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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 한 사람이 따라가면 좋을 것이다. 요즈음 풍습에 소위 책객(冊客)이라는 것이 있어 회계를 맡고 있는데, 이는 예(禮)가 아니니 없애야 한다. - 다음 병객조(屛客條)에 자세히 나온다. - 만약 자기의 글솜씨가 거칠고 졸렬하면, 한 사람쯤 데리고 가서 서기(書記)의 일을 맡기는 것은 좋다. 겸인(傔人)은 관부(官府)의 큰 좀이니, 절대로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 만약 공이 많은 자가 있으면, 후하게 줄 것을 약속하면 된다. 노복(奴僕)을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 다만 한 사람쯤은 내행(內行) 때 따라오도록 한다. 총괄하여 말하면 자제 이하는 관속(官屬)들과 접촉하여서는 안 된다. 신영(新迎)하는 아전이 올라오는 날에 수리(首吏)를 불러 약속을 하되,
“자제 이하는 얼굴은 대면할 수 있지만, 말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자제들이 말을 걸면 너희들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죄는 자제들에게 있다. 그렇지 않고 우연히 말 한마디라도 건다면 네게 죄가 있다. 아전과 하인들이 말을 거는 것을 금하지 못하면 네게 죄가 있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자기 사람을 단속하여 금법을 법하지 못하도록 하고, 범하는 자가 있거든 용서없이 꼭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허자(許鎡)가 가선령(嘉善令)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강직하여, 부임할 때 겨우 아들 하나, 종 하나를 데리고 갔다. 겨울철에 그 아들이 추위에 떨면서 공에게 밖에 나가서 숯을 구해 오게 해 주기를 청하였더니, 공은 창고에서 나무막대기 한 개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주면서,
“이것을 밟아 굴리면 발이 저절로 따뜻해질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는 너무 각박해서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본받을 것이 못 된다. 조청헌(趙淸獻)이 성도(成都)로 부임할 때, 거북 한 마리, 학 한 마리를 가지고 갔고, 재임(再任) 때는 그 거북과 학마저 버리고 다만 종 하나뿐이었다. 장공유(張公裕)가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말은 옛길 알아 오가기에 수월하고 / 馬諳舊路行來滑 거북은 장강에 놓아주어 함께 오지 않았네 / 龜放長江不共流 양계종(楊繼宗)이 가흥지부(嘉興知府)가 되었을 때 종 하나만 데리고 갔으므로 마치 길손 행색 같았다. 임기 9년이 되어도 끝내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왕서(王恕)가 운남(雲南) 지방을 순무(巡撫)하러 갈 때, 종은 데리고 가지 않고 고시(告示)를 써 붙이기를,
“집안 하인을 데리고 오고는 싶었으나, 백성들의 원망을 살까 두려웠으므로 늙은 몸을 돌보지 않고 단신으로 온 것이다.” 하니, 모두 향을 피우며 예를 드렸다. 당간(唐侃)이 영풍지현(永豐知縣)이 되어 부임할 때, 처자는 데리고 가지 않고 종 한둘만 데리고 나물밥과 콩국으로 지내니, 오래되매 아전과 백성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사자양(謝子襄)이 벼슬살이 하되 청렴하고 근신하여, 벼슬살이 30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 이상은 《명사(明史)》에서 인용하였다. -
[주B-001]치장(治裝) : 부임할 때의 행장이다. [주D-001]책객(冊客) : 고을 수령의 비서(秘書)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으로 관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사로이 임용하였다. 책방(冊房)이라고도 한다. [주D-002]겸인(傔人) : 실내에서 수령의 잔심부름을 맡아보던 사사로운 종이다. 청지기, 또는 겸종(傔從)이라고도 한다. [주D-003]내행(內行) : 부인들의 행차이다. [주D-004]신영(新迎) : 도나 군의 장교나 아전이 새로 도임하는 감사나 수령을 그 집에 가서 맞아오는 일을 가리킨다. [주D-005]수리(首吏) : 으뜸되는 아전으로 일반적으로 이방(吏房)을 가리키나, 때에 따라서는 나온 아전 중에서 으뜸되는 아전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D-006]허자(許鎡) : 명(明)나라 목종(穆宗) 때 석병(石屛) 사람으로 자는 국기(國器)이다. 성격이 강직하였다. 강서(江西)를 순안(巡按)할 때에 순무(巡撫)에게 거슬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蘭臺法鍳錄 18》 《昨非菴日纂 3集 氷操》 참조. [주D-007]가선령(嘉善令) : 가선은 명(明)나라 때 설치된 현의 이름인데, 절강성(浙江省)에 속하였다. 영(令)은 고을의 장(長)이다. [주D-008]조청헌(趙淸獻) : 송(宋)나라 서안(西安) 사람 조변(趙抃)으로 청헌(淸獻)은 그의 시호이다. 자는 각도(閣道), 호는 지비자(知非子)ㆍ고재거사(高齋居士)이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을 적에 권력 있는 사람도 피하지 않고 탄핵하니, 당시에 철면어사(鐵面御史)라 칭하였다. 익주 지사(益州知事)ㆍ성도지부(成都知府) 등 외직으로 나가 치적이 많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ㆍ태자소보(太子少保)를 역임하였다. 《宋史 卷316 趙抃列傳》 《宋元學案 卷12 濂溪學案下》 《昨非菴日纂 1集 內省》 참조. [주D-009]성도(成都) : 부(府)의 이름으로 사천성(四川省)의 수도이다. [주D-010]장공유(張公裕) : 미상. [주D-011]양계종(楊繼宗) : 명(明)나라 양성(陽城) 사람으로 자는 승방(承芳),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벼슬은 형부주사(刑部主事)ㆍ가흥지부(嘉興知府)ㆍ호광안찰사(湖廣按察使)ㆍ첨도어사(僉都御史)를 역임하였다. 《明史 卷159 楊繼宗列傳》 [주D-012]가흥지부(嘉興知府) : 가흥은 부(府)의 이름으로 절강성(浙江省)에 속해 있었다. 지부(知府)는 관명으로 부의 장관(長官)이다. 송대(宋代)에 부(府)에 지사(知事)를 두었는데 지부의 명칭이 이때부터 비롯되었으며, 명(明) 때에 비로소 부(府)마다 지부 1인을 정하였다. 지현(知縣)ㆍ지주(知州)의 명칭도 있다. [주D-013]왕서(王恕) : 명나라 삼원(三原) 사람으로 자는 종관(宗貫), 호는 개암(介菴)ㆍ석거(石渠), 시호는 단의(端毅)이다. 벼슬은 순무운남(巡撫雲南), 병부(兵部)ㆍ이부(吏部)의 상서(尙書)를 지냈다. 저서에 《완역의견(玩易意見)》ㆍ《석거의견(石渠意見)》ㆍ《왕단의주의(王端毅奏議)》ㆍ《왕단의문집(王端毅文集)》 등이 있다. 《明史 卷182 王恕列傳》 《明儒學案 卷9 三原學案》 《昨非菴日纂 1ㆍ2集 氷操》 참조. [주D-014]운남(雲南) : 부(府)의 이름으로, 명나라 때 두었다. 운남성(雲南省) 곤명현(昆明縣)에 있다. [주D-015]당간(唐侃) : 명(明)나라 단도(丹徒) 사람으로 자는 정직(廷直)이다. 벼슬은 영풍지현(永豐知縣)ㆍ무정 지주(武定知州)를 지내고 형부 주사(刑部主事)에 이르렀다. 효도로 이름났다. 《明史 卷281 循吏列傳 唐侃》 [주D-016]영풍지현(永豐知縣) : 영풍은 현의 이름으로 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있었다. 지현(知縣)은 관명으로 한 현의 우두머리. 지현의 칭호는 당대(唐代)에 벌써 시작하였다. 송 태종(宋太宗)이 현령에 무능한 사람이 많으므로 조관(朝官)이나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현의 정치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지현사(知縣事)라 하였다. 즉 현령은 아니면서 현의 일을 맡았다는 뜻이다. 명(明)ㆍ청(淸) 때에 관명이 되었다. 지부(知府)ㆍ지주(知州)의 명칭이 있다. [주D-017]사자양(謝子襄) : 명나라 신감(新淦) 사람으로 이름은 연(兗), 자(字)가 자양(子襄)인데 자로 행세하였다. 청전지현(靑田知縣)ㆍ처주 지부(處州知府)를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있었고, 반졸(叛卒) 오미(吳米)를 잡은 공이 있었다. 《明史 卷281 循吏列傳 謝子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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