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고려인 문학 작가들 <박미하일, 아나톨리 김>
“나는 당신의 후예임을 알아내고 한없이 기뻐했습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는 소련이 해체한 1991년에 구소련 계승을 목적으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10개 공화국이 동맹을 맺은 독립국가연합의 약칭입니다. 우리 민족인 고려인이 스탈린 체제와 소비에트 시기를 거치면서 소수민족 분리정책과 강제이주를 당하며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고려인은 거친 역사 속에서도 한민족의 언어, 문화, 전통 등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문학입니다. 강제 이주 전에 사망하거나 연해주・사할린에서 태어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1세대 문인, 북한에서 태어나 소련으로 망명한 2세대 문인, 그리고 구소련에서 러시아어로 활동하는 3세대 문인까지 그러한 노력을 쏟아왔습니다. 고려인의 문학에는 민족에 대한 향수로부터 비롯하여 억압당한 정체성, 문화적 충돌, 체제 순응 등 다양한 디아스포라적 특징이 담겨있습니다. 최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3세대 문인 중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박미하일과 아나톨리 김입니다.
고려인 5세인 박미하일(Park Mikhail, 1949)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부모님을 둔 한국계 러시아 작가입니다. 화가가 되고 싶어 두샨베 미대에 진학했고 전시회도 열었지만, 문학도 똑같은 예술이 될 수 있단 생각으로 스물일곱에 펜을 잡은 것이 지금까지 글을 쓰는 작가의 길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사람을 접할 길 없던 젊은 그에게 한국은 그저 막연한 그리움이었습니다. 40대에 접어들자 한국어를 배우려 한국교육원을 찾았고, 1992년에 떠난 한국 연수가 인연이 되어 이제는 한국을 오가며 고려인의 이주 역사를 소설과 그림 등 예술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박미하일은 1976년에 카자흐스탄 신문에 실린 단편소설 「사울레느」로 등단한 이래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꾸준히 글을 써왔습니다. 그에게 소설이란 자신의 민족적・문학적 정체성을 성찰하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며, 인간의 실존을 확인하는 수단입니다. 이민 1세대와 2세대의 연해주 이주 과정을 담은 장편소설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는 작가의 가족 역사를 풀어낸 작품입니다. 「발가벗은 사진작가」 또한 러시아와 한국 혼혈인 화가의 삶을 다룬 연작소설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고려인이 사회적 소외를 피하기 위해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가가 처음으로 한국 소재와 한국 배경, 한국 주인공을 등장시킨 「헬렌의 시간」은 다양한 인종의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진실한 관계로 한국 사회의 다문화 문제를 조명하는 소설입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문체로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소설들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러시아 까따예프 문학상, 쿠프린 문학상, KBS 예술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현재까지 장편 7편, 중편 6편, 단편 20편, 희곡 2편을 발표한 그의 꿈은 한국어로 단편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구소련 시대에 그룹 전시로 화가의 명성을 얻었던 전력을 살려, 러시아, 프랑스, 카자흐스탄을 거쳐 한국의 여러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그림 전시를 열기도 했습니다. 윤후명 「둔황의 사랑」, 이문열 「사람의 아들」 등 한국 문학을 러시아로 번역하고, 박경리 「토지」를 번역할 때는 직접 그린 삽화 사십여 장도 함께 수록하여 한국에 대한 그의 진한 애정을 녹여 넣었습니다.
도시 너머로는 바다가 펼쳐졌고, 사이프러스 숲과 보리를 심은 밭, 오름 산지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막의 카라반을 닮은 오름 산지의 능선은 이따금 아지랑이 속에서 녹아 내렸다. 멀리 보이는 채마밭과 취락 너머로는 한라산이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이곳 멀리서는 한라산이 그저 장난감처럼 작게만 보일 뿐 그다지 높게 느껴지지 않는다.
- 박 미하일,『헬렌의 시간』중, 제주도 풍경을 설명하는 부분.
박미하일보다 조금 윗세대인 고려인 3세 아나톨리 김(Anatoly Kim, 1939)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습니다. 강릉 김씨의 후손인 그의 조상은 조선 시대 문인인 김시습이기도 합니다. 선조의 영향 덕인지,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되며 최고의 작가로 자리 잡은 그는 러시아 작가 중 최초로 한민족을 다뤘습니다. 1989년 가을, 세계 한민족 체전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아나톨리 김은 그 해부터 한국 사회에 신문 인터뷰와 방송 등으로 알려지며 그의 작품도 국내에 알려졌습니다. 그의 작품은 언뜻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와 뉘앙스, 울림이 숨어있고, 동양적 인간으로서의 철학과 우수가 담겨있습니다. 다성적(多聲的) 의미를 빚어내는 환상문학가로도 유명해 ‘20세기의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그는 고려인의 민족의식과 녹록지 않은 삶,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인류의 삶을 자유롭게 풀어냅니다.
1973년에 그는 단편소설 「수채화」와 「묘코의 찔레꽃」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잡지 ‘북극광’에 발표하면서 소련 문단에 데뷔하게 됩니다. 고려인을 주인공으로 한민족의 생활문화와 죽지 않는 인간의 예술혼을 쓴 1984년 작 「다람쥐」는 러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톨스토이 문학상의 대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킵니다. 2013년 작 「낙원의 기쁨」은 전생과 후생이라는 한국적 개념을 이용해 인간의 불멸 가능성을 다룬 소설입니다. 그가 전북 남원에서 보낸 3개월의 경험이 담겨있으며, 스스로 한국인의 정신으로 빚은 작품이라 표현할 만큼 한국적인 작품입니다. 이외에도 「켄타우로스의 마을」, 「신의 플루트」 등 숱한 대표작을 낸 그는 모든 작품에 존재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심습니다.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이 힘든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랑의 힘을 주제화하고, 염세적 세계관과 소설의 철학적 형식을 모색하며 한국적 색채를 고루 담아냅니다. 이들 작품은 작품성을 높이 평가받아 모스크바 예술상, 독일의 국제문학상, 이탈리아 펜네 시 문학상, 야스나야 폴랴나 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동양적 인간, 구체적으로 말해서 ‘한’이라고 불리는 어떤 철학적 우수 같은 것을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국 사람인 나는 러시아어로 쓴 자신의 시와 산문 속에 영혼을 담으려 했다.
- 아나톨리 김,『초원, 내 푸른 영혼』에세이 중
소설가가 되기 전 크레인 기사, 보일러공, 선전 포스터 제작 미술 감독관 등 여러 직업을 거쳐온 아나톨리 김. 그의 활동 역시 다양했는데, 「춘향전」, 「운수 좋은 날」 등의 한국 문학을 번역 출간했고, 러시아 클래식 문학을 카자흐스탄어로 번역했습니다. 한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여행지를 그린 회화 작품을 모아 한국문화원에서 전시하는 등 미술적 감각도 뛰어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미대에서 배웠던 미학적 개념을 작품 속으로 그대로 옮겨온 덕에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언어에 영혼을 담아 민족과 국민을 치유하는 것이 사명이라 여기는 그의 꿈은 한국과 러시아 문학이 보다 발전적으로 교류하는 것입니다. 이제 고령에 접어든 그는 더 깊어진 통찰로 펜을 듭니다.
▶ 작가 이력
박미하일(1949).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출생. 화가, 소설가
타지키스탄 두샨베 미술대학 유화학과 졸업
1976년 단편소설 「사울렌」으로 데뷔
러시아 까따예프 문학상, 러시아 쿠프린 문학상, KBS 예술문학상 등 수상
러시아미술가협회 회원
▶ 작가 이력
아나톨리 김(1939). 카자흐스탄 침켄트 출생. 소설가
모스크바 미술대학 중퇴, 고리키 문학대학 졸업, 한국외대 노어과 졸업, 미국 캔사스주립대 대학원 슬라브어문학 박사
1973년 단편소설 「수채화」로 데뷔. 대표작 「다람쥐」 전 세계 30여개 언어로 번역 및 출간
톨스토이문학상 대상 수상, 모스크바 시 문학상 수상, 노벨문학상 후보 거론
「춘향전」, 「동백꽃」, 「운수 좋은 날」 등 다수 한국 문학 작품 공역
문학잡지 ‘야스나야 폴랴나’ 편집장 역임, 한국외대 노어과 부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