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 八關 / 고전문헌 자료 (2) 

2019. 1. 11. 21:21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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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 八關 / 고전문헌 자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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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권 /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정해 6년(987), 송 옹희 4년ㆍ거란 통화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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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정월에 교하기를, “2월부터 10월까지는 만물이 나서 자라는 시기이니, 산과 들에 불 놓는 것을 금한다. 이를 어기는 자는 죄를 줄 것이니, 일정한 법으로 삼는다." 하였다.
○ 3월에 내사령(內史令) 최지몽(崔知夢)하였다. 지몽은 남해(南海) 영암군(靈巖郡) 사람으로, 어릴 때 이름은 총진(聰進)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며, 인자하고 온화하며,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경서와 사서(史書)를 널리 섭렵하였으며, 천문과 복서에 더욱 정통하였다. 나이 18세에 태조가 그 명성을 듣고 불러서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吉兆)를 얻었으니, 반드시 삼한을 통일하여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그 이름을 지몽이라 고쳐 주고 비단 옷을 내려 주며 공봉(供奉)의 관직을 임명하였다. 항상 태조를 따라 정벌하여 그 옆을 떠나지 않았고, 태조가 즉위하자 궁중에서 입시하면서 고문에 대비하였다. 혜종은 그에게 사천(司天)의 관직을 임명하였고, 정종이 왕규(王規)를 죽이자, 지몽이 유성(流星)의 변고를 아뢴 데 대해 포상하여 노비와 은으로 장식한 안장을 갖춘 말ㆍ은그릇을 내려 주었다. 일찍이 광종귀법사(歸法寺)로 행차할 때에 호종하였다가 술에 취하여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에 외걸현(隈傑縣)으로 폄출된 지가 무릇 11년이나 되었는데, 경종 때에 이르러서야 불러서 다시 내의령(內議令)으로 임명하였다. 왕(성종)이 즉위하자 좌집정수내사령 상주국(左執政守內史令上柱國)의 벼슬을 더 주고, 홍문 숭화 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었으며, 이어 그 부모에게 작(爵)을 주었다. 나이 78세가 되자, 세 번이나 표(表)를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글을 올려 굳이 청하니, 조회에 참석함은 그만두고 내사방(內史房)에 나가서 그전대로 일을 보도록 명하였다. 그 후 3년 만에 병으로 자리에 눕자, 명하여 의원과 약을 내려 주고 왕이 친히 가서 문병하였으며, 병을 치료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이 81세로 졸하였다. 부고(訃告)를 듣자, 왕이 슬퍼하며 부의(賻儀)로 베 1천 필ㆍ쌀 3백 석ㆍ보리 2백 석ㆍ차 2백 각(角)ㆍ향 20근을 내려 주고, 관에서 장사를 치렀다.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증직하고, 민휴(敏休)란 시호를 주었다. 후에 태사(太師)를 더 증직하고, 경종(景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여름 6월에 주군의 병기를 거두어 농기구를 만들었다.
○ 가을 7월에 교하기를, “해방되어 양민이 된 노비는 연대가 점차 멀어지면 반드시 본주인을 업신여기게 된다. 지금 본주인을 대신하여 뱃길로 전쟁에 나갔거나 3년간이나 여묘(廬墓)를 지킨 자는, 그 주인이 유사에 알려서 그 공을 살펴 나이 40이 넘은 자는 천인을 면하게 하고, 만약 본주인을 욕하는 자가 있으면 도로 천인으로 만들어 사역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 8월에 이몽유(李夢遊)에게 명하여 중앙과 지방의 주장(奏狀)과 공문(公文)의 이첩(移牒) 방식을 상정(詳定)하였다.
○ 교하여 정우현(鄭又玄)과 명경(明經) 1명ㆍ복업(卜業) 1명ㆍ의업(醫業) 2명ㆍ명법업(明法業 법률학)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방(榜)을 발표할 때에 교하는 일은 이에서 시작되었다.
○ 교하기를,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ㆍ의학박사(醫學博士)를 각각 한 사람씩 두고 목재(牧宰)ㆍ지주(知州)ㆍ지현(知縣)이 힘써 더 가르치도록 하고, 만약 경의(經義)에 밝거나 효제(孝悌)하거나, 의방(醫方)에 밝아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한(漢) 나라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상세히 기록하여 서울에 천거하고, 이를 상식(常式)으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의 팔관회(八關會) 폐지하였다.
○ 11월에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고치고 유수(留守)를 두었다.
○ 이해에 5부(部)의 방리(坊里)를 정하였다.



[丁亥六年 宋 雍煕四年,契丹 統和五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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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正月,敎,自二月至十月,萬物生成之時,禁放火山野,違者罪之,著爲常式。○三月,內史令崔知夢,卒,知夢南海靈巖郡人,幼名聰進,性淸儉慈和,聰敏嗜學,博涉經史,尤精於天文卜筮,年十八,太祖聞其名,召使占夢,得吉兆,曰必將統御三韓,太祖喜,改名知夢,賜錦衣,授以供奉職,常從征伐,不離左右,及卽位,入侍禁中,以備顧問,惠宗授司天職,及定宗誅王規,褒其奏流星之變,賜臧獲,銀粧鞍馬,銀器,嘗從光宗,幸歸法寺,被酒失禮,貶于隈傑縣,凡十一年,至景宗朝,召還,授內議令,及王卽位,加左執政守內史令上柱國,賜弘文,崇化,致理功臣之號,仍爵其父母,及年七十八,三上表乞骸,不允,又上書固請,乃命除朝參,赴內史房,視事如舊,後三年寢疾,命賜醫藥,親臨問疾,凡可以已疾者,靡所不爲,卒,年八十一,訃聞震悼,賻以布千匹,米三百碩,麥二百碩,茶二百角,香二十斤,官庀葬事,贈太子太傅,諡敏休,後加贈太師,配享景宗廟庭。○夏六月,收州郡兵,鑄農器。○秋七月,敎,放良奴婢,年代漸遠,則必輕侮本主,今或代本主,水路赴戰,或廬墓三年者,其主告于有司,考閱其功,年過四十者,方許免賤,若有罵本主,還賤役使。○八月,命李夢游,詳定中外奏狀,及行移公文式。○下敎,賜鄭又玄及明經一人,卜業一人,醫業二人,明法業二人,及第,放榜下敎,始此。○下敎,置十二牧,經學,醫學博士各一員,令牧宰知州縣官,敦加訓誨,若有明經,孝悌醫方足用者,依漢家故事,具錄薦貢京師,以爲常式。○冬十月,罷兩京八關會。○十一月,改慶州,爲東京留守。○是歲,定五部坊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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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권 /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계사 12년(993), 송 순화 4년ㆍ거란 통화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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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2월에 상평창(常平倉)을 양경(兩京 개경(開京) 서경(西京))과 12목에 설치하였다.
○ 3월에 교하기를, “천자는 7묘(廟)를 세우고, 제후는 5묘를 세워 공로가 있는 이는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이는 종(宗)이라 하며, 왼편에 모시는 이는 소(昭)라 하고 오른편에 모시는 이는 목(穆)이라 한다. 대효(大孝)는 신명을 감동시키고, 지극한 덕은 천지를 움직인다. 이에 지난해부터 새로 비궁(閟宮 종묘)을 지어 건물이 이미 완성되어 차례에 따라 증상(烝嘗)을 올리게 되었다. 은(殷)은 12군(君)을 6대(代)로 하였고, 당(唐)은 10제(帝)를 9실(室)로 하였다. 《진서(晉書)》에 이른바, '형제간에 왕위를 전하는 것은 임시변통이다.' 하였으니, 마땅히 신주(神主)를 위하여 실(室)을 세우는 것이요, 실을 가지고 신주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형제가 한 항렬임은 예문(禮文)에도 있는데, 하물며 우리 혜종대왕(惠宗大王)은 세대가 같음을 논한다면 반열에 들지 못함에 있어서랴. 마땅히 혜종ㆍ정종ㆍ광종ㆍ경종 네 임금을 같이 한 묘(廟)에 모셔 태묘에 합사(合祀)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여름 5월에 서북계(西北界)의 여진이 보고하기를, “거란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노할 것을 모의한다."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 '여진이 우리를 속인다.' 하여 방어를 하지 않았다.
○ 가을 8월에 이유현(李維賢) 등 10명과 명경 3명, 명법(明法)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여진이 다시 보고하기를, “거란의 군사가 이르렀다." 하니, 비로소 일이 급함을 알고 여러 도의 군마제정사(軍馬齊正使)를 나누어 보내었다.
○ 겨울 10월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門下侍郞) 최양(崔亮)하군사(下軍使)로 삼아, 북계(北界)에 주둔하여 거란을 막게 하였다.
○ 윤달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안북부(安北府 평남 안주(安州))로 나아가 머무르다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봉산군(蓬山郡 평북 구성(龜城))을 쳐서 우리 선봉군사(先鋒軍使)인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庶顔) 등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는, 왕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바로 돌아왔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원하려고 하니, 소손녕이 성명(聲明)하기를, “대조(大朝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 하였다. 또 글을 보내 말하기를, “대조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은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하였다. 서희가 글을 보고는 돌아와서 상황이 화친할 수 있겠다고 아뢰니, 왕이 감찰사헌(監察司憲) 이몽진(李蒙戩)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소손녕이 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80만의 군사가 다다르리라. 만약 강(江 대동강)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모두 멸할 것이니, 군신(君臣)이 빨리 진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하였다. 이몽진이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침노한 이유를 물으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우리가 공손히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시행한다. 만약 화친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빨리 와서 항복하라." 하였다. 이몽진이 돌아오자, 왕이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였는데, 어떤 이는, “임금께서 서울의 대궐에 돌아가서 중신(重臣)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합니다." 하고, 어떤 이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부터 절령(岊嶺)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땅을 떼어 주자는 의논을 따르려고 하여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대로 쌀을 가져가게 하였는데 아직도 남은 것이 많자, 왕은 적군에게 이용될까 염려하여 대동강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서희가 아뢰기를,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싸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승부는 군사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요, 다만 능히 틈을 보아 움직이는 데 있을 뿐인데 어찌 대번에 쌀을 버리도록 하십니까. 하물며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이니, 차라리 적군에게 이용되었으면 되었지 헛되이 강물 속에 버리는 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겨 이를 중지시켰다. 서희가 또 아뢰기를, “거란의 동경부터 우리나라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에게 점거되었었는데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ㆍ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으니, 지금 거란 군사가 쳐들어 온 것은 그 의도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는다고 소리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공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군사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대번에 서경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떼어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의 땅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이니, 욕심 많은 저들이 한없이 요구한다면 그대로 다 주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떼어 준다면, 진실로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이 한 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아뢰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는데, 한 사람의 충신도 없어 대번에 가벼이 토지를 적국에게 주려고 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옛사람의 시(詩)에, '천리 산하를 어린아이보다 가볍게 여기니, 두 조정의 관검이 초주를 원망하네.[千里山河輕孺子兩朝冠劍恨譙周]' 하였으니, 대개 초주가 촉한(蜀漢)의 대신이 되어 위(魏)에 토지를 바치도록 후주(後主)에게 권하여 영원히 웃음거리가 된 것을 이른 것입니다. 가벼이 토지를 떼어 적국에 버리는 것보다는, 선왕(先王)께서 행하시던 연등(燃燈)ㆍ팔관(八關)ㆍ선랑(仙郞) 등의 일을 다시 행하고 외국의 다른 법을 쓰지 않아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루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만약 옳게 여기신다면 마땅히 먼저 신명께 고한 뒤에 전쟁을 하든지 화친을 하든지 주상께서 이를 결정하소서." 하였다. 이때 왕이 중국의 풍속을 즐겨 본받았는데,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이지백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소손녕은 이몽진이 돌아온 후에 오래도록 회보(回報)가 없자 드디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는데,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 낭장 유방(庾方)소손녕과 싸워 이겼다. 소손녕이 감히 다시 전진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와 항복하기를 재촉하자, 왕이 화통사(和通使)로 합문사인(閤門舍人) 장영(張瑩)을 거란의 진영에 보내었는데, 소손녕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대신을 군문 앞에 보내어 면대하게 하라." 하였다. 장영이 돌아오자, 왕이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누가 능히 거란의 진영에 가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치고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겠느냐?" 하니 신하들 중에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희가 홀로 아뢰기를,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강가에 나가 전송하면서 손을 잡고 위로해 보내었다. 서희가 국서를 받들고 거란의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대등한 예를 차리고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소손녕이 마음속으로 기특하게 여겼다.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侵蝕)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니, 대국(大國 거란)이 이 때문에 와서 토죄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하는데 말씨가 강개하니, 소손녕이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사실대로 거란 황제에게 아뢰기를, “고려에서 이미 화친을 청하였으니 마땅히 전쟁을 중지합시다." 하였다. 서희가 거란의 진영에 7일 동안 머무르다가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서 강가에 나가 맞이하고, 곧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弊使)로 보내 들어가서 거란의 임금을 보게 하였다.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주-D001] 증상(烝嘗) : 
상(嘗)은 추제(秋祭)이며 증(烝)은 동제(冬祭)인데, 종묘의 제사를 통칭한 것이다.
[주-D002] 차함(借銜) : 
옛날에 외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에, 사신의 관직이 낮으면 임시로 높은 직함을 빌려서 보내는데, 이것을 차함(借銜)이라 한다.



[癸巳十二年 宋 淳化四年,契丹 統和十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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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二月,置常平倉于兩京,十二牧。○三月,敎曰,天子七廟,諸侯五廟,祖功宗德,左昭右穆,大孝,感于神明,至德,動乎天地,爰從去歲,新作閟宮,締構旣完,烝嘗有次,殷以十二君,爲六代,唐以一十帝,爲九室,晉書所云,兄弟旁及,禮之變也,則宜爲主立室,不宜以室限神,兄弟一行,禮文斯在,況我惠宗大王,若論同世,未可以班合,奉惠定光景四主,通爲一廟,祔於大廟。○夏五月,西北界女眞,報契丹,謀擧兵來侵,朝議,謂其紿我,不以爲備。○秋八月,賜李維賢等十人,明經三人,明法三人,及第。○女眞復報契丹兵至,始知事急,分遣諸道軍馬齊正使。○冬十月,以侍中朴良柔,爲上軍使,內史侍郞徐煕,爲中軍使,門下侍郞崔亮,爲下軍使,軍于北界,以禦契丹,閏月,幸西京,進次安北府,聞契丹蕭遜寧,將兵攻蓬山郡,獲我先鋒軍使,給事中尹庶顏等,王,不得進,乃還,徐煕引兵,欲救蓬山,遜寧,聲言,大朝,旣已奄有高句麗舊地,今爾國,侵奪疆界,是用征討,又移書云,大朝,統一四方,其未歸附,期於掃蕩,速致降款,毋涉淹留,煕,見書還奏,有可和之狀,王,遣監察司憲,借禮賓少卿李蒙戩,如契丹營請和,遜寧,又移書云,八十萬兵,至矣,若不出江而降,當須殄滅,宜君臣,速降軍前,蒙戩,至營,問所以來侵之意,遜寧曰,汝國,不恤民事,是用恭行天罰,若欲求和,宜速來降,蒙戩還,王,會群臣議之,或言車駕,還京闕,令重臣,率軍士乞降,或言割西京以北之地,與之,自黃州至岊嶺,畫爲封疆,可也,王將從割地之議,開西京倉米,任百姓所取,餘者尙多,王恐爲敵所資,令投之大同江,煕奏曰,食足則城可守,戰可勝也,兵之勝負,不在强弱,但能觀釁而動耳,何可遽令棄之乎,況食者,民之命也,寧爲敵所資,虛棄江中,又恐不合天意,王,然而止之,煕又奏曰,自契丹東京,至我安北府,數百里之地,皆爲生女眞所據,光宗,取之,築嘉州,松城等城,今丹兵之來,其志不過取此二城,其聲言取高句麗舊地者,實恐我也,今見其兵勢大盛,遽割西京以北與之,非計也,且三角山以北,亦高句麗舊地,彼以谿壑之欲,責之無厭,可盡與乎,況今割地,則誠萬世之恥也,願駕還都城,使臣等,一與之戰,然後議之,未晩也,前民官御事李知白,奏曰,聖祖,創業垂統,洎于今日,無一忠臣,遽欲以土地,輕與敵國,可不痛哉,古人有詩云,千里山河輕孺子,兩朝冠劍恨譙周,蓋謂譙周爲蜀大臣,勸後主納土於魏,爲千古所笑也,與其輕割土地,棄之敵國,曷若復行先王,燃燈,八關,仙郞等事,不爲他方異法,以保國家,致太平乎,若以爲然,則當先告神明,然後戰之與和,惟上裁之。時,王,樂慕華風,國民不喜,故知白,及之,遜寧以蒙戩回還,久無回報,遂攻安戎鎭,中郞將大道秀,郞將庾方,與戰克之,遜寧,不敢復進,遣人,促使來降,王,遣和通使,閤門舍人張瑩,往丹營,遜寧曰,宜更以大臣,送軍前面對,瑩還,王會群臣,問曰,誰能往丹營,以口舌却兵,立萬世之功乎,群臣,無有應者,煕獨奏曰,臣,雖不敏,敢不唯命,王,出餞江頭,執手慰藉而送之,煕,奉國書,如丹營,與遜寧抗禮,不小屈,遜寧心異之,語煕曰汝國,興新羅地,高句麗之地,我所有也,而汝侵蝕之,又與我連壤,而越海事宋,大國,是以來討,今割地以獻,而修朝聘,可無事矣。煕曰,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若論地界,上國之東京,皆在我境,何得謂之侵蝕乎,且鴨綠江內外,亦我境內,今女眞,盜據其間,頑黠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朝聘之不通,女眞之故也,若令逐女眞,還我舊地,築城堡,通道路,則敢不修聘,將軍如以臣言,達之天聰,豈不哀納,辭氣慷慨,遜寧,知不可强,遂具以聞,丹帝曰,高麗,旣請和,宜罷兵,煕,留丹營,七日而還,王,大喜,出迎江頭,卽遣侍中朴良柔,爲禮幣使,入覲,煕,復奏曰,臣,與遜寧約,盪平女眞,收復舊地,然後朝覲可通,今纔收江內,請俟得江外,修聘未晩,王曰,久不修聘,恐有後患,遂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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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8권 / 예종 문효대왕 2(睿宗文孝大王二)


을미 10년(1115), 송 정화 5년ㆍ요 천경 5년ㆍ금 태조 수국(收國)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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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에 요 나라에서 관찰사 고경순(高敬順)을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생여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황제라 칭호하고 이름을 민(旻)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거주하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끈을 매어 약속하였다. 그 지방에 돼지ㆍ양ㆍ소ㆍ말이 많고, 말은 준마가 많았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아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을 달리고 전투를 연습하여 강병이 되는데, 여러 부락이 제각기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 지방이 서쪽은 바로 거란이요, 남쪽은 바로 우리나라 땅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겼는데, 조회하러 올 때마다 부스러기 금ㆍ담비가죽ㆍ좋은 말을 폐백으로 삼았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은과 폐백을 후히 주어 해마다 그렇게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 지금 황해도의 평산)의 중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시조라 한다."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으로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하며 고을(古乙)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劾里鉢), 막내아들을 영가(盈歌)라 하였는데, 영가가 제일 영웅호걸스러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고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 2월에 아들 구(構)를 책봉하여 왕태자를 삼고 사면령을 내렸다.
○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사추(崔思諏)하였다. 사추는 문헌공(文憲公) 충(冲)의 손자로 힘써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종이 불러들여 궁중에서 왕을 모셨는데 말하여 보니 왕의 마음에 맞았다. 그 후로 내외 관직에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의논하는 것이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감히 경솔하게 옛 법을 고치지 않았다. 문인과 자제 중에 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항상 왕을 섬기는 도리로 교훈하고 개인적인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언제나 다름이 없었다.
   왕이 마침 연등회에 나가 풍악을 보다가 부고를 듣고서는 놀라고 슬퍼하여 잔치를 파하고 조회를 정지하며, 부의와 위문을 특별히 후하게 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장례에 참석하게 하였다.
○ 3월에 오연총이 병을 칭탁하고 퇴직하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 왕이 여러 신하들과 건덕전에서 잔치하고, 만년사(萬年詞)를 지어 좌우들에게 보여 주었다.
○ 여름 4월에 이수(李壽) 등이 요 나라에서 돌아왔다. 요 나라 황제의 회답 조서에 이르기를, “근래 국경 지방 신하들이 방비를 해이하여 작은 도적이 백성을 괴롭히기에 지금 죄 있는 자를 토벌하려고 일부 군사의 출동을 계획한다. 경은 도적의 지경에 지방이 이웃해 있으며, 속국으로서의 직분이 있으니, 특별히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몰아내도록 유시한다. 경이 사신을 보내와서 사례하는 글을 바치니, 명을 따르는 신하로서 충성하는 절개를 극진히 함을 알 수 있다. 마침 봄철이라 농사에 방해될까 염려되니, 아직은 연습 준비에 힘써서 뒤에 별도로 출동하기를 기약하라."고 하였다.
○ 왕이 여러 왕씨와 재신과 추신을 상춘정(賞春亭)으로 불러서 술마시며 마음껏 즐겼는데 시중으로 치사한 김경용(金景庸)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라의 원로는 경만이 남았다."고 하니, 경용이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사례하여 아뢰기를, “노신이 입는 은혜가 너무 지극하여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갚기 어렵습니다."하였다. 왕이 가사 두 곡조를 짓고 좌우를 시켜서 화답하여 바치게 하였다.
○ 6월에 김정(金精) 등 39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처사 곽여가 궁궐 서쪽에 있는 자신이 거처하는 별장에서 송 나라에 들어가는 정사와 부사를 전송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특별히 술과 과일을 하사하고 내관을 명하여 준비를 맡게 하여 설비가 배우 성대하니 여론이 그르게 여겼다.
중서시랑 평장사 이자겸을 익성공신 수태위(翼聖功臣守太尉)로 삼고, 자겸의 어머니 김씨를 통의국대부인(通義國大夫人), 처 최씨를 조선국대부인으로 삼으며, 사자를 보내어 세 통의 칙서를 그 집에 하사하였다.
○ 가을 7월 1일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이부상서 왕자지(王字之)호부시랑 문공미(文公美)송 나라에 보내어 사은하고, 겸하여 물품을 바치며 이어 진사 김단(金端)ㆍ견유저(甄惟底)ㆍ조석(趙奭)ㆍ강취정(康就正)ㆍ권적(權適) 등 5명을 보내어 태학에 들어가 공부하게 하였다. 표문에 이르기를,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것은 태학의 학풍에 말미암는 것이요, 중화의 문물로 외국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왕의 가르침에 의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호한야(呼韓耶 흉노 선우(單于)의 한 사람)는 아들을 한 나라에 보냈으며 토번(吐蕃)은 서적을 당 나라에 청하였으니 일은 같지 않지만 뜻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찍부터 중국 풍속을 사모한 것은 개보(開寶 송 태조의 연호) 연간에 있었으며, 신종(神宗) 때에 이르러서는 사신을 보낼 때마다 생도도 보내어 주 나라를 구경[觀周 공자가 주 나라에 가서 문물을 구경한 것을 인용한 것]하여 선왕의 유풍이 남아있는 노(魯) 나라로 변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 후 우연히 중간에 폐지되어 오래도록 전에 하던 일을 시행치 않으니 전하여 듣고 따라 익힌 것이 이미 멀어지고 널리 기억하고 자세히 말한 것을 절반이나 잊어졌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일정한 의논이 없고 학문은 갈림길이 많아졌으니 혼잡한 말류로 적막하기 몇 해인가. 하물며 법도와 헌장이나 문물의 의식에 대하여 역대의 경전이나 제가의 이설을 유식한 이에게 질의하지 않고서야 어찌 장래의 법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전례를 좇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좋은 기회를 만났으니 평소의 뜻을 펼 수 있겠습니다. 삼가 학생 5명을 보내어 조회하는 사신을 따라 대궐에 나아가 뵙게 합니다. 이들 생도들은 모두 수재가 아니며, 눈으로는 중국 학교의 예절을 보지도 못했고, 귀로는 아송(雅頌)의 악장을 듣지도 못한 자들로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것은 호향(互鄕)의 동자와 같은 점이 있사오나, 일찍이 가르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대개 궐리(闕里 공자의 동리(洞里))의 덕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깊은 충심을 동정하시고 전례를 미루어 상고하여 특히 국자감에 내려서 혹시라도 벽옹(壁雍)에 거두어 편리할 대로 학업에 나아가게 하신다면, 여러 학생들의 말석(末席)에 용납되어 박사 앞에 제자가 되어 좋은 소리로 회유하여 올빼미의 나쁜 소리를 고치며, 꾀꼬리처럼 그윽한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에 옮겨 고루한 새 지저귀는 말소리(알아듣지 못할 오랑캐의 말소리)를 면하고, 성인의 도를 동쪽 나라로 오게 하여, 길이 태양처럼 비춰주신 은혜를 입게 하소서." 하였다.
○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허경(許慶)하였다. 허경은 문학으로 출세하였는데, 청렴하고 충성ㆍ검박하였다. 숙종이 왕자로 있을 때에 불러서 요속을 삼았으며 즉위하여서는 추밀원 승선으로 임명하였다. 왕의 은총이 특별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재상에 이르렀다. 비록 혁혁한 일컬음은 없었으나 절개가 시종 한결같아 당시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
○ 8월에 요 나라에서 여진을 치려고 사신을 보내와서 청병하였다. 재추ㆍ시신ㆍ도병마판관과 여러 위(衛)의 대장군 이상을 불러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파병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오직 위위소경(衛尉少卿) 척준경(拓俊京)과 예부낭중 김부일(金富佾), 호부원외랑 한충(韓冲), 우사간 김부식(金富軾)ㆍ우정언 민수(閔修)가 "국가에서 정해ㆍ무자의 전란(예종 2~3년의 여진 정벌) 이후로 군사와 백성들이 겨우 어깨를 쉬게 되었는데, 지금 타국을 위하여 군사를 출동한다면 이것은 자진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니, 장래의 이해가 어찌 될지 두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재삼 가부를 물었으나 끝내 결정된 의논을 보지 못하였다.
○ 작은 잔치를 장령전(長齡殿)에서 베풀었다.
○ 왕이 친히 국로인 평장사로 치사한 오수증(吳壽增) 등을 합문에서 잔치하며 또 서민의 늙은이를 구정에서 잔치하고 물품 주기를 차등 있게 하였다.
서북면병마사 경작(朴景綽)이 어전에 나와 사례하고 떠나니, 이름을 고처서 경인(景仁)으로 하사하고 차와 약을 주었다.
○ 9월에 근신들을 소집하여 상춘정(賞春亭)에서 활쏘기를 사열하고 작은 잔치를 하였다.
○ 왕이 달밤에 미복차림으로 처사 곽여가 거처하는 순복전(純福殿) 청심대로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근신들과 글을 의논하다가 새벽녘에야 파하였다.
○ 왕이 친히 무사를 동지(東池)에서 선발하고 물놀이를 구경하였다.
○ 겨울 10월에 예부에서 태자의 생일을 영정절(永貞節)로 하고 궁관(宮官 동궁의 관속)들이 축하하며, 또 양계ㆍ삼경ㆍ팔목ㆍ삼도호부로 하여금 축하문을 올리게 하여 영구한 법식으로 하기를 청하니 좇았다.
백좌도량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치하고 중 1만 명을 대궐 뜰에서, 2만 명을 주ㆍ부에서 밥먹였다.
○ 친히 6도의 신기장사(神騎將士)를 동지에서 사열하였다.
○ 평장사 김연 등을 명하여 크게 동교(東郊)에서 사열하였다.
시어사(侍御史) 윤언순(尹彦純)요 나라에 보내어 천흥절을 축하하였다.
○ 친히 서경의 장사들을 동지에서 사열하였다.
○ 11월에 응건전(膺乾殿)에서 작은 잔치를 하였다.
○ 낭중 김인관(金仁琯)을 요 나라에 보내어 기복을 끝내게 하여 준 것을 사례하였다.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었다. 왕이 구정에서 돌아와 합문 앞에 이르러 잠시 멈추고 부르며 화답하기를 한참 동안 하다가 배우에게 명하여 의장(儀仗)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게 하여 거의 삼경에 이르렀다. 어사대부 최지(崔贄)와 잡단(雜端) 허재(許載)가 나아가서 간언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 내전에서 작은 잔치를 하였다.
요 나라에서 이주(利州) 관내 관찰사 야율의(耶律義) 대리소경(大理少卿) 손양모(孫良謀)를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군사 출동하기를 독촉하고, 이어 비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하사하였다.
북로병마사가 보고하기를, “요 나라 동경에서 황제의 명으로 통첩을 보내왔는데, 고려조에서 보낸 생신사ㆍ횡선사ㆍ낙기복사의 세 사신이, 이즈음 국경 방면에 사고가 많아 들어오지 못하므로 이미 환국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 야율의 등이 합문에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고려에서 군사 출동하는 의논을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했다고 하여 예를 이루지 않고 물러갔다가 이튿날에야 인사하고 떠났다.
○ 12월에 요 나라 동경유수회사지례사(回謝持禮使)로 예빈부사 고효순(高孝順)을 보내 왔다.

[주-D001] 호향(互鄕)의 동자 : 
《논어》에, “호향(互鄕)은 비루하여 더불어 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데, 그곳의 동자(童子)가 공자를 찾아오니 공자가 받아 주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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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春正月,遣觀察使高慶順,來,賀生辰。○生女眞完顏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其俗如凶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土饒猪羊牛馬,馬多駿,其人鷙勇,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或曰,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或曰,平州僧今幸之子克守,初入女眞,居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活羅,多子,長曰劾里鉢,季曰盈歌,盈歌,最雄傑,得衆心,盈歌,死劾里鉢,長子烏雅束,嗣位,烏雅束,卒弟阿骨打,立。○二月,冊子構,爲王太子,赦。○中書令,致仕,崔思諏卒,思諏,文憲公冲之孫,力學擢科,文宗召入內侍,與語稱旨,自是,歷仕中外,所至有聲績,爲相,論議,務存大體,不敢輕改舊章,門人子弟,有來謁者,常訓以事君之道,言不及私,雖謝事家居,憂國之心,終始不替,王,適以燃燈觀樂,聞訃,震悼,罷宴輟朝,賻恤優厚,令百官,會葬。○三月,吳延寵托疾乞退,不允。○宴群臣于乾德殿,賦萬年詞,宣示左右。○夏四月,李壽等,還自遼,回詔,曰,近以邊臣弛備,小寇擾民,方行有罪之誅,是議偏師之擧,以卿,地隣賊境,職守侯藩,特諭整戎,庶令逐暴,卿,遣馳使介,來奉謝章,諒玆從命之臣,盡爾爲忠之節,適當春事,有慮農妨,姑務練修,別期進取。○召諸王宰樞于賞春亭,置酒極歡,顧謂侍中致仕金景庸曰,國之元老,惟卿在爾,景庸,涕泣拜謝曰,老臣,蒙恩至渥,糜粉難酬,王,製詞二闋,令左右和進。○六月,賜金精等三十九人,及第。○處士郭輿,請於所居闕西別業,餞入宋使副,王,特賜酒果,命內官主辦,供帳甚隆,物議非之。○以中書侍郞平章事李資謙,爲翼聖功臣守太尉,資謙母金氏,爲通義國大夫人,妻崔氏,爲朝鮮國大夫人,遣使賜三勑于其第。○秋七月,戊辰朔,日食。○遣吏部尙書王字之,戶部侍郞文公美,如宋謝恩,兼進奉,仍遣進士金端,甄惟底,趙奭,康就正,權適等五人,赴大學,表曰,化民成俗,由乎大學之風,用夏變夷,藉彼先王之敎,故,呼韓,遣子於漢室,吐蕃,請書於唐家,事雖不同,義則無異,顧惟弊邑,夙慕華風,在乎開寶之時,及至神宗之世,每馳使介,參遣生徒,俾以觀周期於變魯厥後,偶因中廢,久闕前修,傳聞承習之已遙,廣記備言之半脫,士無定論,學有多岐,混混末流,寥寥幾歲,況乎法度憲章之際,聲名文物之儀,或歷代之遺經,或諸家之異說,苟非質疑於有識,豈能成法於將來,每及興言,思遵舊貫,今也,良晨在遇,素志可伸,謹遣學生五人,令隨入朝赴闕,惟此諸生,竝非秀穎,目不見膠庠之禮,耳不聞雅頌之聲,難可與言,有類互鄕之子,未嘗無誨,蓋存闕里之仁,伏望陛下,愍惻深衷,推明故事,特下國子監,或於璧雍收管,許令就便學業,則容迹於諸生之末,摳衣於博士之前,懷我好音,庶見鴞鳴之變,遷于喬木,免同鴃舌之頑,儻令吾道,以東行,永荷大明之下燭。○門下侍郞平章事,致仕許慶卒,慶,以文學進,淸廉忠儉,肅宗,在藩邸,引爲府僚,及卽位,拜樞密院承宣,恩渥殊異,累遷至宰相,雖無赫赫之稱,終始一節,時人重之。○八月,遼,將伐女眞,遣使,來請兵,召宰樞,侍臣,都兵馬判官,諸衛大將軍以上,議之,群臣,皆以爲可,惟衛尉少卿拓俊京,禮部郞中金富佾,戶部員外郞韓冲,右司諫金富軾,右正言閔修以爲,國家,自丁亥戊子兵亂之後,軍民,僅得息肩,今爲他國出師,是自生釁端,竊恐將來利害,難測也,王,問至再三,卒無定議。○曲宴于長齡殿。○親饗國老,致仕,平章事吳壽增等於閤門,又饗庶老於毬庭,賜物有差。○西北面兵馬使朴景綽,陛辭,改賜名景仁,賜茶藥。○九月,召集近臣,閱射,曲宴于賞春亭。○王,乘月微行幸處士郭輿,所居純福殿淸心臺,置酒與近臣論文,至曉乃罷。○親選武士于東池,觀水戲。○冬十月,禮司,請以太子生日爲永貞節,宮官僚屬,進賀,亦令兩界三京八牧三都護府,上賀箋,以爲永式,從之。○設百座道場于會慶殿三日,齋僧一萬于闕庭,二萬于州府。○親閱六道神騎將士于東池。○命平章事金緣等,大閱于東郊。○遣侍御史尹彥純,如遼,賀天興節。○親閱西京將士于東池。○十一月,曲宴于膺乾殿。○遣郞中金仁琯,如遼,謝落起復。○八關,王,自毬庭,還至閤門前,駐蹕,唱和久之命倡優,歌舞仗內,幾至三鼓,御史大夫崔贄,雜端許載,進諫,王,嘉納之。○曲宴于內殿。○遼,遣利州管內觀察使耶律義,大理少卿孫良良謀,賫詔來,督發兵,仍賜段匹諸物。○北路兵馬使報遼,東京,奉勑旨,牒云,高麗,所遣生辰,橫宣,落起復三使近,緣邊境多故,未得入,已今還國。○耶律義等,詣閤門欲辭,以出兵之議,久不決,不成禮而退,翼日乃辭。○十二月,遼,東京留守,遣回謝持禮使,禮賓副使高孝順,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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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9권 /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병오 4년(1126)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ㆍ금 천회(天會)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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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2월에 왕비 이씨연덕궁주(延德宮主)로 책봉하였는데, 바로 자겸의 셋째 딸이다.
○ 신유에 내시지후 김찬(金粲)내시 녹사 안보린(安甫麟)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등과 더불어 이자겸ㆍ척준경죽이기를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예종이 돌아가고 어린 왕이 즉위하니, 자겸이 그 권세와 은총을 굳히고자 하여 두 딸을 왕에게 들여 보내고, 자기에게 따르지 않는 자는 온갖 계략으로 중상하고, 친족을 요직에 포진시키고 당파를 많이 만들어 스스로를 높여 국공(國公)이 되고, 부(府)를 개설하며 관속을 두어 예법의 등급이 왕태자와 대등하게 하였고, 그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며, 중앙이나 지방의 관원이 하례나 감사의 글을 올릴 때에 전(箋)이라고 하였다. 여러 아들이 다투듯 저택을 건축하여 길거리에 죽 뻗쳐 있고, 권세가 나날이 더욱 떨치며,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으며, 그 종들을 풀어 놓아 다른 사람의 거마를 빼앗아서 자기 물건을 실어 들이므로, 힘없는 백성은 수레를 부수고 마소를 팔아 도로가 시끄러웠다.
   자겸이 또 군국(軍國)의 일을 도맡고자 하여, 왕을 자신의 집으로 행차하게 해서 책명을 줄 것을 요청하며 강제로 날짜를 정하려다가 일을 성취하지는 못하였지만, 왕은 그를 매우 미워하였다. 김찬과 안보린이 항상 측근에 모시고 있어 왕의 뜻을 알아채고, 마침내 지녹연과 함께 제거하기를 청하니, 왕은 그 일을 중대하게 생각하여 김찬을 평장사 이수(李壽)전평장사 김인존(金仁存)에게 보내어 계교를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왕이 외가에서 생장하였으니 은혜를 끊을 수 없으며, 하물며 그들의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니 경솔히 움직일 수 없으니, 시기를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인존은 바로 김연(金緣)이다. 지녹연 등이 상장군 최탁(崔卓)ㆍ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 등을 불러서 함께 그들을 잡아들여 먼 곳으로 유배보낼 것을 모의하였다. 준경은 지원(之元 이자겸의 아들)의 장인인데, 그 동생 준신(俊臣)과 함께 상당히 세력을 부리고 있었다. 탁 등은 준신이 본래 낮은 지위에서 병부상서로 뽑히어 윗자리에 있는 것을 평소부터 미워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허락하였다. 약속이 이미 정해지고, 그날 초저녁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먼저 준신과 준경의 아들 내시 순(純)과 지후 김정분(金鼎芬), 녹사 전기상(田其上)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에 던졌다. 내직기두(內直旗頭) 학문(學文)이 성을 넘어 중랑장 지호(池顥)를 통해서 자겸에게 고하니 자겸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낭중 왕의(王毅)가 또 성을 넘어 달려와 그 자세한 소식을 알리니, 자겸이 준경과 여러 아들 지미(之美) 등과 함께 서로 돌아보고 떨며 두려워 재신ㆍ추신 및 백관들을 집으로 소집하였다. 이자겸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고 이지미를 시켜 갔다왔다 하며 의논하였으나, 모두 대답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준경이, “일이 급박하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 하고, 시랑 최식(崔湜), 지후 이후진(李侯進), 녹사 윤한(尹翰) 등과 함께 수십 명을 거느리고 밤에 주작문(朱雀門)까지 갔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윤한을 시켜 성을 넘어 자물쇠를 부수고 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신봉문 밖에 이르러, 아우성을 치니 소리가 땅을 울렸다. 녹연(祿延)과 탁(卓) 등은 밖에 군사가 많이 모였으리라 생각하고, 모두 두려워서 나오지 못하였다. 자겸이 사람을 시켜 최탁, 오탁, 권수, 고석 등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처자와 노복들을 잡아 가두었다.
   좌복야 홍관(洪灌)이 도성에서 숙직하다가 탄식하기를, “왕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법인데, 내가 편히 있을수 있느냐." 하고, 임술일 새벽에 서화문(西華門)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려 하니, 지녹연이 밧줄로 그를 끌어올려 왕의 곁에 있게 되었다. 준경이 준신 등의 시체를 보고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지보ㆍ최식ㆍ이후진ㆍ김정황(金鼎黃)ㆍ조순거(曹舜擧)ㆍ윤한ㆍ문중경(文仲經) 등과 함께 군사를 소집하여 군기고에 들어가서 갑옷과 무기를 가지고 나아가 승평문(昇平門)을 포위하였다. 자겸의 아들인 중 의장(義莊)은 현화사에서 중 삼백여 명을 거느리고 궁성 밖에 이르니, 궁중에 있는 사람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고, 다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자성(子城)의 문 위를 지켰다.

  신봉문에 나와서 황산(黃傘)을 펼치니, 준경의 군사가 바라보고 나열하여 절하고 환성을 올리며 만세를 불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무기를 지니고 여기에 왔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들으니, 적이 궁중에 들어와 있다 하기에 사직을 호위하려 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그런 일은 없으며, 짐도 아무 탈이 없으니, 너희는 갑옷을 벗고 해산하라." 하고, 드디어 내탕의 은폐(銀幣)를 줄에 달아 늘어뜨려 군졸에게 하사하고, 시어사 이중(李仲)과 기거사인 호종단(胡宗旦)을 시켜 군사들에게 널리 임금의 명령을 알려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게 하니, 준경이 성이 나서 칼을 빼어 들고 이중 등을 쫓아 버리고 군사에게 명령하여 다시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게 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니, 빗나가는 화살이 왕의 앞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의장(義莊)의 무리가 도끼로 신봉문 기둥을 찍는데 어떤 사람이 누 위에서 중을 쏘아 머리를 맞히니 즉사하였다.
   자겸이 합문지후 최학란(崔學鸞)과 도병마 녹사 소억(邵億)을 시켜 궁문에 이르러 아뢰기를, “궁중에서 난을 일으킨 자를 내어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궁중이 경동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말씨가 매우 불손하여 왕이 아무 말이 없었다.
내시 박심조(朴深造)라는 자는 승중(昇中)의 아들이다. 궁중 뒷간으로 빠져나와 분뇨가 잔뜩 묻었다. 지름길로 자겸의 집에 가서 궁중의 사정을 고하니, 자겸이 의관을 주어 그를 위로하였다. 준경이 소억을 보내어 자겸에게 말하기를, “오늘 저물면 적이 밤을 타서 몰래 출동할 듯하니, 그들이 행동하기 전에 궁문에 불을 지르고 수색하여 체포함이 어떠하냐." 하자, 자겸이 지미를 시켜 평장사 이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궁궐이 서로 나란히 서 있어, 만일 불이 나면 불을 끄기 어려울 것이니 매우 옳지 않다." 하였다. 준경은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소부감(少府監)에 있는 황회목(黃灰木)과 장작감(將作監)에 있는 서까래들을 가져다 동화문(東華門) 행랑에 쌓고 불을 지르니, 바람에 불길이 날리어 삽시간에 내침에까지 불이 타 들어가, 궁인들이 놀라서 숨었다.
   저녁이 되어 준경과 지보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춘덕문(春德門)에 이르니, 문을 지키던 내시 이숙신(李叔晨)이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하였다. 준경이 좌액 문으로 들어가니, 금위 별장(禁衛別將) 이작(李作)과 장군 송행충(宋幸忠)이 칼을 빼어 들고 쫓아오자, 준경은 물러나 달아났다. 이작이 손으로 문을 닫으니, 준경이 사람을 보내어 여러 문을 지키게 하고 명령하기를,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죽이라." 하였다. 지추밀원사 김진(金縝)이 숙직소에 있다가 불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고지식하고 변통성이 없어 세력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이자겸, 척준경과 사이가 나쁘니, 나가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따르던 사람들을 시켜 문을 닫고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 밤에 왕이 걸어서 산호정(山呼亭)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김인존(金仁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시종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측근의 신하 임경청(林景淸)의 무리 10여 명이 있었다. 왕은 해를 당할까 두려워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선위할 것을 청하니, 자겸은 양부(兩府)의 비난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히 발언하지 못하였다. 이수(李壽)가 좌중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왕의 조서가 비록 있으나, 이공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으랴." 하니, 자겸의 뜻이 드디어 꺾여 울면서 조서를 돌려 주며 아뢰기를, “신이 두 마음이 없사오니, 바라건대 왕께서는 알아 주소서." 하였다.
   홍입공(洪立共)은 장군 유한경(劉漢卿)의 아래에 있는 중랑장이다. 자겸이 한경을 궁중에 들여보내고, 곧 입공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준경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준경이 입공에게 군사 60여 명으로 섶을 지고 도성(都省) 남쪽 길에 이르게 하였는데 입공이 은밀히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나와 너희가 모두 왕의 신하인데, 섶을 지고 궁궐을 불사르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지고 가던 나무를 내려 놓고 선교문(宣敎門) 구멍으로 들어가 왕을 바라보며 나열하여 절하니, 왕이 놀라서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였다. 입공이 앞에 나아가 경과를 아뢰자, 왕이 매우 기뻐하여 술과 음식을 주니, 이때부터 왕을 호위하며 떠나지 않았다.

   계해일 새벽에, 왕이 불길이 다가와 나가려고 하였는데, 마침 자겸이 승선 김향(金珦)을 보내어 남궁으로 나오기를 청하여, 왕이 걸어서 경령전(景靈殿)에 이르러 내시 백사청(白思淸)에게 명해서 조종의 신주를 받들어 내제석원(內帝釋院) 마른 우물에 들여 놓고, 서화문(西華門)으로 나와 말을 타고 연덕궁에 이르니, 오탁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준경이 낭장 장성(張成)을 시켜서 칼을 빼어 들고 돌진하여 오탁을 잡아 죽이고, 또 사람을 나누어 보내서 최탁, 권수, 고석ㆍ유한경, 송행충ㆍ이작ㆍ안보린 및 대장군 윤성(尹成)ㆍ한경(韓景), 장군 박영(朴英)ㆍ송인(宋仁)ㆍ사유정(史惟挺)ㆍ오정신(吳挺臣), 낭장 이유(李儒), 내시 최잠(崔箴), 원외랑 박원실(朴元實) 등을 붙잡아 죽였다. 홍관은 늙고 병들어 잘 걷지 못하여 맨 나중에 나와서 서화문(西華門) 밖에 이르렀는데, 준경이 사람을 시켜서 죽였다. 그 밖에 죽은 군사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내시 봉어(內侍奉御) 왕관(王觀), 대장군 윤선(尹先), 낭장 정총진(丁寵珍), 별장 장성호(張成好) 등이 왕을 모시고 남궁에 있었는데, 자겸이 그들을 내보내기를 두세 번이나 청하니, 왕이 할 수 없이 따르며 사람을 시켜 죽이지는 말라고 청하였으나, 지보(之甫)가 모두 죽였다. 자겸이 또 준경과 함께 상의하여, 난이 일어나던 날에 숙직하던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죽이자 하니, 이수(李壽)가 굳게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장군 이녹천(李祿千)ㆍ김단(金旦)ㆍ김언(金彦)은 도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이날 궁궐이 다 타버리고 오직 산호(山呼)ㆍ상춘(賞春)ㆍ상화(賞花)의 세 정자와 내제석원(內帝釋院) 행랑 수십 칸만이 겨우 남았다. 모든 관원이 허둥지둥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직사관 김수자(金守雌)가 혼자서 국사를 지고 산호정 뒤에 가서 땅을 파고 묻었기 때문에 타 없어지지 않았다. 지보가 지녹연을 순천관(順天館)에서 결박하고 참혹하게 고문하여 거의 죽게 된 것을 윤한을 시켜 압송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는데, 충주에 이르러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었으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을 윤한이 팔다리를 잘라 길가에 묻고 돌아왔다. 김찬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김찬과 지녹연의 처자들을 모두 적몰하여 지방 관청의 노비로 삼았다. 오탁의 아들 자승(子升)과 고석의 동생 보준(甫俊)이 북산(北山)에 숨었는데, 박영(朴永)을 시켜 뒤를 밟게 하였더니, 보준 등이 높은 바위에 올라가 박영을 꾸짖기를, “자겸 등이 은총을 도둑질하고 권세를 독점하여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 이리와 호랑이보다 더 심하여, 장차 종묘 사직을 전복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모두 간사하게 아첨하여 그를 섬기니, 본래 노예만도 못하다. 우리는 의거를 일으켜 우리 백성에게 보답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운명이다. 의사가 어찌 너같이 못난 놈의 손에 죽을수 있겠느냐." 하고, 곧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며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지녹연은 채문(蔡文)의 증손으로 재간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갑신년에 여진을 토벌하는 데 따라가 상당한 공이 있었다. 사람됨이 거칠고 방자하고 학술이 없으며, 스스로 지혜가 있는 줄로 생각하지만 계책이 졸렬하여 도리어 화를 당하였다. 홍관은 당성군(唐城郡) 사람으로, 힘써 공부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김진은 일찍이 영광ㆍ청주 두 고을을 다스려 모두 정사를 잘했다는 명성이 있었고, 당시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기는 바 되었다.

○ 3월에 자겸이 에게 중흥택 서원(西院)으로 옮겨서 거처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의장과 시위를 폐지하고 샛길로 서원에 갔는데 문에 이르니, 대경(大卿) 김의원(金義元)과 최자성(崔滋盛)이 중흥택 집사로 나와 맞았다. 낭장 지석숭(池錫崇), 산원 권정균(權正鈞), 대정 오함(吳含)이 산호정에서 남궁에 이르기까지 측근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때에 석숭(錫崇) 등이 왕을 부축하여 북문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자겸과 준경이 그를 죽이려고 낭장 이적선(李積善)을 시켜 끌어내니, 석숭이 왕의 옷을 잡고 살려 달라고 급히 소리쳤다. 왕이 돌아보고 적선을 꾸짖으며 그 가슴을 찼으나, 그래도 놓지 않아 왕의 옷이 찢어지고 복두 역시 문설주에 부딪혀 부서졌다. 지미와 지보가 문에서 왕을 바라보고도 뜰에 내리지 않고, 최식만이 홀로 나와서 절하고 적선을 꾸짖기를, “왕의 말씀이 계신데 네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느냐." 하니, 적선이 드디어 그를 놓아주었으나, 석숭 등이 오히려 두려워하여 나오지 못하였다. 이때 내시 조영(趙寧)이 자겸에게 아첨하여 섬겼는데, 왕이 최식과 조영을 불러 이르기를, “석숭 등 세 사람이 지성으로 왕을 위할 뿐이요, 다시 다른 마음은 없으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죽이지 말라고 청하여 달라." 하니, 준경이 이 말을 따라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왕이 마루에 오르니, 자겸이 그 아내와 함께 나와서 절하고 손뼉을 치며 땅을 두드리고 통곡하며 아뢰기를, “황후가 궁으로 들어갈 때는 태자가 탄생되기를 원하였고, 탄생하자 오래 사시기를 하늘에 기원하여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 천지 신명이 나의 지성을 알아주실 터인데, 도리어 오늘날 적신의 말을 믿으시고 골육을 해치고자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니, 왕이 부끄러워하며 말이 없었다. 왕이 서원(西院)에 거처하면서부터 좌우가 모두 자겸의 무리였기 때문에 우울하고 무료하여 나라 일을 직접 처결하지 아니하고, 모든 관원들을 근처의 사원으로 옮겨 왔으나 임시로 수를 채워 둘 뿐이었다. 자겸과 준경은 위엄과 세도가 더욱 극성하여 그들이 하는 일에 누가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생겼다 없어졌다 하며 가득 찼다 비었다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다. 이자겸의 악이 극치에 달하였으니 그 망할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다. 지녹연 등은 사람이 참을 수 없는 마음으로 인하여 왕의 측근에 있는 악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지혜가 적고 모책이 얕아서 마침내 제 몸도 죽고 나라를 어지럽히기에 이르렀으니, 옛날 당(唐) 나라의 이훈(李訓)과 정주(鄭注)가 환관(宦官)을 제거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감로(甘露)의 변으로 화가 국가에 미친 것과, 그 사정이 대략 비슷하니 진실로 탄식할 만하도다." 하였다.

   척준신(拓俊臣)을 수사공 좌복야로, 김정분(金鼎芬)ㆍ척순(拓純)을 모두 호부 원외랑으로, 전기상(田其上)ㆍ최영(崔英)을 모두 합문지후로 추증하고, 후하게 부의를 주었다. 이는 자겸의 뜻을 따른 것이다. 이로부터 외가가 더욱 횡포하여, 박승중(朴昇中), 허재(許載)로부터 아랫사람에 이르기까지 아첨하고 붙좇아 포학을 부리는 것이 두려웠다. 왕은 은밀히 내의 군기 소감 최사전(崔思全)과 이를 상의하니, 사전이 아뢰기를, “자겸이 발호하는 까닭은 오직 준경을 믿기 때문이니, 왕께서 만일 준경을 매수하여 곧 병권을 예속시키면 자겸은 다만 한 고립된 사람일 뿐입니다." 하였다. 왕은, “준경이 국공의 심복이 되어 혼인을 맺기까지 하였고, 준신과 척순이 모두 관병에게 살해되었으니 이를 두려워 하는 바이다." 하고, 곧 점을 치니 길조를 얻었다. 그리하여 사전이 준경의 집에 가서 충의로써 효유하기를, “태조와 역대 왕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어 화복이 두려운데, 자겸이 특히 궁중의 세도를 믿을 뿐이오. 신의가 없으니 그가 하자는 대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은 마땅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한 세대에까지 없어지지 않을 공을 세우도록 하시오." 하니, 준경이 속으로 옳게 여겼다.
○ 국가에 일이 많기 때문에 과거 선발을 정지했다.
○ 척준경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생각하건대, 짐이 밝지 못해서 이번에 흉도들이 일을 일으키게 만들어 대신에게 근심과 수고를 끼치게 하였으니, 모두 과인의 죄이다. 이로써 몸소 반성하고 허물을 뉘우치며 하늘을 우러러 마음에 맹세하고, 신민과 더불어 그 덕을 새롭게 할 것을 바라노니, 경은 다시 노력하여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보필하여 뒤에는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게 하라." 하였다.
○ 백관을 소집하여 대금(大金)에 대해 신하로서 섬기는 문제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모두 옳지 않다고 하였다. 오직 이자겸ㆍ척준경이 말하기를, “금 나라가 옛날에는 작은 나라로 요 나라와 우리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갑자기 중흥하여 이미 요와 송을 멸하였고, 정치를 잘하고 군사가 강하여 날로 강대해지고 있으며, 또 우리나라와 국경이 연접해 있으니, 일의 형세상 섬기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은 옛날 어진 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사신을 먼저 보내어 빙문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좇았다.
○ 계사일에 누른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 갑오일에 해의 빛깔이 핏빛 같았다.
○ 이지미를 보내어 태묘에 고하고, 금 나라를 섬기는 문제의 가부에 대하여 점을 쳤다.
○ 참수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인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무리를 사직을 보호했다 하여 차등 있게 관직을 주었다.
○ 지추밀원사 김부일(金富佾)을 평장사 척준경의 사택에 보내어 빨리 일을 보도록 재촉하고, 이어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의 종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왕의 자리에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놓았으니 죄가 마땅히 죽어야 될 것이요, 너 역시 적몰되어 관노가 될 터인데, 어째서 나를 욕하느냐." 하였다. 준경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자겸의 집으로 달려가서 옷을 풀고 갓을 벗고 말하기를, “나의 죄가 크니 마땅히 법을 맡은 관아에 가서 스스로 변명하리라." 하고, 바로 나오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리자, 자기 집에 돌아와 누웠다. 자겸이 지미(之美)와 공의(公儀)를 보내어 화해하기를 청하니, 준경이 꾸짖어 말하기를, “전날의 난은 모두 너희가 한 짓인데, 어찌 다만 나의 죄라 하여 죽어야 된다 하느냐?" 하고, 마침내 서로 만나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때문에, 왕이 이 말을 듣고 이번의 명을 내린 것이다.
○ 여름 4월에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거둥하였는데, 이자겸이 호종하고 백관이 말 앞에서 절하니, 자겸이 이것을 보면서 태연스럽게 있으니, 왕은 옛 궁궐을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정응문(鄭應文)과 이후(李侯)를 금 나라에 보내어 신(臣)이라 일컫고 표문을 올리기를, “대인(大人)이 전통을 이어서 사방에 위엄을 떨치니, 다른 나라들이 조하(朝賀)하려고 이역만리를 건너오거늘 하물며 국경이 접해 있으니 정성을 바치는 마음 더욱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천품이 영명하셔서 덕업을 날로 새롭게 하시어 제왕의 조령이 발표될 때마다 모든 백성이 기뻐하지 않는 자 없으며, 위력이 미치는 인근의 적국이 감히 거역하는 자 없으니, 진실로 제왕의 위대한 능력이시며 천지도 은연히 보호하는 바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소국의 미약한 몸과 변변치 못한 덕으로 위대한 공적을 듣고 경모하는 마음이 간절한 지 오래였으니 약소한 물건으로 충성과 신의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비록 변변하지 못한 예물임을 부끄럽게 여기나, 넓은 도량으로 받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다.
금 나라에서 회답하는 조서에, “짐(朕)은 생각하노니, 망하여 가는 것은 없애 버리고, 보존되는 것을 견고히 하는 것은 제왕의 할 일이며,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사직을 보존하는 도리이다. 훌륭하고 큰 인물은 시기를 따라 변통할 줄 아는 원대한 사업을 품는 것이다. 경은 집안이 왕작(王爵)을 전하고 대대로 영토를 누려 왔는데, 글을 올려 존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고, 토산물을 공납하는 예절을 다하였으며, 이어 낮은 칭호를 사용하였으니, 최고의 예의로 섬기는 뜻을 알겠노라. 무력으로 위협하지 않았고 예물로 회유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왔으니 역시 좋은 일이 아닌가. 또 군부(君父)로서의 나의 마음이 이미 두터우니, 신자(臣子)로서의 의리를 너는 쉽게 잊지 말라." 하였다.
○ 척준경을 문하시랑 판병부사에, 이수를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자덕(李資德)ㆍ허재(許載)를 모두 참지정사에, 김부일(金富佾)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지미를 판추밀원사에, 김향(金珦)ㆍ김의원(金義元)을 모두 동지추밀원사에, 김부식(金富軾)을 어사대부 추밀원부사에 임명하였다.
○ 내시 25명을 내쫓았다. 모두 자겸이 미워하는 사람들이었다.
○ 5월에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겸이 궁의 남쪽에 거처하면서 북쪽 담을 뚫어 궁 안으로 통하게 하고, 군기고의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 집 안에 보관하였다. 왕이 일찍이 혼자서 북쪽 동산에 나아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얼마 후에 자겸이 십팔자(十八子 이(李) 자를 파자한 것)의 비결대로 왕의 자리를 도모하고자 떡에 독약을 넣어서 왕께 드렸는데, 왕비가 비밀리 왕께 알려 떡을 까마귀에게 주었더니 까마귀가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어 왕비를 시켜서 왕에게 드리게 하였더니 왕비가 대접을 들고 일부러 넘어져 엎질러 버렸다. 왕비는 바로 자겸의 넷째 딸이다.
척준경이 이미 자겸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최사전(崔思全)이 또 이 틈을 타서 말하니, 준경이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글을 올려, “스스로 충성을 바치겠다." 하였다.이 사람을 시켜 준경에게 이르기를, “국공이 비록 참람하나, 반란을 일으킨 형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짐이 만약 먼저 거사 한다면 가까운 사람을 친애하는 본의가 될 수 없는 일이니, 천천히 그 변하는 상황을 기다려 이에 대응하여도 늦지 않다." 하고, 항상 궁중 사람을 시켜 상황을 엿보게 하였다. 준경은 병부에서 무관직의 인사를 맡아 보았다. 왕이 손수 쪽지를 적어서 몰래 내시 조의(趙毅)를 보내어 준경에게 보였는데 쪽지에 이르기를, “오늘 숭덕부(崇德府)의 군사가 무기를 가지고 대궐 북쪽에 이르러 장차 침문(寢門)으로 들어올 듯하니, 짐이 만일 해를 당한다 하면 실로 부덕한 탓이지만, 원통한 것은 태조가 창업한 뒤 역대 선왕이 서로 계승하여 과인에게까지 이르렀는데, 만일 왕조가 다른 성(姓)으로 바뀌게 된다면, 다만 짐의 죄만이 아니라 실로 보필하는 대신도 매우 수치스러운 바이니, 바라건대 경은 이것을 잘 도모하라." 하였다. 준경이 곧 어필을 상서 김향(金珦)에게 보이니, 김향이 꿇어앉아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성지가 이같으니 마땅히 의리상 죽어야 하거늘 공은 어찌 편하게 있겠는가." 하였다.

   준경이 김향과 함께 장교 7명과 서리와 종들 20여 명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나오니, 창졸간의 일이기에 아무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어, 각기 목책의 나무를 뽑아서 몽둥이를 만들어 가지고 금오위(金吾衛) 남쪽 다리로부터 대궐로 들어가니, 조의(趙毅)가 맞이하면서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하며 들어가자, 곧 광화문(廣化門)을 닫아버렸다. 이공수(李公壽)가 뒤따라 이르자 왕이 한쪽 문을 열어 그를 들어오게 하였으니, 공수는 바로 이수이다. 이때에 순검 도령(巡檢都令) 정유황(鄭惟晃)이 백여 명을 거느리고 군기감에 들어가 무기와 갑옷을 나눠 주고, 연경궁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소경 유원식(柳元湜)을 만났는데, 그 말이 불순하자 즉시 죽였다.
   준경이 갑옷을 입고 급히 궁궐로 들어가니, 왕은 천복전(天福殿) 문에 나와 준경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준경이 왕을 모시고 나오는데 자겸의 무리가 활로 준경을 쏘았다. 준경이 칼을 빼어 들고 한번 호통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왕이 군기감으로 들어가 군사를 시켜서 호위를 엄중히 하고, 준경이 승선 강후현(康侯顯)을 시켜 자겸을 부르니 자겸이 소복을 하고 왔다. 준경이 공수와 상의하려고 자겸과 그의 처자를 팔관보(八關寶)에 가두고, 그의 장군 강호(康好)와 고진수(高珍守) 등을 베어 죽였는데, 모두 자겸이 시키는 대로 한 자들이었다. 사람을 나눠 보내어 그 무리를 체포하고 왕이 몸소 광화문에 나와 모여든 여러 사람에게 포고하기를,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 매우 대역이 말할 수 없었는데, 충신들의 의거로 해를 면하게 되었다." 하니, 모든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환호하며 기뻐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지미(之美)가 사변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백여 명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다가, 이자덕(李資德)ㆍ김인규(金仁揆)와 함께 병부에 들어갔으나 역시 자겸이 붙잡힌 줄을 알지 못하였다. 저녁에 순검이 병부에 나가 지미를 잡아 검점소(檢點所)에 가두자, 자덕 등은 놀라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왕이 연경궁으로 돌아올 때에 시종이 먼저 들어가 청궁(淸宮)하는데, 중 의장(義莊)이 내침(內寢)에 숨어 있으므로 잡아서 팔관보(八關寶)로 보냈고, 자겸과 아내 최씨와 아들 지윤(之允)은 영광에, 지미(之美)는 합주(陜州 경남 합천)에, 공의(公義)는 진도에, 지언(之彦)은 거제에, 지보(之甫)는 삼척에, 의장은 금주(金州 경남 김해)에, 지원(之元)은 함종(咸從 평남 강서)에 귀양보내고, 합문지후 박표(朴彪)ㆍ문중경(文仲經), 직장 박영(朴永), 태사령 양인(梁麟), 동관정(冬官正) 양해(梁獬), 내시 이숙신(李叔晨)ㆍ이분(李芬), 대장군 김호(金好), 장군 지호(池顥)ㆍ지복신(池福臣), 낭장 최사염(崔思琰), 별장 위호(位好), 산원 송용중(宋用中)과 자식 30여 명과 관노ㆍ사노 90여 명은 모두 먼 지방으로 나누어 귀양보내었다.
   박표란 자는 가장 간교하고, 자겸에게 아부하여 수탈해 들이고 재물 긁어 모으는 짓을 모두 그가 행하여, 이익을 노리고 벼슬을 얻으려는 사람이 다투어 그에게 뇌물을 바치니, 드디어 큰 부자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더욱 미워하여 중도에서 죽여 물속에 넣어 버리고, 또 신봉문에서 활쏜 자 1명과 지언의 가신 김충(金冲)을 잡아서 칼을 씌워 사흘 동안이나 도시에서 위엄을 보이고 외딴 섬으로 귀양 보내고, 그 친당인 평장사 이자덕ㆍ김인규(金仁揆)와 동지추밀원사 김의원(金義元), 예빈경 이자원(李資元), 전중소감 박효렴(朴孝廉), 내시낭중 왕의(王毅), 지후 이존(李存)은 모두 수령으로 좌천시켰다.

교서에 선포하기를, “짐이 어린 나이로 조종의 대업을 이어받아 외가에 의뢰하고자 하여,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위임하였는데, 탐학하고 포학한 짓을 함부로 하고 백성을 괴롭혀서 나라에 해가 되었다. 짐이 비록 알았으나, 막아 낼 수가 없던 차에,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나자 판병부사 척준경이 의거를 일으켜 난국을 바로잡았으니 그 공은 잊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해당 관아로 논공하여 상을 내리고, 군기 소감 최사전(崔思全)도 뜻을 같이하여 은밀히 도왔으니 아울러 공을 포상하게 하라." 하였다.
○ 평장사 박승중(朴昇中)을 울진에, 그 아들 심조(深造) 등 4명은 남쪽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승중은 허재(許載)ㆍ최식(崔湜)과 함께 자겸에게 아부하여 못할 짓이 없었다. 심지어 부(府)를 세우고 관원을 설치하며 전(箋) 혹은 절(節)이라고 부르게 한 것이 모두 승중의 소행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간관이 논박하여 배척하였다.
○ 척준경을 문하시중에 임명하니, 준경이 계품을 뛰어넘었다고 하여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6월에 척준경을 추충 정국 협모 동덕 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에 임명하고, 아내 황씨를 제안군 대부인(齊安郡大夫人)에 봉하고, 의복과 금ㆍ은으로 만든 그릇과 피륙, 안장 갖춘 말 및 노비 10명, 토지 30결(結)을 주었으며, 이공수를 추충 위사공신 판이부사에, 김향(金珦)을 위사공신 호부상서 지문하성사에, 최사전(崔思全)을 병부상서에 임명하였다.
○ 허재를 내보내어 풍주 방어사(豐州防禦使)를 시키고, 아들 순(純)을 금주 방어판관(金州防禦判官)을 시켰다. 이전에 간관이 허재를 박승중과 같은 죄로 논하려던 것을 준경이 옹호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처분을 받으니, 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 간관이 여러 번 소를 올려 아뢰기를, “이자겸의 두 딸은 주상께 이모가 되니, 주상과 배우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두 왕비를 내치고, 전중내급사 임원애(任元敱)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비(妃)의 어머니는 이씨요, 문하시중 위(瑋)의 딸이다. 왕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이위가, 누런 큰 기를 그 집 중문에 세웠는데 깃발이 바람에 날려 선경전(宣慶殿) 치미(鴟尾 궁전의 지붕 네 모서리에 다는 장식)쪽으로 휘날리는 꿈을 꾸었다. 왕비를 낳자, 이위가 특히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뒤에 반드시 선경전에서 놀 것이다." 하였다.
시집갈 나이가 되어 평장사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지효(之孝)와 정혼하였는데, 혼인날 저녁 지효가 문에 이르자 왕비가 별안간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어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하고 돌려 보냈다. 다음날 병점을 쳤는데 점쟁이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시오. 이 처녀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하게 될 것이니, 반드시 국모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이미 자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여 보낸 뒤라 자겸이 그 말을 듣고 미워하여 곧 상소하여 원애를 개성 부사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1년 후에 부사의 부관이, 부사가 있는 청사의 대들보가 벌어져 큰 구멍이 생기고 누런 용이 구멍에서 나오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 부관이 조복을 갖추고 원애에게 나아가 지난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자세히 하며 하례하여 말하기를, “부사의 집에 반드시 특이한 경사가 있을 것이니, 공은 꼭 알아 두십시오." 하였다.

   또 왕이 일찍이 깨 닷되와 황규(黃葵) 서 되를 얻은 꿈을 꾸었다. 이를 척준경에게 말하니 준경이 대답하기를,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하더니, 그 해몽이 과연 적중하였다.
○ 정유황(鄭惟晃) 등 20명에게 왕의 행차를 호위하여 역적을 체포한 공로로 차등있게 관직을 주었다.
○ 가을 7월에 송 나라에서 합문지후 후장(侯章)ㆍ귀중부(歸中孚) 등의 60여 명을 보내 와서 조서로 이르기를, “짐이 태자로 있은 지 10여 년간 감히 태만하고 안일하게 지낸 일이 없었더니, 도군태상황제(道君太上皇帝)께서 제위에 있은 지 오래되어서 만기(萬機)의 번거로움에 싫증이 나시어, 마침내 양위할 뜻을 말씀하시니 짐이 사양하였으나 명을 받지 못하고 드디어 제위에 올랐노라. 높으신 조종조의 기업과 지중하신 상황의 부탁을 깊이 생각하여, 밤낮으로 조심스러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금 나라 사람이 무도하게 곽약사(郭藥師 송 나라 장수)의 배반을 기회로 연산(燕山)을 함몰하고, 국경에서 소란을 일으켜 수도에까지 미쳤다. 짐이 즉위하자마자 이런 놀라운 일을 당하여, 왕에게도 미처 알리지 못하였노라. 짐이 생각건대, 왕은 대대로 충효를 닦으며 책봉을 받들어 역사가 오랜 변경의 나라로 오랫동안 나라의 은혜를 받아 왔다. 우리 할아버지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사절을 명하여 국교를 닦을 적에 예의와 성의가 아울러 극진하여, 정의는 골육지친과 같으며, 의리는 임금과 신하의 사이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왕 도군태상황제 때에도 예물을 후히 보내고 대우도 특별하였다. 짐이 생각건대, 중국과 왕과는 멀리 요해(遼海)가 가로막혀 있는데도 은혜와 예절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에 똑같은 적개심으로 적을 물리치는 데 힘써 주기를 바란 것뿐이다. 왕의 나라가 금 나라와 서로 마주 보고 있어 거리가 수백 리도 되지 않는데,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여 중국에 보답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역대 왕조에서 특별히 대우하던 본의이겠는가.
   금 나라 사람이란 일찍이 왕에게 신하 노릇을 하던 해변의 조그만 종족으로 하늘을 배반하고 신을 거역하여 거란을 쳐 없애고 드디어 중국을 업신여겨 횡포가 차츰 심해지니, 가령 그들이 뜻대로 된다면 왕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고립무원의 군사로 깊이 쳐들어 왔을 적에 응당 쳐 없애 버려야 했지만, 짐은 그들이 숙왕(肅王)을 위협하여 인질로 데려갔기 때문에 다만 군사에게 명하여 국경 밖으로 몰아내었다. 장차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그만 족속의 죄를 문책하려 하노니, 왕은 마땅히 군사를 독려하여 서로 안팎이 되어 토벌을 행하라. 왕에게 사특함이 있는 자를 다스려 바로잡고 포로를 조정에 바쳐 중국에서 베푼 여러 세대의 은혜에 보답함은 큰 충성이며, 혼란하고 어두운 것들은 공격하고 횡포한 자를 쳐 없애어 사막 밖에 위엄을 펴는 것은 큰 의(義)이며, 영토를 확장하여 그 소굴을 뒤엎어 교만하고 신하 노릇 하지 않는 오랑캐를 앙갚음하는 것은 큰 위엄이다. 한 번 거병하면 세 가지를 모두 얻을 터인데, 왕은 무엇을 꺼려 하지 못하는가. 높은 관작과 후한 물품도, 짐은 왕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을 것이니, 왕은 노력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후장(侯章)이 사관에서 또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저희들이 올 때에 황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대 때부터 요순의 도를 행하여 근본을 힘쓰고 교화를 돈독히 하여 귀국과 수호하여 온 지 거의 2백 년 동안 예절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고, 우리 도군태상황제가 이어받아서 은총이 더욱 두터웠는데, 근래에 나쁜 무리들의 발의에 의해 모두 국경의 분쟁을 일으켜, 금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발호하여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키고 오합지졸을 모아서 준비가 없는 틈을 타서 습격함으로써 우리 중국을 소요하게 하여 위협과 노략질을 함부로 감행하였습니다. 이때에는 왕을 떠받드는 군사 수백만이 있었으나 대신이 건의하기를, '기왕 황하의 남쪽에서 공격하지 않았으니 대하(大河)의 북쪽에서 맞아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깊숙이 들어온 뒤에 대군이 한번만 출동하여도 모조리 없애 버릴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효제와 공경과 검소로써 밤낮으로 정무를 부지런히 관장하였으며, 어진이에게 책임을 맡기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신의를 숭상하고 의를 생각하여 그들을 쳐 없애 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금 나라 사람도 허물을 뉘우쳐 화의를 고하고, 길을 빌려 사막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주상께서 금과 비단을 주어 호군하는 밑천을 삼게 하였는데, 다시 만족을 모르는 욕심을 품어 하북(河北)의 관진(關鎭)을 노리고 있으니 사람과 신이 함께 노할 일입니다. 사세가 어쩔 수 없게 되어, 가을의 서늘한 때를 기다려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자 하는데, 이런 때를 당하여 귀국에서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만일 국경으로 군사를 인솔하여 함께 이 도적을 소탕한다면, 이는 무궁한 우호를 맺는 것이요, 인하여 성공할 것이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오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본국이 선조 때부터 이제까지 상국을 섬겨 공손하게 순종하는 정성을 감히 태만히 한 적이 없었으며, 신종황제께서 비록 멀리 요해(遼海)가 가로 막고 있으나 하늘의 밝은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듯이 사신을 내려보내어 국교를 닦으시고 은총과 예의가 더욱 두터웠으며, 도군태상황제께서 이어받들어 대우하심이 한층 더하였고, 예물도 평상시의 배나 되니, 실로 백 번을 태어나도 갚기 어려운 은혜입니다. 생각건대, 천지같이 크신 덕으로 그 보답함을 책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감격한 마음은 그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원하였습니다. 지금 엎드려 사신이 받들어 전하는 조서를 보니, 금 나라 사람이 무도하고 횡포가 더욱 심하여, 바야흐로 천하의 군사를 일으켜 조그마한 무리를 문죄하려 하는데, 소국으로 하여금 군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서로 안팎이 되어 토벌을 행하라 하니, 저는 처음부터 받들어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생각건대, 금 나라 사람은 처음에는 본래 우리나라에 예속되어 있으며 항상 약탈을 일삼아 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변방을 겨우 안정시켜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쳐들어오면 징계하여 방어하고 물러가면 방비하고 지켜 그들을 견제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숙왕(肅王 숙종) 때에, 추장 영가(盈歌)란 자가 힘으로 여러 오랑캐를 제압하고 위력으로 모든 부족을 항복 받아 백두산을 노려보고 자주 우리 국경을 침범하더니, 오달(吳達)과 혜노(惠奴)가 계속하여 일어나 흉한 세력이 날로 떨쳤습니다. 얼마 전에 포로가 되었던 사람이 금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상국의 사신이 오랑캐의 영토에 왔는데 예절이 항복하러 온 사신 같아 북요를 대하는 전례와 같았다.' 하며, 또 변방 사람의 말을 들으니 금 나라 사람이 거란을 함몰하고 드디어 상국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합니다. 황제가 즉위하신 직후이기에 쳐 없애지 않고 그들이 화의를 청하자 그것을 허락하였다 하니, 중국과 같은 큰 힘으로도 이러하온데, 하물며 우리나라와 같이 고립된 처지에서 장차 무엇을 믿겠습니까.
금년 4월에 특별히 사절을 보내서 수호하여 벌써 여러 달이 지났는데, 오히려 회보가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본국은 천재가 잦아서 국고가 다 없어져 모든 적을 방어할 기구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으므로, 바야흐로 공인(工人)들을 모아 부흥시킬 것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이제 조서를 내려 간곡히 유시하시니 이는 실로 옛 수치를 씻고 큰 은혜에 보답할 시기입니다만, 잔폐한 군사로써 새로 이긴 적군을 당해 낸다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니, 다만 군사를 훈련하고 병장기를 수리하였다가, 상국의 군사가 와서 저쪽 국경을 제압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감히 힘을 다하여 서로 안팎이 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천자의 위력을 힘입어 오랑캐의 무리를 평정하는 데 협조하는 것이 나의 원하는 바로서 하늘이 실로 이를 감시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사명을 받들어 복명하는 날에 마땅히 이 뜻으로 보고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후장(侯章)이 돌아갈 때 왕이 표문을 붙여 통보하였다. 그 대략에, “생각하옵건대, 작은 제후국으로 대대로 두터운 은덕을 입어 항상 상국에 보답하는 데 충성을 다하기를 원하였으니, 어찌 근왕의 일에 힘쓸 생각이 없겠습니까. 문득 조서를 받아, 읽고서 다만 눈물이 흐름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즉시 명령을 따라 군사를 동원하여야 하지만, 다만 저희 나라는 본래 넉넉하지 못한데다가 근래에 재난을 겪어 저축하였던 것이 모두 타 버렸으니, 장차 물자와 식량을 저축하고 병장기를 수선한 후에야 동원할 수 있으며, 창졸간에 도모하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더구나 적들의 세력이 모질고 완강하여 경솔히 건드릴 수 없으며 오랑캐의 땅이 험난하니, 어찌 쉽사리 멀리 쳐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황제의 명령이 문에 임하니 회피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상국의 군사가 적을 제압함을 기다려 조금이라도 위령(威靈)을 돕고자 합니다." 하였다.
○ 9월에 추밀원부사 김부식(金富軾)형부 시랑 이주연(李周衍) 송 나라에 보내어 즉위를 하례하였다.
금 나라선유사 동첨서추밀원사 고백숙(高伯淑), 홍로경(鴻臚卿) 오지충(烏至忠) 등이 왔다. 금 나라 임금이 백숙 등에게 이르기를, “고려에 대한 모든 사절의 왕래하는 의식은 모두 요에게 대하던 옛 제도를 따르게 하고, 보주로(保州路)와 변경지대에 있는 인구로서 저쪽 경내에 거주하는 자를 있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 만일 일일이 다 들어 주거든 곧 보주의 지방을 그에게 주라." 하였다. 보주는 바로 포주(抱州 평북 의주)이다.
○ 경인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횡단하였다.
○ 겨울 10월 병신일은 경룡절(慶龍節)이므로, 천복전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왕이 금 나라 사자를 대명궁(大明宮)에서 전별하고 회답의 표문을 부쳐 보냈는데, 절차는 모두 요를 섬기던 옛 제도대로 하였다.
○ 김찬(金粲)을 불러들여 전중 내급사에 임명하고, 홍관(洪灌), 김진(金縝), 지녹연(智祿延)의 아들과 사위에게 관작 일급(一級)을 내렸다. 김찬은 뒤에 이름을 안(安)으로 고쳤다.
○ 남경에 행차하였다.
○ 11월에 연흥전(延興殿)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남경(南京)에서 돌아왔다.
○ 윤달에 사면령을 내리고, 80세 이상 된 자와 홀아비ㆍ과부ㆍ자식 없는 늙은이ㆍ고아ㆍ효자ㆍ의부ㆍ절부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차등 있게 물건을 주었다.
○ 조서를 내려, 척준경의 화상공신당에 걸게 하였다.
○ 12월에 이자겸이 영광군에서 죽었다.
위위경 김자류(金子鏐), 형부 낭중 유덕문(柳德文)을 금 나라에 보내어 선유에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기를, “고백숙이 와서 보주성(保州城)의 땅을 떼어 고려에 소속시킴을 허락하고 다시 회수하지 아니한다는 성지를 은밀히 전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려의 원래의 영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의 옛 땅은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는데, 여러 번 변천을 겪어서 우리 선대에 이르러 북국(北國 요(遼))에 겸병을 당하고, 삼한의 영지가 침해당하여, 비록 이웃 나라로서의 수호는 맺었으나 옛 땅을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명이 새로 내려 성스러운 왕이 이미 일어나시고 군사가 정의를 위하여 일어남을 보고, 성보(城堡)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신의 아버지인 선왕 때에 귀국의 변방 신하 사을하(沙乙何)가 와서 황제의 칙지를 전하기를, '보주(保州)는 본래 고려의 영토이니 고려에서 회수함이 옳다.' 하여, 선왕은 곧 그 성과 못을 수리하고 민가를 들여보냈습니다. 이때에 비록 우리나라가 상국에 신하로 복속하지 않았지만, 선제(先帝)가 특별히 이웃 나라를 사랑하시어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시고 우리에게 옛 땅을 주었습니다. 다음 세대가 왕위를 계승함에 이르러 천명을 받은 거룩한 덕을 만나서 덕음을 상세히 듣고 공손히 신하의 직분을 수행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동쪽의 자그마한 땅은 본래 우리나라의 변경 지역인데, 비록 일찍이 거란에게 침탈당했으나, 우리나라가 이미 선대에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여 이례적인 혜택을 베풀어 우리나라에 예속시키니, 어찌 요행으로 이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대저 특별한 황제의 은덕일 뿐입니다. 깊은 인자함과 큰 의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작은 힘과 얕은 재주로 어떻게 보답할 것입니까. 오직 철을 따라 조공하는 일을 극진히 하며 속국이 지켜야 할 상례를 지켜 온 나라가 기꺼이 정성을 다하며 자손에게 전해가면서 영원히 맹세합니다. 높은 밝으심이 위에 있는지라 진실한 정성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하였다.
○ 김인존(金仁存)을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 검교태사 문하시중 감수국사 상주국 판례부사로 임명하였다.

[주-D001] 감로(甘露)의 변 : 
당 나라 이훈과 정주가 환관을 모조리 죽이려고 꾀를 내어, 궁중의 나뭇잎에 감로가 내렸다고 속여서 환관들에게 그것을 보러 오게 하여 모두 죽이려 하다가, 일이 실패되어 조신들이 화를 당하였다.
[주-D002] 청궁(淸宮) : 
난이 있은 후에, 왕이 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궁중을 숙청하는 것이다.



[丙午四年 宋 欽宗 靖康元年,金 天會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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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二月,冊王妃李氏,爲延德宮主,卽資謙,第三女也。○辛酉,內侍祗候金粲,內侍錄事安甫鱗,與同知樞密院事智祿延等,謀誅李資謙,拓俊京,不克,初睿宗,晏駕,王,幼沖卽位,資謙,欲固其權寵,納兩女于王,有不附己者,百計中傷,以其族屬,布列要職,多樹黨與,自尊爲國公,開府置僚屬,禮數,視王太子,號其生日,仁壽節,內外賀謝,稱箋,諸子,爭起第宅,連亘街陌,勢焰益熾,賄賂公行,縱其僕隷,奪人車馬,載輸己物,小民,皆毀車,賣牛馬,道路騷然,資謙,又欲知軍國事,請王幸其第,授冊,勒定時日,事雖未就,王,頗惡之,粲及甫鱗,常侍左右,揣知王意,乃與祿延,謀,請除之,王,重其事,遣粲,問計於平章事李壽,前平章事金仁存,皆對曰上,生長外家,恩不可絶,況彼黨與滿朝,不可輕動,請俟其間,王,不聽,仁存,卽金緣也,祿延等,召上將軍崔卓,吳卓,大將軍權秀,將軍高碩等,共謀收捕,流之遠地,俊京,之元,妻父也,與其弟俊臣,頗用事,卓等,素疾俊臣,自下位,擢爲兵部尙書,以居上,故,許之,約束旣定,至是日初夜,率軍入宮,先殺俊臣,及俊京子內侍純,祗候金鼎芬,錄事田其上,崔英等,投屍於宮城外,內直旗頭學文,踰城,因中郞將池顥,以告資謙,資謙,罔知所爲,郞中王毅,又踰城,奔告其詳,資謙,與俊京,及諸子之美等,相顧戰恐,召集宰樞百僚于其第,資謙蒼黃失措,使之美,往復議問,皆莫知所對,俊京,曰事急矣,不可坐待,乃與侍郞崔湜,祗候李侯進,錄事尹翰等,率數十人,夜至朱雀門,不得入,使翰,踰城,折鑰開關,入至神鳳門外,呼譟聲,殷地,祿延,卓等,謂外兵,大集,膽落,皆不能出,資謙,使人,火崔卓,吳卓,權秀,高碩等家,囚其妻子奴僕,左僕射洪灌,直宿都省,嘆曰主辱臣死,吾何自安,壬戌黎明,至西華門,扣扉請入,祿延,使縋上之,因侍王側,俊京,見俊臣輩屍,恐不免,與之甫,崔湜,李侯進,金鼎黃,曹舜擧,尹翰,文仲經等,召聚軍卒,入取軍器庫甲牟兵仗,進圍昇平門,資謙子僧義莊,自玄化寺,率僧三百餘人,至宮城外,在宮內者,無敢出,但持弓矢,分守子城門上,王御神鳳門,張黃傘,俊京軍卒,望見,羅拜懽呼萬歲,王,使問汝輩,何爲操兵而至,對曰聞有賊,入禁中,請衛社耳,王,曰無之,朕亦無恙,汝等,可釋甲散去,遂縋內帑銀幣,下賜軍卒,令侍御史李仲,起居舍人胡宗旦,宣諭軍士,解甲投兵,俊京,怒,拔劍逐仲等,令軍卒,復擐甲執兵,大呼,或有流矢,及御前,義莊之徒,以斧,斫神鳳門柱,有自樓上,射僧,中其頭卽斃,資謙,使閤門祗候崔學鸞,都兵馬錄事邵億,至宮門,上奏曰請出禁中作亂者,不爾,恐驚動禁中,言甚不遜,王,默然,有內侍朴深造者,昇中之子也,自宮溷中出,衣上,矢汁淋漓,徑至資謙第,告宮中事狀,資謙,贈衣冠勞慰之,俊京,遣邵億,謂資謙曰今日向晩,恐賊乘夜竊發,及其未發,焚宮門,索擒如何,資謙,使之美,以問平章事李壽等,答曰宮宇,相比,恐延燒,不可撲滅,甚不可也,俊京,不待報,取少府監黃灰木,將作監木橦,積東華門廊火之,風焰扇熾,須臾,延及內寢,宮人,皆驚駭藏匿,及晩,俊京,之甫,被甲上馬,率兵百餘人,至春德門,守門內侍李叔晨,開門納之,俊京,入左掖門,前禁衛別將李作,將軍宋幸忠,拔劍逐之,俊京奔退,李作,手闔門扉,俊京,差人守諸門,令曰有自內出者,卽殺之,知樞密院事金縝,在直廬,見火逼,乃曰我,平生拙直,不畏强禦,與李拓有隙,出,必遇害,與其死於賊手,不如自盡,乃使從者,閑戶,逮火而死,夜,王,步至山呼亭,嘆曰恨不用金仁存之言,侍從,皆散,唯近臣林景淸等十餘人,在,王,恐被害,作書,請禪位於資謙,資謙,畏兩府之議,未敢發言,李壽,颺言於坐中曰上,雖有詔,李公,豈敢如是,資謙,意遂沮,涕泣還書曰臣,無二心,惟聖,鑑諒之,有洪立功者,將軍劉漢卿下,中郞將也,資謙,以漢卿,入內,卽以立功,爲借將軍,使率兵,聽俊京指揮,俊京,使立功,以軍卒六十餘人,擔柴,至都省南路,立功,密語軍卒曰我,與若等,皆王臣也,而負薪燒宮,非臣子之義,遂釋擔,從宣敎門竇入,望見羅拜,王,驚問爾爲誰,立功,前自陳,王,甚悅,賜酒食,自是,宿衛不離,癸亥黎明,王,以火焰將逼,欲出,會,資謙,遣承宣金珦,請出御南宮,王,步至景靈殿,命內侍白思淸,奉祖宗神御,納諸內帝釋院眢井中,乃出西華門,乘馬至延德宮,吳卓,導前,俊京,使郞將張成,拔劍突入,執卓斬之,又分遣人,執崔卓,權秀,高碩劉漢卿,宋幸忠,李作,安甫麟,及大將軍尹成,韓景,將軍朴英,宋仁,史惟挺吳挺臣,郞將李儒,內侍崔箴,員外郞朴元實等,皆殺之,洪灌,老病不能行,最後,出至西華門外,俊京,使殺之,其餘軍士死者,不可勝計,內侍奉御王觀,大將軍尹先,郞將丁寵珍,別將張成好,侍從在南宮,資謙,請出之再三,王,不得已從之,使人,請勿殺,之甫,皆殺之,資謙,又與俊京,議,亂作日,直宿者,無貴賤,皆殺之,李壽,執不可,乃止,將軍李祿千,金旦,金彥,逃匿以免,是日,宮禁,焚蕩,唯山呼,賞春,賞花,三亭,及內帝釋院廊廡數十間,僅存,百官,狼狽奔散,直史館金守雌,獨負國史,至山呼亭北,掘地以藏之,賴免焚滅,之甫,縛栲智祿延於順天館,慘酷幾死,使尹翰,押流遠地,行至忠州,病不能興,氣尙未絶,翰,斷支體,埋路傍而還,流金粲于遠地,粲及祿延妻子,並沒爲外官奴婢,吳卓,子子升,高碩,弟甫俊,奔匿北山,使朴永,跡之,甫俊等,登高岩,罵永曰資謙等,竊寵擅權,流毒生民,甚於豺虎,將覆宗社,汝輩,皆姦諂以事之,曾奴隷之不若,吾儕,擧義,以謝吾民,而不克者,命也,義士,豈死於汝庸奴手乎,乃呼天,卽投岩下而死,祿延,蔡文,曾孫,以材幹,稱歲甲申,從討女眞,頗有功,爲人,荒恣無學術,自謂有智,而謀拙,反陷於禍,灌,唐城郡人,力學善寫,縝,嘗知靈光,牧淸州,皆有政聲,爲時輩所推。○三月,資謙,請王,徙居重興宅西院,王,去仗衛,從間道,至西院,反門,大卿金義元,崔滋盛,以重興宅執事,出迎,郞將池錫崇,散員權正鈞,隊正吳含,自山呼亭,至南宮,不離左右,至是,錫崇等,扶王,將入北門,資謙,俊京,欲殺之,使郞將李積善,牽出,錫崇,手執御衣,疾呼請救,王,顧叱積善,蹴其胷,猶不釋,御衣,爲之裂,幞頭,亦觸楣而破,之美,之甫,在門,望見王,不下階,崔湜,獨出拜,罵積善曰有聖旨,汝何敢爾,積善,遂釋之,錫崇等,尙恐懼不能出,時宦者趙寧,諂事資謙,王,召崔湜,趙寧曰錫崇等三人,至誠愛君,更無他心,爾等,爲我,請勿令殺,俊京,從之,流于遠地,王,升堂,資謙,與其妻出拜,拍手,拊地大哭曰自皇后入宮,願生太子,及聖人誕生,祈天永命,無所不至,天地鬼神,鑑吾至誠,不圖今日,反信賊臣,欲害骨肉,王,羞赧無言,王,自居西院,左右,皆資謙之黨,鬱鬱無聊,國事,不自聽斷,百僚,移寓傍近寺館,因循備員耳,資謙,俊京,威勢益煽,其所施爲,無敢誰何。
史臣,曰消息盈虛,天行也,資謙之惡,極矣,其亡,可立而待,祿延等,因人不忍,欲除君側之惡,而智小謀淺,卒至殺身亂國,昔,唐李訓,鄭注,欲鋤翦宦官,而不能克,甘露之變,禍及國家,其事略同,固可嘆也已。
贈拓俊臣,守司空左僕射,金鼎芬,拓純,並戶部員外郞,田其上,崔英,並閤門祗候,厚賻之,從資謙之意也,自是,外家益橫,自朴昇中,許載,而下,諛佞附托,威虐可畏,王,密與內醫軍器少監崔思全,謀之,思全,曰資謙,所以跋扈者,惟恃俊京,上,若得俊京,則兵權內屬,資謙,特一夫耳,王,曰俊京,爲國公腹心,至結婚姻,而俊臣,及純,皆爲官兵所害,以是疑之,遂筮得吉兆,思全,因往俊京家,諭以忠義曰太祖,列聖神靈,在天,禍福可畏,而資謙,特借宮掖之勢爾,無有信義,不可與同好惡,公,宜一心奉國,以立永世不朽之功,俊京,心然之。○以國家多事,停選擧。○賜敎于拓俊京曰惟朕不明,致此兇徒生事,使大臣憂勞,皆寡人之罪也,是用省躬悔過,指天誓心,冀與臣民,惟新厥德,卿其更勵厥修,無念旣往,盡心夾輔,俾無後艱。○召集百官,問臣事大金可否,皆言不可,獨李資謙,拓俊京,曰金,昔爲小國,事遼及我,今旣暴興,滅遼與宋,政修兵强,日以强大,又與我,境壤相接,勢不得不事,且以小事大,先王之道,宜先遣使聘問,從之。○癸巳,黃霧四塞。○甲午,日色如血。○遣李之美,告大廟,筮事金可否。○赦斬絞以下罪,以李拓之黨,謂之衛社,授職有差。○遣知樞密院事金富佾,就平章事拓俊京私第,趣令視事,仍賜鞍馬,先是李之彥奴,罵俊京家奴曰汝主,射宁位,火宮禁,罪當死,汝亦當沒爲官奴,豈得辱我哉,俊京,聞之,大怒,走詣資謙家,乃解衣免冠曰吾罪,大矣,當詣所司自辨,徑出不復顧,有人止之,乃歸臥其家,資謙,遣之美,公儀,請和,俊京,罵曰前日之亂,皆爾等所爲,何獨謂我,罪當死乎,卒不與見,因宣言,欲歸老吾鄕,王,聞之,有是命。○夏四月,王,如安和寺,李資謙扈從,百官拜馬前,資謙,視之自若,王,回望舊宮,泫然淚下。○遣鄭應文,李侯,如金,稱臣上表曰大人,垂統,震耀四方,異國入朝,梯航萬里,況接境之伊邇,諒馳誠之特勤,伏惟天縱英明,日新德業,渙號一發,群黎,無不悅隨,威聲所加,隣敵,莫能枝梧,實帝王之高致,宜天地之冥扶,伏念臣,塉土小邦,眇躬涼德,聞非常之功烈,久已極於傾虔,惟不腆之包苴,可以伸於忠信,雖愧蘋蘩之薦,切期山藪之藏,金,回詔曰朕,以推亡固存,寔帝王之造,以小事大,乃社稷之圖,繄魁偉之渠材,蘊變通之遠業,卿,家傳王爵,世享胙封,抗章,竭尊奬之誠,任土,盡委輸之節,仍稱卑號,足見全能,加非兵革之威,誘不玉帛之惠,自然來者,不曰良哉,且君父之心,予已堅篤,而臣子之義,汝毋易忘。○以拓俊京,爲門下侍郞判兵部事,李壽,爲門下侍郞平章事,李資德,許載,並參知政事,金富佾,爲政堂文學,李之美,判樞密院事,金珦,金義元,並同知樞密院事,金富軾,爲御史大夫樞密院副使。○黜內侍二十五人,皆資謙,所惡也。○五月,移御延慶宮,資謙,寓居宮南,鑿北垣,以通宮內,取軍器庫甲兵,藏之家中,王,嘗獨往北園,仰天慟哭移時,資謙,因十八子讖,欲圖不軌,置毒餠中以進,妃,密白于王,以餠投烏,烏斃,又送毒藥,令妃,進于王,妃,奉椀,陽蹶而覆之,妃,卽資謙,第四女也。○拓俊京,旣與資謙構隙,崔思全,又乘間說之,俊京,乃決策,附奏云願自效,王,使謂俊京曰國公,雖僭亂,反狀未著,朕若先擧,親親之意,謂何,徐俟其變,應之未晩,常使中人伺之,俊京,在兵部,注擬武職,王,手書小紙,密遣宦者趙毅,以示俊京曰今日,崇德府軍將,持兵至殿北,若將入寢門,朕,若遇害,實否德所致,所可痛者,太祖創業,列祖相繼,以至寡躬,若爲異姓所易,非獨朕罪,實輔相大臣,所深恥也,惟卿圖之,俊京,乃以御筆,示尙書金珦,珦,跪呼天泣曰有旨如此,義當死事,公其可安乎,俊京,與珦,率將校七人,僚吏僕隷二十餘人,出北門,倉卒無所持,各取栅木爲棒,自金吾衛南橋,入宮,趙毅,迎呼曰事急矣,趣入,遂閉廣化門,李公壽,隨至,王,命開一扉以納之,公壽,卽李壽也,時,巡檢都領鄭惟晃,率百餘人,入軍器監,分授兵甲,向延慶宮,路見少卿柳元湜,其言不順,卽殺之,俊京,身擐甲冑,急入宮,王,出天福殿門,遲之,俊京,奉王以出,資謙之黨,射之,俊京,拔劍一呼,無敢動者,王,入御軍器監,嚴兵衛,俊京,使承宣康侯顯,召資謙,資謙,服素而至,俊京,與公壽議,拘囚資謙,及妻子於八關寶,斬其將軍康好,高珍守等,皆資謙所指使者,分遣人,逮捕支黨,王,出御廣化門,使告于衆曰禍起蕭墻,大逆不道,賴忠臣義士,擧義除害,衆皆稱萬歲,懽呼抃躍,至有流涕者,之美,聞變,率百餘人,至廣化門,不得入,徘徊往返,與李資德,金仁揆,入兵部,亦不知資謙被拘,及晩,巡檢,至兵部,執之美,囚檢點所,資德等,驚駭散去,王,還御延慶宮,近侍,先入淸宮,僧義莊,匿內寢,執送八關寶,流資謙,及妻崔氏,子之允于靈光,之美,陜州,公儀,珍島,之彥,巨濟,之甫,三陟,義莊,金州,之元,咸從,閤門祗候朴彪,文仲經,直長朴永,太史令梁麟,冬官正梁獬,內侍李叔晨,李芬,大將軍金好,將軍池顥,池福臣,郞將崔思琰,別將位好,散員宋用中,幷兒息三十餘人,及官私奴凡九十餘人,分配遠地,朴彪者,最姦黠,諂媚資謙,凡聚斂附益,皆其所爲,故射利干祿者,競賂之,遂以巨富,朝廷,尤疾之,戮諸中道,沈于水,又執射神鳳門者一人,及之彥家臣金冲,枷于都市,凡三日,流之遠島,其親黨,平章事李資德,金仁揆,同知樞密院事金義元,禮賓卿李資元,殿中少監朴孝廉,內侍郞中王毅,祗候李存,皆貶爲守令。○宣旨曰朕,以幼沖,承襲祖業,意欲倚賴外家,事無大小,一切委任,而縱爲貪暴,殘民害國,朕,雖知之,無以防閑,患起倉卒,判兵部事拓俊京,倡義定難,功不可忘,宜令所司,論功懋賞,軍器少監崔思全,同心密輔,可幷賞功。○流平章事朴昇中于蔚珍,其子深造等四人于南裔,昇中,與許載,崔湜,諂附資謙,無所不至,立府置僚,稱箋稱節,皆昇中所爲,至是,諫官,論斥。○以拓俊京,爲門下侍中,俊京,以越次,固辭不拜。○六月,以拓俊京,爲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戶部事兼西京留守使上柱國,妻黃氏,爲齊安郡大夫人,賜衣服金銀器,布帛鞍馬,及奴婢一十口,田三十結,李公壽,爲推忠衛社功臣,判吏部事,金珦爲衛社功臣,戶部尙書知門下省事,崔思全,爲兵部尙書。○出許載,爲豐州防禦使,子純,爲金州防禦判官,初諫官,論載與昇中,同罪,俊京,庇之,至是,乃坐,物議快之。○諫官,累疏言,李資謙二女,於上,爲從母,固不可以配極,王,乃出二妃,納殿中內給事任元敳女,爲妃,妃母李氏,門下侍中瑋之女也,妃誕夕,瑋,夢有黃大旗,豎於其第中門,旗尾,飄縈於宣慶殿鴟尾,妃生,瑋,特愛之曰此女,後,當遊於宣慶殿,及笄,平章事金仁揆,子之孝,聘之,婚夕,之孝至門,妃暴疾幾死,以實謝遣,翌日,卜人,占病曰勿憂,此女貴不可言,必爲國母,時資謙,已納兩女,聞其言,惡之,卽奏貶元敳,爲開城府使,居歲餘,府倅,夢,太守廳事樑棟,坼作大竇,黃龍,從竇而出,詰朝,倅,具朝服,詣元敳,具陳其夢以賀曰使君家,必有異慶,公其識之,又王,嘗夢得荏子五升,黃葵三升,以語拓俊京,俊京,對曰荏者,任也,納任姓后妃之兆也,其數五者,誕五子之瑞也,黃者,皇也,與皇王之皇,同,葵者,揆也,與道揆之揆,同,所謂黃葵者,皇王執道,揆御邦家之瑞也,其數三者,五子之中,三子御國之兆也,其言果驗。○以鄭惟晃等二十人,有扈駕捕賊功,賜職有差。○秋七月,宋,遣閤門祗候侯章,歸中孚等六十餘人,來詔曰朕,居春宮十有餘載,罔敢怠逸,道君太上皇帝,享國日久,厭於萬機之煩,爰議內禪,朕,辭不獲命,遂登大寶,深惟祖宗基構之崇,上皇付托之重,夙夜兢惕,懼不克任,而金人不道,乘郭藥師背叛之故,陷沒燕山,俶擾邊境,達于都畿,方朕卽政之初,遭此震驚,以故,未及與王相聞,朕惟王,世濟忠孝,膺受顯冊,屛翰之舊,久受國恩,肆我烈祖神宗皇帝,命使修聘,禮意備至,情同骨肉,義則君臣,以至于我道君太上皇帝,錫賚不貲,待遇加等,朕惟中國,與王,遠隔遼海,而恩禮如此,豈有他哉,庶幾艱難,有以敵慨耳,王國,與金相望,無數百里之遠,而不能蕩其巢穴,以報中國,豈累朝,待遇殊絶之意耶,金人者,固嘗臣屬於王,以蕞爾海隅之醜,背天逆神,滅絶契丹,遂陵中國,淫暴滋甚,使其得志,何有於王哉,孤軍深入,理當勦殄,朕,以其劫質肅王而去,第命將士,驅逐出境,方將起天下之兵,問罪小醜,王其率勵師衆,相爲表裏,以行天誅,夫糾逖王慝,獻俘本朝,以報中國數世之恩,大忠也,取亂攻昧,誅討淫暴,以伸威沙漠之外,大義也,拓地開境,覆其巢穴,報驟驕不臣之虜,大威也,一擧而三者,皆得,王,何憚而不爲,高爵厚賜,朕於王,無所愛惜,王其勉之,侯章,在館,又致書於王曰章等,來時,奉皇帝聖旨,祖宗,行堯舜之道,務本敦化,與本國講好,幾二百年,禮無不備,我道君太上皇帝,繼而承之,恩崇益厚,比緣姦人啓議,悉興邊事,使金人猖蹶,興無名之師,雜烏合之衆,襲其不備,擾我中原,恣行劫掠,是時有勤王之師,數百萬,大臣,獻議曰不擊於黃河之南,可邀於大河之北,正玆深入,若大兵,一擧則無遺矣,今皇帝,登祚之初,孝悌恭儉,旰食晏寢,任賢使能,崇信顧義,未欲殄滅,於是,金人,悔過,告和請路,求歸沙漠,主上,因而資之,以金帛爲犒軍之具,復有無厭之求,窺伺河北關鎭,人神共怒,事不獄已,待以秋涼,必興師討伐,乘此之時,本國,安可坐視,若將兵境上,共爲掃除,是,結無窮之好,因玆成功,別遣使人前來,答云本國,自祖先以來,承事上朝,恭順之誠,未嘗敢怠,神宗皇帝,雖遠隔遼海,而天日之明,無不鑒炤,降使修聘,恩禮尤厚,道君太上皇帝,繼而承之,待遇加等,錫賚倍常,實百生難報之恩也,惟天地,不責其報,而區區感激之心,庶幾萬一,今者,伏承奉使宣贊,來傳詔書,以金人不道,淫暴滋甚,方將起天下之兵,問罪小醜,令小國,率勵師衆,相爲表裏,以行天誅,孤,自初奉讀,不覺流涕,惟金人之始也,固嘗臣屬於我國,而常以寇掠爲事,我國,以邊鄙甫寧,不欲生事,來則懲而禦之,去則備而守之,要在羈縻而已,我祖肅王代,有酋長盈歌,力以制群兇,威以降諸部,雄視白山,數侵吾境,吳達惠奴,相繼而作,凶勢益振,昨者,被掠人,自大金還,來言上朝使臣,到蕃土,禮數,一如降使北遼之例,又聽邊人之言,金人陷沒契丹,遂犯上朝地界,皇帝以登祚之初,未欲殄滅,因其請和而許之,以中國之大,而如此,況小國孤立,其將安恃乎,今年四月,特遣使修好,已經累朔,尙未回報,載念本國,天災流行,府庫焚蕩,凡爲禦戎之具,靡有孑遺,方議鳩工,以圖興復,今,詔書,委曲,諭示,此實雪舊恥報大恩之日也,然,以殘弊之兵,當新勝之虜,恐非勉强所能及也,但冀訓勵師,徒修整器械,待王師臨壓彼境,則弊國,敢不盡力,相爲表裏,假託威靈助平戎醜,孤,所願也,天實臨之,惟奉使宣贊,復命日,宜以此意,奏聞。○侯章,還,王,附表以聞,略曰言念小藩,世蒙厚德,常願盡忠於報上,豈能無意於勤王,忽奉讀於絲綸,第難禁於涕淚,宜卽奔命,以待興師,但爲弊封,本非勝國,近經災孼,焚盡蓄藏,其於儲㣥資粮,繕修器械,必也整齊而後動,固難造次而可圖,況又賊勢兇强,未宜輕觸,虜地險隘,豈易長驅,然帝命之臨門,理無回避,俟王師之制敵,少助威靈。○九月,遣樞密院副使金富軾,刑部侍郞李周衍,如宋,賀登極。○金,宣諭使,同僉書樞密院事高伯淑,鴻臚卿烏至忠等,來,金主,勑伯淑等曰高麗,凡遣使往來,當盡循遼舊,仍取保州路,及邊地人口,在彼界者,須盡數發還,若一一聽從,卽以保州地,賜之,保州,卽抱州也。○庚寅,太白晝見經天。○冬十月丙申,以慶龍節宴群臣於天福殿。○王,餞金使于大明宮,附回表謝,一依事遼舊制。○召還金粲,爲殿中內給事,賜洪灌金縝智祿延,子壻,爵一級,粲,後,改名安。○幸南京。○十一月,宴群臣於延興殿。○至自南京。○閏月,赦,饗年八十以上,及鰥寡孤獨,孝順節義者,賜物有差。○詔拓俊京,圖形功臣堂。○十二月,李資謙,死於靈光郡。○遣衛尉卿金子鏐,刑部郞中柳德文,如金,謝宣諭表,曰高伯淑,至,密傳聖旨保州城地,分許履高麗,更不收復,竊以勾麗本地,主彼遼山,平壤舊墟,限於鴨綠,累經遷變,逮我祖宗,値北國之兼幷,侵三韓之分野,雖講隣好,未歸故疆,及乎天命惟新,聖王旣作,見兵師之起義,致城堡之無人,當臣父先王時,有大朝邊臣沙乙何,來傳皇帝勑旨曰,保州本高麗地分,高麗收之可也,先王,於是,理其城池,實以民戶,當此之時,雖小邦,未嘗臣屬上國,而先帝,特欲寵綏隣藩,霑以訓辭,賜之舊土,及後嗣之繼序,遭聖德之承天,備認德音,恭修臣職,惟此東濱之寸土,本爲下國之邊陲,雖嘗見奪於契丹,謂已拜恩於先代,特推異渥,仍屬弊封,豈僥倖而致玆,蓋遭遇之異甚,深仁大義,不可名言,緜力薄才,若爲報效,惟當備春秋之事,守藝極之常,擧邦國而樂輸,傳子孫而永誓,高明在上,悃愊無他。○以金仁存,爲翊聖同德功臣,檢校太師門下侍中監修國史上柱國判禮部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