우란분도량(盂蘭盆道場) : 7월 15일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비는 도량

 

제야도량(除夜道場) : 12월 30일

 

인왕회(仁王會) : 국가의 평온을 비는 모임

 

무차대회(無遮大會) : 모든 사찰에서 잔치를 열고 물품을 분배

 

반승(飯僧) : 승려에게 음식을 제공

 

수륙회(水陸會) : 주인없는 귀신[영혼]을 진정

 

방생회(放生會) : 가축을 놓아주고 그물 소각

 

소재도량(消災道場) : 천재지변 제거

 

팔관계율(八關戒律)

1. 불살생(不殺生)                            2. 불투도(不偸盜)

3. 불음일(不淫佚)                            4. 불망언(不妄言)    

5. 불착향화(不着香華)                      6. 불좌고대상(不坐高大床)

7. 불음주(不飮酒)                            8. 불자락관청(不自樂觀聽)



                                           訓要十條(훈요십조)와 고려불교행사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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