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각(金地藏 , 金乔觉)

2016. 2. 6. 23:16茶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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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이 된 신라 스님, 김교각

[지용택칼럼] 지용택 /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13-10-15 17:00ㅣ 지용택 (hhreview@saeu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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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산 불학원 - 감로사


달마가 동쪽에서 받아들여지기까지
중국 춘추전국시대(B.C.770~B.C.221) 5백여 년간은 주나라 왕실이 힘을 잃어 160여 개의 제후국들이 서로 공방전을 거듭했다. 제후국들이 백성의 어려운 삶을 버려둔 채 서로 힘을 다투어 무력으로 그 세를 확장해 나갔으므로 전쟁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이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기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철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관개사업으로 농업이 크게 발전한 시대였다. 상공업도 발전하여 대도시가 형성되고 청동화폐가 통용되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도 토지를 사유화할 수 있었다.
 
제후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일반 평민들도 능력에 따라 등용하였기 때문에 누구라도 출세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환경을 바탕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사상가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서 중국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한 것이 노자(老子), 공자(孔子), 묵자(墨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 한나라, 삼국시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거치면서 묵자는 퇴색하고 새로운 사조로서 불교(佛敎)가 재래의 사상인 노자, 공자와 더불어 중국의 사상과 풍속사에 자리잡게 되었다.
 
후한(後漢)이 몰락한 이후부터 수()나라 양제(煬帝)가 중국을 재통일(589)할 때까지 장장 360여 년간 중국 대륙은 대단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북방의 이민족과 한족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치열한 권력쟁탈전을 벌이는 동안 수많은 나라가 명멸했고, 백성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었다. 이처럼 격변과 혼란을 겪던 시대, 불교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중국 고유의 전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으로 다뤘다. 또 사후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시각과 구원의 소망을 제공하였고, 인간은 언젠가 이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리라고 약속했다.
 
초기에 많은 중국인들은 불교를 도교(道敎)의 변형으로 보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불경 번역자들이 대승불교의 ()’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도교의 ()’라는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는 등 많은 개념을 도교의 이론과 언어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유교는 불리한 논리를 제공하는 데 반해 불교는 서로 조화로 민족 간의 통일을 시도할 수 있어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도 불교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중국의 불교 수용사
중국 사람들은 서역의 승려인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같은 외국학자들의 불경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인도 유학을 감행했다. 예를 들어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한 법현(法顯, 337?~422?), 서역기(西域記)를 저술한 현장(玄奬, 602?~664),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을 저술한 의정(義淨, 635~713)과 신라에서 유학간 혜초(慧超, 704~787)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했는데 위의 저서들이 인도 사대(四大)여행기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바다에서 바다로, 육지에서 육지로,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길을 택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할 뿐만 아니라 많은 불경을 구해 돌아와 스스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신라 승려 원측(圓測, 613~696)은 외국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유학하지 않고도 서역 언어에 달통하여 현장 스님과 함께 경전을 번역한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서안 근교에 있는 흥교사(興敎寺)에는 지금도 현장과 함께 그의 탑묘가 모셔져 있다.
 
중국 사람들은 불경을 다 번역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달마(達磨),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으로 이어지는 선()불교를 창안하여 인도불교를 중국불교화해서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선불교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중국 명산에 불교의 사대보살의 거처를 마련했다. 산서성 오대산(五台山)에 문수보살(文殊菩薩), 절강성 보타산(普陀山)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사천성 아미산(峨眉山)에 보현보살(普賢菩薩),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에 지장보살(地藏菩薩) 등이 그것인데 이곳에서 보살의 법력과 서원을 빌려 성역화(聖域化)하여 많은 사람의 기도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의 뿌리로 발전했다.
 
보살(菩薩, Bodhisattva)이란 누구인가?
인류가 70억이라고 하니 지구상에는 70억의 보살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보살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구하고自利,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利他으로 정의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전생(前生)에 여러 겁()을 거치면서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부처, 아라한(阿羅漢), 보살이 될 수 있었는데, 보통 사람도 오직 자신과 모든 중생과 함께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워 고된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살의 개념이 확대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은 중생도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다는 대승불교 사유체계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대웅전(大雄殿)에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님本尊佛좌측에 사자를 타고, 청련화(靑蓮花)를 들고 있는 보살이 문수보살이다. 지혜(智慧) 제일이라는 문수보살은 부처님을 대변하고, 모든 중생에게 지혜를 일깨워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승 자장(慈藏, 590 ?658 ?)이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상원사(上院寺)에 문수보살의 신앙처를 열었다.
 
법당 안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우측에 코끼리를 타고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이 보현보살이다. 문수보살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보현보살은 행원(行願)을 상징한다. 보현보살은 크게 서원을 세워 중생을 두루 넓게 구하고, 사람의 생명을 길게 이어 보현연명(普賢延命)이라고도 한다. 불교 역사에서 보살들 가운데에는 힌두교의 영향이 크게 보이는 편이 많은데, 문수와 보현의 경우엔 불교에서 비롯된 독창적인 보살의 사례라는 것이 특색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균여(均如, 923~973) 스님이 향가로서 보현신앙을 넓혔고, 고려승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이 전남 강진 백련사(白蓮寺)에 보현도량을 열었다.
 
관세음보살은 보타락가(補?洛迦, potalaka)에 사시면서 세상 중생의 소리를 듣고 보는 자비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언제나 생명수인 감로수(甘露水)병을 가지고 다닌다. 고난에 빠지거나 소망이 있는 중생이 그 명호를 부르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소리를 듣고 보아 고난에서 구제하고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보살이다. 끝없이 방황하는 서민들이 얼마나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두 손 모아 서원하였을까.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민속화되고, 대중화되어 절마다 관음보살을 모시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관세음보살이 사시는 곳이 다른 나라에 비해 여러 곳이다.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낙산사(落山寺) 홍련암(紅蓮庵), 경남 남해시에 있는 보리암(菩提庵), 인천 강화군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인데 이곳들이 모두 보타락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타락가를 특정 지역의 명칭으로 제한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관음신앙과 인연이 있는 곳을 관음주처(觀音住處) 즉 관세음보살이 사는 곳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화엄경에서 제26선지식인 비슬지라(毘瑟祗羅) 거사가 선재동자에게 바다 위에 산과 바다와 모래가 어우러진 맑고 깨끗한 곳에 관세음보살이 계시다고 가르쳐준다. 이것은 경문에 있는 말이지만 우리나라 관음주처 세 곳은 모두 바다 위에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불세계(無佛世界)의 등불, 지장보살(地藏菩薩)
지장보살은 인도에서 시작된 오래된 신앙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토속신앙과 결합되어 여느 절마다 명부전(冥府殿)을 차리고 그 안에 모셔져 왔다. 시대에 따라 모습이 다르지만 이 근래에는 머리를 삭발하고 푸른 띠를 두른 형상에 석장(錫杖)을 들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시고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없는 혼탁하고 지루한 험한 시간 속에 특히 육도(六道,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도, 천도) 가운데서도 가장 혹심한 고통을 받는 지옥의 중생을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구원하는 것을 서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지장보살의 서원은 바로 철저한 중생제도의 비원(悲願)인 것이다.
 
또 지장보살은 다른 보살들과는 달리 지옥을 주거지로 삼아 무불세계(無佛世界)의 험난한 세상을 사는 중생을 대상으로 교화를 펼치면서 마지막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결코 성불(成佛)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 까닭에 육도 어느 곳이든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 끊임없이 중생을 구제하는 무한한 공덕을 지닌 보살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휘성 지주시(池州市)에 있는 구화산 지장보살 김교각(金喬覺, 695~794) 신라 스님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이나 신승전(神僧傳)의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스님은 신라 왕자라고 하는데, 스님의 고행과 법력에 경탄한 주위의 사람들이 대가람을 지어 화성사(化城寺)라 하고 스님이 주석하도록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스님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일컬어져 신라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와 함께 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가부좌를 한 상태로 음력 730일 세수 99세로 입적하였다. 시신을 관에 안치하였고 3년 후에 탑속에 모시려고 관을 열었을 때 얼굴 모습이 생시와 같았고, 뼈마디에서 금쇄(金鎖)소리가 났다고 한다.
 
경전에 따르면 시신에서 금쇄소리가 나면 바로 보살의 화신이라 했는데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지장보살로 생각하고 김교각 대신 김지장이라 하였다. 육신탑을 세워 공양하게 되었고, 그 후로 구화산이 지장보살의 도량(道場)이 되었다. 문헌의 내용은 대충 이러한데 이곳을 방문해보면 스님의 전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 전당시(全唐詩)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가 실려 있고, 다른 문헌에도 스님의 작품들이 보인다.
 
만리타국에서 보살이 된 김교각 스님
지난 9월 초 안휘성 구화산에 세계 최고 높이의 지장보살상이 제막되었다. 좌대를 제외하고 불상 높이만 99m나 된다.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46m)이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39.6m)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금도금으로 황금 35kg이 사용되었다고 하니 제작비만도 엄청났으리라.
 
중국을 많이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관광사업을 개발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광역화, 성역화, 역사화하는 소리가 대단하다. 중국이 이런 정책을 펼치는 속내가 무엇이든 지장보살이 된 김교각 스님의 문헌과 전설이 살아있는 곳에 99m의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세수 99세에 입적하신 스님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는데, 한국 사람으로서는 정서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를 구제하기 위하여 몸을 낮추다 못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뛰어드는 보살신앙에서 우리는 김교각 스님을 새롭게 재조명할 의무가 있다. 종교를 떠나서 신라 스님이 만리타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기에 지장보살이라고 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과정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어려움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면서도 존경스럽고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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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노천대동상

지장보살노천대동상조감도.jpg

지장보살 노천대동상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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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地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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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地藏,新罗(今朝鲜)僧人,真名金乔觉。据说,金乔觉早年曾经来大唐留学,汉学修养颇深,其诗作被收入《全唐诗》。此间他对佛教产生了浓厚的兴趣,曾自诲说:“世上儒家六经、道家三清法术之内,只有佛门第一义与我心相合。”于是回国后,毅然抛弃王族生活,削发为僧。
中文名
金地藏
出生地
朝鲜
代表作品
《送童子下山》
真    名
金乔觉

人物生平编辑

金乔觉(696-794),系新罗僧人,俗称金地藏,古新罗国(今朝鲜半岛东南部)国王金氏近族。相传其人“项耸奇骨,躯长七尺,而力倍百夫”。“心慈而貌恶,颖悟天然。”24岁时,削发为僧,携白犬“善听”,从新罗国航海来华。初抵江南,卸舟登陆,经南陵等地上九华。相传九华山原为青阳县居士闵让和属地。金乔觉向其乞一袈裟地,不意展衣后竟遍覆九峰。闵让和十分惊异,由惊而喜,先让其子拜师,后自己亦随之皈依。至今九华山寺殿中地藏圣像左右的随侍者,即为闵让和父子。金乔觉来山后,居东崖峰的岩洞里(后人称之为“地藏洞”),岩栖漳汲,过着十分清苦的禅修生活[1] 
唐至德二年(757年)山下长老诸葛节等数人结伴登山,一路但见深山峡谷,荆榛莽莽,寂静无人。到得东崖,见岩洞内唯有释地藏孑然一身, 闭目端坐,旁边放一折足鼎, 鼎中盛有少数白米掺杂观音土煮的剩饭,众长老为有如此苦修之人,而肃然起敬。于是共同筹划兴建禅舍,供养地藏。不到一年时间,一座庙宇建成,地藏有了栖身之地和收留徒众常住寺内的条件。其大弟子、首座僧用瑜,身体力行,斩荆披棘,率众垦荒,凿渠开沟,造水田,种谷物,劳动自给,坚持苦修。建中二年(781年)池州太守张岩,因仰慕地藏,施舍甚厚,并奏请朝廷将“化城旧额移于该寺。郡内官吏豪族,纷纷以师礼皈依地藏,向化城寺捐献大量财帛。金乔觉,声闻遐尔,连新罗国僧众闻说,也相继渡海来华随侍。
唐贞元十年(794年),金乔觉99岁,忽召众徒告别,趺跏圆寂。相传其时“山鸣石陨,扣钏嘶嘎,群鸟哀啼,地出火光”。其肉身置函中经三年,仍“颜色如生,兜罗手软,罗节有声,如撼金锁”。众佛徒根据《大乘大集地藏十轮经》语:菩萨“安忍如大地,静虑可秘藏”。认定他即地藏菩萨示现。建一石塔,将肉身供于石塔中,尊为金地藏,嗣后配以殿宇,称肉身殿。从此九华山名声远播,逐渐形成与五台山文殊、峨眉普贤、普陀观音相并称的地藏菩萨应化道场。

记载编辑

据《青阳县志》载:“金地茶,相传为金地藏西域携来者,今传梗空筒者是。”《九华山志》也载:“金地茶,梗心如筱,相传金地藏携来种。……在神光岭之南,云雾滋润,茶味殊佳。”九华山的煎茶峰,相传为“金地藏携道侣于前汲泉烹茗”之地。金地藏在九华山提倡种茶、饮茶、从佛法,但不忘茶事,是“茶禅一味”的倡导者。这在金地藏作的《送童子下山》诗中,也能得到印证。诗曰:“……空门寂寞尔思家,礼别云房下九华。爱部竹栏骑竹马,惯于金地聚金沙。瓶添涧底休拈月,烹茗瓯中罢弄花。好去不须频下泪,老僧相伴有烟霞。”

九华山肉身菩萨 - 金地藏编辑

[2]  大乘佛教四大菩萨之一。“地藏”系梵文意译,音译为“乞叉底蘖婆”,是印度佛教大乘菩萨之一。佛经说,地藏菩萨受释迦牟尼佛嘱托,在释迦既灭、弥勒未生之前发下大愿,自誓必须尽度六道众生,拯救诸苦,始愿成佛。其大悲大愿最胜最广,犹如大地一样,含藏无量善根种子。《地藏十轮经》谓其 “ 安忍不动,犹如大地;静虑深密,犹如秘藏。”故其尊号为“大愿地藏王菩萨”。中国佛教视安徽九华山是地藏菩萨的应化之地。地藏菩萨的形象,在诸菩萨中与众不同,是现出家相。其塑(画)像,一般是圆顶,结跏趺坐,右手持锡杖,表爱护众生,也表戒修精严;左手持如意宝珠,表满众生的愿。也有的是立像。九华山肉身殿中的地藏菩萨塑像头戴佛冠,身着袈裟,坐在座骑上,像两旁侍立一比丘、一长者像,即金地藏卓锡九华山时受到当地闵公的供养。闵公之子从他出家,法名道明;后闵公亦离俗纲,反礼其子为师。故闵公父子成为地藏的胁侍立像。
参考资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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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诗 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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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소개해 드렸던 고배경대를 지나서 천대에 오르고 천대 뒤에 있는 관음각을 돌아서 아래로 내려가면

신라시대의 왕자셨던 김교각스님께서 중국으로 건너가셔서 구화산에서 이곳 저곳에서 수행을 하셨지만

천대사 뒤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자그마한 동굴 " 지장고동 "에서 득도를 하셨다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동굴 안에 이러한 김교각스님 즉 지장보살의 동상이 만들어 모셔져 있습니다.




천대사 뒤에 자리하고 있는 관음각의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면 김교각스님께서 수행을 하셨다는 " 지장고동 "이 나옵니다.




관음각을 지나서 " 지장고동 "으로 내려가기 전에 있는 비문입니다.

워낙에 한문이 짧고 중국이기에 더욱더 뭔말인지 모르지요 ! ㅎㅎ




정면에 관음각을 처다보고 경사가 급한 이런 계단으로 내려 갑니다.




계단을 내려가면 우선 이런 우물이 나옵니다.

전설에 의하면 김교각스님께서 이 곳에서 수행을 하시는데 도우려고 신선이 우물을 팠다는 얘기를 들은거 같습니다.




계단을 다 내려오면 이렇게 " 지장고동 "이 나옵니다.




저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 이런 동굴에서 수련을 하셨구나 ! 하고 사진 몇장을 찍고서 나오는데




안의 지장보살님의 동상의 눈동자를 보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시 들어가 봅니다.




어두운 동굴이지만 눈동자의 빛이 살아 있다는 얘기에 카메라의 조리개를 최대한 조이고서 준비해 들어 갑니다.




어떻게 이런 동상에 눈빛을 살아나게 집어 넣어서 만들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 가까이 들어가 클로즈 업




더 자세하게 들어가 보니 살아있는 사람과 눈이 맞주친거 같습니다.

그 뒤에 들었는데 동상이지만 아이러니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매번 동상의 표정이 바뀐다고 들었는데 중국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밤에 저희 애들과 사진을 보다가 이런 얘기를 하니

둘째 꼬맹이가 인터넷으로 뒤져보더니 다른분이 올리신 사진은 저희가 보고온 동상의 표정과

완전히 판이하게 다른 표정이였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시면 정말로 매번 표정이 바뀐다는 것을 느끼시게 될거 같습니다.

 

다행히도 저희가 갔을 때는 이렇게 아주 온화한 표정으로 맞이하여 주셔서 너무나도 다행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 지장고동 " 앞에 있는 나무도 특이하게 이렇게 바위를 타고 올라가다가 위에서 잎들이 피어 나 있습니다.

전에 서산에 마애불 앞에서도 비슷한 나무를 본거 같은데 별도의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 집니다.





예전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김교각스님을 자세하게 다루며 만든 자료가 유튜브에서 본 기억이 나

찾아보는데 없어졌기에

다른 곳에서 다운로드를 하실수 있으신 분은 역사스페셜을 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이 자료는 현재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김교각스님에 대한 자료입니다.

좀 길긴 하지만 종교를 떠나서 이런 것에 관심이 계신 분은 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을 해봅니다.

 


blog.daum.net/imsckim/214   풀벌레의 사는 이야기








金地藏与九华山的故事

护眼色:绿 字体:粗体 发布时间:2013-9-4 11:51:11 繁體版 

金地藏与九华山的故事

佛陀住世时,有四大菩萨协助应化人间;他们分别是:大智文殊、大行普贤、大悲观音、大愿地藏。直到佛陀灭度后,他们还是本着那分悲智愿力,不断在人间显迹,救度众生。

在中国有十分著名的四大名山,即五台山、峨嵋山、普陀山、九华山:这四座名山就是四大菩萨在中国显迹、度化的道场。而九华山是地藏菩萨所显迹的地方。

地藏菩萨在九华山显迹,大约是在释迦佛灭度后的一千五百年间,那时在新罗国——就是现在的南韩,王族中有一位年轻人,名字叫金乔觉,他因喜好佛学而出家修行。出家后他想:一定要到中国才能求得佛法。所以,他搭船带着白狗“善听”,渡海到中国安徽省,在沿海遇到一阵大风将船吹至岸边。这位年轻的比丘就弃船、带着白狗,向山的方向前进,不知不觉中来到山岭处,放眼一看,山下尽是一片平原,风景十分优美。他就停留在山中以洞穴为家,而且一停留就度过了七十五年的时间。

他在山中的生活过得非常艰难,因欠缺粮食,仅以野草、山果充饥,甚至在传说中他曾吃土维生,称为“观音士”,这是传奇的记载。不过其生活的刻苦由此可以想见。山洞中又缺水,需要到山崖下五百公尺处才能提到一桶水,一天之内为了取水而必须上上下下,非常的辛苦。

在传奇中还有一篇小故事,有一天早上当金乔觉打坐时,忽然被一条虫咬到,他吓一跳出定后,见到一位身穿黑纱的妇人,在他面前叩头跪拜说:“非常忏悔,我的儿子不懂事,冒犯了圣体。为了表示忏悔和恭敬之心,所以在石崖边化出一条清水,供您取用以表示他的心意。”妇人说完话即消失了,之后果然离洞口不远的山崖出现一股清水,源源不断地流下来:听说无论如何的干旱,泉水仍是不断流出,这也是传奇之一。

金乔觉比丘在九华山修行经过多年,有一群诗人到那里游山玩水,想寻找灵感作诗,忽然间在山洞口看到一口破锅子放在石头上,柴火已熄灭了。看看锅内,只有野菜混杂着观音土,大家又探头往洞内看,原来有一位修行者在那里打坐。大家在洞口静静地等待,一直到中午时分,修行者终于出定,走出洞来。他看起来不太像中国人,据传奇的记载地藏菩萨的相貌很特别,他的身高约七尺高,额头很高很宽,所以那些诗人问他从何处来?比丘即自我介绍,并说他来自新罗国。

那些诗人听了觉得很惭愧,因为他们就住在山下,竟然不知道有一位远道而来的修行者已在山上住了好多年,而让他过着这么刻苦的日子,从此那群诗人就成为他的护法,又去禀告山主——闵公。

闵公是一位虔诚的佛教徒,他知道山上有一位有道高僧时,心里非常欢喜,于是赶紧去拜访。看他住在那么简陋的山洞内,闵公也觉得很不忍心,因此决定和诗人们一起为修行者盖一座简单的精舍。

金乔觉比丘生活安定后,他更加用功修行、研习佛法,护法的这群人也常来请教佛法。尤其是闵公,他非常敬重三宝,每天都要供养一百位僧众;但是,不管如何努力去邀请,总是只有九十九位,一定要专程去邀请金乔觉比丘,才会正好满一百位,长此以往金乔觉比丘经常到闵公家里应供。

闵公对这位高僧非常恭敬,于是让儿子随他出家。有一天,闵公向金乔觉比丘说:“您应该扩大修行的道场,因为前来求法的信众愈来愈多,将来也会有人来此安住修行,是不是要扩建道场呢?”金乔觉比丘说:“只要有足够的地方就可以扩建。”闵公说:“您看,这整座九子山都是我的呀!您需要多大的地方都可以。”

金乔觉比丘说:“我只要有一件袈裟大的范围即可。”闵公说:“那一点点怎么够呢?”金乔觉比丘说:“这件袈裟的影子能盖住的地方,就够用了。”闵公不甚解地答应了。金乔觉比丘就把身上的袈裟脱下来,向空中扬去,一阵乌云遮住了阳光,整座山被乌云遮盖犹如被袈裟遮蔽一般。闵公既惊讶又欢喜地把整座山奉献给金乔觉比丘:这群诗人即思惟着:到底怎么为这座山命名呢?应称为“九子山”还是“九方山”?若以看莲花的心看这座山,它就像九瓣层叠的莲花,于是大家提议以“九华山”定名。

从那时起,护法的人愈来愈多,道场也很顺利地扩建完成,这位金乔觉大师在当时度人无数,从韩国渡海来跟随他出家修行的人也很多,而且一年年增加,后来僧众太多,发生缺粮的情况,而“僧多粥少”这句成语就由该地传衍出来。金乔觉比丘想把僧众分一些出去,但是大家好乐佛法,虽然生活困顿,还是为法忘躯要跟随金乔觉法师,不愿离开九华山,有所谓“枯槁众生”用来形容在那儿好乐求法的人。

为什么后来大家会称他为地藏菩萨的化身呢?因为,白天他为弟子们说法,一到黄昏时他就入定了:据说,到了夜晚九华山的周围常常会发出地狱刑具的声音。所以,很多人传说金乔觉法师夜晚时分,会到幽冥界去度众生,所以称他为“化迹的地藏菩萨”,也有人尊称他为“金地藏”。

他自二十四岁上九华山,直到九十九岁的七月三十日圆寂:在九华山度过了七十五年的岁月,可见地藏菩萨和中国的众生特别有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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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地藏与九华山的故事 - 佛弟子文库    www.fodizi.net/fojiaog...    百度快照 - 评价






중국 구화산 김교각스님 엿보기| ★불교 일반★

자연 |  2015.07.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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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각은

서기696년 신라33대 성덕왕의 아들이었습니다.(맏아들 金守忠 )

그때가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당나라를 토사구팽하여 쫓아낸지 20년이

되었을 즈음인데 이때가 신라문화의 최대 황금기였습니다.

그당시 문화가 꽃피우고 불교가 한창 왕성할 때였는데

 

김교각은 왕의 아들이었음에도 권력이나 부와 명예 여자 등에는 별무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719년에 불교에 입문하게 되는데요

 

김교각은 그 당시 키가 칠척장신이었다고 합니다.

  

719년에

산 넘고 바다 건너 중국..당나라로 배를 타고 갔는데 그때 개를 한마리

데리고 갔다는데 개이름이 선청이었다.

 

죽을 때까지 김교각을 모셔 이 삽살개도 나중에 구화산 수호신으로 동상이 세워집니다.

당나라 동부해안에 도착한 김교각은 걸어서 당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지금의 안훼이성이라는 곳에 도착해서 하늘을 올려보니 구름속에 걸린 산 하나를 발견합니다

 

거기가 바로 구화산(九華山)이라고 합니다.

 해발1300m 정도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전북의 덕유산 정도의 높이입니다.

 중국사람들이 구자산이라고 부르다가 그 유명한 이태백이 구화산이라고 불렀다고

자기들도 그렇게 불렀다니 구화산이라고 한답니다.

 

김교각이 구화산을 보자 한눈에 반해 열반에 든듯한 희열을 느꼈고

이곳이야 말로 내가 불교를 펼칠곳이다 라는 것을 알고 산 동쪽에 암굴을 파고 수도에 들어갔습니다.

 

끼니만 간신히 때우는 동굴에서 삶이 이어졌고 산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유일하게  산밖으로 나가는것이 불경을 구하러 가는 거였을 정도로 정진하였다합니다.

 

그러다 757년 그가 불교정진을 한지 30년쯤 되던 해에

그때 산기슭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이름이 제갈절이라고

 

제갈공명과 친척쯤 되는지...이분이 큰 부자였는데 굴속에서 수도하는 그에게

감명을 받아 김교각초대해서 마을 아래에서 자주 설법회를 열었고

설법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한층 우러르게 됐고

이 사람들이 돈을 모아 구화산에 절을 짓게 됩니다

 

승유라는 제자가 생겼는데 이사람도 나중에 당나라에서 유명한 스님이 되는데

 

그의 설법을 듣기위해 인산인해를 이루게 됩니다.

그곳에 부임한 태수 장암이 불경과 불력과 덕행이 높은 김교각에게 감명받아 스승으로 모셨고

왕에게 아룄고 왕은 절을 확장하게 해주고 이름을 화성사라고 지어서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왕이 밀어주고 태수가 땡겨주니 모든 사람들이 그 절에 드나들었고 많은 시주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했지만 그는 자신이 불교에 입문할 때의

초심을 잃지않고 항상 검소하고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 사랑했다고 합니다

 

또 그가 고향으로 떠나는 자신의

동자에게 준 시는 그의 심성을 잘 보여주는데

 

불문이 쓸쓸하여 집 생각 하더니

절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

 

난간에 기대어 죽마 타던 어린시절 그리워하던 너

금같은 불도의 땅도 너를 붙잡지 못하는구나

 

첨병곡의 달 구경도 마지막이며

자명구의 꽃놀이도 끝이 났구나

 

서운해 눈물 흘리지 말고 잘 가거라

노승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리라'

 

그 당시

 

이태백은 시선으로 김교각은 살아있는 부처로 당나라에서 쌍벽을 이뤘다고 하니 얼마나

유명한 분이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김교각이 99세 되던 때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이젠 떠날 때가 됐다고 하고

가부좌를 틀고 열반했는데 그가 열반에 드는 순간 99봉 구화산 골짜기가 무너지고

절에 종을 쳐도 소리가 않나고 짐승들과 새들이 슬피 울었고 땅밑에서

불길이 솟았다고 하는데 기이한 일이지요

 

 

중국에는 불교명산이 4개 있는데 보살을 각각 하나씩 모시는데

산시성의 오대산 저장성에 보타산 스촨성의 아미산 구화산

오대산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

보타산에는 대자대비한 관음보살

아미산은 덕행을 주관하는 보현보살

구화산에는 김교각지장보살로 불린다고 함.

중국의 4대 불교성지에서 모시는 4대보살중에 유일하게 실존했던 승려는

바로 김교각 뿐이라고


 

cafe.daum.net/hyunjisa/Rkse/891  현지사를 사랑하는 모임






九华山地藏菩萨道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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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华山作为地藏菩萨道场而闻名于世。地藏菩萨俗姓金,原为新罗国(今朝鲜中部)王族,唐时渡海来到中国,幽栖九华山中,孤坐石室,以白土和小米为食,后置地构宇,形成一大伽蓝。九华山位于安徽省青阳县西南二十公里,是中国著名的佛教圣地之一,与山西五台 、四川峨眉、 浙江普陀并称中国佛教四大名山。九华山崛起于长江之东,方圆一百多公里内,群峰罗列,九座主峰高耸入云,如莲华削成,最高峰十五峰海拔一千三百四十二米。
中文名
九华山地藏菩萨道场
外文名
jiuhuashandizangpusadaochang
行政区划
安徽省
建造年代
唐至德初年756年
佛教意义
地藏菩萨圆寂之处

景点历史编辑

九华山[1]  唐以前称九子山,自诗人李白作“昔在九江上,遥望九华峰,天河挂绿水,秀出九芙蓉”诗后,更名为九华山。山势峻奇高险,苍翠峥嵘,气候夏凉冬寒,变幻万千,素有“灵山仙境”、“奇秀甲江南”之美称。
九华山作为地藏菩萨道场而闻名于世。地藏菩萨俗姓金,原为新罗国(今朝鲜中部)王族,唐时渡海来到中国,幽栖九华山中,孤坐石室,以白土和小米为食,后置地构宇,形成一大伽蓝(即化城寺)。后世相传金地藏是地藏菩萨示现,九华山遂以地藏菩萨道场著称。九华山中最古老的化 寺建于唐至德初年(756)。至唐末,陆续修建了九子寺、妙峰寺、圆寂寺、净倍寺、崇圣寺、慈仁寺等十三座寺庙, 高僧继金地藏后,有胜瑜、道明、智英、道济、超永、卓庵等。晚唐时禅宗传入九华,道济禅师即门徒之一。宋代,九华山佛教得到发展,寺院已达五十余座。元代,由于统治者崇奉喇嘛教,九华山佛教无大发展,基本保持宋时状况,明清两 代,九华山佛教进入隆盛时期。朝廷多次遣使颁赏,修庙建寺,大兴供养,使得 全山香火兴旺,胜甲天下。至清末,全山寺庙达一百五十余座。自民国至今,历经战火,九华山寺院几度兴衰。直到现在,九华山共存寺庙七十座。
九华山每年七月三十日(月小二十日)为地藏菩萨诞辰日,相传是九华山僧地藏圆寂、成道日。历年九华山僧众都要在这一天举行隆重的庆祝活动,称“地藏法会”。节日期间,僧众要诵《地藏菩萨本愿经》。守金地藏肉身塔。法会一般历时7天(七月三十日至八月初六日),圆满之日设斋供众,广结善缘。法会期间,民间有“百子会”等信众集体朝山进香。

形成编辑

九华山地藏菩萨道场的形成,不同于其他的三大道场直接以三大菩萨作为供奉的对象,而是通过传说的新罗王子金地藏出家修行的应化事迹来形成的。从学术角度而言,金地藏应该是一个有着不平凡经历的真实历史人物,但在佛教传播过程中已经将其神化为地藏菩萨的显圣示化。自金地藏以后,九华山逐渐成为地藏道场,在历代信仰民众的拥戴与朝廷王臣的支持下,九华道场日益兴盛,与其他三大菩萨道场形成了平分局面的态势。

史料考辨编辑

地藏的来历

地藏,梵文Ksitigarbhb(乞叉底婆蘖)的意译,是印度佛教菩萨名。《大乘大集地藏十轮经》说他是他方世界的菩萨,“安忍如大地,静虑可秘藏”,故名“地藏”。《地藏本愿功德经》解释说,地藏菩萨是释迦既灭以后、弥勒未生以前众生赖以救苦的大愿菩萨。他自誓必度尽所谓六道(地狱、饿鬼、畜牲、阿修罗、人间、天上)众生,始愿成佛。他现身人、天、地狱之中,以救苦难。按照佛子对“地藏大愿”的概括,就是“渡尽众生,方证菩提,地狱未空,誓不成佛”这几句话(黎元洪为九华山肉身宝殿题匾)。
佛教传入中国后,寺院中便塑有地藏菩萨像,如三国吴大帝 (222——258)时,当涂县建的化城寺内,即有地藏菩萨像供奉。李白于唐宝应元年(762),陪族叔当涂县令李阳冰游化城寺后,曾作过《地藏菩萨像赞》。中国佛寺中地藏菩萨的形象,一般是结跏趺坐,右手持锡杖,表示爱护众生,也表戒修精严;左手持如意宝珠,表满众生的愿。也有的是立像。

金地藏的来历

据《神僧传》记载,佛灭度1500年后,地藏菩萨降诞于新罗王家,姓金,号乔觉。祝发出家后,航海来华,卓锡九华山,“遂证道于斯”。据唐人费冠卿《九华山化城寺记》载:唐开元末(约741),有僧地藏,系新罗王子金氏近属,落发,涉海,舍舟登岸,辗转至江南青阳九华山,“岩栖涧汲”,苦心修持。至德初(约757),青阳人诸葛节等为其苦修的德行所感动,遂买下原为僧檀号住寺的旧基(旧额为“化城”)重建新寺,“敢冒死请,大师从之”。建中初(约781)池州太守张岩奏请朝廷移旧额置新寺,曰“化城寺”。其后,僧徒日众,连新罗国僧人闻说,也渡海来九华相从。贞元十年(794),金乔觉99岁,在夏季的一天,忽召众告别。示寂时“山鸣石陨”,“寺中扣钟,无声堕地”,“堂椽三坏”。金乔觉的肉身“趺坐函中”,3年后,僧徒开缸,见颜状如活时,“舁动骨节,如撼金锁”。按佛经上说的“菩萨钩锁,百骸鸣矣”!于是,僧徒们便说他是地藏菩萨的化身,并建造肉身墓塔供奉。传说墓地岭头常发光如火,故名其岭为“神光岭”。从此,九华山就成为地藏菩萨的“应化”之地。
为区别于原地藏,人们称金乔觉为“金地藏”。九华山寺院地藏塑像两旁侍立着一比丘,一长者像。这是传说金乔觉卓锡九华时,受到当地闵公让和的礼遇,闵公的儿子从师出家,法名道明。金乔觉圆寂后,应化为地藏菩萨,闵公父子成为地藏的胁侍,被后人塑像立于地藏像的两旁。

金乔觉的祖籍

唐元和八年(813)费冠卿在《九华山化城寺记》载:“开元末,……时有僧地藏,则新罗王子金氏近属”;宋《高僧传》载:“释地藏,姓金氏,新罗国王之支属也”。(《唐池州九华山化城寺地藏传》)这两条是记载金乔觉为新罗国人的最早文字根据。
但是,清代有人却造出一个释地藏是暹罗人的说法。光绪二十三年(1887)立的《九华山化城寺佛印显应记》碑载:“相传菩萨系暹罗储王,弃本国,渡重洋,遍游瀛寰,爱九华深秀,卓锡是山。”民国三年(1914),郦培之所撰《重修九华山石梯记》上则说:“昔暹罗太子成道于九华之巅,是为幽冥教主地藏王菩萨。”就在这个时期,《重修化城寺碑》称金地藏来华“渡南海”;地藏塔匾称“暹罗大觉”;重修的《安徽通志》也称地藏为“暹罗王子”。将新罗改为暹罗,显然是讹传和附会。
新罗系一古国,相传在公元前已立国。约4世纪中叶,已成为朝鲜半岛的强国之一,继而与百济、高丽争雄,7世纪时灭百济、高丽,统一了朝鲜。至9世纪衰落,10世纪初为高丽所取代。唐代是中朝关系最密切的时期之一,佛教界往来频繁。据《朝鲜佛教史》载,自6世纪前半期新罗正式信奉佛教以来,一直到10世纪初的380年左右的时间内,入唐求法的新罗高僧共有64人(其中包括入印求法者10人)。除上述留学僧外,还有一些新罗僧渡海到唐朝长期定居,在中国名山古寺中成为常住僧。新罗僧金氏,法名乔觉,就是在这种历史背景下渡海来华的。
参考资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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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daum.net/phil228/16507174   김용필의 동포세계와 ..




중국동포 리문호 시인의 "불국의 성산 - 구화산 여행기"(下) 신라의 왕자 등신불 김교각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 동포세계신문 기사보기

동포세계 | 2015.06.11. 18:18


중국동포 리금호 시인의 불국의 성산 - 구화산 여행기(下)

 

   신라국의 왕자로 중국에 와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김지장 보살의 도장(道場) 구화산은 중국 민중의 마음에 오연히 솟아 있다. 김지장의 이름은  구화산과 함께 영세불멸하리라!  

 

                                                                                                              글/리금호 시인(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본문은 중국 심양 리문호 시인이 '신라의 왕자 출신 승려' '등신불'로 유명한 김교각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쓴 글입니다

 

 

 

 

 

 

   구화산에서는 김교각을 구화산 차도(茶道)의 시조(始祖)라 한다. 역사적 기록의 시를 보면 구화산의 차는 김지장께서 동도의 신라국에서 가져 왔다, 혹은 서역에서 가져 왔다 한다. 학자들의 견해는 한국에는 아직 원생차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신라때 중국에서 가져간 것이라 한다. 그리고 김지장이 서역에 간 적은 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가져오고 간에 김지장이 구화산 차나무를 재배한 것은 공인하는 사실이며 구화산 차도의 시조라는 것도 공인하는 사실이다.
 비록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둘 수 있었으나 승도가 많아져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승려들은 종종 굶었으며 관음토를 캐여다 허기를 달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아들이 이렇게 고생한다는 소식을 접한 모친은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왔다고 한다. 전설에 불과하지 사실인지는 어떠한 문헌에도 고증할수 없다. 어머니는 3주야를 울어 눈이 멀어졌다. 김교각은 효심이 지극하여 우물의 물을 떠다가 3년을 닦아 주어 드디어 눈이 밝아졌다. 훗날 사람들은 그 우물의 이름을 <명안천(明眼泉)>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우물 위에 탑을 세워 '낭낭탑(娘娘塔)'이라 명명하였다. 이 탑은 아직 있다. 



 

    781년 당지의 태수 장암(張岩)은 몹씨 김교각을 숭상하였다. 장암은 당나라 조정에 상서를 올려 정황을 반영하였다. 조정에서는 김교각의 수행에 감동되어 화성사 자리에 사원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그 사원은 어느 병란에 소각되여 존재하지 않고 지금의 화성사는 명조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김제장의 부친 성덕왕이 재위한 후 성정왕후는 아들을 데려 오라하며 신라의 대신 외삼촌 소우(昭佑)와 소보(昭普)를 구화산으로 보내였다. 김교각은 외삼촌을 만나 무척 반가웠을 것이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 또한 얼마나 간절했으랴. 그러나 이미 굳게 다진 철석같은 마음을 외삼촌으로서는 다잡을 수 없었다. 결국 조카의 결심에 감복한 외삼촌도 구화산에 남아 수행하기로 하였다. 아마 김교각을 남겨 놓고 간다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신라국에 김교각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갈 면목이 없어 가지 않은 지도 모른다. 비록 외삼촌은 구화산에 남아 수행한다고 하지만 김교각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오계(五戒)>를 위반하며 경상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기에 하는 수 없이 하산시켜 속세로 돌아가게 하였다.
 두 외삼촌은 지금의 구화산 이성촌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후 당지 사람들은 이 두 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성전(二聖殿)>을 지어 기념한다. 이성전 전당에는 관복을 입은 문관과 무사복을 입은 무관 성상이 있는데 바로 김교각의 외삼촌이다. 매년 음력 7월 30일은 김지장의 성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장법회>를 성대히 진행한다. 이튼날 8월 1일에는 이성전에서 <이성회>를 진행한다. 제사상에는 술과 고기도 놓였다. 제사가 끝나면 모인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한다. 이는 대체로 한국의 제사와 비슷한 것으로 구화산에서는 특수한 종교 풍속이라 한다. 이때면 산상의 일부 중들도 슬그머니 찾아와 행사에 참가한다는 핑계를 대고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고 간다고 한다.


 


 

   794년 99세 되는 해 김교각은 중도들을 불러 고별을 고하며 앉은 자세로 무병 원적(圓寂)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돌연 산이 진동하고 새들이 울고 화광이 치솟았다 한다. 김지장의 육신을 석관에 넣어 모셨는데 3년 후에 열어보니 하나도 부식됨이 없이 얼굴이 태연하였으며 손가락 관절에서는 금고리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지장왕이 응화(應化)된 육신이라 인정되어 삼층석탑을 지어 지금의 영광령(靈光嶺)에 모셔져 있다. 영광령이란 산 이름도 김지장 왕을 모실때 산에서 영광이 비껴 나왔다하여 지은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구화산에서는 육신을 신봉하는 습관이 있다. 소위 말하는 미이라는 기후가 건조한 사막이나 내륙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구화산에서는 남방의 습윤한 지구로서 불가사의한 일이다. 구화산에서는 이미 14구의(그 중 하나는 녀승) 육신이 발견되였는데 의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육신 사리라 한다. 극 소수의 스님만이 이런 현상을 가진다. 스님이 죽으면  커다란 옹이에 모셔 놓는데 3년이 되어 부식하지 않으면 유약을 칠 하였다가 다시 3년이 되어 금박을 씌운다. 그러면 몇 천년을 보관할 수 있다. 백세궁(百世宮)은 청나라때 126살에 세상 뜬 명정스님의 육신사리가 있는 곳이다. 약 1.2m 높이의  물독은 명정스님의 육신을 모셨던 독이다. 그 독은 이상하게 한국의 뚜껑이 있는 옹이와 비슷하다. 이런 양식의 독은 신라의 기술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학자들이 연구할 바이다.
 화성사와 백세궁을 구경하고 나니 벌써 오후 5시 반이다. 나는 하산하여 호텔에서 주숙하고 이튿 날인 4일 7시 반에 또 다시 버스를 타고 구화산에 올랐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하지만 향불과 홍촉을 태우는 사람들은 사원마다 붐빈다. 


 

 

 

   오늘 내가 중점으로 볼 것은 김지장의 육신사리가 보존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영광령으로 오르려면 500계단의 층대를 올라야 한다. 층대는 세 개의 전당으로 나뉘였는데 첫 전당은 여래보살을 모신 전당, 두 번째는 대원 지장보살을 모신 전당, 정상에는 육신보전이다. 이 층대의 첫 입구에는 약 30m 높은 대문이 있다. 대문에는 행원무진(行願無盡) 이란 금박 글이 가로 새겨져 있으며 기둥 마다에는 금박의 글들이 수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 <지옥미공, 서불성불(地獄未空, 誓不成佛)>란 금박글이 있다. 김지장은 생전에 <아불입지옥, 수입지옥(我不入地獄, 誰入地獄)>라 하였으며, <지옥미공, 서불지옥>한다고 호언을 하였다. 즉 지옥에서 모든 중생을 구원하기 전에는 결코 보살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는 종신 분투하였다.


    첫 전당을 보고 나는 다시 층대를 오른다, 두번째 전당으로 오르는 층대는 장랑이기에 우산이 필요치 않았다. 오르고 오르면 웅장하게 세워진 <지장선사(地藏禪寺)>이다. 안에는 김지장의 성상과 양쪽에는 민량공과 도명법사가 시위하여 있다.
 <지장선사>를 지나 계속 오르면 마지막으로 99개(김지장의 수명을 상징)의 층대가 60도 각으로 가파르게 나 있다. 해설원이 말하기를 가운데 연꽃을 밟고 오르면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요, 왼쪽의 돈을 밟고 오르면 재운을 기원하는 것이요, 오른쪽의 무엇을 밟고 오르면 관(官)운을 기원하는 것이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올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헐떡이며 단숨에 가운데의 연꽃, 평안을 밟고 올랐다. 숨이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것일까?
 <육신보전>은 2층의 단청색 웅장한 대궐이다. 1층 정문 위에는 <동남제일산(東南第一山)>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2층에는 <호국월선보탑(護國月身寶塔)>란 편액이 걸려있다.
 797년 최초의 건축은 김지장의 육신사리를 모신 3층의 석탑이였다. 송나라 때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탑전(塔殿)>을 지었는데 바로 지금의 건축이다. 그후 청나라 때는 석탑에 7층 17m 의 목탑을 건축하여 씌웠다. 목탑의 내벽에는 적금(赤金)으로 쓴 <지장본원경>이 적혀있다. 석탑속에는 지금도 김지장의 육신사리가 보존되어 있다. 탑 앞에 앉아 있는 도금의 김지장육신 성상은 모조일 뿐이다. 
 산의 정상이라 하지만 <육신보전>앞 마당은 광장과 같이 넓었다. 약 8m 높이의 청동탑이 4개 세워지고 양쪽에는 3층 4각형의 커다란 루각(樓閣)이 날듯이 허공에 추녀를 치켜들고 있다. 촉대(燭臺)에서는 수백개의 홍촉이 타고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청동탑과 향로들이 장관을 이룬다. 수많은 사람들이 향불을 붙여들고 동서남북으로 기도를 올린다. 그러고는 전당에 들어가 김지장 보살왕에게 절을 하며 무엇을 소원한다. 대비대원(大悲大願)의 김지장보살에게 중국의 민중은 이렇게 1천2백년을 기도하며 향불을 지폈으리라.



   필자는 이전에 한국의 불국사나 암자들을 구경한 적이 있다. 한국 사당의 특점은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울려 있다. 산과 암자들의 호흡이 조화롭고 오붓해서 아늑한 감을 준다. 그러나 구화산의 전당들은 산의 정기를 압도하여 위엄스런 감을 준다. 백세궁이나 육신보전은 산 마루에 웅장하게 지어져 산의 기세를 억눌러 놓은 감을 준다. 필자는 왜서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중국의 불교는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런 것 같다.
 한국에서도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원은 웅장하다. 예를 들어 익산 미륵사 유적지가 실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의 사원은 산마루에 지은 것을 보지 못했다.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이에 연구를 해본 적이 없기에 원인을 모른다. 하여간 구화산의 전당은 모두 장엄하게 지어져 산의 기세를 압도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산을 내려와 몇 개의 사원을 더 보고 나서 나는 오후 3시 버스로 귀로에 올랐다. 몇 일 어간에 1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였으니 여행사에서도 기차표를 살 수 없어 부득불 버스를 타고 상해로 간다. 버스에서 바라본 구화산은 장엄하고 수려했다.
 천 이백년의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 동란이 있었던가? 841~846년간에는 이염이 도교를 성행하고 불교를 탄압하는데서 구화산의 사원 10여개가 소각당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불교 보호 정책 하에 사원이 40여개로 늘었는데 12개는 조정에서 지은 것이다. 원나라 조정은 라마교를 숭상하였지만 구화산의 사원은 여전히 보전되였다.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승려의 출신으로 불교를 지지하여 구화산의 사원은 100여개로 늘어났고, 그때로부터 산서의 오대산, 사천의 아미산, 절강의 보타산과 함께 중국 4대 불교 성지가 되였다.


    청나라 제왕은 라마교를 추앙하지만 한족 지구의 불교에 대하여도 중시하였다. 1853~1863년 구화산 주위에서 청군과 태평군간에 결전이 있었다. 태평군의 반불 행위로 인해 많은 사원들이 파괴되였다. 청나라 말기까지 조정의 자금 조달과 특히는 상인, 신도들의 헌납하에 사원들이 재건되였으며 사원과 암자가 150개에 도달하였고 승려는 무려 3~4천명 이였다. 신해혁명후  5.4운동때 <공가점을 타도하자>란 일부 급진 지식분자의 구호아래 불교도 탄압을 받았지만 구화산은 도시와 떨어진 편벽한 곳이라 큰 손실은 없었다. 국민당의 상층에서도 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하여 그런대로 구화산의 사원은 여전히 150개였다 그 후 일본 침략군의 몇 차례 소탕을 겪으면서 일부는 파괴되였다.
  신 중국이 성립된 당시 구화산의 사묘는 90개였으며 승려 200명이 있었다고 한다. 토지개혁을 할 때는 승려들에게 땅도 분배해 주었다. 노동과 수련을 결합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극좌 사조로 인해 사원과 암자, 문물들이 미증유의 훼손을 보았다. 승려들은 핍박에 못 이겨 환속하거나 멀리 떠났으며 그때부터 천년의 향불은 꺼지고 말았다.
 개혁개방 이 후 점차 종교신앙에 대한 정책이 낙실되면서 다시 사원의 문이 열리고 향불을 지폈으며 사원들을 수건하고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1.5억 위안(그중 정부의 재정 조달은 98만 위안이고 그 외는  민자와 헌금)의 자금이  투입되였다. 물론 1998년 후로 계속 건설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규모가 형성되였다. 특히 한국정부와  한국 불교계의 자금을 조달한 구체 금액은 모르지만 적지않을 것으로 해설원의 말에서 추측된다. 지금 구화산에는 78개의 사원과 암자가 있으며 400여명의 승려가 있다고 한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귀로에 오르며 운무에 잠겨 비가 내리는 구화산을 우러러 본다. 천 이백년 역사의 수난을 겪은, 또한 그 속에서 멸하지 않고 발양된 구화산 - 불국의 성산은 장엄하고 수려하다. 경제발전의 급물살과 관광업의 발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낙후했던 구화산의 주변에도 천지개벽의 발전상이 안겨 온다. 도처에 굴삭기와 기중기가 작업하고 건축물이 일어선다. 커다란 기차역과 버스터미널도 금방 운영에 투입되였다. 그것은 구화산을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극부상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신라국의 왕자로 중국에 와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김지장 보살의 도장(道場) 구화산은 중국 민중의 마음에 오연히 솟아 있다. 김지장의 이름은  구화산과 함께 영세불멸하리라!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38호 2015년 6월 5일 발행 동포세계신문 제338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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亲眼目睹九华山地藏王菩萨真身示现

(2013-08-14 10:21:09)

 

模拟图

 

岳母亲眼目睹九华山地藏王菩萨真身示现
 作者:一路有你 QQ:909315
 

    在整理这篇文章的时候,心情还是十分的激动,虽然不是自己亲眼见到地藏王菩萨示现,但从岳母及其同修的言语中真切的感受到他们心中的那种喜悦激动之情。

 

    地点:这次千年难逢的菩萨示现地点就在九华山的双溪寺。

    时间:2013年九华山双溪寺水陆法会圆满结束最后一天(即2013年8月4日晚)

    示现时间:8月4日晚 20点左右-21:06 整整示现了1个小时,不可思议!

 

    本篇日志如实记录,绝无半句虚假。后面还有见证人集体签名照片。

 

    下面先介绍下双溪寺——

 

    双溪寺位于安徽省青阳县朱备镇境内,在东侧30里处,故称之为“九华后山”。双溪寺背山面水,环境清幽,风景秀丽。寺旁岩石下有“洁泉”,其泉水清澈照人,细流涓涓。双溪水横流寺前,滔滔汨汨注入青通大河。时而可闻捣衣砧杵之声,大有“断续寒砧断续风”的诗境。寺内广种花草,芳香袭人,寺外茶园成片,果木成林。历代高僧云集双溪寺,虚云和尚、月霞和尚曾在后山办过华严学校,故后山也称“华严道场”。
 

 

    双溪寺著名僧人大兴法师,1894年生,1925年在九华山百岁宫出家,礼常法和尚剃度。1858年居于双溪寺。大兴法师精于禅定,平日常为附近群众治病疗伤,分文不取。1984年圆寂后,在当地民众的强烈要求下,保留其遗体,装缸建塔并立纪念碑一座。五年后拆塔开缸,见大兴和尚遗身未腐,堪称奇迹。该寺遂呈报九华山佛教协会,将之装金供奉,四方信众前来朝拜者络绎不绝。 

 

 

    以下是双溪寺主持当场让一位师父写下的文章(附见证人签名)

 

 


    深圳珠海众居士双溪寺僧众及村民亲睹圣境


   “地藏王菩萨来了!” 2013年8月4日晚,普圣法师和深圳珠海几位居士正在九华后山双溪寺大兴和尚肉身殿前广场纳凉品茶,突然,深圳居士顿安和珠海居士顿莼同时惊呼。随即大伙奔走相告,众人仰望叩首,焚香点灯跪念,“南無地藏王菩萨”的圣号响彻夜空。

 


    当晚八时许,地藏王菩萨金足踏莲花,右手持锡仗,左手托白色摩尼宝珠于胸,法身高大,立于半空,面容犹如举世瞩目的99米铜地藏圣像。现真身十分钟后,空中时而偶降零星雨点,是甘露,是法雨,众说不一,然而,激动是共同的。如同“千江有水千江月”,地藏王菩萨的圣像在天王殿屋顶、双溪寺广场、大兴和尚肉身殿前等处都有观见。九时零六分,不到眨眼功夫,如同刹那灯灭,地藏王菩萨突隐,柔和的佛光消退,夜幕笼罩。

 

当晚在场的师父和居士们合影。晚上手机拍的效果不太清晰

 

      地藏王菩萨现身之时,正值双溪寺水陆法会圆满结束。遗憾的是,众多手机都没能摄下当晚的圣境,或许是天空太暗,佛光太亮了吧!但见证居士合了影,留下了联系方式。
     二0一三年八月五日


 

当场师父记录下的文字

 


    为了更详细的知道当时的情景,笔者专门仔细的询问了当时在场的见证人之一,也就是我岳母。下面的对话是我详细询问岳母整个过程的对话,让大家感受一下。
 

    一路师兄:当时的时间是在什么时候

   

    岳母:在8月4日法会圆满结束的最后一天晚上8点左右
 

    一路师兄:当时是谁先看到地藏菩萨示现的?

 

    岳母:具体谁先看到的不太清楚,突然有人很激动的大喊,地藏菩萨来了。大家才抬头往天上看的,那天是阴天,天上很多乌云。
 

    一路师兄:你看到的是什么情形?

 

    岳母:当时天上看到了三尊菩萨,身边两位菩萨好像是护法,看的轮廓比较不清楚,但是中间的地藏王菩萨非常的清晰,手持锡仗,一看就知道是地藏菩萨。大家都跪下来焚香诵念南无大愿地藏菩萨。

 

    一路师兄:看的到地藏菩萨的面部表情吗?

 

    岳母:看不到,就好比一个人背对着灯光,我们看到的只是轮廓,看不清面部
 

    一路师兄:是你自己一个人看到的还是大家都看到的?

 

    岳母:那天晚上在双溪寺后山。我们一行大概几十个人,全部都看到了,附近的村民也看到了。绝对是菩萨真实示现。
 

    一路师兄:那其他人怎么没人用手机或相机拍下呢?(岳母的手机是老式的,拍不了)

 

    岳母:多人拿起手机拍了,但是都拍不到,很可惜。我也不清楚怎么回事。

 

    一路师兄:接下来您还看到哪些?地藏王菩萨离你们多远?是不是很高大?

 

    岳母:地藏王菩萨离我们很近。很高大。感觉有3层楼那么高的样子。还看到远处白云一朵朵飘过来,化现成莲花状消失在地藏王菩萨脚下的莲花座下面。那么黑的晚上,本来就根本看不到白云的。地藏王身上放射出大量的光芒,眼前全部一片白光,后来才知道这是佛经里经常说到的无量寿光(经典里描述的真实不虚啊)。

 

    一路师兄:太殊胜,太不可思议了。以前只有听人说,没想到这次离的这么近。是自己的家人亲眼看到的,让我对佛法更是信心倍增。

 

    一路师兄:最后地藏菩萨是怎么消失的?

 

    岳母:时间持续了一个小时左右,所有在场的人都看到了。期间还不时的下了几次雨。主持大师说这是天降甘露水。最后地藏菩萨一下子就看不见了。一切恢复平静

 

    一路师兄:您再详细说下怎么一下就不见了?

 

    岳母:就像是我们看电视,换频道一样,刷一下就不见了,不是像云一样慢慢消散的。是一下就看不到了。这个场景现在一辈子都会印在我的脑海里了。

 

    以上是我和岳母的真实对话记录。因为我会一些电脑图像制作,为了让大家更具体的感受到地藏菩萨示现的情景。便按照她的描述,制作出了一张菩萨示现时的场景,核对完。这张图跟她看到的8-9分相像。

 

    就是这样的,地藏王菩萨十分清晰,旁边两位菩萨比较没那么清晰。
 

    因为相机拍摄不出来,上图是我用电脑模拟的场景。岳母看后觉得十分相似。以后有时间,再制作模拟的动画,地藏菩萨放无量光的动态图。以供养善信。

 

    结束语:说到这些,很多人会有疑问,这是真的吗?我没亲眼看到,还不是很相信。但是很多的事情,我们没看到或者是不相信,不代表就是不存在的。佛度有缘人,也是需要有缘,才能看到。就像你现在看这篇文章一样。

 

    以上句句属实,如有兴趣的,可以到深圳这边,当面咨询当事人,

 

 

    在场30几位居士们签名见证了地藏菩萨的真身示现

 

九华山地藏菩萨

 

    最后请多多转载,让更多人能看到这篇文章,增强学佛的信心。南无大愿地藏王菩萨,南无大愿地藏王菩萨,南无大愿地藏王菩萨!

时间:2013年8月9日编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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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转载]九华山金地藏和华严禅洞

(2012-11-23 10: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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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类: 他山之石



                   九华山下立起了金地藏菩萨全身立像
         


                   秦阳汉月   摄于   秋深之九华山


                              幽幽小径通华严




      静静的行进在通往华严禪洞的海拔800米的山麓上,时间急促,我们没去那些后修建的堂皇雄伟的山下大殿,而直奔金地藏面壁九华山后山的石洞“华严禪洞”而来。远处可见到熙熙攘攘人流乘索道上山顶去了。

    孤寂的山间小径上,看不到人影,非常萧瑟寂静。原来很多人都不知道山中有这样一个金地藏面壁后半生的石洞。很多人都被山下修建的大殿寺庙给截流了,或者就从山下坐缆车直达九华山顶游览去了。唯一留下孤零零的华严洞,寂静的隐没山崖之中。

    我不知道游人之中到底有百分之几的人,知道或了解有这么一个,金地藏曾经面壁数十载的石崖洞。总之走了一路到达和进到华严洞的只有我们,而没见到任何其他的香客,不知道10·1大假时的华严洞是如何光景。

    不过也好,金地藏菩萨当初来这里修行,不就是喜欢清修吗?他不希望别人来打搅他,菩萨选的地方就是好,无缘无份者是不会来到这里的。我们能在这样清幽的环境下拜地藏菩萨,真是三生有幸,也是与地藏菩萨有缘。

    我十分喜欢这种不经雕琢的山间野岭的原始情调,这才符合金地藏选择来九华山上面壁的初衷。我没有去山顶和山下的大殿,我认为,华严洞凝聚了天地和金地藏的朴实精神,是其精髓所在,没到过华严禪洞就等于没到过九华山道场。

     九华山道场于其他三大菩萨道场的最大不同,就是金乔觉,他是中国四大佛教道场中唯一一个以真身应化菩萨转世,而享受千年香火的道场。

 


     金乔觉·法号地藏 修行面壁数十载的石崖洞--九华山·华严禅洞

    原来八米进深的石洞,有个完全对外敞开的洞口,现在被一个从外搭建的有门的小木廊盖住了,所以光线进不来了。玻璃神龛中的为金地藏像,而右侧为,后来捐出全部家产带儿子一同出家,成为金地藏大弟子的九华山大地主的闵公员外。

            下图为石洞外侧石崖壁,是块完整的巨石。

 
                          地狱不空·永不成佛

   有些人吃斋念佛,是为了能后世能有好的轮回,有些是想放下屠刀立地成佛,有些是寄希望于成佛而得到永生。但金地藏面壁数十载,不是为自己修行如何成佛,而是时刻想着那些已经在受苦受难,被冤受屈的,被社会抛入底层的人士,他修行的境界是“地狱不空·永不成佛”。

   我认为,古朴无华的华严洞凝聚了、体现了和向人们暗示了,天地和金地藏的朴实精神,是其精髓所在,没到过华严禪洞就等于没到过九华山道场。



                            金地藏肉身金菩萨像


                  【原创】

 

       曾为新罗金太子     转身中华空门僧 

        不做俗世王庭主     甘为

       黄精孤泉面壁坐    莲花九朵浮缘尘

       隐去重山居陋室    留的洞前草木深

 

  金地藏(公元696—794年) ——金乔觉,法号地藏,生于新罗国(今朝鲜半岛东南部)王族。唐高宗永徽四年24岁时,因不堪宫廷王族内斗,避免因自己会使其母遭到的进一步迫害,金乔觉离开新罗离家出走,来华后到内地出家潜心向佛不问尘事,终于成为高僧。

    成为高僧后的金乔觉,离开寺庙,前往长安研修佛学多年,引起世人的尊重和瞩目(包括半岛新罗等国),并在经文翻译作出很大的成绩,并使其身世渐露为外人所知。

    但已坚心向佛,不愿返回尘世的名利场中,而立志救人于水火地狱的金乔觉,则选择避开喧哗闹市的俗尘,隐姓埋名离开了长安,避开新罗国使臣和其家人望其归国为国王的邀请,来到当时人迹罕至九华山的崇山峻岭之中,在石崖洞中(进深8米)面壁修行数十载。渴饮山泉露水,饿食崖旁拽下晾干后的黄精藤。

    这期间不断有上山的樵夫,采药人在避雨雪风寒时,发现了在洞中端坐面壁金乔觉大和尚,后一传十,十传百传开来。而前来九华山石崖洞中探访的民众,都纷纷看到在丛山野岭石崖端坐面壁,几十年如一日的大和尚金乔觉,于是被四方民众磕拜,尊为地藏菩萨转世来到九华的应身。

    所以当金乔觉在洞中面壁的数十年间,山外四面八方的民众口口相传,“九华山中有地藏菩萨转世”,于是民众初一十五,不断不远从方圆千里之外,进九华山中山崖石洞,诚信磕拜洞中面壁数十年修行的金乔觉和尚,如拜地藏菩萨。由此,九华山区从一个人烟稀少的群山野岭的地方,渐渐成为了长江两岸和江淮一带民众纷纷来朝的佛教名山。

    其中一例:相传唐至德初年,乡绅诸葛节等登高赏秋。至东崖,“山深无人,居唯一僧,闭目石室。其旁折足鼎中,唯白土少米烹而食之”。群老被地藏和尚的苦行精神所感动,纷纷出钱出力,买下檀号和尚的旧地,修建寺院,恳请地藏和尚入居。

    后得当地大圆外闵公出地为其也为越来越多的四面八方来朝拜金乔觉的民众建立起寺庙,并尊为地藏菩萨的大道场,从此完成了,先由金乔觉的洞中修行,而使四方民众心目中认可的地藏菩萨道场,到变为世间朝野都公认的地藏菩萨的道场的“功德圆满”的大转身。

    所以在中国的四大菩萨的道场:

    金五台--文殊菩萨,银峨眉--普贤菩萨,

    铜普陀--观音菩萨,铁九华--地藏菩萨,之中

    唯一只有九华山的地藏菩萨道场,是因为当世真人的修行而先被四方百姓认可并尊崇了几十年后建成为一个菩萨道场,而不是先由释家或朝廷认定才建起来的。 

  地藏和尚住进化城寺以后,率领弟子开渠引水,垦荒种地。寺院周围,尽成稻田。唐建中期间,“有水田数十亩,种黄粒稻,田之上植茶,异于他处,亭后有五钗松,结实香美,皆自新罗移植。”尽管地藏和尚率众农禅并重,但皈者如云,仍难解决僧众衣食之缺。于是又率众“挖土得土壤,甘滑如面,众赖以济”。“其众请法以资神,不以食而养命”,过着“夏则食兼土,冬则衣伴火”的艰苦生活。

  地藏和尚苦行清修,道德感人。消息最终传到新罗国,使原来多次前往长安寻找金乔觉不果的新罗国的使臣和金乔觉的舅舅和母亲及亲人们,知道了金乔觉隐名埋姓修行的地点。

   “本国闻之,相与渡海,其徒实众”。相传新罗使臣昭佑、昭普(传说是地藏的两位舅舅),再次前往(不过不是去长安了)不远万里来到九华劝甥回国。

    金地藏对他们动之以情,晓之以理,示之以佛法,两人终被地藏的苦行和道德所感化,遂留山不去,在九华山脚下筑室为庵,帮助地藏建设道场,弘法利生。两人去逝后,徒众塑二臣像供奉,改庵名为二圣殿。今二圣殿仍在。

    地藏两位舅舅寻甥来到九华山后不回,地藏的母亲不顾年迈,思子心切也渡海寻来九华山。当母子相见后,金母悲喜交加,连哭三昼夜,眼睛哭瞎了,地藏和尚是个大孝子,他每天亲自提取化城寺前的山泉,为母亲洗眼,终于使母亲眼睛复明,后人为了纪念他的母亲,彰示地藏的孝心,便在井边建造一座石塔。称井为“明眼泉”,塔为“娘娘塔”,今塔基尚存。

  唐贞元十年(794),金地藏在人生旅途上已度过99个春秋。作为一期应化的地藏菩萨,他开道场,度有情,功德圆满。此年闰七月三十日,他召众徒告别,天悲地泣,百鸟哀鸣,灵异异常。

    开元十六年圆寂,时年九十九岁。

    金地藏圆寂后,徒众将他的肉身跌坐石函中,三年后开缸,见颜色如生,撼其骨节有金锁般的响声。佛经上说“菩萨钩锁、百骸鸣矣!”徒众更加坚定的认定了金乔觉是地藏菩萨应世。而且金乔觉的法号为地藏,长相与佛经所说的地藏相似,行持与古地藏一脉相承。因为他俗姓金,便尊他为金地藏,遂建塔供奉肉身。此塔即今肉身宝殿

  金地藏在四大佛教名山中,以真人真事开辟道场而独树一帜。由此开始,千余年来九华山肉身菩萨不断出现。

 
         下图: 金乔觉面壁时食用的观音土和黄精藤



  金乔觉在大唐的研修,汉学修养颇深,其诗作被收入《全唐诗》。

 

            金地藏·乔觉 诗二首

 

              《酬惠米》

 

  弃却金銮纳布衣   修身浮海到华西

  原身自是西王子   慕道相逢吴用之   

    未敢叩门求他语   昨叨送米续晨炊   

    而今飧食黄金饭   腹饱忘思前日饥

 

           《送童子下山》

 

  空门寂寞汝思家   礼别云房下九华

  爱向竹栏骑竹马   懒于金地聚金沙   

    添瓶涧底休招月   烹茗瓯中罢弄花   

    好去不须频下泪   老僧相伴有烟霞

 

 
                                     诸葛建寺图
                          娘塔基遗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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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구화산의 신라 왕족 김교각 스님과 茶 | 알립니다2006-12-11  | 조회수 1387
염우섭


   ♠「삼국사기」 흥덕왕 3년(서기 828)에 “당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濂)이 차의 종자를 가져옴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근거로 하동이 녹차의 최초 시배지라는 인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일소하고자 합니다 : 진주성 지킴이 염 *,


   신라에는 7세기 전반인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차가 있었고, 흥덕왕(826~836) 때에는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했다. 「삼국사기」 흥덕왕 3년(서기 828)에는 “당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濂)이 차의 종자를 가져옴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삼국사기]내용에 의하면 당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濂)이 차의 종자를 가져왔으나 신라에 차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신라에는 7세기 전반인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차가 있었고 ,흥덕왕(826~836) 때에는 이미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고 이었던 중에 김대렴 공이 차 종자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가 있다. 


    ◈.<구화산 화성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문헌에는 ‘지장왕보살 김교각스님은 713년 24세의 나이로 홀연히 당나라로 건너가니 이때가 성덕왕 12년이다. 99세(794년, 정원 10)로 열반하자 제자들이 남대 지장암에 ‘육신보전’을 세우고 육신불을 안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으로 . 김대렴공이 차의 종자를 가져온 때가 흥덕왕 3년(서기 828)이고 김교각 스님이 신라에서 당나라 구화산으로 차 종자를 가져간 것이 서기 713년 이니 100 여년의 차이가 나며 100 여년 동안 김교각 스님이 가져가 재배한 녹차가 중국의 남부 지방에 널리 보급되여 재배되고 있었음을 가정할수 있으며 김대렴공이 서기 828년에 가져온 녹차의 종자는 김교각 스님이 가져가서 보급한 그 녹차를 역수입하였다고 기록에 의거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입증자료: 현제 우리나라에는 사천, 고성지방의 황차,김해지방의 인도에서 허왕비가 가져왔다는 장군차 등등의 대엽종,소엽종 등 여러가지 차종이 자생하고 있으며 김대렴 공이 가져와 최초로 심었다는 하동의 녹차와도 같은 종류의 녹차가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 두루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고성지역의 자생지는 대가면,상리면,영현면,하이면 등에 분포되어 있다,


   ●.김교각 스님이 가져가 심었다는 중국 구화산의 녹차는 김대렴공이 가져와 시배하였다는 하동의 녹차 종류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 안휘성(구화산)의 녹차 재배 방법은 우리나라 하동의 자생 녹차군과 같은 식의 재배를 하고있어 인상적이였다.


   ■,,김교각 지장 보살에 대해 상세히 알고 싶으시면 좌측 목록 중 "지킴이 사진방" 사진 중 "중국 안휘성 구화산 김교각 스님"의 사진을 Clic하시면 보다 자세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김교각 지장보살이 심은 차씨에 대한 기록♧

   김교각 지장보살은 현존하는 구화산 역사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저술된 <구화산 화성사기>(化城寺記)에 지장스님이 입적한 때는 794년(정원 10), 99세라고 기록되어 이를 기준으로 출생 년대를 산출한 결과, 출생년대는 696년(신라 효소왕 5년)이다. 그러나 988년에 저술된 <송고승전>에는 입적 년도를 803년으로 기록되어 전자의 기록보다 9년 늦게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동국역경원에서 편찬(1961)한 <불교사전>에도 입적 년대를 <송고승전>의 기록대로 80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차(茶)와 관련된 기록 중 ‘김지장이 직접 지었다’는 ‘송동자하산’이란 유명한 차시(茶詩)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 


 ① 절간이 쓸쓸하여 네가 집 생각하더니 (空門寂寬汝思家) 

 ② 절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 (禮別雲房下九華) 

 ③ 대난간의 죽마타기를 즐겨 묻더니 (愛問竹欄騎竹馬) 

 ④ 불문에서 수행하기 게을렀지 (於金地聚金沙)ㆍ(懶于金地聚金沙) 


 ⑤ 돌샘물 길으며 달보기도 이제 그만 (添甁澗底休招月) 

 ⑥ 차 달이며 꽃 희롱하기도 이제는 그만 (烹茗中罷弄花)ㆍ(鉢洗池中罷弄花) 

 ⑦ 잘 가거라 부디 눈물 흘리지 말고 (好去不須頻下淚) 

 ⑧ 노승은 안개와 노늘을 벗하리라 (老僧相伴有煙霞) 


  위의 시는 청나라 성조의 강희 42년(1703), 황제의 칙명으로 팽정구(彭定求)가 저작한 <전당서>(全唐書)에 수록된 글로, ④행과 ⑥행의 뒷부분과 같이 내용이 다른 문헌도 있다. 위 시의 ④행의 ‘금지’(金地)를 ‘금 같은 불도의 땅’이라 해석하고 나머지 부분을 ‘너를 붙잡지 못하는구나’하고 결론지었으나 필자의 생각은 ‘금지(金地)’는 ‘금지차’를, ‘금사’(金沙)란 유명한 샘물인 ‘금사천’(金沙泉)을 지칭한다고 판단된다. 


 1669년경 유원장이 지은 <계옹다사>(介翁茶史) ‘공경차’(空梗茶)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구화산에는 공경차가 있는데(九華山有空梗茶) 이는 김지장이 심은 바이다(是金地藏所植). 대체로 보건대 구름 안개 중에 기후가 항상 온습하여 이 땅에 심은 바, 맛이 자연 것과 같지 않았다. 구화산은 지주 청양현으로 원명은 구자산이다. 이태백이 아홉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고쳐 구화산으로 하였다. 김지장은 신라의 스님으로 당나라 지덕연간(756-758)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거처하며 이 차를 심었다(渡海居九華乃植此茶). 나이 99세에 함중에 앉아 임종하였는데 3년 뒤에 열어보니 얼굴빛이 살아 있는 듯 했으며 뼈마디가 모두 움직이더라.’ 또 중화민국 67년에 영인본으로 초판 발행된 <구화산지>(九華山誌)에 ‘금지차’(金地茶)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지차는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고 전하는데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가져온 차씨라고 한다(相傳金地藏 携來種). 이지세(李之世)의 시에 ‘벽옥같은 차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채다에서 풍겨지는 차향은 수행자의 공(空)을 깨우쳐 주네. 누가 서역(신라)에서 전해 온 선맛(禪味)이 틀리다고 하나 설산 중에서 차에 찻물을 가득 채우네.’위 글에서 ‘김지장이 가져 온 차씨’라는 ‘휴래종’(携來種)의 기록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즉 구화산 지역에서 나는 차씨가 아니라 김지장의 고향인 신라에서 가져온 차 종자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김지장이 가져 온 차란 뜻으로 ‘금지차’ 또는 ‘김지장차’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차나무의 특징으로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하여 공편차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구화지남>(九華地南)이란 책에도 ‘김지장이 차종자를 휴대하고 와서 구화산에 심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청양현지>에도 ‘금지차란 서역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서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신라를 가리킨다. 이외에 <속다경>(續茶經) 등이 있는데 <구화산지>와 <구화산록>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구화기승>에는 ‘구화산에는 선인장차가 나는데 ... 김지장은 전다봉(煎茶峰)에서 좌선하고 장기간 차를 마셨기 때문에 99세까지 살았다. 무하(無瑕)선사는 백세궁의 동굴에서 차를 마시며 경서를 사경하였기에 126세까지 장수하였다. ’고 하였으며 다연(茶宴)에 대하여 ‘음다좌선은 진나라 때부터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다연이 있게 되었다. 지장보살은 승려들을 봉우리 앞에 모아 놓고 샘물을 퍼서 차를 끓임으로써 차를 혼자서 마시지 않고 여러 도우(道友)들과 같이 마시면서 경(經)을 읽었다.’하였다 


    ♤신라차의 종자는 구화산에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으니 1993년 10월, 동국대 불교대학원과 신라문화연구회 주최로 서울과 경주에서 개최된 ‘신라 고승 김교각과 중국 구화산 신앙 강연회’에서 중국 안경(安慶)사범학원 사수전(謝樹田) 교수‘김교각스님이 신라에서 휴대하고 온 신라 차의 종자는 구화산에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으니 이것 또한 중국 인민의 문화교류에 있어 불후의 공을 세웠다’ 하였으며 안휘 농업대학 왕지항 교수는 ‘구화차와 벼는 중국으로부터 조선으로 전파되어 개량된 후 다시 김지장에 의해 구화산에 재수입 재배되었다. ... 차나무의 크기는 135cm이고 이파리는 뒤로 말리었고 앞면은 불룩하여 가엔 톱날형이 뚜렷하다. 잎의 모양은 중엽종류의 형태로 토란형의 잎모양으로써 독특한 품격을 갖고 있다. 월신전의 85세 되는 노승온념 스님의 말에 의하면 ‘차나무는 높이가 2-3m였고 의자를 놓고서야 찻잎을 딸 수 있었는데 두 세그루 따면 한 바구니 가득 찼다’고 한다. 


    이는 승려들이 아끼는 공차(貢茶)가 되었다. 곡우 때, 일아일엽(一芽一葉)을 따서 정성들여 만든 ‘금지 작설차’는 참새의 혀와 같았고 모양은 부처님의 손과 같았으며 싹과 잎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색은 비취처럼 푸르고 흰털이 많았다. 차탕의 색깔은 황록이었고 향기가 청아하고 오래 지속되어 맛이 신선하고 단아하며 잎은 연하고 푸르렀다. 그 품격은 과연 불차(佛茶)의 풍미로 손색이 없었다. 남대공심차는 구화산의 제일 높은 산정에서 생산되는데 이곳을 소천대의 남대암이라 부른다. 당나라 때 김지장은 남대에 거처하고 살았다. 지금도 약 열그루의 차나무가 남아 있는데 높이 160cm이고 나무의 폭은 130cm이며 잎의 길이가 11.5cm이고 넓이는 5.9cm이다. 잎의 앞면은 볼록하고 광택이 나며 잎이 수평에서 위로 경사지게 나 있다. ...


   찻잔에 우리면 창이 아래로 향하고 밑으로 가라앉은 모습이 마치 부처님께 참배를 드리는 모습과 같으므로 배불차(拜拂茶)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는 또한 속이 빈 대나무와 같은 특색을 가진 ‘김지불장차’와 똑 같은 형식이다. 김지장이 오래도록 남대에 거처하면서 ‘김지장차를 재배했다’고 김지장차에 대한 발표한 바 있다. 구화산에는 모봉차(毛峰茶), 운무차(雲霧茶) 등의 명차를 생산하는 중국의 주요 차산지의 한 곳인데 이 차의 뿌리는 다름 아닌 김지장이 심은 금지차(金地茶)이다. 

    모봉차는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하기도 한 특1급 차로 그뿌리는 바로 우리나라(신라)이다. 현재 구화산에는 3천여 평의 크기의 차밭이 1천 2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푸르름과 명성을 더하고 있었다. 


 ♤ 다시 써야 할 우리나라의 차(茶)역사 ♤


   우리나라 정사로 꼽히는 <삼국사기> 흥덕왕 3년(828)조‘12월에 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조공하니 당 문종은 사신을 인덕전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져 왔으므로 왕은 이를 지리산에 심게하였다. 차는 이미 선덕여왕 때(632-647)부터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 성하였다’ 고 기록, 선덕여왕 때인 600년대에 우리나라에 이미 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김지장 스님은 그의 나이 24세 때인 719년에 우리 차씨를 중국 구화산으로 휴대하고 가서 심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보다 중국 문헌과 중국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으므로 확인된 증거 자료나 기록도 없이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차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식물인가 또는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인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거슬러 올라 <삼국유사>’가락국기’ ‘매년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 차(茶), 과일 등 여러가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巨登王)이 정한 연중 5일을 변하지 않아...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에 이르는 33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능화가 엮은 <조선불교통사>‘김해의 백월산(白月山)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 허씨(許黃玉)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 전한다’고 기록되었다. < 삼국유사>에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허황옥 공주가 가락국(김해)에 도착한 날은 서기 48년(건무24년, 무신) 7월 27로, 이 날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차씨를 가져 온 날로 차계(茶界)에서는 기억될 만한 날이다. ▶.따라서 중국의 구화산과 김해의 백월산이 차의 시배지이며 중요한 차 유적지라고 감히 단정한다. 2006년 12월 11일[월요일] ★지킴이 염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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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来解读《送童子下山》

2014-03-01 14: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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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来解读《送童子下山》


九华山·大慈藏寺

住持  释 门 智


九华山 王瑜 画


九华山是地藏王菩萨的道场,它的由来,是根据南韩僧人(新罗国的王子)金乔觉于唐开元七年(公元719年),到中国九华山修行一生,所发生的故事而演化成的。

据说,金乔觉早年曾来大唐留学,汉学修养颇深,此间他对佛教产生了浓厚的兴趣,自诲:‘世上儒家六经、道家三清,法术之内,只有佛门,第一义经,与我心合’。回国以后,毅然抛弃,王权族贵,削发为僧。其24岁时,只带一犬,名‘谛听’,西渡来华。初抵大唐,于青岛渔港,弃舟登陆,历经艰辛,几经磨难,辗转江南,卓锡九华,芙蓉峰下,度化有情,弘法毕生,于99(公元794圆寂

金乔觉一生的故事很多,仅从《送童子下山》的一首诗中,足以看出金乔觉的修行功夫及超凡境界。

 

送 童 子 下 山

(唐)金乔觉

空门寂寞尔回家

拜别云房下九华

愛向竹栏骑竹马

懒于金地聚金沙

瓶添涧底休拈月

钵洗池中罢弄花

相去何须频下泪

老僧相伴有烟霞

     

这里的童子,是金乔觉于晚年时,收一年少弟子。几年的朝夕相处,师徒之间,颇具感情。一日,其母来山相迫,逼童子回家与表妹完婚。童子无奈而欲下山,临行之前,拜别恩师,频频下泪,依依不舍老僧相送,分手之时,触景生情,赋诗一首······

《送童子下山》诗中前两句空门寂寞尔回家,拜别云房下九华说的就是这个意思。这里的‘空门’泛指佛家,‘云房’即和尚的禅房亦称丈室

弟子回去干吗?是奉父母之命与表妹完婚。完婚即坠入红尘,还俗过日子与孩童时竹竿当马骑、过家家玩儿戏无二。故而诗人才愛向竹栏骑竹马’的无奈感慨; 既然回去,岂有再来深山修行的可能,故又有‘懒于金地聚金沙’的悲情流露。诗中‘竹栏’,意即篱笆,农家之义,‘金地’即寺庙修行的场所。诗中愛向竹栏骑竹马懒于金地聚金沙两句,犹如仙韵,妙不可言不仅很美,意义也很深。其中不仅完全露出诗人惋惜以及说不出的感慨。更能看出,出家人修行路上之艰辛与难,修行之不易只有诗人理解,只有诗人明白,世人哪里晓得啊如此修行,一切前功尽弃矣诗人为此而遗憾,为此而呼喊这是诗的上半部。

下半部的‘瓶添涧底休拈月,钵洗池中罢弄花两句,说的是师父想起往昔弟子朝夕相处之时的情景,从此再也见不到弟子每天到涧下为佛堂换供水、洗净瓶时,戏耍水中月亮的顽皮相了;再也见不到弟子每天在泉池中替师父洗钵时,撩起水花玩的童真样儿了。唉!一切不能复制······此处的‘休’与‘罢’两个动词,用得恰到好处,如画龙点睛,颇具人情味看后倍觉亲切,耐人思考也是在告诉世人,出家人并非都像世人所认为的那样,游手好闲不劳而食,更不是世俗偏见那样无所事事糊涂春秋之辈。其实,真正的出家人就如金乔觉一样,即精进修持又严格律仪,一日不做,一日不食,食存五观,农禅并重的操守已成道风。板响云堂赴供,闻钟上殿讽经,出坡布萨,临斋供佛是出家人丝毫不敢懈怠,更不可放逸的事情。

结尾两句,‘相去何须频下泪,老僧相伴有烟霞’,更是诗中的灵魂。神来之笔,犹如天乐,亦如宫舞,动静相间,阴阳和合,有血有肉,有情有义。 唉······弟子啊,你去吧,尊父母之命去与青梅竹马的表妹完婚,是天经地义,宿世之因缘去吧!不要惦记师父,不要依依不舍,不要哭泣不要悲伤······

徒儿记住,你去以后,师父并非孤单,师父并不寂寞弟子虽然下山了,可是,与师父朝夕相伴的,还有无尽飘渺的云雾和落日时巍峨神秘的晚霞老僧足以!

通篇《送童子下山》脍炙人口,犹如一部优美的电视连续剧, 场面波澜细腻,情感绘声绘色,咋读扣人心弦,细品回味无穷,道义真如贯穿始末,禅门风韵尽在其中。

《送童子下山》也在告诉世人,出家人并非如世人之偏见那样:冷酷无情,不谙世事。‘我法妙难思,唯佛乃能知’中大乘教义的入世精神,世人岂能理解与知晓。

金乔觉不愧为是大愿地藏王菩萨的化身,更是佛门四众永远学习的楷模。

顶礼大愿地藏王菩萨!

二〇一四年三月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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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


   우주의주인공 2015.07.11 17:23



   위대한 한국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중국 땅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 한 사람을 꼽는다면 바로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일 것입니다.
김교각스님은 중국 안에서 일고 있는 한국열풍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는 김교각스님의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지난 1999년 9월 9일, 99m의 동상 건립 기공식을 갖고 현재 공사를 완공하여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김교각스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1500년 되는 696년에 신라 성덕왕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스물네 살에 출가하여 지장(地藏)이라는 법명을 받은 뒤에 스님은 신라에서 선청(또는 지체라고도 함)이라는 흰 삽살개 한 마리와 오차송이라는 소나무 종자, 황립도라는 볍씨와 금지차라는 신라차를 가지고 중국 구화산으로 건너갔습니다.

 
구화산에 이르러 초인적인 고행과 뛰어난 법력으로 그곳 사람들을 교화하다가 99세 되는 794년 음력 7월 30일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 내 몸을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어 두었다가 세 해가 지난 뒤 열어 보아라.
 만일 그때까지 썩지 않으면 그대로 개금하여라."
신라왕자 지장스님의 육신성도(肉身成道)를 통해 중국사람들은 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받들게 되었고, 이로부터 중국불교에 육신보살의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지장스님이 열반하신 음력 7월 30일에는 중국에서 가장 성대한 종교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중국 당시집(唐詩集)에는 김교각스님의 차시(茶詩) 한 편이 실려 있습니다. 호랑이한테서 구해 준 고아 아이가 절에서 살다 적막함을 못 이기자 시 한 수를 지어 마을로 돌려 보내니, 이 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을 내려가는가

고요한 절 한나절 하도 길 때면 먼산 바라고 옛집 그리더니
함께 머물던 흰구름 떠나 산을 내려가는가
난간에 뛰어올라 죽마 타던 아이야
이곳은 황금땅 부처님 나라, 금모래 모으는 일도 이제 싫으냐
칠병 속 시냇물엔 밝은 달 찾아올 일 없겠고
차 달인 단지에는 향긋한 꽃 필 일 없겠네
부처님 그리는 이는 자주 울 일 없나니
노승은 노을의 벗 노을은 노승의 벗



신라왕자 김지장스님은 한국, 중국, 일본등 세 나라에서 함께 받드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대원사의 김지장 기념관 건립과 김지장 삼존상 봉안식을 기념하여 한·중·일 삼국의 다인들이 모여 헌공다례의식을
올렸습니다.


 送童子下山 (송동자하산)

送童子下山 (송동자하산)
空門寂寞汝思家   禮別雲房下九華 (공문적막여사가   예별운방하구화)
愛向竹欄騎竹馬   懶於金地聚金沙 (애향죽난기죽마   나어금지취금사)
漆甁澗底休招月   烹茗遼中罷弄花 (칠병간저휴초월   팽명구중파농화)
好玄不須頻下淚   老僧相伴有煙霞 (호현불수빈하루   노승상반유연하)



<한·중 수교 10년, 김지장 성도절 기념 국제 학술대회>

世界一花, 萬生一家신라왕자 김지장 스님의 탄생 1308주년과 열반 1209주년을 맞이하여 지장성지 구화산에서
열리는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을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1500년 역사를 간직한 한국의 대원사에 살고 있습니다. 금년 사월 초파일에 김지장 삼존불을 모신 기념관 -신라대각 김지장전- 낙성식을 갖고 한·중·일 삼국의 다인들이 모여 헌공다례를 올렸습니다.

한·중·일 동양 삼국은 각각 특성 있는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불교문화와 차문화의 전통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켜온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불교인들과 다인들이 공통적으로 존경하고 받드는 역사인물을 꼽는다면 김지장스님이 첫 번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장스님의 게송 중에衆生度盡 (중생을 모두 제도하는 것이)


方證菩提 (깨달음의 완성이니)
地獄未空 (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誓不成佛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 

중생들은 이기심과 욕망 때문에 끝없는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으로 지구환경은 파괴되고 자연의 재앙은 해마다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지장스님은 지옥중생의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고 지구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이가 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지장스님의 원력과 사상을 배우고 그 뜻을 널리 펴는 일은 전쟁과 파멸의 길을 가는 모든 인류가 공존의 지혜를 깨닫고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국 구화산 불교문화 연구회”에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장성지 구화산이 중심이 돼서 지장신앙과 지장사상으로 위기에 빠진 지구생명을 구원하는 메시지를 온 세계에 전해주기를 바랍니다.

世界一花 (이 세상은 한 송이 꽃이며)
萬生一家 (모든 생명은 나의 가족입니다.)
爲他爲己 (남을 위한 일이 자기를 위한 일이니)
自他不二 (나와 남은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blog.daum.net/pdnwn7/4586   문학 한 소절






동물과 함께하는 역사 산책(삽살개편)
삽살개를 데리고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 왕자 김교각
2016년 02월 24일 (수) 17:09:28아이펫뉴스 기자 news1@ipetnews.co.kr
  
▲ 지장보살 삽살개

 김교각은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아들이다. 그는 왕자로서 누려야 할 부귀영화를 버리고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김교각 스님은 열심히 불도를 닦아 신라에서 이름난 스님이 되었지만,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불법을 더 연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학을 결심하고 신라에서 당나라로 건너갔다.
중국 쪽 문헌에는 김교각 스님이 돛단배에 삽살개 한 마리를 태워 당나라로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교각 스님은 차 씨앗, 볍씨를 챙겨 들고, 삽살개 한 마리를 거느린 채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스님은 삽살개를 데리고 수행처를 찾아 중국 땅을 헤매 다녔다. 그러다가 안휘성 구화산에 이르렀다. 이 산은 아흔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솟은 중국의 명산이었다.
김교각 스님은 구화산 정상에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한 사람이 겨우 허리를 펴고 드나들 만한 작은 동굴이었다. 스님은 삽살개와 함께 이 동굴 속에서 향을 피워 놓고 날마다 경을 읽으며 수행을 했다.
어느 날 눈을 감고 참선을 하는데, 독사 한 마리가 나타나 스님의 다리를 물었다. 독이 퍼져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삽살개가 잠시 동굴을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스님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때 아름다운 부인이 나타나 절을 하며 말했다.
우리 집 아이가 스님을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저 돌 밑에 샘물이 솟아나게 했으니, 그 샘물을 몸에 바르십시오.”
김교각 스님은 부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독사에 물린 다리가 깨끗이 나았다.
하루는 구화산 기슭에 사는 제갈절이란 사람이 산에 올라왔다가 스님을 보았다. 그는 스님이 도를 닦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스님을 위해 절을 지어 주었다. 이 절이 구화산 최초의 절인 화성사. 스님은 이 절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옷을 지어 입으며 수행에 힘썼다. 그리고 안휘성 일대에 볍씨를 전해 이곳 사람들에게 벼농사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김교각 스님은 794년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지 말고 독 안에 넣어 봉했다가 3년 뒤에 열어 보아라. 그 때까지 시체가 썩지 않았으면 금칠을 하여라.”
스님은 유언을 남긴 뒤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나이 99세였다.
제자들은 스님의 시신을 독 안에 넣어 봉했다가 3년 뒤에 열어 보았다. 스님의 시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팔다리가 부드러웠고, 시신을 들자 뼈마디에서 쇳소리가 났다. 이런 현상은 지장보살의 화신을 뜻한다고 한다.
제자들은 스님의 시신에 금칠을 하여 불상을 만들었다. 이것을 등신불이라고 부른다.
신라에서 온 왕자 스님은 그렇게 등신불이 되었다. 이 등신불은 1200년이 넘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사람들에게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안휘성 구화산에는 김교각 스님이 삽살개를 데리고 수행을 했다는 성지와 7층 석탑, 삽살개를 타고 있는 지장보살상 등이 보존되어 있다.
(월간GZ 2016년2월호_자유기고가 신현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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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자 김교각스님, 한·중 우호의 다리가 되다

경주시와 중국 안후이성 츠저우시 우호교류협력 의향서 체결

     




    중국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평가받는 신라 왕자 김교각(金喬覺)스님의 인연으로 경북 경주시와 중국 안후이성 츠저우시(池州市)가 10일 오후 현대호텔에서 우호교류 및 협력에 관한 의향서를 체결했다.

10일 경주시에 따르면 이날부터 11일까지 ‘김교각 지장보살을 통한 한중문화교류’란 주제로 개최되는 경북문화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왕 구이졔 츠저우시 상무위원(부시장급)과 스 후이칭 구화산불교협회장 등 9명이 경주를 방문했다.

포럼행사에 앞서 김교각 스님이 맺어준 인연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문화관광 분야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양시간 ‘우호교류 및 협력’에 관한 의향서를 체결했다.

우시에 자리하고 있는 구화산에는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박물관에는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 등이 전시돼 있다.

지난 2007년에는 한중수교 15주년를 기념하여 김교각 스님의 입상을 제작해 서울 봉은사, 경주 불국사 등에서 한·중 봉안법회가 개최된 바 있다.

중국 안후이성의 서남부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170만명의 츠저우시는 중국 4대불교의 성지이며 불교도장으로 이름난 구화산, 아시아의 습지보호구로 알려진 승금호, 시인 리바이, 두팡 등 수많은 문인들이 배출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번 츠저우시와의 우호교류 협정 조인으로 문화관광 분야의 교류 활성화와 더불어 중국관광객 유치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경주=장영태 기자 3678jy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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