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편지 05- 형과 헤어지고 나서 낮은 짧고 밤은 깊어졌습니다

2019. 8. 1. 18:47美學 이야기



  • 추사편지 05- 형과 헤어지고 나서 낮은 짧고 밤은 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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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10월24일에 쓴 추사의 편지다.
동지부사인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기 직전에 쓴 편지로 다양한 정보가 들어있다. 이 편지는 현재 북경 국가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추사작품 전시회에 처음 소개되고 있다. 
수신처는 광산전사(匡山田舍)인데 광산이 어디인지 불분명해 수신인이 정확히 누구인가는 추후 검토가 필요하다.

발신인을 고요 행객(古遼行客)이라 표시했는데 ‘옛 요동 땅으로 떠나는 객’이라는 말로 연경에 가게 되는 상황을 간접적으로 나타냄과 동시에 그 발길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자신과 수신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첫 문장이 비교적 길게 이어지는데 서로 잊을 수 없는 관계임을 비유와 반어적 표현으로 에둘러 설명하는 내용이 돋보인다. 
19세기초 당시 조선 학계의 한 흐름을 설명해주는 내용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 “제가 이십사년을 살며 밤낮으로 갈구한 것은 오늘 이 발길이었습니다. 매번 형과 이에 대해 이야기했고, 남들에게서 신선의 길을 걷고 날개가 달린 듯 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직접 이 길을 걷게 되다니 이 얼마나 갸륵한 일입니까!”라는 표현에서 추사라는 젊은 학자와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분위기가 잘 전해진다.
그리고 편지 뒷부분에 과거(科擧) 일 때문에 사행단을 바로 따라가지 못하고 추후에 출발했다는 내용에서 사행의 출발 시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확인해주기도 한다.
이 편지를 쓴 지 210년 만에 실물이 북경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겉봉】 匡山田舍 入納.  古遼行客 寄.
自兄相別 晝短宵長 而南箕北斗 七易其躔 絺裘一更 草木之葱倩豐縟者 皆又黃而落矣 一以相阻 若與之兩忘 兄之忘弟也 滅跡深山 遂與闤闠相絶 不欲交涉 其忘也 眞忘也 吾不足以處人心腑之間 而若是之甚耶 弟 則如魚之忘水 如鳥之忘藪 又如明德之軆 雖在紛擾汩亂之中 其虛靈不昧者 有未嘗息 材學庸鈍 特未下格致誠正之工耳 兄何以盡諒也 向從景茂便面 知兄山居樂事悅心怡性 可以知軆氣之隨以安旺也 弟 行將遠役 殊可念也 弟生二十一四年 昕夕經營 在於今日此行 每與兄津津及此 聞人有行仙有羽化之意 身遽當之 何其奇也 日前得忝一解 若復成實 當與子岡兄故事相符 甚可喜也 終年不燒香 將欲急抱佛脚 絶倒絶倒 臨行冲黯 如海如山者 不能攄其萬一 在兄神會 惟祝行歸之前 一味保重 以副遠人區區之思 不備式 
二十四日 弟 正喜 拜
拜表 則二十八日 而弟 則以科事初生發行耳

【겉봉】 광산(匡山) 전사(田舍) 입납.  고요행객(古遼行客) 보냄.
형과 헤어지고 나서 낮은 짧고 밤은 깊어졌습니다. 남쪽 기성(箕星), 북쪽 두성(斗星)이 그 자리를 일곱 번 바꿨으며 여름과 겨울[絺裘]*이 한 번 바뀐 뒤 푸르고 무성했던 초목이 다시 노랗게 변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사이 줄곧 소식 없이 지낸 것이 마치 둘 다 서로 잊어버린 듯했습니다. 형께서 저를 잊은 것에 대해 말하자면, 깊은 산 속에 자취를 감추고 결국 속세와 인연을 끊은 채 교섭하지 않으려 하시니 그 잊음은 정말로 잊은 것입니다. 제가 남의 마음속에 머물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이토록 심할 수 있습니까.
저의 경우는 물고기가 물을 잊은 듯하고 새가 숲을 잊은 듯했습니다. 그리고 또 견주어 말하자면 명덕(明德, 좋은 심성)을 가진 몸이 비록 속세의 혼란 속에 있긴 해도 혼미하지 않은 청정한 마음은 일찍이 가시지 않았으나 재능과 학문이 부족하고 보잘것없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공부를 제대로 못했을 뿐입니다(마음속으론 잊지 않았는데, 실제 행동에 문제가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 형께서 어떻게 이를 다 양해하시겠습니까. 
지난번 경무(景茂, 미상)를 만나 형이 전원에서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확인했는데, 몸과 기분도 그에 따라 편안하실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저는 곧 먼 길을 떠나게 돼 매우 걱정입니다. 제가 24년을 살며 밤낮으로 갈구한 것은 오늘 이 발길이었습니다. 매번 형과 이에 대해 이야기했고, 남들에게서 신선의 길을 걷고 날개가 돋친 듯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직접 이 길을 걷게 되다니 이 얼마나 갸륵한 일입니까!
일전에 생원시에 급제[解]*했는데 한발 더 나아가 결실을 보게 된다면(진사시에 급제한다면) 자강(子岡)*형의 경우와 부합하게 되니 대단히 기쁠 일입니다. 하하 평생 향을 사르지 않다가 다급해지자 부처다리라도 잡으려는 꼴이니 뒤로 나자빠질 일입니다.
길을 떠나려는 즈음에 정신이 몽롱해, 산만큼 바다만큼 많은 이야기 가운데 일부도 다 적지 못하니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떠났다 돌아오는 동안 줄곧 보중하시어 멀리서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24일 아우 정희(正喜) 올림

배표(拜表)*는 28일에 있을 예정이며(이때 사행단이 떠남), 저는 과거(科擧) 일* 때문에 다음 달 초승[初生]에 출발할 계획입니다.

*치구(絺裘): 치(絺)는 가는 갈포로 지은  옷으로 여름옷을 가리키며 구(裘)는 가죽 옷으로  겨울옷을 가리키는데 여름과 겨울의 대칭으로도 쓰인다.
*자강(子岡): 이봉수(李鳳秀 1778∼1852)의 자(字).
*배표(拜表): 중국 황제에게 표문을 보낼 때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배송하는 의식.
*급제[解]: 해(解)는 발해(發解)로 생원시에서의 급제를 뜻한다. 순조 9년(1809) 10월(정유)  11일(『승정원일기』 순조9년 10월11일조 참조)에 원자(元子)의 탄강을 축하하며 연 원자탄강경증광사마시(元子誕降慶增廣司馬試)가 있었고, 이 증광시에서 김정희는 ‘생원’ 1등 4위(4/100)로 급제했. 
*과거(科擧) 일: 생원진사과(生員進士科)에 합격한 사람은 합격이 발표되고 나서 임금에게 직접 사은(謝恩)의 예를 표하는데 김정희는 동지사 일행을 수행한 이유로 그 해 11월10일에 있었던 사은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승정원일기』 순조 9년 11월10일: “김정희만 합격자 게시 전에 부사(副使)인 부친을 따라갔기 때문에 반주인(泮主人, 지방 응시생이 성균관 부근에 묶는 집의 주인)이 백패(白牌, 합격증서)를 받아 갔다.[獨金正喜一人 以出榜前 隨去其父副使之行 故泮主人來 受白牌而去矣]”) 
당시 김정희가 합격이 결정된 뒤 합격증서를 받는 과정에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해 본진보다 약간 늦게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 김규선(선문대학교) 관리자
업데이트 2019.08.01 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