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22. 13:55ㆍ美學 이야기
미술사를 움
직인 100
인 원시로의 회귀를 주장한 회화계의 이단아
폴 고갱
Paul Gauguin
출생 | 1848년 06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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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3년 05월 08일 |
국적 | 프랑스 |
대표작 | 〈퐁타방의 빨래하는 여인들〉, 〈타히티의 전원〉, 〈설교 후의 환영〉,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등 |
인상주의 화가로 원시적 자연을 동경했으며, 독자적인 색채와 형태를 표현한 그의 화풍은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상주의에서 출발해 종합주의와 클루아조니슴(Cloisonnisme)을 탄생시키고 상징주의로 귀착한 회화계의 이단아 폴 고갱. 그는 서구의 인위적인 문명사회에서 벗어나 인류의 근원과 원시사회적 상태로의 회귀를 주장했으며, 원시문명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며 강렬한 충격을 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사실적인 묘사에서 탈피하여 개념적으로 색채와 형태를 표현한 고갱의 기법은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떠돌이 생활 끝에 이국의 섬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친 고갱의 일생은 작품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주어 후일 서머싯 몸은 《달과 6펜스》에서 그를 모델로 예술가의 삶을 그려 내기도 했다.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자였고, 어머니는 스페인과 페루 혈통의 여성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이 페루로 이주하여 약 5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이때 보고 들은 이국의 풍광과 관습은 어린 고갱의 가슴속에 깊이 남았고, 이후 그의 작품에 밑거름이 되었다. 7세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누이와 그를 데리고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했다. 남미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활동적으로 뛰놀던 고갱에게 유럽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모험을 꿈꾸던 고갱은 17세 때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남미, 지중해, 북극해 등을 떠돌아다녔고, 복귀한 후에는 해군에서 복무했다. 24세 때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주식 중개인으로 일했으며, 부유한 덴마크 여성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해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고갱은 그림을 수집하다가 점차 취미로 그림을 그렸고,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면서 전업 화가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소묘와 유화 기법을 터득해 나갔다. 1875년에 〈이에나 다리 옆 센 강가〉를 완성했고, 이듬해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1879년부터 인상파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데다 화단에 연고가 없어 그림이 팔리지 않고 생활이 쪼들리자 그는 가족들과 아내의 친정인 코펜하겐으로 갔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의 제2의 인생을 인정하지 않았고, 고갱은 화가로서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홀로 파리로 돌아왔다. 이후 고갱은 실질적으로 가족과 결별하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이때까지는 아직 인상주의 화풍에 물들어 있었으나 고갱은 점차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6년, 부인과 완전히 결별한 고갱은 파리의 소란함을 피하고 경제적인 곤궁을 해소하고자 브르타뉴 지역의 퐁타방으로 이주했다. 그해 그린 〈퐁타방의 빨래하는 여인들〉, 〈브르타뉴의 시골 여인들(네 명의 브르타뉴 여인들의 춤)〉 등에서는 혁신적인 구도, 단순화된 형태 묘사,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인물의 표정과 시선 처리 등 고갱의 새로운 모색이 드러난다. 이 무렵 고갱은 반 고흐를 알게 되고 아를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고갱은 마르티니크 섬을 여행하면서 열대 지방의 색채와 그곳이 지닌 관능, 원시 공동체의 단순한 생활에 큰 감흥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인상파와 결별하고 ‘원시 미술로의 회귀’를 주장하게 된다. 이에 대해 고갱은 말했다.
“원시 미술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며 자연을 이용하지만, 정제된 미술은 관능에서 나오며 자연을 섬긴다. 자연은 원시 미술의 하녀이며, 정제된 미술의 정부(情婦)이다. 자연은 사람들이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영혼을 실추시킨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주의라는 가증스러운 오류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고갱의 새로운 표현 형식은 〈설교 후의 환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안녕하세요 고갱 씨〉 등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태와 크기의 왜곡, 선명하고 임의적인 색채, 단순화되고 평면적인 형태 묘사, 짙은 윤곽선 등 고갱은 사실주의를 비롯해 인상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고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확립한다. 이 시기부터 점차 그를 따르는 젊은 화가 집단이 생겨났는데, 이들을 나비파(Nabis)라고 부른다.
원시주의에 몰두하면서 고갱의 그림에서 형태는 보다 단순화되었고, 색채는 강렬해졌으며,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감수성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세부적인 사실 묘사가 아닌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고, 그 결과 상징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그는 물질주의와 부르주아 문화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1891년, 결국 고갱은 작품의 영감을 얻고 산업 문명이 지배하는 서구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타히티로 떠났다. 열대 낙원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는 원주민에게 예술적 영감과 생의 활력을 얻은 고갱은 친구에게 ‘당신은 문명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나는 야만 세계에서 다시 활력을 얻고 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고갱이 타히티에 도착했을 당시 타히티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로 원주민 문화가 많이 파괴된 상태였다. 때문에 그는 원주민의 자연 숭배, 신화와 종교 등을 공부하면서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현지 원주민 여성 파후라와 동거하면서 아이도 낳았다. 〈마나오 투파파우(지켜보고 있는 망자의 혼)〉, 〈아레아레아(기쁨)〉, 〈타히티의 전원〉, 〈테 아리이 바히네(고귀한 여인)〉 등에는 원시적 관능을 지닌 타히티 여인들과 열대 낙원의 풍광, 타히티의 신화에서 얻은 소재들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고갱은 가난과 질병, 파후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의 죽음, 사랑했던 딸 알린의 죽음 등으로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우울증을 겪었다. 그는 아이의 죽음으로 얻은 슬픔을 〈테 타마리 노 아투아(그리스도의 탄생, 신의 아들)〉를 통해 달랬고, 알린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이후 〈두 번 다시〉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우울과 불안정함은 당시 고갱의 불안한 마음 상태를 잘 드러낸다. 그런 한편 프랑스 식민 정부의 식민지 개발에서 원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누드화에 적대적인 가톨릭 선교단 임원들과 마찰하면서 점차 타히티의 생활에도 환멸을 느꼈다.
타히티 시기 고갱의 대표작은 1897년에 그려진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이 작품 역시 두 아이의 죽음 이후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린 것으로, 최악의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남은 모든 정력을 바쳐 그렸다고 한다.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그려 인간 존재의 근원을 고찰하는 철학적인 작품으로, 무의식과 상상력만을 이용해 그려졌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동양화처럼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데, 오른쪽의 어린이와 세 명의 여인, 중앙의 과일 따는 젊은이, 왼쪽 아래 웅크리고 앉아 귀를 막아 닥쳐 올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늙은 여인은 인간의 탄생과 삶, 죽음의 3단계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1901년, 고갱은 타히티를 떠나 마르키즈 제도로 향했다. 이곳에서 고갱은 다시 예술가로서의 활력을 얻어 〈그리고 그 여성들의 나체의 금빛은〉, 〈해변의 기수들〉, 〈미개한 이야기〉 등의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고, 1903년 5월 8일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미개인이다. 문명은 첫눈에 그 사실을 알아챈다. 나의 작품에는 당혹스럽거나 경악스러운 부분이 전혀 없다. 다만 나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야성적 기질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나의 작품은 모방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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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역사와 예술의 관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술가들을 재조명하고 ,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은 삶과 작품을 새롭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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