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7장 정토 경전의 주요 개념 - 4. 왕생과 정토

2013. 8. 27. 14:25경전 이야기

 4. 왕생과 정토

 

 

왕생의 의미

 

극락정토에 왕생함을 설하는 것이 정토경전의 목적이다.

 

'정토'란 산스크리트본을 보면 '태어난다'고 하는 의미를 가진 몇 개의 말로 표현되어 있으며, 극락정토에 태어난다는 것은 결국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극락정토가 본래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를 나탄내 것이라는 점에서 보아도 분명하다.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설해져 있다.

 

예를 들면 아미타불의 본원 가운데는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열반에 도달한다고 하는 필지멸도의 원(必至滅度의 願), 일생을 끝내고 다음 생에는 반드시 부처가 된다고 하는 필지보처의 원(必至滅度의 願), 혹은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적 특징을 갖춘다고 하는 32상의 원이 있는데, 이것은 극락정토에 태어난는 것이 보살도를 완성하여 반드시 불과(佛果)를 얻는 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경전의 표현을 빌리면,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 대해 마음을 일으켜(發菩提心)"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며,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서 퇴보하지 않는 자가 될 것(得不退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극락정토가 본래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라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극락정토는 본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 세계이기 때문에 현세라든가 내세라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세계지만, 정토경전에서 극락왕생은 내세에 실현된다고 한 것처럼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사후에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극락정토에 '태어난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들이 태어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무량수경>에서는 이것을 '화생(化生)'이라 하였다.

 

태어나는 방법에는 사생, 즉

 

①인간이나 소처럼 모태로 태어나는 태생(胎生),

 

②닭이나 오리처럼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

 

③지렁이나 모기처럼 습한 곳에서 태어나는 습생(濕生),

 

④귀신이나 지옥 중생처럼 의지하는 것이 없이 자신의 과거 업의 힘에 의해 홀연히 태어나는 화생(化生) 네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극락에 태어나는 것은 네번째의 화생으로서,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스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출생 방법에 대한 관념은 이미 원시불교에서 사후의 생천(生天)등을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하던 것인데, 정토경전은 이 것을 그대로 받아 사용하였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정토왕생과 생천사상 사이에는 사상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천계도 윤회의 세계에 포함되기 때문에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 결코 해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해탈(열반)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단지 생천사상이 발달해서 정토왕생 사상이 성립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생천사상을 기본으로 하면서 해탈한다고 하는 점에서 왕생의 원류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원시불교의 사사문과(四沙門果)에서 찾을 수 있다.

 

사사문과란 예류과(預流果)·일래과(一來果)·불환과(不還果)·아라한과(阿羅漢果)라고 하는 네 단계의 수도계위를 말한다.

 

예류과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로서 수다원(須陀洹)이라고도 한다.

 

일래과는 인간세계로 한번만 되돌아가는 자로서 사다함(斯陀含)이라고도 한다.

 

불환과는 다시는 욕계(欲界)로 되돌아가지 않는자로 아나함(阿那含)이라고도 한다.

 

아라한과는 삼계(욕계·색계·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 다시는 삼계에 생사윤회하지 않는 자이다.

 

이 가운데 현세에서 궁극의 과보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은 제4과인 아라한과이며, 앞의 3과는 모두 해탈에 이르지 못한 자이다.

 

그러나 앞의 3과도 해탈을 향한 수행과정에 있는 한, 사후에는 천계에 태어나 수행을 계속해서 결국은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은 소위 생천을 매개로 내세에 해탈을 기대하는 사상인데, 정토왕생과 비교해 보면, 해탈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토왕생 사상은 생천사상과 결합된 사사문과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염불과 칭명

 

 

정토왕생의 실천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염불이다.

 

염불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을 염(念)하는 것인데, 산스크리트어로 표기되는 이 '염'속에는 부처님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항상 떠올리거나 생각하는 억념(憶念)과 사념(思念)과 심념(心念)의 뜻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염불하면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칭명(稱名)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중국 정토교의 선도(善導)는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에서 설하는 '십념(十念)'이나 <무량수경>의 제18원에서 설명하는 '십념'을 '십성(十聲)'으로 해석하여 '염'과 '성(혹은 稱)'을 같은 뜻으로 봄으로써 염불이 곧 칭명임을 주장하였다.

 

이후 일본 정토종의 개조 법연과 정토진종의 개조 친란(親鸞)이 이 설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염불은 곧 칭명염불과 같은 의미가 되었다.

 

그러면 칭명염불은 중국의 선도가 처음으로 만든 것일까?

 

선도가 칭명염불설을 확립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원류를 찾아보면 원시불교의 교설에서도 염불과 칭명이 동일시되는 자료가 발견된다.

 

원시불교 경전 상응부에 "세존을 억념(憶念)하면서, 그때에 이 게송을 외웠다. '붓다여, 웅자(雄者)여, 당신에게 귀명합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부처님을 억념하면서 귀의하는 말을 게송으로 외웠다는 이 문장은 염불이 구칭(口稱)과 동시적으로 행해진 것을 나타내는데, 여기에는 '염' 과 '칭'의 동시성에 의한 동일시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런 용례는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문헌이나 힌두교의 문헌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염'과 '칭'의 동일시는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용법이었다.

 

이렇게 보면, 염불과 칭명의 동일시는 인도와 중국 어디에서든 자연적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서, 칭명염불설은 중국에서 확립된 것이지만 그 원류는 인도에서 찾을 수 있는, 원시불교 이래의 소위 유서 깊은 실천법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행위를 신·구·의 삼업설(三業說)로 설명하는데, 이것을 염불과 칭명에 대응해 보면, 의업(意業)으로서의 염불을 반복하는 동안에, 그것은 구업(口業)의 칭명이 되고, 또한 신업(身業)으로서의 합장·예배하는 모습이 된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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