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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를 듣다>는 10년 간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 다닌 <빈센트 나의 빈센트>의 저자 정여울 작가가 전시장 내
2019. 8. 7. 04:45ㆍ美學 이야기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Vincent Van Gogh
색채의 힘을 사용하다
출생 | 18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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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0년 |
좋은 풍경화는 화가가 풍경을 얼마나 멋지게 묘사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상식을 무시한 화가가 있다. 그는 풍경이란 주(主)가 아니라 화가의 내면세계를 대변하는 종(從)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이다. 표현주의 화가인 고흐 때부터 풍경화는 화가의 내면을 대변하는 종속물이 된다. 이리하여 고흐는 자신의 그림처럼 하늘의 별이 되었다. 고흐는 양초를 세운 모자를 쓰고 밤풍경을 그렸다.
하늘에선 혜성이 소용돌이치며 쏟아졌고, 산은 노란 선이 되어 캔버스를 대각으로 가로질렀다. 불 켜진 여러 집들이 있지만, 뾰족한 예배당 창문들만이 까맣게 그려졌다.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경험한 제도화된 교회의 위선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검푸른 밤하늘의 별들이 어두운 산 아래 들판과 마을을 은은히 비치고 있다.
고흐는 월세 15프랑을 내는 작은 방에 살면서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다. 융단도 깔지 않은 벌거숭이 갈색 마룻바닥, 튼튼하기만 하고 볼품없는 침대뿐 아무런 특징 없는 방에서 그려진 그림은 1,000억 원이 넘는 작품이 되어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그림 속에도 그의 집은 잘 묘사되어 있다. 침대 위에 양복 걸이가 있고, 방바닥에 두 개의 허술한 의자, 그리고 탁자 위에 물병과 세면도구가 있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간소하기만 한 방이다. 그의 방 푸른빛이 도는 벽엔 작은 거울 하나와 풍경화 한 점이 걸려있을 뿐이다. 이 보잘것없이 작은 월세방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치열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지 못하고 주로 자화상이나 정물화를 그린 고흐에게 고대 궁전이나 박물관 등 고색창연한 그림은 사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우월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대상은 거의 없다.
“폭풍우 없는 자연 드라마 없듯, 고통 없는 인생 드라마는 없다”고 말한 고흐는 인간 존재를 포장한 특별한 그림이 아니라 유한하고 불안한 숙명을 지닌 고만고만한 인간의 일상을 작품의 소재로 삼기 좋아했다.
정물화에서도 그는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보통 정물화는 탁자와 그 위의 가지런한 과일, 또는 꽃이 담긴 꽃병이 있다. 그러나 고흐의 정물화 〈사과, 배, 포도, 레몬이 있는 정물〉에는 탁자나 배경없이 과일의 배열도 자유롭다. 거기엔 제목에도 없는 큼직한 모과도 세 개나 있다.
마치 반추상화 같다. 인생이란 그런 것, 가지런한 정물화 같으나 실제는 반추상화와 같다. 살다 보면 어디 내 뜻대로만 되던가? 더 잘 풀릴 때도 있고 복병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러려니 하고 주어진 대로 노력하며 살뿐이다. 그래서 규칙 없이 놓인 이 정물화에 정이 간다. 이 정물화의 바탕이 은박지보다 더 반짝이고 있다. 이것이 삶의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저변에 흐르는 생의 환희이다.
고흐는 자신을 그릴 때도 거울에 비친 대로 그렸을 뿐 조금도 꾸미지 않았다. 그런 쌩얼의 자화상을 무려 36장씩 그렸다. 그의 자화상은 모두 정면이 아닌 옆모습이나 얼굴 전체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의심이 많거나 숨길 게 있을 때, 별 관심이 없을 때, 그리고 별 뜻 없이 정면을 회피하기도 한다. 그래서 측면을 감출 것이 많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정면 직시는 측면보다 훨씬 더 의도적이어야 가능하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사데크 헤다야트(Sādeq Hedāyat)의 《눈먼 부엉이(Die Blinde Eule)》에 나온 이야기다. 누구나 치유 못 할 절대적 고독이라는 상처가 있는데 그중 고흐는 평생 더 고독하게 살며 그 고독을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그림에 인간미가 묻어나 바로 이것이 인생이라고 찬탄하게 된다.
프랑스 미술심리학 교수인 르네 위그(René Huyghe)는 예술을 이렇게 정의했다.
영혼의 언어로 자신의 자취를 남기려 하는 인간의 욕구에서 태어났다.
불후의 명작이 되려 할수록 인생의 날 것을 포장하지 말고 보여 주어야 한다. 그 가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하다. 역사에 남을 예술가의 전형적 캐릭터인 고흐에게 사랑과 행복의 여신도 늘 잠시만 깃들다가 날아갔다.
그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치열하게 한 생을 살다간 그의 예술혼은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미술관이 세계 미술 초대전을 여는 곳 중에 가장 분주한 이유도, 1,000억 원 이상의 가격에 팔리며 많은 미술애호가가 그의 그림에 열광하는 까닭도 어쩌면 그의 예술혼을 지금의 사람들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쉼 없이 고뇌할 운명으로 태어난 파란만장한 드라마였다.
네덜란드의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서적상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흐는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가 태어난 지 4년 후 평생 후원자가 될 남동생 테오(Theo)가 태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고흐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위해 부모는 가정교사를 통해 적응훈련을 시킨 후 다시 학교로 보내는 일을 반복했다. 나중에 고흐는 이 시기를 ‘포로처럼 차갑고 우울했던 때’라고 회상했다. 1869년부터 그림을 판매하는 유명한 화상이었던 삼촌 밑으로 들어가면서 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헤이그 지점을 시작으로 런던 지점, 파리 지점 등을 옮겨 다니며 그림을 판매하던 중 그림을 보는 관점이 다른 손님과 큰 언쟁을 벌인 것이 빌미가 되어 삼촌 회사에서 해고된다.
7년 만에 화랑을 떠난 고흐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 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하면서 노동현장의 현실을 보게 된다. 내성적이었지만 세상을 보는 냉철한 시선을 가졌던 그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해방을 주장하는 설교를 하다가 6개월 만에 해고되고 만다. 그때부터 제도권 교회를 평생 불신한다.
세상과 불협화음으로 일관하는 고흐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생 테오는 그림공부를 권한다. 이때부터 안톤 모베(Anton Mauve)를 스승 삼아 그림공부를 시작하지만, 이마저도 견해차를 보이며 중단하게 된다. 내성적이고 고집 센 고흐를 감당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오랜 절친으로 남게 되는 고갱이다.
둘은 화가 마을을 만들어 함께 생활한다. 하지만 고흐의 괴팍한 성격은 절친 고갱마저 등을 돌리게 한다. 친구가 떠나버리자 화가 난 고흐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기 귀를 잘라버린다. 그리고 그 처량한 모습마저 화폭에 담는다.
고흐의 예술은 진실과 열정의 도가니였다. 자기의 진실에 맞지 않으면 삼촌이든 스승이든 친구든 가리지 않고 시비를 걸었다. 이런 자신의 심리를 색채로 표현했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이라 극찬한 〈신발〉에도 그런 심리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가 그린 구두는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나 왕들의 화려한 신발이 아닌 땀 냄새가 가득한 농부의 신발이었다. 고흐에게 신발은 신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신고 산길이든 밤 길이든 걸어야 신발로서 존재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광택을 내기는커녕 끈조차 제대로 맬 필요가 없었다. 그가 그린 신발 속에는 남루한 농부의 소박한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이는 하이데거의 “인간의 눈에 비친 사물은 독립적 존재로 파지될 수 없고 관계 속의 존재로만 파악된다”라는 말을 고흐의 그림이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색채가 지닌 힘을 알아챈 고흐는 자신에게 투영된 대상의 존재를 드러내는 유일한 자원으로 삼았다.
간척지와 운하가 많았던 네덜란드엔 도개교(跳開橋)도 많았다. 그 아래엔 인근의 여인들이 몰려나와 빨래하곤 했는데, 고흐는 이들을 놓치지 않았다. 내려져 도개교 위로 마차가 지나가고, 빨래하는 아낙들 앞에 세 개의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모습을 〈앙글루아 다리〉라는 그림을 통해 표현했다. 소소한 삶이 고흐의 눈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였다.
괴팍한 성격의 고흐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삼촌 화랑의 런던 지점에 근무하던 1873년 6월, 하숙집 딸 외제니 로예(Eugenie Loyer)를 만난 것이다. 당시 열아홉 살 처녀였던 외제니는 예의 바르고 쾌활한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고흐는 “외제니의 미소는 저 태양보다 밝다”며 그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그리고 쥘 미슐레(Jules Michelet)의 연애 에세이 《사랑(L’Amour)》을 탐독하던 동생 테오에게 “여자는 사랑받는 한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다”며 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날 이후 고흐는 외제니 앓이를 시작하게 된다.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외제니는 이미 정혼한 남자가 있었다. 외제니를 향한 사랑이 깊어지자 외제니의 부모는 고흐를 하숙집에서 쫓아버린다. 첫사랑의 실패는 고흐의 인생을 바꿔버린다. 종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신앙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미술품을 멀리하게 된다.
화랑에 근무하던 때여서 미술품 혐오는 손님들과의 마찰로 이어진다. 동료나 고객들과 언쟁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더 이상 화랑에서 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결국 그는 해고당해 낙향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877년, 화랑에서 계속 일하길 원하는 어머니의 청을 물리치고 암스테르담 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에게 신학은 간단한 학문이 아니었다. 신학의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감이 그를 괴롭혔다. 광산촌에 들어가 목회활동을 하면서 제도권 교회와 크게 부딪친 이후 종교와도 결별하게 된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미술공부가 시작된다. 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중심에 신을 두고 살았던 고흐는 탄광촌에서 제도권 교회와 크게 다툰 후 신을 밀어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태양을 두게 된다.
이후 그는 태양 아래 어둠이 벌거벗듯이 가식 없는 작품을 그리는데 집중한다. 비싸고 좋은 붓이 아니라 거칠고 큰 붓이나 자신의 손가락, 심지어 나이프로 투박하게 색칠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이 무렵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가 자주 그림에 중심이 된다.
비싸고 좋은 화구(畵具)가 아니라 아무나 구할 수 있는 조악(粗惡)한 도구로 명화를 그려내면서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기존의 작가와 달리 대충 그리면서도 독립적 생명을 창조해냈다.
그의 그림 공부는 테오의 도움이 컸다. 미술공부를 하는 동안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아버지 밑에 사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가 아버지 밑에서 그림을 공부할 무렵 외삼촌 스트리커 목사 가족이 휴가를 맞아 방문했다. 그때 동행한 스트리커의 딸 케이 보스 스트리커(Kee Vos-Stricker)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청혼하게 된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데다 아들까지 둔 미망인이었던 케이 보스는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게다가 둘의 결혼은 부도덕한 짓이라며 집안의 반대가 이어진다. 하지만 고흐의 마음을 돌리진 못한다. 케이 보스에게 구애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없자 암스테르담까지 직접 찾아가서 만났지만 거절당한다.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이다.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만 잊어 달라”는 케이 보스의 문전박대는 고흐를 상심하게 한다. 이 일로 가족과도 불화하게 된다.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 “케이 보스와 대화하고 싶다. 긴 시간도 아니다. 내 손이 타오르는 이 불꽃 속에서 견딜 수 있는 시간만큼”이라는 심정을 밝히지만, 더 이상 둘의 관계는 이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이 일로 가족은 물론 친척들과의 갈등으로 번지면서 고흐는 고향을 떠나야 했다.
첫사랑은 물론 두 번째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하자 헤이그로 떠나 미술공부에 전념한다. 안톤 모베에게 수채화를 배워 화가로서 첫발을 내디디게 된다.
1882년 1월, 테오의 도움으로 헤이그에 화실을 얻어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던 그는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가 쓴 《밀레의 전기》를 읽다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발견하게 된다. 책에서 감동하면서 농어촌 등 촌락을 그리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그해 8월엔 갑작스러운 폭풍을 피해 몰려든 고깃배와 갯벌에서 일하다가 뭍으로 올라온 사람들을 화폭에 담은 〈스헤베닝겐 해변의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을 그린다.
화가로 자리를 잡아가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가족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한없이 쓸쓸해진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그때 시엔[sien(본명 Clasina Maria Hoornik)]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비가 내리는 차가운 거리에서 생계를 위해 남자를 찾고 있던 창녀였다. 임신한 몸에 다섯 살짜리 딸까지 두었던 그녀는 비에 젖어 초라한 모습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에 매독까지 걸려 더는 살아갈 방도를 찾지 못해 보이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화실로 데려와 그들을 위로하고 시엔을 모델로 누드화 〈슬픔(sorrow)〉을 그렸다.
순탄치 않은 매춘부의 비참함이 손에 잡힐 듯한 그림이었다. 축 처진 가슴과 뱃살들, 아름다울 것 하나 없는 여인이 당장 오늘 밤 먹을 것과 잘 곳을 걱정하고 있는 슬픔이 그림에서 묻어났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감싼 팔에 얼굴을 묻어 표정을 볼 수 없어 더 애잔했다. 이 그림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화가를 꿈꿨던 고흐의 시작은 알리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밤을 보낸 고흐는 시엔을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다. 화실에서의 동거가 시작되고, 아이들을 위한 요람과 어린이용 의자가 놓이게 되면서 시엔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우울했던 화실이 그들로 인해 밝게 변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그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꿈꾸게 된다.
“이제 내 평생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더 좋은 작품 만들어 돈을 벌고 시엔과 결혼해야지. 그것만이 시엔이 다시 구렁텅이로 돌아가지 않도록 돕는 길이야.”
하지만 둘의 결혼은 고흐의 가족은 물론 항상 고흐의 편이었던 동생 테오마저 반대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형 왜 하필 그 여자야? 결혼하지 말고 형편 되는대로 돕고 말아. 사랑은 동정이 아니야.”
고흐는 “따뜻한 위로와 생리적 이유”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버틴다. 그러나 이번엔 시엔의 오빠가 찾아와 화실에서의 궁색한 삶을 보더니 “이렇게 살 바에 차라리 거리의 창녀가 낫겠다”며 헤어지기를 강요하면서 둘은 결별하게 된다. “사랑하지만 이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시엔은 그의 곁을 떠났다.
시엔과의 결혼소동은 가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다. 오직 테오만이 여전히 고흐의 든든한 후원자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시엔은 1904년 강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그녀와 그녀의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한동안 고흐를 괴롭힌다. 그 일은 고흐가 혹독하게 창작에만 몰두하게 한다. 그리는 일만이 기쁨이고 구원이라는 확신이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헤이그에서의 화실생활은 궁핍을 견디다 결국 문을 닫는다. 1883년 12월, 어쩔 수 없이 부친의 집이 있는 누넨으로 돌아오지만 부자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부친은 고흐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종용했으나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 의지대로 살겠다’며 거부한다.
아버지 밑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갈 무렵, 어머니가 기차에서 내리다 왼쪽 발을 헛디뎌 발목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어머니의 병간호를 적극적으로 도운 이가 옆집에 살던 마르고트 베게만(Margot Begemann, 1841~1907)였다.
병원을 오고 갈 때 함께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미술을 좋아했던 열두 살 많은 그녀는 고흐가 화가임을 알고 호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들녘으로 그림을 그리러 갈 때 동행하기도 했다. 이후 고흐를 믿어주고 사랑해준 유일한 여자가 된다.
고흐는 그녀를 위해 〈누넨의 물레방아〉를 그려준다. 두 개의 물레방아 바퀴가 맞물려 있는 그림을 통해 하나는 자신을, 다른 하나는 마르고트를 나타낸 것이다. 그렇게 둘의 사랑이 깊어갈 즈음, 마르고트가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생긴다. 이때 그 곁을 고흐가 지킨 것이 알려지면서 양쪽 집안에서 둘의 관계를 알게 된다.
이들의 만남도 반대에 부딪힌다. 고흐의 집안에서 여자가 너무 늙었다는 이유였고, 마르고트 집안에선 고흐의 인물을 핑계 삼았다. 마르고트는 이 일로 크게 상심하여 자살을 결심한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면서 결혼승낙을 받아낸다.
이때 〈황혼의 포플러 거리(Avenue of Poplars at sunset)〉가 그려진다. 서쪽에 붉은 해가 마지막 정열을 불태울 때 포플러 가로수 사이로 한 사람이 걷고 있다. 형체만 사람일 뿐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마르고트일 것이다. 가장 힘이 되어야 할 가족들이 두 연인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가장 많은 아픔을 주었다. 이런 역설적 아픔이 황혼의 실루엣으로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끝내 둘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생명을 함부로 버리려 한 여자를 절대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목사 아버지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상심한 고흐는 가족과도 헤어지겠다고 선언하고 1886년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테오와 함께 살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때 새로 문을 연 카페 탕브랭에 자주 드나들었다. 주인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라는 특이한 옷차림과 미모로 주목받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고흐에게 정물화 한 점을 갖고 싶다고 접근하면서 둘은 친밀해졌다. 이후 그 카페에서 처음으로 고흐의 전시회가 열린다.
그리고 이 무렵 세가토리가 임신을 하게 된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세가토리에게 청혼을 하지만 “당신 매독에 내가 전염되었다.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다. 아이도 지우겠다”는 뜻밖의 거절을 당한다. 시엔에 의해 매독이 전염되어 있었다.
또다시 이별하게 된 고흐는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더 많은 빛과 색채를 찾아 남프랑스 아를로 떠난다. 그곳에서 연작으로 〈꽃이 핀 과수원〉을 그린다. 그리고 1888년엔 처음으로 앵데팡당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한다.
고갱을 만나 화가공동체를 구상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둘은 노랑 아틀리에를 꾸며 함께 거주한다.
비인간화된 산업사회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는 것으로 주목받은 두 사람은 아마추어 화가 출신으로 최고의 미술학교 출신을 제치고 세계 최고 예술가가 되는 등 공통점이 많았다. 차이가 있다면 고갱은 물, 고흐는 불이라 불리는 정도였다. 오랜만에 마음 맞는 친구가 된 두 사람은 밤의 정경을 그리며 별 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성적이며 격정적이지만 의리를 중시했던 고흐와 외향적이며 인습을 비웃는 현실적 냉소주의자였던 고갱은 잘 맞았다. 애정을 쏟은 상대에게 버림받으면 자신을 괴롭히는 마조히즘적 성격을 지닌 고흐는 사디스트적이며 거침없는 고갱이 평생 함께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고갱이 자신을 귀하지도 않은 해바라기나 그리는 화가 취급하자 등을 돌린다. 그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둘의 관계는 심하게 다툰 어느 날 화가 나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 고흐의 모습에 질려버린 고갱이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혼자 남은 고흐는 까닭 모를 죄책감과 공허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계속 그림을 그려 2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1890년 1월 28일, 브뤼셀 유화전에서 생전 처음이자 유일하게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팔린다. 언론들 역시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며 그에 대한 호의적 평론을 발표한다.
같은 해 7월 27일, 명왕성이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그는 생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초라한 다락방에서 가슴에 총을 쏘아 생을 마감했다. 형의 죽음을 직감하고 달려온 테오의 품에 안긴 고흐는 “모든 것이 끝나서 좋다”라는 말을 남기고 영영 우리 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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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대화의 연금술》을 비롯해 《통하는 대화법》, 《소비 트렌드》, 《리더십 불변의 법칙》, 《최고 마케팅 경영자 예수》, 《CEO형 인재》, 《해체냐 해탈이냐》,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두 개의 길 하나의 생각》, 《바루나-포용의 신화를 찾아서》, 《강화도 미래신화의 원형》과 중국에 수출된 《행복한 수면법》 등이 있다.접기
명작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다! 화가, 음악가, 시인 등 예술가의 명작을 이해하려면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편의 명작이 태어나기까지 희로애락이 깃든 작가만의 라이프 스토리와 세기의 명작이 탄생하는 과정을 소개한다.접기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해바라기의 화가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Vincent van Gogh
출생 | 1853년 0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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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0년 07월 29일 |
국적 | 네덜란드 |
대표작 | 〈별이 빛나는 밤〉,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 〈해바라기〉, 〈탕기 영감의 초상〉, 〈감자 먹는 사람들〉 등 |
선명한 색채와 거칠지만 독특한 표현으로 오늘날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영혼의 화가, 빛의 화가, 해바라기의 화가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서양화가 중 한 사람이다. 살아서 단 한 점의 그림을 팔았을 만큼 무명이었고, 궁핍과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런 생을 살다 사후 재평가된 ‘시대를 앞서 나간 천재 예술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기도 하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던 테오도루스 반 고흐이고, 어머니는 안나 코르넬리아다.
16세가 되던 해, 고흐는 화상이던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수습 화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화상은 당시 장래가 유망한 직업이었으나 고흐는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손님들과 종종 다투었고, 하숙집 주인 딸을 짝사랑하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해고되었다. 해고된 후에는 견습 교사, 서점 점원 등을 전전했다. 이처럼 힘든 시기에 고흐가 마음으로 의지했던 것은 종교와 그림이었다. 고흐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어서 고흐는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선교사로 일했으나 6개월 뒤에 해고되었다. 그럼에도 무보수로 일을 계속했기 때문에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네 살 아래인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에 의지하게 되었다. 화상으로 일하던 테오는 평생 형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흐가 그림을 계속 그리는 데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7세가 된 고흐는 테오의 제안에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가의 길도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고흐는 1880년 테오의 주선으로 헤이그로 갔다. 여기서 화가 안톤 모브의 화실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으나 그림에 대한 견해차로 얼마 후 나왔다. 1885년에는 벨기에 안트베르펜 미술학교에 등록했으나 몇 달 만에 퇴학당했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고흐는 고향집 목사관 부속 건물에 자리를 잡고 홀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 루이스달 등 좋아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공감하고 연대감을 느끼면서 양식화된 미를 표현하는 것보다 진실성을 드러내고 분위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이때 완성한 대표작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농부 가족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이 그림은 잘못된 인체 비례, 구성의 결함, 과장된 얼굴 묘사 등 회화적 기교가 부족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며, 고흐만의 거칠지만 독특한 붓질 표현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등불 아래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땅을 경작할 때 쓰는 그 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다. 노동으로 거칠어진 그들의 손을 강조한 건 그들이 밥을 먹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그가 몰두하고 있던 주제와 화가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1885년 10월 말, 고흐는 고향을 떠났다. 고흐의 충동적인 태도에 반감을 가졌던 이웃 사람들이 지난 3월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고흐를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이후 고흐는 안트베르펜에 잠시 체류한 뒤 1886년에 파리로 올라왔다. 고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과 깊은 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조차 자신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파리에서 고흐는 모네, 르누아르, 쇠라 등의 작품을 접하고 인상주의가 지닌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에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큰 영향을 받은 화가는 폴 고갱과 들라크루아였다. 구필 화랑의 지배인으로 있던 테오가 연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에서 고흐는 무명 화가였던 고갱을 만났다. 당시 고갱은 강렬한 색채를 균일하고 표현적으로 사용하는 양식을 개발하던 중이었다.
이 시기에 고흐가 강렬하게 매혹된 또 다른 것은 일본 판화 우키요에였다. 고흐는 색채 표현에 몰두하고 물감을 다루는 방식을 습득했다. 색채의 자율성을 주장한 들라크루아의 색채 이론을 공부하면서 색채 대조 기법을 개발했고, 색과 붓놀림을 대담하게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인 〈탕기 영감의 초상〉에서 고흐는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 푸른색 등 강렬한 원색을 대담하게 구사했는데, 그에게 색채란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자연의 색이 아니라 자신의 격렬한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표현주의적 도구였다.
1887년, 고흐는 툴루즈 로트레크,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등과 함께 레스토랑 샬레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다. 고흐의 소란스러운 행동이 동생 테오의 사회생활에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
1888년 2월,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로 떠났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면 늘 그랬듯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중해 특유의 온화한 기후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아를에서 자신의 작품의 본질인 강렬하고 따뜻한 색채와 초기에 영감을 받았던 농촌 소재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동생 빌레미나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아를에서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붙잡기만 하면 된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고흐의 작품 대부분은 이 시기에 그려졌다. 이때 전형적인 고흐의 그림으로 보이는 화법을 개발한 것이다. 고흐는 론 강 유역의 밀밭과 포도밭, 운하, 밤의 거리 등을 걸으며 남프랑스의 풍경에 심취했는데, 이는 그가 대상의 자연색이 아니라 각각의 그림을 위해 발전시킨 색채 체계에 적합한 색을 사용하는 특유의 기법을 완성할 수 있게 했다.
그에게 색은 대상의 모습을 그리는 수단이 아니라 화가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내는 개인적 표현이었다. 그림에 나타난 붓 자국 역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가 개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표현 기법이었다.
색채의 위치를 정할 때 자연으로부터 일련의 순서와 정확성을 받아들인다.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지만 내가 사용한 색이 내 그림에서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이 사물의 색과 동일한 색인지는 더 이상 내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형태에 있어서는 ‘나는 내가 그린 형태가 정확하지 못해 실제와 다를까 봐 겁이 난다’라고 썼다. 때문에 돌아다니면서 습작을 할 때도 정확하고 꼼꼼하게 드로잉했으며, 집으로 돌아와서 이를 바탕으로 작품의 효과를 생각하여 선택한 색을 입혔다. 그는 작품 속에서 대상을 종종 심하게 변형시키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로,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았다.
내성적이고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음울해 보이는 고흐는 이곳에서도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모든 풍경도 주변이 냉담하자 점차 시들해졌다. 고흐는 파리에서 꿈꾸다 실패했던 ‘화가들의 공동체 생활’을 다시 꿈꾸며 테오에게 고갱을 설득해 아를로 오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동 화실인 노란 집을 꾸미면서 기대에 가득 찬 고흐는 〈해바라기〉 연작과 〈아를에 있는 반 고흐의 침실〉을 그렸다. 침실에 그려진 두 개의 의자, 두 개의 액자, 두 개의 그림에는 고갱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리는 고흐의 부푼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고, 고갱이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그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고흐는 고갱에게 딱 달라붙어 자신이 그린 것들을 보여 주고 토론하고 싶어 했는데, 고갱은 그의 태도를 부담스럽게 여겼다. 기대가 깨진 고흐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고갱에게 집착했고, 고갱이 떠날 것을 두려워했다. 잠을 자는 사이에 고갱이 떠날까 봐 한밤중에도 몇 번이고 고갱의 침실을 들여다봤을 정도였다.
어느 날 고갱이 밤 산책을 나갈 때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그의 뒤를 쫓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려워진 고갱은 고흐를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낸 뒤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를 발견했다. 그동안 고흐의 병증 때문에 머물렀던 고갱은 이로써 완전히 질려 고흐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아를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고흐는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게 되었고, 고갱을 잃은 슬픔을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으로 표현했다. 병원에 갇힌 동안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지만, 삶의 희망을 잃은 상태였다.
1889년, 36세의 고흐는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는 1년여를 이곳에서 지내면서 〈붓꽃〉, 〈사이프러스가 있는 푸른 밀밭〉, 〈올리브밭〉, 〈별이 빛나는 밤〉 등을 그리며 서서히 자신감을 찾았다. 그러나 발작은 계속되었고, 우울증과 환상, 피해망상, 정신착란에 시달렸다.
1890년 9월, 고흐는 아마추어 화가인 가셰 박사의 제안으로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 갔다. 박사의 치료를 받으며 작업에 몰두한 그는 매일 한두 점씩 그림을 그리는 열정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를 지배하고 있던 슬픔과 고독,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를 일생 후원해 주었던 동생 테오가 자신 때문에 가정생활과 재정적 측면에서 곤란을 겪자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렸다. 결국 1890년 7월 29일 밤, 그는 들판에 나가 권총 자살을 기도했다. 그리고 이틀 후 머물던 여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는 오베르에 쓰였다. 고흐가 죽고 1년 후 동생 테오도 사망했으며, 테오도 그의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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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역사와 예술의 관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술가들을 재조명하고 ,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은 삶과 작품을 새롭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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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VLQPDHJ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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