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B.C.770~B.C.221) 5백여 년간은 주나라 왕실이 힘을 잃어 160여 개의 제후국들이 서로 공방전을 거듭했다. 제후국들이 백성의 어려운 삶을 버려둔 채 서로 힘을 다투어 무력으로 그 세를 확장해 나갔으므로 전쟁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이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기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철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관개사업으로 농업이 크게 발전한 시대였다. 상공업도 발전하여 대도시가 형성되고 청동화폐가 통용되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도 토지를 사유화할 수 있었다.
제후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일반 평민들도 능력에 따라 등용하였기 때문에 누구라도 출세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환경을 바탕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사상가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서 중국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한 것이 노자(老子), 공자(孔子), 묵자(墨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 한나라, 삼국시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거치면서 묵자는 퇴색하고 새로운 사조로서 불교(佛敎)가 재래의 사상인 노자, 공자와 더불어 중국의 사상과 풍속사에 자리잡게 되었다.
후한(後漢)이 몰락한 이후부터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중국을 재통일(589년)할 때까지 장장 360여 년간 중국 대륙은 대단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북방의 이민족과 한족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치열한 권력쟁탈전을 벌이는 동안 수많은 나라가 명멸했고, 백성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었다. 이처럼 격변과 혼란을 겪던 시대, 불교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중국 고유의 전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으로 다뤘다. 또 사후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시각과 구원의 소망을 제공하였고, 인간은 언젠가 이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리라고 약속했다.
초기에 많은 중국인들은 불교를 도교(道敎)의 변형으로 보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불경 번역자들이 대승불교의 ‘공(空)’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도교의 ‘무(無)’라는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는 등 많은 개념을 도교의 이론과 언어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유교는 불리한 논리를 제공하는 데 반해 불교는 서로 조화로 민족 간의 통일을 시도할 수 있어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도 불교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중국의 불교 수용사
중국 사람들은 서역의 승려인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같은 외국학자들의 불경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인도 유학을 감행했다. 예를 들어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한 법현(法顯, 337?~422?), 『서역기(西域記)』를 저술한 현장(玄奬, 602?~664),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을 저술한 의정(義淨, 635~713)과 신라에서 유학간 혜초(慧超, 704~787)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했는데 위의 저서들이 인도 사대(四大)여행기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바다에서 바다로, 육지에서 육지로,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길을 택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할 뿐만 아니라 많은 불경을 구해 돌아와 스스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신라 승려 원측(圓測, 613~696)은 외국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유학하지 않고도 서역 언어에 달통하여 현장 스님과 함께 경전을 번역한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서안 근교에 있는 흥교사(興敎寺)에는 지금도 현장과 함께 그의 탑묘가 모셔져 있다.
중국 사람들은 불경을 다 번역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달마(達磨),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으로 이어지는 선(禪)불교를 창안하여 인도불교를 중국불교화해서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선불교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중국 명산에 불교의 사대보살의 거처를 마련했다. 산서성 오대산(五台山)에 문수보살(文殊菩薩), 절강성 보타산(普陀山)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사천성 아미산(峨眉山)에 보현보살(普賢菩薩),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에 지장보살(地藏菩薩) 등이 그것인데 이곳에서 보살의 법력과 서원을 빌려 성역화(聖域化)하여 많은 사람의 기도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의 뿌리로 발전했다.
보살(菩薩, Bodhisattva)이란 누구인가?
인류가 70억이라고 하니 지구상에는 70억의 보살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보살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구하고〔自利〕,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利他〕”으로 정의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전생(前生)에 여러 겁(劫)을 거치면서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부처, 아라한(阿羅漢), 보살이 될 수 있었는데, 보통 사람도 오직 자신과 모든 중생과 함께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워 고된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살의 개념이 확대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은 중생도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다는 대승불교 사유체계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대웅전(大雄殿)에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님〔本尊佛〕 좌측에 사자를 타고, 청련화(靑蓮花)를 들고 있는 보살이 문수보살이다. 지혜(智慧) 제일이라는 문수보살은 부처님을 대변하고, 모든 중생에게 지혜를 일깨워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승 자장(慈藏, 590 ?∼658 ?)이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상원사(上院寺)에 문수보살의 신앙처를 열었다.
법당 안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우측에 코끼리를 타고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이 보현보살이다. 문수보살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보현보살은 행원(行願)을 상징한다. 보현보살은 크게 서원을 세워 중생을 두루 넓게 구하고, 사람의 생명을 길게 이어 보현연명(普賢延命)이라고도 한다. 불교 역사에서 보살들 가운데에는 힌두교의 영향이 크게 보이는 편이 많은데, 문수와 보현의 경우엔 불교에서 비롯된 독창적인 보살의 사례라는 것이 특색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균여(均如, 923~973) 스님이 향가로서 보현신앙을 넓혔고, 고려승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이 전남 강진 백련사(白蓮寺)에 보현도량을 열었다.
관세음보살은 보타락가(補?洛迦, potalaka)에 사시면서 세상 중생의 소리를 듣고 보는 자비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언제나 생명수인 감로수(甘露水)병을 가지고 다닌다. 고난에 빠지거나 소망이 있는 중생이 그 명호를 부르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소리를 듣고 보아 고난에서 구제하고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보살이다. 끝없이 방황하는 서민들이 얼마나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두 손 모아 서원하였을까.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민속화되고, 대중화되어 절마다 관음보살을 모시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관세음보살이 사시는 곳이 다른 나라에 비해 여러 곳이다.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낙산사(落山寺) 홍련암(紅蓮庵), 경남 남해시에 있는 보리암(菩提庵), 인천 강화군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인데 이곳들이 모두 보타락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타락가를 특정 지역의 명칭으로 제한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관음신앙과 인연이 있는 곳을 관음주처(觀音住處) 즉 관세음보살이 사는 곳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화엄경에서 제26선지식인 ‘비슬지라(毘瑟祗羅) 거사’가 선재동자에게 바다 위에 산과 바다와 모래가 어우러진 맑고 깨끗한 곳에 관세음보살이 계시다고 가르쳐준다. 이것은 경문에 있는 말이지만 우리나라 관음주처 세 곳은 모두 바다 위에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불세계(無佛世界)의 등불, 지장보살(地藏菩薩)
지장보살은 인도에서 시작된 오래된 신앙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토속신앙과 결합되어 여느 절마다 명부전(冥府殿)을 차리고 그 안에 모셔져 왔다. 시대에 따라 모습이 다르지만 이 근래에는 머리를 삭발하고 푸른 띠를 두른 형상에 석장(錫杖)을 들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시고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없는 혼탁하고 지루한 험한 시간 속에 특히 육도(六道,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도, 천도) 가운데서도 가장 혹심한 고통을 받는 지옥의 중생을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구원하는 것을 서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지장보살의 서원은 바로 철저한 중생제도의 비원(悲願)인 것이다.
또 지장보살은 다른 보살들과는 달리 지옥을 주거지로 삼아 무불세계(無佛世界)의 험난한 세상을 사는 중생을 대상으로 교화를 펼치면서 마지막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결코 성불(成佛)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 까닭에 육도 어느 곳이든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 끊임없이 중생을 구제하는 무한한 공덕을 지닌 보살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휘성 지주시(池州市)에 있는 구화산 지장보살 김교각(金喬覺, 695~794) 신라 스님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이나 『신승전(神僧傳)』의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스님은 신라 왕자라고 하는데, 스님의 고행과 법력에 경탄한 주위의 사람들이 대가람을 지어 화성사(化城寺)라 하고 스님이 주석하도록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스님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일컬어져 신라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와 함께 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가부좌를 한 상태로 음력 7월 30일 세수 99세로 입적하였다. 시신을 관에 안치하였고 3년 후에 탑속에 모시려고 관을 열었을 때 얼굴 모습이 생시와 같았고, 뼈마디에서 금쇄(金鎖)소리가 났다고 한다.
경전에 따르면 시신에서 금쇄소리가 나면 바로 보살의 화신이라 했는데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지장보살로 생각하고 김교각 대신 김지장이라 하였다. 육신탑을 세워 공양하게 되었고, 그 후로 구화산이 지장보살의 도량(道場)이 되었다. 문헌의 내용은 대충 이러한데 이곳을 방문해보면 스님의 전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 전당시(全唐詩)에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가 실려 있고, 다른 문헌에도 스님의 작품들이 보인다.
만리타국에서 보살이 된 김교각 스님
지난 9월 초 안휘성 구화산에 세계 최고 높이의 지장보살상이 제막되었다. 좌대를 제외하고 불상 높이만 99m나 된다.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46m)이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39.6m)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금도금으로 황금 35kg이 사용되었다고 하니 제작비만도 엄청났으리라.
중국을 많이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관광사업을 개발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광역화, 성역화, 역사화하는 소리가 대단하다. 중국이 이런 정책을 펼치는 속내가 무엇이든 지장보살이 된 김교각 스님의 문헌과 전설이 살아있는 곳에 99m의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세수 99세에 입적하신 스님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는데, 한국 사람으로서는 정서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를 구제하기 위하여 몸을 낮추다 못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뛰어드는 보살신앙에서 우리는 김교각 스님을 새롭게 재조명할 의무가 있다. 종교를 떠나서 신라 스님이 만리타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기에 지장보살이라고 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과정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어려움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면서도 존경스럽고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신라국의 왕자로 중국에 와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김지장 보살의 도장(道場) 구화산은 중국 민중의 마음에 오연히 솟아 있다. 김지장의 이름은 구화산과 함께 영세불멸하리라!
글/리금호 시인(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본문은 중국 심양 리문호 시인이 '신라의 왕자 출신 승려' '등신불'로 유명한 김교각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쓴 글입니다
구화산에서는 김교각을 구화산 차도(茶道)의 시조(始祖)라 한다. 역사적 기록의 시를 보면 구화산의 차는 김지장께서 동도의 신라국에서 가져 왔다, 혹은 서역에서 가져 왔다 한다. 학자들의 견해는 한국에는 아직 원생차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신라때 중국에서 가져간 것이라 한다. 그리고 김지장이 서역에 간 적은 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가져오고 간에 김지장이 구화산 차나무를 재배한 것은 공인하는 사실이며 구화산 차도의 시조라는 것도 공인하는 사실이다. 비록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둘 수 있었으나 승도가 많아져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승려들은 종종 굶었으며 관음토를 캐여다 허기를 달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아들이 이렇게 고생한다는 소식을 접한 모친은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왔다고 한다. 전설에 불과하지 사실인지는 어떠한 문헌에도 고증할수 없다. 어머니는 3주야를 울어 눈이 멀어졌다. 김교각은 효심이 지극하여 우물의 물을 떠다가 3년을 닦아 주어 드디어 눈이 밝아졌다. 훗날 사람들은 그 우물의 이름을 <명안천(明眼泉)>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우물 위에 탑을 세워 '낭낭탑(娘娘塔)'이라 명명하였다. 이 탑은 아직 있다.
781년 당지의 태수 장암(張岩)은 몹씨 김교각을 숭상하였다. 장암은 당나라 조정에 상서를 올려 정황을 반영하였다. 조정에서는 김교각의 수행에 감동되어 화성사 자리에 사원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그 사원은 어느 병란에 소각되여 존재하지 않고 지금의 화성사는 명조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김제장의 부친 성덕왕이 재위한 후 성정왕후는 아들을 데려 오라하며 신라의 대신 외삼촌 소우(昭佑)와 소보(昭普)를 구화산으로 보내였다. 김교각은 외삼촌을 만나 무척 반가웠을 것이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 또한 얼마나 간절했으랴. 그러나 이미 굳게 다진 철석같은 마음을 외삼촌으로서는 다잡을 수 없었다. 결국 조카의 결심에 감복한 외삼촌도 구화산에 남아 수행하기로 하였다. 아마 김교각을 남겨 놓고 간다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신라국에 김교각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갈 면목이 없어 가지 않은 지도 모른다. 비록 외삼촌은 구화산에 남아 수행한다고 하지만 김교각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오계(五戒)>를 위반하며 경상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기에 하는 수 없이 하산시켜 속세로 돌아가게 하였다. 두 외삼촌은 지금의 구화산 이성촌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후 당지 사람들은 이 두 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성전(二聖殿)>을 지어 기념한다. 이성전 전당에는 관복을 입은 문관과 무사복을 입은 무관 성상이 있는데 바로 김교각의 외삼촌이다. 매년 음력 7월 30일은 김지장의 성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장법회>를 성대히 진행한다. 이튼날 8월 1일에는 이성전에서 <이성회>를 진행한다. 제사상에는 술과 고기도 놓였다. 제사가 끝나면 모인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한다. 이는 대체로 한국의 제사와 비슷한 것으로 구화산에서는 특수한 종교 풍속이라 한다. 이때면 산상의 일부 중들도 슬그머니 찾아와 행사에 참가한다는 핑계를 대고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고 간다고 한다.
794년 99세 되는 해 김교각은 중도들을 불러 고별을 고하며 앉은 자세로 무병 원적(圓寂)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돌연 산이 진동하고 새들이 울고 화광이 치솟았다 한다. 김지장의 육신을 석관에 넣어 모셨는데 3년 후에 열어보니 하나도 부식됨이 없이 얼굴이 태연하였으며 손가락 관절에서는 금고리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지장왕이 응화(應化)된 육신이라 인정되어 삼층석탑을 지어 지금의 영광령(靈光嶺)에 모셔져 있다. 영광령이란 산 이름도 김지장 왕을 모실때 산에서 영광이 비껴 나왔다하여 지은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구화산에서는 육신을 신봉하는 습관이 있다. 소위 말하는 미이라는 기후가 건조한 사막이나 내륙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구화산에서는 남방의 습윤한 지구로서 불가사의한 일이다. 구화산에서는 이미 14구의(그 중 하나는 녀승) 육신이 발견되였는데 의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육신 사리라 한다. 극 소수의 스님만이 이런 현상을 가진다. 스님이 죽으면 커다란 옹이에 모셔 놓는데 3년이 되어 부식하지 않으면 유약을 칠 하였다가 다시 3년이 되어 금박을 씌운다. 그러면 몇 천년을 보관할 수 있다. 백세궁(百世宮)은 청나라때 126살에 세상 뜬 명정스님의 육신사리가 있는 곳이다. 약 1.2m 높이의 물독은 명정스님의 육신을 모셨던 독이다. 그 독은 이상하게 한국의 뚜껑이 있는 옹이와 비슷하다. 이런 양식의 독은 신라의 기술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학자들이 연구할 바이다. 화성사와 백세궁을 구경하고 나니 벌써 오후 5시 반이다. 나는 하산하여 호텔에서 주숙하고 이튿 날인 4일 7시 반에 또 다시 버스를 타고 구화산에 올랐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하지만 향불과 홍촉을 태우는 사람들은 사원마다 붐빈다.
오늘 내가 중점으로 볼 것은 김지장의 육신사리가 보존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영광령으로 오르려면 500계단의 층대를 올라야 한다. 층대는 세 개의 전당으로 나뉘였는데 첫 전당은 여래보살을 모신 전당, 두 번째는 대원 지장보살을 모신 전당, 정상에는 육신보전이다. 이 층대의 첫 입구에는 약 30m 높은 대문이 있다. 대문에는 행원무진(行願無盡) 이란 금박 글이 가로 새겨져 있으며 기둥 마다에는 금박의 글들이 수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 <지옥미공, 서불성불(地獄未空, 誓不成佛)>란 금박글이 있다. 김지장은 생전에 <아불입지옥, 수입지옥(我不入地獄, 誰入地獄)>라 하였으며, <지옥미공, 서불지옥>한다고 호언을 하였다. 즉 지옥에서 모든 중생을 구원하기 전에는 결코 보살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는 종신 분투하였다.
첫 전당을 보고 나는 다시 층대를 오른다, 두번째 전당으로 오르는 층대는 장랑이기에 우산이 필요치 않았다. 오르고 오르면 웅장하게 세워진 <지장선사(地藏禪寺)>이다. 안에는 김지장의 성상과 양쪽에는 민량공과 도명법사가 시위하여 있다. <지장선사>를 지나 계속 오르면 마지막으로 99개(김지장의 수명을 상징)의 층대가 60도 각으로 가파르게 나 있다. 해설원이 말하기를 가운데 연꽃을 밟고 오르면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요, 왼쪽의 돈을 밟고 오르면 재운을 기원하는 것이요, 오른쪽의 무엇을 밟고 오르면 관(官)운을 기원하는 것이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올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헐떡이며 단숨에 가운데의 연꽃, 평안을 밟고 올랐다. 숨이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것일까? <육신보전>은 2층의 단청색 웅장한 대궐이다. 1층 정문 위에는 <동남제일산(東南第一山)>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2층에는 <호국월선보탑(護國月身寶塔)>란 편액이 걸려있다. 797년 최초의 건축은 김지장의 육신사리를 모신 3층의 석탑이였다. 송나라 때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탑전(塔殿)>을 지었는데 바로 지금의 건축이다. 그후 청나라 때는 석탑에 7층 17m 의 목탑을 건축하여 씌웠다. 목탑의 내벽에는 적금(赤金)으로 쓴 <지장본원경>이 적혀있다. 석탑속에는 지금도 김지장의 육신사리가 보존되어 있다. 탑 앞에 앉아 있는 도금의 김지장육신 성상은 모조일 뿐이다. 산의 정상이라 하지만 <육신보전>앞 마당은 광장과 같이 넓었다. 약 8m 높이의 청동탑이 4개 세워지고 양쪽에는 3층 4각형의 커다란 루각(樓閣)이 날듯이 허공에 추녀를 치켜들고 있다. 촉대(燭臺)에서는 수백개의 홍촉이 타고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청동탑과 향로들이 장관을 이룬다. 수많은 사람들이 향불을 붙여들고 동서남북으로 기도를 올린다. 그러고는 전당에 들어가 김지장 보살왕에게 절을 하며 무엇을 소원한다. 대비대원(大悲大願)의 김지장보살에게 중국의 민중은 이렇게 1천2백년을 기도하며 향불을 지폈으리라.
필자는 이전에 한국의 불국사나 암자들을 구경한 적이 있다. 한국 사당의 특점은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울려 있다. 산과 암자들의 호흡이 조화롭고 오붓해서 아늑한 감을 준다. 그러나 구화산의 전당들은 산의 정기를 압도하여 위엄스런 감을 준다. 백세궁이나 육신보전은 산 마루에 웅장하게 지어져 산의 기세를 억눌러 놓은 감을 준다. 필자는 왜서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중국의 불교는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런 것 같다. 한국에서도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원은 웅장하다. 예를 들어 익산 미륵사 유적지가 실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의 사원은 산마루에 지은 것을 보지 못했다.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이에 연구를 해본 적이 없기에 원인을 모른다. 하여간 구화산의 전당은 모두 장엄하게 지어져 산의 기세를 압도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산을 내려와 몇 개의 사원을 더 보고 나서 나는 오후 3시 버스로 귀로에 올랐다. 몇 일 어간에 1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였으니 여행사에서도 기차표를 살 수 없어 부득불 버스를 타고 상해로 간다. 버스에서 바라본 구화산은 장엄하고 수려했다. 천 이백년의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 동란이 있었던가? 841~846년간에는 이염이 도교를 성행하고 불교를 탄압하는데서 구화산의 사원 10여개가 소각당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불교 보호 정책 하에 사원이 40여개로 늘었는데 12개는 조정에서 지은 것이다. 원나라 조정은 라마교를 숭상하였지만 구화산의 사원은 여전히 보전되였다.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승려의 출신으로 불교를 지지하여 구화산의 사원은 100여개로 늘어났고, 그때로부터 산서의 오대산, 사천의 아미산, 절강의 보타산과 함께 중국 4대 불교 성지가 되였다.
청나라 제왕은 라마교를 추앙하지만 한족 지구의 불교에 대하여도 중시하였다. 1853~1863년 구화산 주위에서 청군과 태평군간에 결전이 있었다. 태평군의 반불 행위로 인해 많은 사원들이 파괴되였다. 청나라 말기까지 조정의 자금 조달과 특히는 상인, 신도들의 헌납하에 사원들이 재건되였으며 사원과 암자가 150개에 도달하였고 승려는 무려 3~4천명 이였다. 신해혁명후 5.4운동때 <공가점을 타도하자>란 일부 급진 지식분자의 구호아래 불교도 탄압을 받았지만 구화산은 도시와 떨어진 편벽한 곳이라 큰 손실은 없었다. 국민당의 상층에서도 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하여 그런대로 구화산의 사원은 여전히 150개였다 그 후 일본 침략군의 몇 차례 소탕을 겪으면서 일부는 파괴되였다. 신 중국이 성립된 당시 구화산의 사묘는 90개였으며 승려 200명이 있었다고 한다. 토지개혁을 할 때는 승려들에게 땅도 분배해 주었다. 노동과 수련을 결합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극좌 사조로 인해 사원과 암자, 문물들이 미증유의 훼손을 보았다. 승려들은 핍박에 못 이겨 환속하거나 멀리 떠났으며 그때부터 천년의 향불은 꺼지고 말았다. 개혁개방 이 후 점차 종교신앙에 대한 정책이 낙실되면서 다시 사원의 문이 열리고 향불을 지폈으며 사원들을 수건하고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1.5억 위안(그중 정부의 재정 조달은 98만 위안이고 그 외는 민자와 헌금)의 자금이 투입되였다. 물론 1998년 후로 계속 건설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규모가 형성되였다. 특히 한국정부와 한국 불교계의 자금을 조달한 구체 금액은 모르지만 적지않을 것으로 해설원의 말에서 추측된다. 지금 구화산에는 78개의 사원과 암자가 있으며 400여명의 승려가 있다고 한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귀로에 오르며 운무에 잠겨 비가 내리는 구화산을 우러러 본다. 천 이백년 역사의 수난을 겪은, 또한 그 속에서 멸하지 않고 발양된 구화산 - 불국의 성산은 장엄하고 수려하다. 경제발전의 급물살과 관광업의 발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낙후했던 구화산의 주변에도 천지개벽의 발전상이 안겨 온다. 도처에 굴삭기와 기중기가 작업하고 건축물이 일어선다. 커다란 기차역과 버스터미널도 금방 운영에 투입되였다. 그것은 구화산을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극부상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신라국의 왕자로 중국에 와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김지장 보살의 도장(道場) 구화산은 중국 민중의 마음에 오연히 솟아 있다. 김지장의 이름은 구화산과 함께 영세불멸하리라!
♠「삼국사기」 흥덕왕 3년(서기 828)에 “당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濂)이 차의 종자를 가져옴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근거로 하동이 녹차의 최초 시배지라는 인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일소하고자 합니다 : 진주성 지킴이 염 *,
신라에는 7세기 전반인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차가 있었고, 흥덕왕(826~836) 때에는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했다. 「삼국사기」 흥덕왕 3년(서기 828)에는 “당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濂)이 차의 종자를 가져옴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삼국사기]내용에 의하면 당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濂)이 차의 종자를 가져왔으나 신라에 차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신라에는 7세기 전반인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차가 있었고 ,흥덕왕(826~836) 때에는 이미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고 이었던 중에 김대렴 공이 차 종자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가 있다.
◈.<구화산 화성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문헌에는 ‘지장왕보살 김교각스님은 713년 24세의 나이로 홀연히 당나라로 건너가니 이때가 성덕왕 12년이다. 99세(794년, 정원 10)로 열반하자 제자들이 남대 지장암에 ‘육신보전’을 세우고 육신불을 안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으로 . 김대렴공이 차의 종자를 가져온 때가 흥덕왕 3년(서기 828)이고 김교각 스님이 신라에서 당나라 구화산으로 차 종자를 가져간 것이 서기 713년 이니 100 여년의 차이가 나며 100 여년 동안 김교각 스님이 가져가 재배한 녹차가 중국의 남부 지방에 널리 보급되여 재배되고 있었음을 가정할수 있으며 김대렴공이 서기 828년에 가져온 녹차의 종자는 김교각 스님이 가져가서 보급한 그 녹차를 역수입하였다고 기록에 의거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입증자료: 현제 우리나라에는 사천, 고성지방의 황차,김해지방의 인도에서 허왕비가 가져왔다는 장군차 등등의 대엽종,소엽종 등 여러가지 차종이 자생하고 있으며 김대렴 공이 가져와 최초로 심었다는 하동의 녹차와도 같은 종류의 녹차가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 두루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고성지역의 자생지는 대가면,상리면,영현면,하이면 등에 분포되어 있다,
●.김교각 스님이 가져가 심었다는 중국 구화산의 녹차는 김대렴공이 가져와 시배하였다는 하동의 녹차 종류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 안휘성(구화산)의 녹차 재배 방법은 우리나라 하동의 자생 녹차군과 같은 식의 재배를 하고있어 인상적이였다.
■,,김교각 지장 보살에 대해 상세히 알고 싶으시면 좌측 목록 중 "지킴이 사진방" 사진 중 "중국 안휘성 구화산 김교각 스님"의 사진을 Clic하시면 보다 자세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김교각 지장보살이 심은 차씨에 대한 기록♧
김교각 지장보살은 현존하는 구화산 역사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저술된 <구화산 화성사기>(化城寺記)에 지장스님이 입적한 때는 794년(정원 10), 99세라고 기록되어 이를 기준으로 출생 년대를 산출한 결과, 출생년대는 696년(신라 효소왕 5년)이다. 그러나 988년에 저술된 <송고승전>에는 입적 년도를 803년으로 기록되어 전자의 기록보다 9년 늦게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동국역경원에서 편찬(1961)한 <불교사전>에도 입적 년대를 <송고승전>의 기록대로 80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차(茶)와 관련된 기록 중 ‘김지장이 직접 지었다’는 ‘송동자하산’이란 유명한 차시(茶詩)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
① 절간이 쓸쓸하여 네가 집 생각하더니 (空門寂寬汝思家)
② 절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 (禮別雲房下九華)
③ 대난간의 죽마타기를 즐겨 묻더니 (愛問竹欄騎竹馬)
④ 불문에서 수행하기 게을렀지 (於金地聚金沙)ㆍ(懶于金地聚金沙)
⑤ 돌샘물 길으며 달보기도 이제 그만 (添甁澗底休招月)
⑥ 차 달이며 꽃 희롱하기도 이제는 그만 (烹茗中罷弄花)ㆍ(鉢洗池中罷弄花)
⑦ 잘 가거라 부디 눈물 흘리지 말고 (好去不須頻下淚)
⑧ 노승은 안개와 노늘을 벗하리라 (老僧相伴有煙霞)
위의 시는 청나라 성조의 강희 42년(1703), 황제의 칙명으로 팽정구(彭定求)가 저작한 <전당서>(全唐書)에 수록된 글로, ④행과 ⑥행의 뒷부분과 같이 내용이 다른 문헌도 있다. 위 시의 ④행의 ‘금지’(金地)를 ‘금 같은 불도의 땅’이라 해석하고 나머지 부분을 ‘너를 붙잡지 못하는구나’하고 결론지었으나 필자의 생각은 ‘금지(金地)’는 ‘금지차’를, ‘금사’(金沙)란 유명한 샘물인 ‘금사천’(金沙泉)을 지칭한다고 판단된다.
1669년경 유원장이 지은 <계옹다사>(介翁茶史)‘공경차’(空梗茶)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구화산에는 공경차가 있는데(九華山有空梗茶) 이는 김지장이 심은 바이다(是金地藏所植). 대체로 보건대 구름 안개 중에 기후가 항상 온습하여 이 땅에 심은 바, 맛이 자연 것과 같지 않았다. 구화산은 지주 청양현으로 원명은 구자산이다. 이태백이 아홉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고쳐 구화산으로 하였다. 김지장은 신라의 스님으로 당나라 지덕연간(756-758)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거처하며 이 차를 심었다(渡海居九華乃植此茶). 나이 99세에 함중에 앉아 임종하였는데 3년 뒤에 열어보니 얼굴빛이 살아 있는 듯 했으며 뼈마디가 모두 움직이더라.’ 또 중화민국 67년에 영인본으로 초판 발행된 <구화산지>(九華山誌)에 ‘금지차’(金地茶)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지차는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고 전하는데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가져온 차씨라고 한다(相傳金地藏 携來種). 이지세(李之世)의 시에 ‘벽옥같은 차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채다에서 풍겨지는 차향은 수행자의 공(空)을 깨우쳐 주네. 누가 서역(신라)에서 전해 온 선맛(禪味)이 틀리다고 하나 설산 중에서 차에 찻물을 가득 채우네.’위 글에서 ‘김지장이 가져 온 차씨’라는 ‘휴래종’(携來種)의 기록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즉 구화산 지역에서 나는 차씨가 아니라 김지장의 고향인 신라에서 가져온 차 종자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김지장이 가져 온 차란 뜻으로 ‘금지차’ 또는 ‘김지장차’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차나무의 특징으로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하여 공편차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구화지남>(九華地南)이란 책에도 ‘김지장이 차종자를 휴대하고 와서 구화산에 심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청양현지>에도 ‘금지차란 서역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고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서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신라를 가리킨다. 이외에 <속다경>(續茶經) 등이 있는데 <구화산지>와 <구화산록>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구화기승>에는 ‘구화산에는 선인장차가 나는데 ... 김지장은 전다봉(煎茶峰)에서 좌선하고 장기간 차를 마셨기 때문에 99세까지 살았다. 무하(無瑕)선사는 백세궁의 동굴에서 차를 마시며 경서를 사경하였기에 126세까지 장수하였다. ’고 하였으며 다연(茶宴)에 대하여 ‘음다좌선은 진나라 때부터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다연이 있게 되었다. 지장보살은 승려들을 봉우리 앞에 모아 놓고 샘물을 퍼서 차를 끓임으로써 차를 혼자서 마시지 않고 여러 도우(道友)들과 같이 마시면서 경(經)을 읽었다.’하였다
♤신라차의 종자는 구화산에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으니 1993년 10월, 동국대 불교대학원과 신라문화연구회 주최로 서울과 경주에서 개최된 ‘신라 고승 김교각과 중국 구화산 신앙 강연회’에서 중국 안경(安慶)사범학원 사수전(謝樹田) 교수는 ‘김교각스님이 신라에서 휴대하고 온 신라 차의 종자는 구화산에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으니 이것 또한 중국 인민의 문화교류에 있어 불후의 공을 세웠다’고하였으며 안휘 농업대학 왕지항 교수는 ‘구화차와 벼는 중국으로부터 조선으로 전파되어 개량된 후 다시 김지장에 의해 구화산에 재수입 재배되었다. ... 차나무의 크기는 135cm이고 이파리는 뒤로 말리었고 앞면은 불룩하여 가엔 톱날형이 뚜렷하다. 잎의 모양은 중엽종류의 형태로 토란형의 잎모양으로써 독특한 품격을 갖고 있다. 월신전의 85세 되는 노승온념 스님의 말에 의하면 ‘차나무는 높이가 2-3m였고 의자를 놓고서야 찻잎을 딸 수 있었는데 두 세그루 따면 한 바구니 가득 찼다’고 한다.
이는 승려들이 아끼는 공차(貢茶)가 되었다. 곡우 때, 일아일엽(一芽一葉)을 따서 정성들여 만든 ‘금지 작설차’는 참새의 혀와 같았고 모양은 부처님의 손과 같았으며 싹과 잎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색은 비취처럼 푸르고 흰털이 많았다. 차탕의 색깔은 황록이었고 향기가 청아하고 오래 지속되어 맛이 신선하고 단아하며 잎은 연하고 푸르렀다. 그 품격은 과연 불차(佛茶)의 풍미로 손색이 없었다. 남대공심차는 구화산의 제일 높은 산정에서 생산되는데 이곳을 소천대의 남대암이라 부른다. 당나라 때 김지장은 남대에 거처하고 살았다. 지금도 약 열그루의 차나무가 남아 있는데 높이 160cm이고 나무의 폭은 130cm이며 잎의 길이가 11.5cm이고 넓이는 5.9cm이다. 잎의 앞면은 볼록하고 광택이 나며 잎이 수평에서 위로 경사지게 나 있다. ...
찻잔에 우리면 창이 아래로 향하고 밑으로 가라앉은 모습이 마치 부처님께 참배를 드리는 모습과 같으므로 배불차(拜拂茶)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는 또한 속이 빈 대나무와 같은 특색을 가진 ‘김지불장차’와 똑 같은 형식이다. 김지장이 오래도록 남대에 거처하면서 ‘김지장차를 재배했다’고 김지장차에 대한 발표한 바 있다. 구화산에는 모봉차(毛峰茶), 운무차(雲霧茶) 등의 명차를 생산하는 중국의 주요 차산지의 한 곳인데 이 차의 뿌리는 다름 아닌 김지장이 심은 금지차(金地茶)이다.
모봉차는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하기도 한 특1급 차로 그뿌리는 바로 우리나라(신라)이다. 현재 구화산에는 3천여 평의 크기의 차밭이 1천 2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푸르름과 명성을 더하고 있었다.
♤ 다시 써야 할 우리나라의 차(茶)역사 ♤
우리나라 정사로 꼽히는 <삼국사기>흥덕왕 3년(828)조에 ‘12월에 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조공하니 당 문종은 사신을 인덕전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져 왔으므로 왕은 이를 지리산에 심게하였다. 차는 이미 선덕여왕 때(632-647)부터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 성하였다’ 고 기록, 선덕여왕 때인 600년대에 우리나라에 이미 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김지장 스님은 그의 나이 24세 때인 719년에 우리 차씨를 중국 구화산으로 휴대하고 가서 심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보다 중국 문헌과 중국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으므로 확인된 증거 자료나 기록도 없이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차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식물인가 또는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인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거슬러 올라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매년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 차(茶), 과일 등 여러가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巨登王)이 정한 연중 5일을 변하지 않아...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에 이르는 33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능화가 엮은 <조선불교통사>에 ‘김해의 백월산(白月山)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 허씨(許黃玉)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 전한다’고 기록되었다. < 삼국유사>에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허황옥공주가 가락국(김해)에 도착한 날은 서기 48년(건무24년, 무신) 7월 27일로, 이 날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차씨를 가져 온 날로 차계(茶界)에서는 기억될 만한 날이다. ▶.따라서 중국의 구화산과 김해의 백월산이 차의 시배지이며 중요한 차 유적지라고 감히 단정한다. 2006년 12월 11일[월요일] ★지킴이 염우섭★
위대한 한국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중국 땅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 한 사람을 꼽는다면 바로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일 것입니다. 김교각스님은 중국 안에서 일고 있는 한국열풍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는 김교각스님의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지난 1999년 9월 9일, 99m의 동상 건립 기공식을 갖고 현재 공사를 완공하여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김교각스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1500년 되는 696년에 신라 성덕왕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스물네 살에 출가하여 지장(地藏)이라는 법명을 받은 뒤에 스님은 신라에서 선청(또는 지체라고도 함)이라는 흰 삽살개 한 마리와 오차송이라는 소나무 종자, 황립도라는 볍씨와 금지차라는 신라차를 가지고 중국 구화산으로 건너갔습니다.
구화산에 이르러 초인적인 고행과 뛰어난 법력으로 그곳 사람들을 교화하다가 99세 되는 794년 음력 7월 30일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 내 몸을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어 두었다가 세 해가 지난 뒤 열어 보아라. 만일 그때까지 썩지 않으면 그대로 개금하여라."
신라왕자 지장스님의 육신성도(肉身成道)를 통해 중국사람들은 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받들게 되었고, 이로부터 중국불교에 육신보살의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지장스님이 열반하신 음력 7월 30일에는 중국에서 가장 성대한 종교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중국 당시집(唐詩集)에는 김교각스님의 차시(茶詩) 한 편이 실려 있습니다. 호랑이한테서 구해 준 고아 아이가 절에서 살다 적막함을 못 이기자 시 한 수를 지어 마을로 돌려 보내니, 이 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을 내려가는가
고요한 절 한나절 하도 길 때면 먼산 바라고 옛집 그리더니 함께 머물던 흰구름 떠나 산을 내려가는가 난간에 뛰어올라 죽마 타던 아이야 이곳은 황금땅 부처님 나라, 금모래 모으는 일도 이제 싫으냐 칠병 속 시냇물엔 밝은 달 찾아올 일 없겠고 차 달인 단지에는 향긋한 꽃 필 일 없겠네 부처님 그리는 이는 자주 울 일 없나니 노승은 노을의 벗 노을은 노승의 벗
신라왕자 김지장스님은 한국, 중국, 일본등 세 나라에서 함께 받드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대원사의 김지장 기념관 건립과 김지장 삼존상 봉안식을 기념하여 한·중·일 삼국의 다인들이 모여 헌공다례의식을 올렸습니다.
<한·중 수교 10년, 김지장 성도절 기념 국제 학술대회> 世界一花, 萬生一家신라왕자 김지장 스님의 탄생 1308주년과 열반 1209주년을 맞이하여 지장성지 구화산에서 열리는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을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1500년 역사를 간직한 한국의 대원사에 살고 있습니다. 금년 사월 초파일에 김지장 삼존불을 모신 기념관 -신라대각 김지장전- 낙성식을 갖고 한·중·일 삼국의 다인들이 모여 헌공다례를 올렸습니다.
한·중·일 동양 삼국은 각각 특성 있는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불교문화와 차문화의 전통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켜온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불교인들과 다인들이 공통적으로 존경하고 받드는 역사인물을 꼽는다면 김지장스님이 첫 번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교각은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아들이다. 그는 왕자로서 누려야 할 부귀영화를 버리고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김교각 스님은 열심히 불도를 닦아 신라에서 이름난 스님이 되었지만,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불법을 더 연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학을 결심하고 신라에서 당나라로 건너갔다.
중국 쪽 문헌에는 김교각 스님이 돛단배에 삽살개 한 마리를 태워 당나라로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교각 스님은 차 씨앗, 볍씨를 챙겨 들고, 삽살개 한 마리를 거느린 채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스님은 삽살개를 데리고 수행처를 찾아 중국 땅을 헤매 다녔다. 그러다가 안휘성 구화산에 이르렀다. 이 산은 아흔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솟은 중국의 명산이었다.
김교각 스님은 구화산 정상에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한 사람이 겨우 허리를 펴고 드나들 만한 작은 동굴이었다. 스님은 삽살개와 함께 이 동굴 속에서 향을 피워 놓고 날마다 경을 읽으며 수행을 했다.
어느 날 눈을 감고 참선을 하는데, 독사 한 마리가 나타나 스님의 다리를 물었다. 독이 퍼져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삽살개가 잠시 동굴을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스님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때 아름다운 부인이 나타나 절을 하며 말했다.
“우리 집 아이가 스님을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저 돌 밑에 샘물이 솟아나게 했으니, 그 샘물을 몸에 바르십시오.”
김교각 스님은 부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독사에 물린 다리가 깨끗이 나았다.
하루는 구화산 기슭에 사는 제갈절이란 사람이 산에 올라왔다가 스님을 보았다. 그는 스님이 도를 닦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스님을 위해 절을 지어 주었다. 이 절이 구화산 최초의 절인 ‘화성사’다. 스님은 이 절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옷을 지어 입으며 수행에 힘썼다. 그리고 안휘성 일대에 볍씨를 전해 이곳 사람들에게 벼농사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김교각 스님은 794년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지 말고 독 안에 넣어 봉했다가 3년 뒤에 열어 보아라. 그 때까지 시체가 썩지 않았으면 금칠을 하여라.”
스님은 유언을 남긴 뒤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나이 99세였다.
제자들은 스님의 시신을 독 안에 넣어 봉했다가 3년 뒤에 열어 보았다. 스님의 시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팔다리가 부드러웠고, 시신을 들자 뼈마디에서 쇳소리가 났다. 이런 현상은 지장보살의 화신을 뜻한다고 한다.
제자들은 스님의 시신에 금칠을 하여 불상을 만들었다. 이것을 ‘등신불’이라고 부른다.
신라에서 온 왕자 스님은 그렇게 등신불이 되었다. 이 등신불은 1200년이 넘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사람들에게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안휘성 구화산에는 김교각 스님이 삽살개를 데리고 수행을 했다는 성지와 7층 석탑, 삽살개를 타고 있는 지장보살상 등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